정약용과 당대 지식인들의 작품을 모은 이 시집에는 또 하나의 시집 <초부유고(樵夫遺稿)>가 들어있다.
저자 초부(樵夫)는 글자 그대로 나무꾼. 그는 조선 최하층 천민 ‘노비(奴婢)’였다!
■ 김홍도의 그림에 실린 노비의 시(詩)
▲ <송수관화첩>에 수록되어 있는 또 다른 ‘도강도’
▲ 동호범주(東湖泛舟)
한 척의 나룻배가 강을 건너는 모습을 묘사한 김홍도의 <도강도>. 그림의 상단에는 김홍도가 영감을 받았다는 시가 쓰여 있다. 서정적이고 회화적인 필치로 쓰인 시, ‘동호범주(東湖泛舟)’. 그런데 최근 이 시와 동일한 작품이 실린 시집, <초부유고(樵夫遺稿)>가 발굴됐다. 조선 후기 천재 화원의 마음을 움직인 시인은 초부(樵夫). 그는 다름 아닌 ‘나무꾼’이었다!
■ 노비 시인, 양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다!
▲ 정초부의 시가 실려 있는 <병세집>
▲ 월계협에 살던 정초부는 ‘월계초부’로도 불렸다.
조선 후기 최고 시인들의 작품을 실은 <병세집>에는 정초부의 시가 무려 11수나 실려 있다. 기록에 따르면 정초부는 동원아집(東園雅集)과 같은 양반들의 시회에 초대받아 그들과 함께 시를 지었다. 그의 시에 감명 받은 양반들은 그가 살던 양근(지금의 양평) 월계협으로 직접 찾아오기까지 했다. ‘월계초부’ 정초부의 시가 실린 조선시대의 시선집은 발견된 것만 10여권에 이른다.
■ 노비가 어떻게 한시를 짓게 됐을까?
▲ 화성행궁 낙남헌에서 열린 한시백일장.
한시는 운율과 음의 높낮이 등을 맞춰 기승전결에 맞게 풀어낸다. 한 편의 한시를 짓기 위해서는 한자에 대한 깊은 이해와 함께 15개 내외의 규칙들을 충족해야 해 보통 10년 이상 공부해야 쓸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교육을 받지 못한 노비는 어떻게 한시를 쓸 수 있었을까?
‘주인이 기특하게 여겨 글을 읽게 했다.’ - <삼명시화>
▲ 여춘영이 정초부를 기리며 쓴 제문
정초부의 주인은 그가 가진 특별한 재능을 알아보고 아들의 글공부에 함께 하도록 배려한 것으로 보인다. 그 아들 여춘영은 노비 정초부를 스승이자 친구로 여겼다. 여춘영의 문집, <헌적집>에는 정초부에 대한 시, 두 사람이 함께 지은 시 뿐 아니라 그의 죽음을 애도한 제문까지 실려 있다. 신분의 벽을 뛰어 넘어 깊은 교우 관계에 있었던 주인과 노비. 여춘영은 정초부의 시를 사대부 사회에 널리 소개하며 그를 세상에 알렸다.
■ “시인의 남은 생애는 늙은 나무꾼 신세”
기록에 의하면 정초부는 43세 무렵에 면천되어 양근 갈대울에 거주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나무꾼 신세였다.
‘시인의 남은 생애는 늙은 나무꾼 신세 / 지게 위에 쏟아지는 가을빛 쓸쓸하여라 동풍이 장안대로로 이 몸을 떠다밀어 / 새벽녘에 걸어가네 동대문 제이교를’ - 정초부의 시 중
양인이 된 정초부는 시인으로서의 높은 명성에도 불구하고 극심한 가난에 시달렸다. 그는 굶주림에 시달리는 삶의 애환을 특유의 서정적 필치로 시에 담아냈다.
‘‘한밤중에 다락에 오른 것은 달빛 구경하려는 것이 아니고 아침 세끼 곡기를 끊은 것은 신선되려는 것 아닐세’ - 정초부의 시 중
세상의 벽 앞에 날개를 접고 고단한 인생을 살 수 밖에 없었던 노비 시인 정초부 삶을 되돌아본다.
‘삼한 땅에 명문가 많으니 다음 생에는 그런 집에 태어나시오.’ - 정초부를 기리며 주인 여춘영이 지은 제문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