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애리수가 황성옛터를 처음 부르던때
노래 황성옛터는 원래 "황성의 跡"
이라고 해서 1930년 부터 왕평작사, 전수린작곡,
이 애리수 노래로 불려왔고 1932년에 레코드로 제작되어
5만장이 팔려 나가면서 세상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개성공연중 황폐화된 개성 만월대를 돌아보면서 그 감정을
전수린이 즉석 바이어린 연주로 연주하고 같이있던 왕평이
노래말을 써서 만들어진 이 노래가 1930년 단성사에서
이 애리수에 의해서 불려졌을때 가수가 복바쳐 오르는
감정에 못이겨 잠시 노래가 중단되고 청중들의
열띤 박수를 받으면서노래는 계속
불려 졌습니다.
그때부터 작곡가, 작사자, 가수등
관련자들은 경찰에 끌려 다니고 숨어 다녀야 했지만
노래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국민속에 파고 들었습니다.
그러던 이 애리수가 시골에 아내를 두고 서울에 와 연희전문학교에
재학중이던 배동필과 결혼에 얽힌 사연으로 자살을 기도하는등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또 가수생활을 포함한 대외적인 활동을
하지 않는다는 시가와의 다짐으로 은둔생활에 들어가
황성얫터가 레코드로 되어 나온뒤 몇곡의 노레가
레코드에 실려 나왔지만 어느때 부른 노래인지
조차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1970년대에 수원에 살고 있다는 말을 듣고
어느 신문사의 기자가 찾아갔지만 만나주지도 않은체
그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이 애리수가
백수 가까이 되어 살아 있음이 확인되었지만 2009년 3월
31일 세상을 뜨셨습니다.이 애리수(李愛利秀)의
본명은 이음전(이音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