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죽과 홍랑의 조선시대 사랑시 두 수
오늘은 조선시대 시를 통해 이별의 정한을 노래한 아름다운 일화와 두 수의 시를 소개한다.
그 주인공은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과 홍랑(紅娘)이다.
홍랑은 함경도 홍원 출신으로 변방 경성(鏡城) 관아의 관기(官妓)였다.
기생이지만 문학적인 교양과 미모를 겸비했던 홍랑은 재주가 뛰어난 예기(藝妓)였다.
고죽은 문장과 학문이 능해 이율곡. 송익필 등과 함께 '팔문장(八文章)'으로 꼽혔으며,
특히 당시(唐詩)에 뛰어나 옥봉 백광훈, 손곡 이달과 함께 '삼당시인(三唐詩人)'의 한 사람으로 불린다.
고죽이 북도평사로 함경도의 경성에 부임하면서 두 사람은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다.
그러나 이듬해 봄, 나라의 부름을 받은 고죽이 한양으로 돌아가게 되자 어쩔수 없이 이별을 하게 된다. 당시 북쪽지역 기생이었던 홍랑은 한양으로 이동할 수 없는 법인 양계(兩界)의 금(禁) 때문이었다. 양계의 금이란 함경도와 평안도 사람들의 서울 도성출입을 제한하는 제도였다. 그리하여 며칠을 걸어서 북쪽에서 한양으로 오는 경계선인 함관령(咸關嶺)고개에 도착하자 더 이상 동행 할 수 없음에 비통해 했다. 홍랑은 생이별의 아픔을 가슴으로 삼키면서 뫼버들을 꺽어 고죽에게 주면서 자신의 마음을 시조 한 수로 전한다.
그 시조가 바로 <묏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이다.
묏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묏 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임의 손에,
주무시는 창 밖에 심어두고 보옵소서,
밤비에 새잎 나거든 날인가 여기소서
홍랑의 시조 <뫼버들 가려꺽어 보내노라> 시비
고죽의 마음 또한 오죽했으랴.
홍랑으로부터 건네받은 연정가인 시조 한 수를 한문으로 그 자리에서 곧바로 옮겨
<번방곡(飜方曲)>이라고 이름 붙여 각각 나눠 가졌다.
번(飜)이란 번역한다는 의미이고, 방(方)이란 즉시란 뜻이니,
번방곡은 즉시 번역한 노래라는 의미이다.
고죽이 번역한 칠언고시 번방곡은 그의 문집 고죽유고(孤竹遺稿)에 실려 있다.
折楊柳寄與千里(절양유기여천리) 산에 있는 버들가지를 골라 꺾어 임에게 보내오니
人爲試向庭前種(인위시향정전종) 주무시는 방의 창가에 심어 두고 보시옵소서.
須知一夜生新葉(수지일야생신엽) 행여 밤비에 새 잎이라도 나면
憔悴愁眉是妾身(초췌수미시첩신) 마치 나를 본 것처럼 여기소서.
고죽이 번역한 <번방곡>
이별의 정한이 너무나도 사무쳤을까.
서울로 돌아온 고죽은 병을 얻어 일년 내내 병석에서 일어서지 못한다.
고죽이 병석에 누워있다는 풍문을 전해들은 홍랑은 앞뒤를 가리지 않고,
7일 밤낮을 쉬지 않고 걸어서 꿈에 그리던 고죽의 집에 도착해 극진한 간호를 하게 된다.
그러나 좋은 일에 마가 낀다고 하였던가.
함경도의 기생 홍랑이 고죽의 첩이 되었다는 소문은 순식간에 조정까지 알려지게 되었고,
사헌부에서 양계(兩界)의 금(禁)을 어겼다는 이유로 고죽의 파직을 상소했다.
결국 고죽은 파직을 당하였고, 홍랑은 나라의 법을 원망하면서 경성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이별의 시간이 되자 고죽은 홍랑에게 자신의 마음을 담은 시 한 수를 지어서 건넨다.
말없이 마주보며 / 최경창(崔慶昌, 1539-1583)
말없이 마주보며 유란(幽蘭)을 주노라
오늘 하늘 끝으로 떠나고 나면 언제 돌아오랴
함관령의 옛노래를 부르지 말라
지금까지도 비구름에 청산이 어둡나니
相看脈脈贈幽蘭(상간맥맥증유란) 마음속 정감이 고동치지만 그윽한 난(蘭)을 보내오니,
此去天涯幾日還(차거천애기일환) 이제 가면 아득히 먼 곳 어느 날에 돌아오리.
莫唱咸關舊時曲(막창함관구시곡) 함관령 옛날의 노래를 다시는 부르지 마오.
至今雲雨暗靑山(지금운우암청산) 지금도 궂은비 내려 푸른 산길 어둡겠지.
이 시에서 보듯이 고죽에게 있어 홍랑은 그윽한 향을 풍기는 난(蘭)과 같은 존재였다.
첫 구에 나오는 '脈脈' 이란 시어는
"서로 말 없이 바라보며 마음속 깊이 정감이 고동치는 모양"을 뜻한다.
고죽이 홍랑을 보내면서 가슴 가득히 남아있는 슬픔을 애절하게 담아낸 것이다.
두 사람은 안타까운 이별을 하면서도 이것이 마지막이 될 줄은 몰랐다.
고죽은 홍랑을 떠나보낸 뒤 곧 복직되었지만 변방의 한직으로 떠돌았다.
1583년, 고죽은 마지막 벼슬이었던 방어사의 종사관에 임명되어 상경 도중 마흔
다섯의 젊은 나이로 객사하고 말았다.
홍랑은 타의에 의해 함경도 땅으로 쫒겨나 자나깨나 고죽을 그리워하면서 하루를 삼년처럼 기다리면서 살았다. 그러나 기다리던 고죽의 소식이 부음으로 들려오니 그 슬픔이 얼마나 컸을까. 며칠을 통곡하다 목숨을 걸고 한양으로 향한다. 그녀는 객사한 고죽의 묘소를 수소문해 무덤 앞에 움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시작했다. 미색이었던 그녀는 시묘살이를 하면서 뭇사내의 접근을 막기 위해 자신의 얼굴을 난도질해 추녀로 만들었다고 한다. 1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시묘살이를 한 뒤 고죽의 유품을 챙겨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 뒤 임진왜란이 끝나 최씨문중에 그 유품(詩稿)을 전해준 뒤 생을 마쳤다고 전한다.
홍랑이 죽자 최씨문중에서는 그녀의 정성을 가상히 여겨 고죽 부부가 합장된 묘소 바로 아래에 홍랑의 무덤을 마련하여 집안의 한 사람으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현재 경기도 파주군 교화읍 다율리 해주 최씨의 선산에 고죽과 홍랑은 나란히 잠들어 있다. 홍랑은 갔지만 그녀가 남긴 시는 오늘날 우리의 가슴에 살아남아 그 애절함을 전하고 있다. 죽어서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한 조선시대판 러브스토리의 주인공 홍랑의 노래를 다시 한 번 음미해 본다.
경기도 파주에 있는 홍랑의 묘소, 뒷편에 고죽의 묘소가 보인다.
한편, 지난 2000년 11월에는 그녀의 시조 ‘묏버들 가려 꺾어…“의 원본이 우리에게 공개되었고, 2003년 4월 예술의전당 토월극장에서는 ’홍랑, 그 애달픈 사랑 (洪娘愛詞)‘이란 가무극이 올려지기도 했다. 2011년 9월 17일. 삼도헌에서 정태수 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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