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대(淸代) 화가 소육붕(蘇六朋)의 <청평조도(淸平調圖)>
一枝濃艶露凝香 雲雨巫山枉斷腸
借問漢宮誰得似 可憐飛燕倚新粧
(일지농염노응향 운우무산왕단장
차문한궁수득사 가련비연의신장)
한 떨기 붉은 꽃에 이슬 맺혀 향기로운데
운우의 무산신녀 헛되이 애만 끊누나
漢나라 궁실의 누구와 (미모를) 견줄텐가
어여쁜 비연(飛燕)이 새로 단장하면 모를까
☞ 이백(李白), <청평조사(淸平調詞)> 중에서
※ <청평조사(淸平調詞)>의 청평조(淸平調)는 악부(樂府)의 제목이고, 사(詞)는 그 악곡의 가사를 말한다.
※ 청대(淸代) 화가 원강(袁江)의 <침향정도(沈香亭圖)>
- 서기 743년 봄, 당(唐) 현종이 양귀비와 함께 침향정(沈香亭) 못가에서 모란을 완상(玩賞)하고 있었다. 현종은 이백을 불러 이 모습을 시로 짓게 했다. 평소 술과 더불어 취생몽사(醉生夢死)해온 이백은 이날도 어전에 불려나왔으나 장취불성(長醉不醒), 도무지 깨어날 줄 몰랐다.
찬물을 끼얹고 몸을 주무르는 법석을 떤 끝에 겨우 의식을 차린 이백. 술기운이 가시지 않은 혼미한 가운데 붓을 들어 단숨에 연작시 세 편을 지어 바치니 <청평조사(淸平調詞)>다. 위의 사는 그 가운데 한 편이다.
문장의 마지막 구절에 등장하는 비연(飛燕)은 한나라 성제(成帝)의 후궁으로 나중에 효성조황후(孝成趙皇后)가 됐다. 성양후(成陽侯) 조림(趙臨)의 딸이었던 그의 본명은 조의주(趙宜主).
양아공주(陽阿公主)의 가녀(歌女)였는데 날렵한 몸매 때문에 조비연(趙飛燕)으로 불렸다. 몸매가 '나는 제비', 시쳇말로 '물찬 제비'를 방불케 했던 모양이다.
심지어 "비연이 (임금의) 손바닥 위에서 춤을 추었다"(飛燕作掌中舞)는 고사까지 생겨났다. 도대체 몸매가 어떠했길래 사람의 손바닥 위에서 춤을 출 수 있었을까. 중국인 특유의 허풍과 엄살을 고려해도 쉽게 짐작이 안 간다.
사실은 이렇다. 호수의 선상연(船上宴)에서 춤을 추던 비연이 갑자기 불어닥친 바람에 떠밀려 비틀거리며 넘어지려 했다. 그 순간 황제가 황급히 그의 한쪽 발목을 붙잡았다. 그러나 남달리 몸이 유연했던 비연이 그 상태에서 몸을 가누며 춤을 이어갔다. 飛燕作掌中舞는 이래서 생긴 말이다.
※ 청대(淸代) 화가 이고(李詁)의 <태백취주(太白醉酒)> 횡폭(橫幅)
이백은 양귀비의 아름다움을 예찬하기 위해 비연(飛燕)을 끌어와 대비시키고 있다. 비연의 미모를 직접 보지 못했으니 두 사람을 비교하는 것은 애초에 무리였을 것이다. 다만 황제와 그가 총애하는 여인, 두 당사자를 면전에 두었으니 천하의 이백이지만 어쩌랴.
서시(西施), 왕소군(王昭君), 초선(貂蟬)과 더불어 중국 4대 미인으로 꼽히는 양귀비(楊貴妃)다. 이백 아닌 다른 사람이라도 그 미모를 상찬하지 않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다만 비연이 새 단장을 해야겠다고 했으니 그에게 일말의 미안함이 있을 수는 있겠다. 보통의 여인들이라면 양귀비의 용모와 견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感之德之)할 일이지만.
※ 현대 중국화가 아명(亞明)의 <수색렴전(水色簾前)> (1992年作). 당(唐)나라 때의 시인(詩人) 서응작(徐凝作)의 <한궁곡(漢宮曲)>을 제시(題詩)로 올려놓고 있다.
水色簾前流玉霜 趙家飛燕侍昭陽
掌中舞罷簫聲絶 三十六宮秋夜長
물빛 주렴 앞에 옥구슬 흘러내리는데
조비연은 소양궁으로 황제를 모시네
장중무 끝나니 피리 소리 끊기고
삼십육궁의 가을밤은 깊어만 가네
※ 趙家飛燕: 趙飛燕
※ 昭陽: 昭陽宮. 한나라 성제(成帝)가 거처하던 궁전. 조비연은 이곳에서 황제를 모셨다. 나중에 황제의 총애를 잃은 뒤에는 장신궁(長信宮)으로 거처를 옮겼다.
조비연과 양귀비를 직접 비교하는 성어(成語)도 있다. 연수환비(燕瘦環肥)라는 말이다.
여기서 연(燕)은 조비연을 말하고 환(環)은 양귀비를 지칭한다. 양귀비는 본명이 양옥환(楊玉環)이며 귀비(貴妃)는 그가 받은 관직이다. 우리식으로 표현하면 내명부의 직첩(職牒)이다.
참고로 조비연에게 일격을 당해 임금의 총애를 잃어버렸던 불우한 여인 반첩여(班婕妤)의 '첩여', 항우의 애희였던 우미인(虞美人)의 '미인'도 모두 이름이 아니라 직첩(職牒)이다.
수(瘦)는 "여위다" "말랐다" "파리하다"는 뜻이고, 비(肥)는 "살지다" "통통하다" 또는 "뚱뚱하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연수환비(燕瘦環肥)란 "조비연은 여위었고, 양옥환은 통통하다"는 뜻이 된다.
중국인들은 넓고 큰 항주(杭州) 서호(西湖)를 양귀비에, 상대적으로 가늘고 긴 양주(揚州) 서호(瘦西湖)를 조비연에 비유한다. 이 역시 두 호수의 모습이 각각 두 사람의 몸매와 닮았기 때문이다.
또한 중국인들은 조비연(趙飛燕)을 임풍양류(臨風楊柳)형의 날씬한 미인, 양귀비(楊貴妃)를 부귀모란(富貴牡丹)형의 풍만한 미인이라고 일컫기도 한다. 조비연은 바람에 날리는 버드나무와 같고, 양귀비는 부귀(富貴)의 표상인 모란에 비견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양귀비나 조비연은 유형이 다를 뿐 다같이 뛰어난 미인인데 양귀비는 중국 4대 미인에 포함된 반면 조비연은 거기에 들지 못했을까?
단순하게 생각하면 양귀비의 미모가 조비연보다 한 수 위였기 때문이라는 판단이 가능하다.
하지만 여기에는 다른 변수가 숨어 있을 수 있다. 바로 임풍양류(林風楊柳)와 부귀모란(富貴牡丹)이라고 하는 미인의 유형, 미인을 판단하는 기준이 그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고전적 미인은 임풍양류(林風楊柳)이기보다 부귀모란(富貴牡丹)에 가까웠다.
※ 명대(明代) 최고의 서법가(書法家) 축윤명(祝允明)의 초서(草書) <청평조사(淸平調詞)>(三首)
물론 늘 풍만한 글래머가 각광을 받았던 것은 아니다. 중국 역사를 돌이켜 보면 적어도 한(漢)나라 이전까지는 날씬한 여성이 미인으로 대접받았다.
일례로 춘추시대(春秋時代) 초(楚)나라 영왕(靈王)은 허리 가는 사람(細腰)을 좋아했다. 이 때문에 궁중의 여인들이 필사적으로 살빼기에 나섰고, 급기야 굶어죽는 사람이 생길 정도였다.
그러다가 수·당(脩·唐)대에 이르면, 다시 통통하고 풍만한 여인이 미인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당나라 때의 양귀비가 대표적 사례에 속한다. 양귀비가 현종의 총애를 독차지하자 매비(梅妃)라는 후궁이 양귀비를 비비(肥婢: 뚱땡이 하녀)라 비꼰 것이 이런 사정을 방증한다.
이처럼 사람들이 생각하는 미인상은 시대마다 엇갈리면서 일종의 '순환곡선'을 형성해 왔다. 오늘날에 와서 다시 '날씬한 미인'이 대세를 이루고 있는 것도 시대의 분위기와 미인상의 조합이 '날씬한 미인'을 요구하는 순환 사이클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학적으로는 발전도상의 나라들이 중진 단계에 들어서면 다이어트 바람에 휩싸이게 된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을 일컬어 초요현상(楚腰現象)이라 한다. 세요(細腰)를 요구했던 초나라 영왕의 신드롬이 재현됐다는 뜻이다.
이 즈음에서 우리 선조들의 미인관은 어떠했는지 살짝 음미해 보자.
조선 영조 때 나온 ≪증보(增補) 산림경제(山林經濟)≫에 보면 미인의 조건으로 '십삼구(十三俱)'를 제시하고 있다. 미인은 13가지 조건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체형은 "어깨가 모나지 않고 등이 두툼하며…엉덩이가 펑펑하고 넓어야 된다"고 했다. 임풍양류(林風楊柳)보다는 부귀모란(富貴牡丹)에 기운다.
요즈음은 '살빼기'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여성들의 화두가 됐을 정도로 '날씬함'이 행세하는 시대가 됐다. 그러나 옛날에는 통통하고 복스럽게 생긴 여인이 미인으로 대접받았다.
한 때 '달덩이같은 미인'이라는 말이 큰 칭찬으로 통했다. 지금 그런 소리를 했다간 무슨 '수모'를 당할지 모르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 한(漢)나라 성제(成帝)는 조비연을 가까이 하기 전에 반첩여를 총애했다. 비연은 임금의 사랑을 자신에게로 돌리기 위해 반첩여를 중상했고 성제로 하여금 그를 내치게 만들었다. 나중에 무고(誣告)로 밝혀졌지만 이미 임금의 마음이 떠난 뒤였다.
반첩여가 나중에 버림받은 자신의 신세를 <원가행(怨歌行)>이라는 시(詩)에 녹여내니 그로부터 '추선(秋扇)' 또는 추풍선(秋風扇)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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