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同江上送情人 楊柳千絲不繫人
含淚眼着含淚眼 斷腸人對斷腸人
(대동강상송정인 양류천사불계인
함루안착함루안 단장인대단장인)
대동강 위에서 고운 님 이별할 제
천만 가지 실버들로도 우리 님 매어두지 못해
님과 내, 눈물 머금은 채 서로 마주 보고
애달피 울며불며 이별이로다
※ 임진왜란 '2대 의기(義妓)'로 꼽히는 기생 계월향(桂月香)의 詩다.
※ 의기(義妓) 계월향(桂月香)의 초상화. 한지에 그린 채색화로 기생을 기린 초상화로는 처음 발견된 작품이다. 고미술품수집가 안병례(46)씨가 일본 교토(京都)에서 입수해 조선일보(2007년 2월 3일자)에 처음 공개했다.
그림에는 "1815년 그린 것으로, 그를 기리는 사당(장향각·藏香閣)에 걸고 1년에 한 번씩 제사를 지냈다"고 적혀 있다. 또 상단에는 '義妓 桂月香(의기 계월향)'이라는 제목으로 그의 공적을 기리는 글을 한자로 가득 적어 놓았다.
※ 계월향은 기생으로 임진왜란 때 평양성에서 평안도 방어사 김응서(金應瑞/일명 金景瑞) 장군을 도와 왜장 고니시 히(小西飛)를 죽이고 순절(殉節)했다. 본명이 월선(月仙)인 계월향은 진주(晋州)의 논개(論介), 가산(嘉山)의 홍련(紅蓮)과 함께 의기(義妓)로 널리 알려져 있다.
1592년 6월 중순 왜적이 평양성을 함락하였을 때 계월향은 미처 피난가지 못하고 성안에 남게 되었다. 게다가 기생의 신분이라 왜적의 시중을 들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왜적에게 시중을 들면서도 수시로 적정을 탐지해 아군에 넘겨주었다.
이 과정에서 김응서 장군은 무사히 성을 빠져나왔으나 계월향은 적에게 잡힐 처지에 놓였다. 그는 적에게 잡혀 치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목숨을 버릴 결심으로 가지고 있던 칼로 배를 갈라 장렬히 순사했다 한다.
전란이 끝난 뒤 평양 사람들은 모란봉 기슭에 <義烈祠(의열사)>라는 사당을 짓고 비를 세워 계월향의 애국충정을 기렸다. 또한 그가 배를 갈랐다는 고개를 '가루개', 그 일대를 '월향마을'이라 불렀다.
북한은 1955년 가루개 일대를 포괄하는 인흥1동 일부와 인흥3동 일부, 기림1동 일부 지역을 통합해 '월향동'으로 개칭했다.
지금 평양시 모란봉구역 월향동의 옛 기림리 거리를 지나가다 보면 '월향미용', '월향리발', '월향식료품' 등의 간판을 볼 수 있다. 이들 간판에 등장하는 '월향'은 모두 계월향(桂月香)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 평양 연광정(練光亭) 옆에 세워져 있는 계월향비(碑)와 설명문 표석.
※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은 <계월향에게>라는 제목의 시를 지어 그의 충정과 의절을 노래했다.
"계월향이여, 그대는 아리땁고 무서운 최후의 미소를 거두지 아니한 채로 대지(大地)의 침대에 잠들었습니다. 나는 그대의 다정(多情)을 슬퍼하고 그대의 무정(無情)을 사랑합니다. 대동강에 낚시질하는 사람은 그대의 노래를 듣고, 모란봉에 밤놀이하는 사람은 그대의 얼굴을 봅니다. …"
'관심사 >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석춘음(惜春吟) (0) | 2012.01.12 |
---|---|
[스크랩] 유반산시(遊盤山詩) (0) | 2012.01.12 |
[스크랩] 잡흥(雜興) (0) | 2012.01.12 |
[스크랩] 귀래정(歸來亭) (0) | 2012.01.12 |
[스크랩] 형증영(形贈影) (0) | 2012.01.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