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판준비 저장文集/甘泳生 文集 ·65年만의 歸家

뿌리

감효전(甘曉典) 2015. 6. 26. 13:54

 

 

 

 

 

 

 

 

 

 

 

 

 

 

 

 

 

 

 

 

뿌리 

 

 

나와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 할아버지 고조 할아버지의 태가 만들어진 곳 고향, 그리고 엄마와 외할아버지 외증조 할아버지 외고조 할아버지의 태가 만들어진 곳인 외가. 

 

근데 오늘 나의 아버지를 낳아준 할머니와 할머니의 아버지, 증조 할아버지 그리고 고조 할아버지의 태가 만들어지고 길러진 곳, 

 

그리고 나의 할아버지를 낳아준 증조 할머니와 증조 할머니의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 할아버지, 고조 할아버지의 태가 만들어지고 길러진 곳. 

 

바로 지금 이 내 몸의 근간이 되어주신 그 분들의 그곳을 언젠가 꼭 한 번 찾아가고 싶었다.

요번에 할아버지 문집을 만들다가 알게 된 할머니 친정집 주소. 네비 여자가 정확하게 나를 그곳에 데려다 주었다. 

 

마을입구를 들어서자마자 꾸불꾸불하게 용트림하는 용처럼 두 팔 벌리고 휘어진 채 그대로 아주 멋들어지게 잘 큰 수백년 묵은 느티나무 고목과 늠름하게 잘 생긴 큰 돌에 단정하게 마을이름이 새겨진 입석이 떡 버티고 서 있었다.

 

여태껏 여기저기 참 많이 다녀도 보았지만 그런건 처음 보았으며 마을의 이미지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분명한건 그 곳이 그저 보통 평범한 그런 동네가 아니란 것을 압도적으로 느끼게 하였다. 

 

수려한 산과 내, 왠지 기품이 느껴지고 따뜻한 느낌.

정겨운 느낌, 아무튼 뭐랄 수 없이 묘한 느낌이 들었다.

안동 일직 손씨들의 유서깊은 양반 유림들 고장.

밀양시 산외연 다죽리, 다원.

 

생전 처음으로 그곳에 가보았는데 감회가 새롭고

신선하고 상당히 놀라운 경험을 하였다. 

병풍처럼 빙 둘러진 산등성이를 일일이 천천히 수인사 나누듯 천천히 눈으로 둘러보고 흙냄새 소나무 냄새 풀냄새 낡은 기와냄새 흙담사이의 담쟁이 넝쿨 그리고 나이들어 꼬부랑한 오래된 배롱나무. 

 

그리고 골목골목 어린 날 붉은 댕기머리 나풀 나풀 폴짝거리며 짝다리로 돌차기하고 놀던 어린 날의

할머니와 증조할머니, 엄마 등에 업혀 다니며 무심히 보았을 저 하늘과 저 푸른 산등성이. 

 

조잘거리며 동무들하고 웃으며 담장아래 쪼그리고 앉아 돌멩이로 풀잎찧어 소꼽장난하고 나물캐러 산으로 들로 뛰어다녔을 할머니와 증조 할머니의 어린 날을 상상해보면서 저기 오래된 옛 기와 담장넘어 어린 날의 댕기머리 할머니와 증조 할머니가 나를 보고 웃고 서 있는 것 같았다. 

 

뿌리, 뿌리라는 것, 나의 몸과 정신의 근간이 되어준 그 분들의 몸냄새가 굽이굽이 골목골목 돌과 흙에서, 깨어지고 이끼낀 기와조각에서 옴마 젖냄새같이 나는 것 같았다.

 

할머니의 친정집은 혜산서원이란 곳의 바로 옆이었다.할머니의 친정 부모님과 오라버니 셋, 언니 두 분이 특이하게도 모두 일정시대 때 만주로 식구대로 이사를 하셨으며 거기서 다 돌아가셨고 묘도 거기에 있다고 기록에 나와 있었다.

 

할아버지가 백두산과 만주에 자주 가셨다는게 왜 그랬는지 설명이 되어지고 막내셨던 할머니가 요즘같이 전화도 없고 엄마 아버지 언니 오빠들이 얼마나 보고싶었을까 싶었다. 

 

눈에 띄도록 밀양에서 독립운동을 세게 한 집안이라 일본경찰의 눈을 피해 만주로 식구들 모두 이사를 가신거라고 추정을 한다.

 

할머니 가계의 놀라운 기록들을 보며 할머니가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하셨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그곳은 안동의 도산서원보다 휠씬 품위있고 유서깊은 뭐라 표현키 어려운 어떤 기운이 골목 골목 옛 기와장에 핀 이끼만큼이나 푸르게 꽉 차 서려있었다. 

 

나는 막연히 우리 집 문중만 좋은 줄 생각했지 할머니와 증조 할머니 손씨 가문은 그렇게 많이 생각해보지 않았다.그저 뼈대있고 상당히 괜찮은 안동 손씨 가문정도로만 알았었다. 

 

요번에 문집을 만들면서 자료를 살피다가 할머니 증조할머니의 가계도 알게 되었는데 놀랍게도 밀양의 유명한 독립투사 성하 손경헌 선생의 집안으로 아주 대단한 집안이었다.아하, 그래서 뼈대있는 유림문중에서 괜찮은 집안끼리의 혼사가 있었던 거였구나. 

 

어릴 적에 할머니와 증조 할머니가 시집올 때 80리도 넘는 먼거리를 꽃가마를 타고 오면서 길이 하도 멀어 가마꾼들이 얼마나 쉬어쉬어 왔는지를 모른다고 하셨던 오래전의 이야기가 방금 들은 것처럼 선명하게 생각났다.

 

증조 할머니와 할머니는 같은 집안 같은 마을 가까운 촌수, 스무살 나이 차이나는 언니 동생하던 사이로 두 분이 같은 마을로 시집을 오셨는데 어릴 적에 할머니는 증조 할머니를 큰언니라고 불렀으며 어린 할머니를 증조 할머니가 등에도 많이 업어주었다고 하였다. 

 

증조 할머니는 이런 할머니가 마음에 쏙 들어

며느리감 으로 점을 일찌감치 찍어 두었다고 한다. 삼단같이 긴 머리를 허리까지 쭝쭝 닿아내린 인물이 좋은 할머니를볼 때마다 늘 " 어찌 이리도 미할꼬 어찌 이리도 미할꼬 "라며 머리를 쓰다듬으며 클 때부터 특별히 아주 이뻐했다고 하였다. 

 

아주 어릴적에 이런 두 분을 보면서 나는 할머니가 증조 할머니의 며느리가 아니고 친딸인 줄 알았다.

유별나도록 고부사이가 좋으셨으며 이는 우리집안 대대로 이어져온 거라 하였다.

 

골목길로 마을로 산으로 여기저기 다니며 할머니와 증조할머니가 앉아 보았음직한 바윗돌에도 한번 앉아보고 산딸기도 따먹어보고 살구도 주워먹고 늙은 소나무에도 흙담장에 얹혀진 이끼낀 기왓장에도 손으로 가만히 얼굴만지듯 어루만져보았다. 

 

할머니와 증조 할머니 할아버지가 다녔을 골목 골목길과 하늘과 산등성이, 산죽 숲, 망초대꽃 그리고 산에서 졸졸 내려오는 산개울물에 일일이 눈을 맞추고 발도장을 찍었다.마치 그 분들의 희미한 어떤 흔적들을 찾기라도 하듯이.  

 

저기 저 길은 100년전 증조 할머니가 돐지난 할아버지를 업고 친정집으로 걸어갔던 곳,아, 또 저기 저 훤한 골목길은 88년전에 14살 꼬마신랑이 부채로 얼굴 반 가리고 4살위 누이같은 색시에게 환하게 웃으며 말타고 장가오던 바로 그 길이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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