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甘泳生 文集 /65년만의 귀가(歸家)

감효전(甘曉典) 2015. 6. 4. 18:55

甘泳生 文集 /65년만의 귀가(歸家)

 

 

목차

序文

1. 甘泳生

2. 檜山 甘氏

3. 祖父 감동규(甘東珪)와 밀주징신록(密州徵信錄)

4. 관술정(觀術亭)

5. 관술정(觀術亭)에서의 감호현(甘豪鉉)

6. 예림서원

7. 꿈에도 잊지못할 사람들,가족

8. 甘泳生의 모(母) 孫基守(芬男)

9. 甘泳生의 모(母) 孫基守(芬男)의 족보와 집안

10. 감영생(甘泳生) 선생의 처가(妻家) 사람들

11. 조선 후기 말 대학자 錦洲 허 채 先生 글씨

12. 錦洲 허 채 선생에게 보낸 친필 편지

13. 甘泳生 친필

14. 祖父 甘泳生이 쓰시던 벼루

15. 甘泳生의 단발(斷髮)前 사진

16. 제적부 고조부까지 표기된 것

17. 비밀 의열단원(秘密 義烈團員) 감영생(甘泳生)

18. 감영생과 약산 김원봉 장군

19. 독립운동가 감영생(甘泳生) 선생의 고향

20. 해방후 1948년 2.7구국항쟁 당시의 우리나라 정치 상황

21. 1948. 2·7구국항쟁

22. 나는 이와같이 들었다. 1

23. 나는 이와같이 들었다.2

 

할아버지께 바치는 詩

 

24. 넋두리

25. 아버지,그리고 아버지의 아버지.

26. 눈썹달 곱게 뜰 때

27. 忌日

28. 누가 알리.이 가슴의 핏빛 슬픔을.

29. 할아버지께.

30. 할아버지께2

31. 학살(虐殺)

32. 아,어쩌면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33. 65년만의 귀가(歸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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序文

 

 

낙동강 모래알 속에서 65년 70년 100년전에 깨어지고 조각조각 부서져 던져진 퍼즐조각들을 찾아

일일이 그림을 맞추어 나가는 그런 심정으로 나의 할아버지 甘泳生의 희미한 발자취를 찾아

지난 4년을 밤낮으로 쉬지않고 울면서 헤매었다.

 

어떠한 단서나 실마리라도 찾으면 그 자료를 모아 할아버지의 족적을 길이 남기려고 오래전부터 생각 하였다.

워낙 오래전의 일이고 직계어른들이 거의 다 돌아가신데다 나는 또 이미오래전에 출가를 하여 신경을 끄고

살았다가 4년전에야 너무나 드라마틱한 우리 집안의 일들과 할아버지의 기막힌 일을 알게 되면서

할아버지의 족적을 찾아나서게 되었다.

 

할아버지의 발자국을 찾아가면서 전에는 전혀 알지 못했던 놀라운 사실들을 알게 되었는데 그것은

할아버지뿐만이 아니고 우리 증조 고조부등 선대 조부들께서 아주 훌륭하신 분들이었으며

할머니의 친정집안도 독립운동하신 분들의 가계라 하니 이러한 혈통에 대하여 너무나 자랑스럽다.

오래전부터 이런 자료가 모아지고 때가 되면 반드시 할아버지 文集을 만들어 세상에 내고 문중에 배포하여

후래사람들에게 길이 남길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 文集을 만들면서 할아버지와 어떤 인연인지 몰라도 나로선 도저히 찾을 수 없는 귀중한 역사적 자료와

할아버지 할머니 증조부 고조부뿐 아니라 나의 이 몸과 마음의 근간이 되는 뿌리에 대해서 바쁘실텐데도
일일이 자세하게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주시고 할아버지를 여러 사람들에게 널리 어떻게라도 알려주시려고

여기저기 발품을 하며 도움을 많이 주신 밀양의 향토 사학자이신 虛竹 도재국 선생과 또 알고보니

할머니의 집안이신 향토 사학자 손흥수 선생께도 깊이 머리숙여 너무나 감사드린다는 말씀을 드린다.

 

할아버지를 알게 되면서 증조부 고조부 또 그 윗대 훌륭하신 어른들을 알게되어 너무나 감사하고

이러한 조상분들의 살과 뼈를그리고 훌륭한 정신을 물려받은 것에 대하여 감사한 마음이 든다.

이 文集을 증조부 고조부, 그 윗대 할아버지들 그리고 할아버지께 눈물로 엎드려 절하고 올린다.

 

할아버지, 할아버지를 깊이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이 생뿐아니라 세세생생 할아버지의 손녀로 태어나고 싶고 못다한 사랑 다하고 싶습니다.

부디 부디 좋은 세상에 다시 나서 풀잎같이 꽃잎같이 환하게 웃으며 모두 다시 만나기를 빕니다.

 

2015. 4. 14 할아버지의 생신,붉은 꽃피는 날에.

할아버지를 깊이 존경하고 사랑하는 孫女 甘曉典 拜上

 

 

 

 

1. 甘泳生

 

 

日本 早稻田 와세다 대학교 정치학 동문들과/甘泳生 /東京.사진(右)(1946년,33살경)

 

 

 

 

 

1914년 4월 14일 밀양 上南 東山 洗川에서 아버지 甘豪鉉(감호현)과 어머니 孫基守(芬男)사이에서 출생.

감영생은 당시 밀양 만석군 집안의 외아들로 7세에 향교 백일장에 장원을 할 정도의

놀라운 신동이었고 학식이 출중할 뿐만이 아니고 고매한 인품을 가져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 당시 밀양에 만석군 집이 두 집 있었는데 한 집은 白氏 성을 가졌고 또 다른 한 집이 바로 그의 집이었다.

 

사는 집 위주로 사방 30리의 어마어마한 땅을 가진 대지주였으며

집안의 땅을 그 땅을 부쳐 소작을 하고 사는 불쌍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모두 땅 문서를 풀어서 그들 앞으로 땅문서를 돌려서 해 준 그런 보기 드문 인물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그는 일어 영어 불어 독일어 중국어 5개국어에도 아주 능통하였다.

 

해방 당시 일본 와세다 대학교 정치학부에서 정치학을 공부하였으며

하나를 배우면 열을 알아 스승님이 혀를 내둘렀으며 제자가 스승을 능가하니

더 이상 자네에게는 내가 가르칠게 없다라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막대한 독립자금을 전설적인 독립투사 밀양 김원봉 장군에게 대어 주었다.

1945년,해방이 되고 이승만 정권과 미군정으로 나라가 엉망이 되자

일본 유학생이 주축이 되어 구국 항쟁이 일어났다.

바로 이것이 1948년 2.7 구국 투쟁. 이때 1만 8,478명이 끌려가 2,290명이 재판에 회부되어

미군정 포고령 위반으로 모두 실형을 선고 받았다.

 

항일운동과 1948. 2. 7 구국투쟁에 동참하였고 한학을 가르치던 중 밀양 경찰서로 끌려갔는데

2.7구국 투쟁의 주동자와 참가자를 모두 고발하면 석방 해 주겠다는 회유를 끝까지 거절하였다가

그 해 8월 22일 5년형을 선고 받았으며 마산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 다,다음해인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고 며칠 후 마산 형무소에서 다른 수감자들과 동시에 증발,실종되었다

슬하에 4남 4녀의 자녀가 있어 1989년에 부친의 사인 진상 규명을 위해 사방으로 뛰어 다니다가

아버지가 1950년 7월 24일 마산형무소에서 마산 육군 헌병대로 230명의 다른 재소자와 함께

이감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며,부친이 어디론가 끌려가 집단 학살을 당했을 것이라 추측만을 하였다.

 

천인공노할 엄청난 일을 민주국가가 저질러 놓고도 어떠한 사실도 그 가족에게 알려 주지 않고

철저히 은폐 되었다가 60년이 흐른 2009년 그런 추측들이 모두 다 사실임이 확인 되었다.

학살된 장소는 마산 괭이바다이며 한여름 삼복더위 야밤에 바다로 모두 끌려가서

살아 있는 채로 온 몸이 줄로 꽁꽁 묶이고 두 다리에 무거운 돌덩거리를 매단 채 생수장.총살되었다고 한다.

2012년 현재 국가 상대로 소송중이다.

 

(조봉암과 1950년대.下권.역비한국학 연구총서16/ 역사비평사.서중석 冊 중에서 일부 발췌)

 

 

2. 檜山 甘氏

 

 

본관(本貫): 회산(檜山)

시조(始祖): 감규(甘揆)

유래(由來):본관(本貫)인 회산(檜山)은 지금의 경상남도(慶尙南道) 창원(昌原)의 옛이름으로서

신라 경덕왕 때는 義安郡(의안군)이라 하였는데 삼국시대(三國時代)에는 6가야(伽倻) 중

금관가야(金官伽倻)에 속했었다.

 

감씨(甘氏)는 본래 중국(中國) 발해(渤海) 주왕(周王)의 셋째 아들 숙대(叔帶)가 감후(甘侯)에 봉해지고

식읍(食邑)을 하사(下賜)받았으므로, 그 땅이름을 따서 감씨(甘氏)의 성(姓)을 삼았다고 한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의하면 감씨(甘氏)의 본관(本貫)은 회산(檜山), 합포(合浦),

거창(居昌), 창녕(昌寧), 충주(忠州), 부령(富寧) 등 6본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상고(詳考)할 문헌이 전하지 않아 자세히 알 수 없으며 다만 우리나라 감씨(甘氏) 모두가

동원분파(同源分派)임에는 틀림이 없다.

 

<회산감씨대동보(檜山甘氏大同譜)>에 시조(始祖) 감규(甘揆 : 자는 양원, 호는 연강)는

원(元)나라 성종조(成宗朝 : 서기 1295 ~ 1307)에 한림학사(翰林學士)로서1351년(충정왕 3)

공민왕(恭愍王)과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를 배행(陪行)하고 고려(高麗)에 들어와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올랐으며 후에 연릉군(延陵君)에 봉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하여 15대(代) 수화(受和)에 이르기까지 본관(本貫)을 연릉(延陵)으로 삼아오다가

16대 철(喆)이 북벌(北伐)을 간(諫)하여 중지케 한 공(功)으로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에 오르고

회산군(檜山君)에 봉해졌으므로 관향(貫鄕)을 회산(檜山)으로 삼게 되었다.

 

가문의 대표적 인물(人物)회산 감씨(檜山甘氏)는 시조(始祖) 감규(甘揆)로부터 고려조(高麗朝)에서

훌륭한 인물(人物)을 많이 배출시켜세도가문(勢道家門)으로서의 지위를 굳혔다.

 

감흥협(甘興鋏)시조 감규(甘揆)의 선자로서 평장사(平章事)를 지냄.

감소연(甘紹延)고려조(高麗朝)에서

밀직제학(密直提學)을 지냄.

감진요(甘震曜)고려조(高麗朝)에서 중추부사(中樞府使)를 지냄.

감침(甘鍼)고려조(高麗朝)에서 이부시랑(吏部侍郞)을 지냄.

감전형(甘全亨)고려조(高麗朝)에서 이부시랑(吏部侍郞)을 지냄.

감원한(甘元漢)회산군(檜山君) 감철(甘喆)의 손자(孫子)로서

조선조(朝鮮朝)에서 예부승지(禮部承旨)를 지냈다.

 

감익한(甘益漢)조선조(朝鮮朝)에서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올랐다.

특히 감익한은 1455년(단종 3) 수양대군(首陽大君)이왕위를 찬탈하고 단종(端宗)을

노산군(魯山君)으로 봉하자 성삼문(成三問)을 비롯한 사육신과 함께단종의 복위(復位)를

도모하다가 화(禍)를 입은 충신(忠臣)이다.

 

감경인(甘景仁), 감경륜(甘景倫) 형제임진왜란 때 무공(武功)을 세워 가문을 더욱 빛냈다.

甘箕(감기)諡號(시호)는 貞彗(정혜). 고려조에서 평장사를 역임하고 延陵君(연릉군)에 봉해졌다.

甘興鋏(감흥협)고려 때 平章事(평장사)를 지냈다.

 

甘熙(감희)고려조에서 평장사를 역임했다.

甘鐵顗(감철의)고려에서 이부 상서를 역임했다.

甘紹延(감소연)고려 때 密直提學(밀직제학)을 지냄.

甘震曜(감진요)고려조에 中樞副使(중추부사)를 역임.

甘全亨(감전형)고려에서 吏部侍郞(이부시랑)을 지냈다.

甘 鍼(감침)고려 때 吏部侍郞(이부시랑)을 역임.

甘棚垕(감붕후)자는 文淵(연) 호는 龜亭(귀정) 諡號(시호)는 忠敬(충경).고려 때 편장사를 역임.

甘受和(감수화)자는 仁汝(인여) 호는 道隱(도은)고려 우왕 때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이 司僕侍丞(사복시승)에 이르렀으며문장에 능했다.

甘喆(감철)자는 善卿(선경). 호는 檜庵(회암). 조선조에서 북벌을 간하여 중지하게한 공으로

회산군에 봉해지고 田宅(전택)을 하사 받았다.

甘蘋(감빈)자는 華聖(화성) 호는 修堂(수당). 조선 때 工曹參議(공조참의)를 지냈다.

 

甘葂(감면)자는 華國(화국) 호는 守軒(수헌). 조선 때 主簿(주부) 지냈다.

甘麒鉉(감기현)자는 英八(영팔), 호는 東湄(동미). 조선 때 府使(부사)를 지냈다.

甘濟鉉(감제현)자)는 聖檣(성장), 호는 直齋(직재). 조선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중추원 議官(의관)을 지냈다.

甘泰旭(감태욱)자는 德一(덕일), 호는 農啞(농아), 조선 때 덕망 높은 학자로 하였다.

甘泰烋(감태휴)자는 華守(화수), 호는 晩惺(만성). 조선 때 학자였다.

甘阜(감부)자는 春殷(춘은), 호는 省齋(성재). 조선 때 舍人(사인)을 지냈다.

甘元漢(감원한)자는 大振(대진), 호는 浦隱(포은), 조선 때 禮部承旨(예부승지)를 지냈다.

甘益漢(감익한)자는 道俊(도준), 호는 秋潭(추담). 조선 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예부 승지를 거쳐

이조 참의에 이르렀다.1455년(단종 3)에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고 단종을 노산군에봉하자

성삼문 등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화를 입어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甘漂(감표)자는 處塋(처영). 조선 때 檜山君(회산군)에 봉해 졌다.

甘德八(감덕팔)자는 乃善(내선), 호는 南溪(남계). 조선 때 敎授(교수)를 지냈다.

甘禮從(감예종)자는 亨淑(형숙), 호는 自怡堂(자이당). 조선 때 학자로 유명하였다.

甘昕(감흔)자는 明仲(명중), 호는 謙齋(겸재). 조선조에 참봉을 역임하였다.

甘尙中(감상중)조선 때 典籍(전적)을 지냈다.

 

甘景仁(감경인)자는 汝一(여일), 호는 觀術亭(관술정). 조선 선조 때 무과)에 급제하여

僉節制使(첨절제사)를 지내고,1592년(선조25) 임진왜란 때 이순신의 수하에서 공을 세웠다.

甘景倫(감경륜)子는 汝五(여오), 호는 晴岡(청강), 1591년(선조 24) 무과)에 급제하고

임진왜란 때 창의하여 공을 세웠다. 三烈祠(삼렬사)에 제향 되었다.

甘景茂(감경무)자는 希秀(희수) 호는 敦庵(돈암) 조선 때 성균관진사를 지냈다.

甘景卓(감경탁)자는 希管(희관) 호는 琴溪(금계). 1592년 인진왜란 때 공을 세워 軍資監正(군자감정)을 지냈다.

무술에 뛰어 났다.

甘景仁(감경인) 선생의 일화.

감경인(甘景仁)은 武科에 올라 임진왜란 때는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의 군막에서 선봉(先鋒)으로 나아가

여러 싸움에서 전공을 세웠다.

 

李忠武公의 장계(狀啓)로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책록되고 여도만호(呂島萬戶)를 제수(除授)받았다.

이어 어모장군(御侮將軍) 부사과(副司果) 내금위(內禁衛), 정략장군(定略將軍) 부사맹(副司猛)을 역임했다.

그는 아우와 함께 昌原 등 여러 고을을 방비하였는데 특히 昌原은 그들의 힘에 의해 방어되어

대도호부(大都護府)로 승격되기까지 했다.

 

그 뒤 인조 때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형제가 倡義해 尙州까지 올라갔다.

그곳에서 평란(平亂)소식을 듣고 돌아오던 중 아우 현감공(縣監公)이 병으로 눕자

단지(斷指)로 급환을 구하여 세칭 충효우(忠孝友)삼열(三烈)이라 했다고 한다.

출전: 부천족보 전문 도서과

 

 

 

 

 

 

 

 

 

 

 

姓氏의 古鄕, 중앙일보 발행 (上)

한국인의 족보 편찬위원회 한국인의 족보 중에서 인용. (下)

 

 

 

3. 祖父 감동규(甘東珪)와 밀주징신록(密州徵信錄)

 

 

밀주징신록 密州徵信錄 刊記및 등재자 명단/洗川

아래는 밀주징신록이 저작되었던 1936년 이전에

세천(洗天)마을에 세거(世居)하면서 밀주징신록에 등재된 유림(儒林)들의 명단입니다

밀주징신록은 지금의 예림서원(禮林書院)을 관리했던 당시의 공공단체인 예림재(禮林齋)에서 인쇄되었습니다

 

예림재(禮林齋)는 일제식민통치기간에 밀양에 설치된 조선총독부에 소속된 모든 하부기관을 제외한

조선인이 경영한 유일한 공공단체입니다

즉, 예림재라는 공공단체의 구성원인 유림들은 당시 밀양지역의 최고의 지식인에 해당했으며

징신록의 향약(鄕約) 등을 솔선수범하고, 여론을 형성하는 등

민족정기 함양 및 보존을 위해 또 지역사회를 위해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러한 단체에 효전스님의 고조부(高祖父)인 감동규(甘東珪)가 가입하여 활동한 것은

그가 일제강점기의 엄혹한 시기에도 그를 포함한 회산감씨(檜山甘氏) 문중원 11명과

또 나아가 그당시 문망록에 등재된 밀양지역의 지식인 704명(회산감씨 문중원 11명 포함)과 함께

지역과 민족을 위하여 선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며

 

이러한 지역과 민족을 위하는 애민 민족주의 정신은 그 하대(下代)로 이어졌을 것으로 보이며

감동규(甘東珪)의 손자 감영생(甘泳生)은 장래의 민족을 위한 스스로의 할 일을 감당하기 위해

새로운 지식의 갈구가 일본국 명문 와세다대학 정치학부의 유학을 결심하게 되었을 것이라 보아진다

즉, 그가 입신영달과 더 많은 부(富)를 위했다면 결코 "정치학부"를 선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1. 밀주징신록(密州徵信錄) 간기(刊記)

著作 : 1936년(昭和11) 5월 12일

發行 : 1936년(昭和11) 5월 16일

著作 兼 發行者 : 安秉禧

밀양군 부북면 전사포리 248

印刷者 : 權永漢

밀양군 부북면 후사포리

인쇄 겸 발행자 : 禮林齋

형태 : 목판본

2. 밀주징신록 등재자 명단 (洗川)

01. 감래성 (甘來聖) 字 希孟 三烈公 甘景人 後孫

02. 감창일 (甘昌一) 字 致萬

03. 감창기 (甘昌基) 字 亘萬 號 黙齋

04. 감기혁 (甘基爀) 字 文玉

05. 감수정 (甘守正) 字 德瞻

06. 감수근 (甘守根) 字 進元 號 三友齋

07. 감태정 (甘台廷) 字 士文 號 溓谷

08. 감갑정 (甘甲廷) 字 敬老

 

09. 감봉정 (甘鳳廷) 字 暻瑞 號 竹軒

10. 감동길 (甘東吉) 字 起玉

11. 감동규 (甘東珪) 字 明玉 號 毅齋

밀주징신록 등재자 명단 (洗川)

향토 사학자 도재국 글

 

고조 할아버지 감동규(甘東珪),밀양 유림 자,明玉, 號 의재(毅齋)
毅齋의 의(毅)는 떳떳하다, 굳세다라는 뜻이고 재(齋)는 흔히 집이나 호에 붙이는 말.
사도세자의 號가 의재(毅齋)였는데 왜 고조부께선 의재란 號를 쓰셨을까?

 

 

4. 관술정(觀術亭)

 

 

출처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nocleaf&logNo=90027392830

인재를 가르치던 창원향교 서쪽의 육영재를 철거하면서

회산 감씨 문중에서 인수받아 고종 14년(1877)에 옮겨 지은 것이다.

현재 관술정은 내리동 반룡산 남동기슭의 군용지 안에 자리잡고 있다.

1936년에는 관술정 뒤편에 삼열사를 지어 임진왜란 때 선무원종공신에 오른

감경인·경륜 형제를 모시고 해마다 음력 4월에 유림제를 지내고 있다.

내리동 반룡산(盤龍山) 남동기슭의 군용지내에 위치하고 있는 관술정은

창원향교 서편의 육영재(育英齋)를 훼철할 때 회산감씨 문중에서 인수받아 고

종 14년(1877년)에 이건하였다.

1936년에는 관술정 뒷편에 삼열사(三烈祠)를 세워

임진왜란때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오른 감경인(甘景仁)과 그 동생 경륜(景倫)형제를

모시고 매년 음력 4월 15일 유림제를 지내고 있다.

 

5. 관술정(觀術亭)에서의 감호현(甘豪鉉)

관술정은 창원시 내리동 반룡산에 있는 회산감씨 재실이다.
관술정은 감경인(1569-1648)의 호로서
그는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의 선봉장으로서 선무원종공신이다

1940년대 관술정(觀術亭)에서의 감영생의 부친인 감호현 선생 사진

선생은 의관정제(衣冠整齊)를 갖추어 조상의 사당을 참배하고 나오는 듯한 모습이다.

이 당시에 사진을 찍어 보관한다는 것은 보통 사람으로서는 어려운 일일 것이다

특별히 사회적 명성이 있는 부잣집이 아니고서는 이런 시대에

의관을 정제하고 사진까지 찍어면서 재사를 출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감영생 선생의 손녀 효전스님은"할아버지는 만석군 집안의 신동으로 자랐다" 는 것을

증조모 일직손씨(감영생의 모친으로 95세까지 증손녀와 동거)로 부터 직접 들었다고 한다

관술정(觀術亭)이 있는 반룡산(팔룡산) 위치

지도에서 검색 위치 : 창원시 의창구 내리동 38, 38 - 2번지

창원시 문화재 : 사적지 지정

창원시청 문화재 담당 : 055 - 225 - 3676 문의

창원향교 > 예비군중대본부 : 055 - 294 - 6113 문의

원종공신(原從功臣, 元從功臣)은

각 공신녹권 중 친공신(직접적인 공신)의 아래로, 보조적인 역할을 한 공신이었다.

원종공신 역시 친공신과 같이 1등, 2등, 3등으로 훈이 구분되어 있었으며

각 공신명에 따라 선무공신의 경우는 선무원종공신, 분무공신의 경우는 분무원종공신 등으로 원종앞에 공훈명이 붙었다.

각 정치적 사변이 발생하여 공신들이 녹훈되면 친공신(정식 공신으로 녹훈된 자)와 원종공신이 발생했고

각 공신의 공훈명의 뒤에 원종공신을 붙여서 정공신보다 한등급 아래로 포상했다.

선무공신이나 호종공신의 경우 공훈이 낮은 공신이 원종공신에 편입되는 사례도 있었다.

혜택으로는 원종공신에 녹훈된 자는 당상관(정3품 통정대부,절충장군 이상)으로 승진되는 것이 보통이었고,

원종공신의 아버지의 경우 관직을 역임한 경우 아버지가 생전에 역임한 관직에서 한 등급을 추증해 주었다.

공이 있는 자가 원종공신 서훈이 되기 전에 사망한 자는 공이 있는 본인을 추증하되, 최소 정3품 당상관 직책을 추증했다.

공훈을 세운 친공신이나 왕족의 친·인척이 원종공신에 임명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출처 : http://ko.wikipedia.org/wiki/%EC%9B%90%EC%A2%85%EA%B3%B5%EC%8B%A0


6. 예림서원

 

 

 

예림서원에 대해서 어른들로부터 너무 많이 들었다.
특히 증조모께선 학구열이 대단하신 분이셨는데 점필재 김종직 선생을 선조어른들이 그 정신을 흠모하셨다고 하며
할아버지의 서고의 책은 아버지 말씀으로 1톤 트럭으로 3개나 되는 어마어마한 량이었다고 한다.
한학을 연구하는 단체나 도서관에서 희귀본을 구하지 못하면 집으로 찾아와 대여를 많이 해갔다고 한다.
예림서원은 너희 증조고조부 선대조부님들이 거의 돈을 다 내다시피하여 단독으로 지었다고 해도 무리는 아니다라고 하셨다.
기억에 중창하거나 할 때 두 세집에서 돈을 내었다 들었다.
참고로 나는 기억이 유별나게 좋아 어린시절부터 집안어른들이 기겁을 하곤하였다.

 

7. 꿈에도 잊지못할 사람들,가족

 

감영생의 할머니, 李五利(1863~1945) 1930년 (감영생 촬영)

 

아버지 甘豪鉉(감호현)1891~1947/1940년

 

 

 

외아들이 꽃같이 풀잎 같이 살아만 와달라고 33년간 매일 뜨신 밥

살강에 떠다놓코 기다리다 돌아가신 어머니와 아내.손기수.손성조(1970)




 

8. 甘泳生의 모(母) 孫基守(芬男)

 

 

증조모 孫基守(芬男)1890~1984는 본명이 손분남임에도 이상하게 이름을 남동생인 손기수의 이름을 대며

손기수라고 하였다. 아버지가 남동생 이름과 어떻게 누나의 이름이 같을 수 있냐고 하며

본명을 알고자 했으나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끝까지 증조모는 본명을 말하지 않으셨다.

 

증조모보다 15살이나 아래여서 거의 아들뻘같은 손기수라는 남동생이 재일교포로 일본에 살았고

해마다 한 두차례.한국에 나오면 보름이나 한 달가량 우리집에서 묵고 가셨는데 그 분을 일본할배라고 불렀다.

일본에서 아주 큰 한약방을 가지고 계셨고 조총련소속의 아주 키가 크고(178cm) 양복이 상당히 어울리셨던 지적인 분이셨다.

 

그 분은 자녀를 여럿 두었으나 난리통에 아들을 여럿 잃고 친자가 없어 내가 잘 알기도 하는 아주 먼 핏줄인

친척을 양자로 들이셨고 재산이 아주 많아 그 양자에게 물려준 걸로 기억한다.

어릴적에 증조모 이름이 뭐냐니까 일본할배하고 같은 손기수라 하시기에 하도 이상해서 형제가

어떻게 같은 이름일 수 있냐고 하면서 계속 이유가 뭐냐니까 왠일인지 이유는 모르겠고

" 나는 손기수다.손기수 "하시면서 대답을 이상하게 분명히 회피하는 듯 보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가 너무 궁금하여 며칠동안 계속 따라다니며 틈만 나면 본 이름이 뭐냐고 귀찮게 했더니

아주 번개속같이 빠른 큰 목소리로 "손분냄이,손분냄 이"라고 하여 "손분남??"하고 되물으니 맞다고 하셨다.

지금까지도 그게 미스테리이고 지금도 그 이유가 상당히 궁금하다. 그 후에도 아무리 생각해도 의아하여

내가 기억을 잘하고 있으면서도 슬쩍 본명이 잘 생각나지 않는다고 하자 증조모가 허허 웃으시며

"잘 잊어버렸다"고 하시며 증조모가 다시는 안 가르쳐주시면서" 손기수,나는 손기수다"라고 하셨는데

아무튼 너무 이상스러웠다.

 

모르긴해도 아무래도 뭔가 분명히 있는 것 같았다.

내가 할머니와 아버지께 증조모 본명을 알아냈다고 했더니 그걸 니가 어떻게 알아냈냐고 하면서

아무리 본명이 뭐냐고 가르쳐 달라고해도 도무지 무슨 이윤지는 모르겠고 이상하게 안 가르쳐주셔서

할 수 없이 그냥 남동생인 일본할배의 이름과 같은 '손기수'라 호적에 올렸다고 했다.

 

내가 11살경 면에서 증조모 주민증을 만든 것을 기억하는데.증조모는 90가까운 노구에도

기억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으며 시력,청력이 젊은 애들보다 훨씬 좋아 가는 바늘에 실을 바로 쏙 끼어

사람들을 늘 깜짝 놀라게 하셨다.

 

그리고 머리가 80살즈음부터 검은 머리가 다시 올라와 반백발이셨으며 치아도 12개를 돌아가실 때까지

가지고 계셨기 때문에 다른 할머니들처럼 입이 합죽하지 않았다. 얼굴이 깨끗하고 잔 주름이 거의 없었으며

속살이 희고 피부가 윤기가 돌고 젊은 사람 같았다.

 

그리고 특이한 것은 젖가슴이 젊은 사람처럼 봉곳하고 아주 예뻐 너무 놀라웠다.

그 때 생각에 아흔 넘긴 분의 젖가슴이 이렇게 예쁠 정도면 젊으셨을 때는 얼마나 예뻤을까 싶었다.

증조모는 늘 도인술을 하셨고 내게도 가르쳐주셨기로 나도 덕분에 지금껏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도 모른다.

평생 감기를 하거나 한번도 아파본 적이 없었다고 하셨다.

기억력이 탁월하셔서 몇 살까지 기억이 되시냐고 하니까 엄마등에 업혀있을 3살 때부터

어제 일처럼 생생히 다 난다고 하셨다.

 

자손들이 하나같이 머리가 좋은데 특히 내가 증조모를 탁하여 기억력이 특이하도록 좋아

기억이 한 살때부터 다 그것도 부분적으로 기억나는게 아니고 전편이 드라마처럼 또렷이 어제일처럼

다 나서 조로로로 구술이 가능, 이런 나를 모두 다 놀라워하셨다.(사실 지금도 나를 놀라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나를 증조모와 어른들은 총명하고 영민하다고 하시며 혀를 내두르며 매우 놀라워하셨다.

특히 증조모는 내가 한 살때부터 기억이 다 난다고하자

입을 다물지 못하며 너무 놀라하셨고 식구들 모두 감탄을 하면서 기겁하겠다하셨다

 

어떻게 그런 것까지 기억을 다 하냐고 하면서

나를 아는 이들은 나의 이런 기억력에 상당히 많이 놀란다

사실 난 지금도 신도들 명단을 다 외운다.

대략 2,000명은 될거다.

중노릇 33년하면서 내가 제사를 대략 1,000번쯤 지냈는데 어느 날 그 사람들 이름을 쭉 차례대로

한 번 적어본 적이 있는데 그게 가능하였다. 내가 생각해봐도 신통방통하다.

 

증조모와 할머니는 일직손씨로 증조모가 할머니에게 집안 언니뻘이라 클 때 서로 언니 동생했다고 하며

증조모가 할머니를 아주 어릴때부터 너무 이뻐해 삼단같은 땋은 머리를 쓰다듬고 며느리감으로

점을 찍어두었다고 한다.나는 어릴때 하도 사이가 좋으셔서 두 분이 친 자맨줄 알았다

 

집안내력이 윗대부터 쭉 고부간이나 올케 시누이사이가 너무 좋은게 내림내력이며 그것은 내가 봐도 그랬다.

특히 어른들이 상소리를 하지 않으셨으며 모범이 되신 분들이다.

내가 중이 되자 3대 적선을 해야 집안에 스님이 나오는데 역시 그래서 스님이 나왔다고 했다한다

 

웃대어른들 모두 적덕적선한 거 맞고 어릴때 다리밑이나 동네에서 어린 자식들을 업고 걸리고

집집마다 동네를 돌며 밥을 얻으러 다니는 거지들이 많았는데 그 사람들을 일부러 다 불러다가

마루에 상을 하나 따로 봐서 옷과 밥을 주었는데 어린 마음에도 우리집 어른들이 참 훌륭하시구나 싶었다.

 

우리 아버지는 사람은 어질고 좋은데 결정적으로 어리석어 그 많은 재산을 노름으로 다 날리고

처자식을 건사하지 못하여 내게 돌아가실때까지 미움을 받았지만 다른건 몰라도 평생 남 말 하지않고

또 욕을 하거나 인색하지 않았고 불쌍한 사람들에게는 입은 옷도 다 벗어주는 그런 사람이었으며

다른 사람들에겐 호인이셨다.

 

어느 날 증조모께 천석만석군이 되는 법을 여쭙자 적덕적선을 많이 하고 길을 가다가

혹시 쪼삣한 돌이 보이거든 누가 넘어져 다치지않게 옆으로 치우고 또 누가 가래침을 길에 뱉어 두었거든

아무 소리말고 흙으로 덮어 다른 사람들이 그 더러운 것을 못보게 하고 그리고 거지를 지나가다 보거든

절대 그냥 가지말고 몇 푼이라도 반드시 손에 쥐어 주거라,

 

그리고 밖에 나가면 그냥 빈 손으로 오지말고 하다못해 지푸라기나 돌이라도 하나 쥐고 들어오고

마당을 쓸 때도 집안으로 쓸 것,집 바깥쪽으로 쓸지 말 것,

지푸라기만 버리고 흙은 쓸어 내버리지 말 것,검소검약할 것, 그리고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날 것,

남의 것은 풀 한포기라도 절대 가져오거나 탐내지 말 것, 쓸 땐 쓸 것,이렇게 하면

천석 만석의 주인이 될 수 있다라고 하셨다.

 

나보고는 늘 "너는 훗날 반드시 큰 부자가 될 것이다. 내 말이 맞을테니 함 두고 보아라,

그 때 내 지금 이 말이 생각날 것이니라" 고 입버릇처럼 하셨다.

나보고는 시집을 가도 아주 멀리 시집을 갈 것이라면서 미국으로 시집을 갈래나,

코쟁이한테 시집을 갈래나,아무튼 아주 멀리 시집을 갈거라며 웃으시곤 하셨다.

그 땐 그게 뭔 말인가 하였으나 결국 내가 머리깎고 중이 되었으니 멀리 시집가게 될거란 말은 맞은 셈이다.

 

내가 입태되었을 때 " 조상 제사를 지내게 될 아이가 태어날 것이다" 라고 예언하셨는데

딸이 태어나자 "아니네" 했다지만 결국 내가 조상 제사차례를 다 모시고 사니 그 말씀도 적중했다.

나는 지금도 아흔이 훨씬 넘은 증조모가 한복을 깨끗하게 차려 입으시고 당신 혼자 지팡이를 짚고

교동으로 버스를 타시고 다녀오시던 것을 기억한다. 나는 살면서 우리 증조모같은 분을 아직 한 분도 보지 못했다.

증조모는 도인같으신 분이셨다.

 

 

9. 甘泳生의 모(母) 孫基守(芬男)의 족보와 집안

1

甘泳生의 외조부인 손유헌에 대한 족보(사진)는 아래의 족보와 같고

감영생의 처가와 외가 중에서 현재까지 대를 잇고 있는 효전스님의 인척으로서

감영생 선생의 발자취를 알아 볼 수 있을지도 모르는 유일한 집안으로

지경 손흥수 선생의 말씀으로는 "이 분의 집안도 손흥수 선생과 가까운 파(派)로서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신 "독립의사(獨立義士) 성하(成河) 손경헌(孫庚憲) 선생" 과 가까운 집안이라 하셨다

제가(도재국)가 이렇게 감영생 선생의 처가와 외가의 족보의 기록사항을 확인하는 것은

선생의 행력을 정확하게 알아, 묻혀진 독립운동의 사실을 알아보기 위한 과정의 일환이다.

 

감영생 선생의 제적부는 본적지인 밀양시 상남면에서 현재 관리를 하고 있고,

현재의 밀양시 관내의 각 읍,면에서 보유중인 제적부(호적부)의 최초의 작성과 완성 년도는

일제강점기인 1922년의 총령(總令)인 <조선호적령> 이 발표된 직후인 1924년도로 추정되며,

 

이는 일제의 조선토지조사령 시행기간(1910 ~ 1918,밀양지역 토지 조사령 집중 시행기간은 1913년 ~ 1916년)과

조선건물조사령 시행기간(1916 ~ 1924)이 시기적으로 서로 맥을 같이 하고 있어,

일제의 우리나라 병탄의 공고화를 위한 조선총독부 정책의 근간을 알 수 있는 자료이기도 하다.

 

혼인으로 인한 손기수(분남) 여사의 감호현(감영생)家의 호적부 등재시 아래의 내용과 같이

?조선시대의 호구단자

 

❶구법령정리사업의 일환으로 1912년의 제령(制令)인 <조선민사령> 중 호적에 관한 규정

❷건양호적(1896년,건양원년)

❸민적법(1909년,융희3년)

❹조선민사령(1912년)

❺조선호적령(1922년)

❻조선민사령 3차 개정(1939년)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혼란이 있은 것은 분명해 보이나

 

결론적으로는

효전스님의 증조모인 손기수는 친정의 족보에 기록된 손기수와는 동명이인(同名異人)이며

또 “현재 남아 있는 감호현 家의 제적부(호적부)의 기록인

밀양시 상남면 세천리 1036번지 호주 감호현(甘壕鉉)의 처(妻)로서

또 감영생(甘泳生)의 모(母)로 기록되어 있는 것에 대해서는

이설(異說)이 없고 법적으로 유효한 기록이다”

 

2

 

감영생(甘泳生) 선생의 외조부 손유헌(孫瑜憲) 선생의 족보

출처 : 일직(안동)손씨대동보

 

감영생(甘泳生) 선생의 외조부 손유헌(孫瑜憲) 선생의 족보

 

女 손기수(孫基守, 손분남 : 夫 창원인 甘文鉉)와 子(男) 손기수(孫基守) 족보

손기수(분남)의 족보 : 창원인 감문현은 감호현의 족보상의 이름 또는 동일인으로 보이며

※ 효전 스님의 글로 보아 그 다음에 기록된 큰 글자의 손기수(孫基守)는 감문현

(감문현과 감호현 같은 사람으로, 감호현족보상의 이름 또는 다른 이름으로 보임)처남으로 보인다.

즉, 손분남의 남동생으로 보인다.

(효전스님이 말하는, 일본에 계시면서 약방을 경영하며, 큰 부자가 되셨다는 할아버지이다)

감영생 선생의 외사촌 동생인 손기수 선생의 자녀는 외가쪽의 유일한 인척으로 보인다

 

추가

 

25세 基守의 아들인 26세 손철석의 配는 남양洪씨로 1962년 5월 5일 졸, 철석은 1963년 3월 13일,

27세 손철서의 양자 제화는 생부가 태수이며, 2004년 1월 4일 졸, 室(妻)는 밀성孫씨 鄒川公後

 

대동보 증보 2010년

3

다음은 우리나라의 호적법 유래를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우리나라 호적법 유래

 

1. 호적법[ 戶籍法 ]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시행일시 1912년부터 시행되었으며, 호적에 관한 사항을 규정함을 목적으로 제정된 법률로서

그 내용은

❶구법령정리사업의 일환으로 1912년의 제령(制令)인 <조선민사령> 중 호적에 관한 규정

❷1922년의 총령(總令)인 <조선호적령>

❸1948년의 군정법령인 <호적임시조치에 관한 규정>을 폐지하고

❹1960년 1월에 제정되어

❺그 뒤 1995년 12월 9차의 개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8장 135조 및 부칙으로 되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호적법 [戶籍法]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호적법 [戶籍法]

출처 : 두산백과

전략

 

현재는 가족관계의 등록 등에 관한 법률에 따른 가족관계등록부가 그 역할을 하고 있다.

즉 오늘날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여건의 변천은 이러한 가부장적 가족제도를

유지할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에

호주의 지위는 점차 약화되었고, ❻이에 따라 민법이 개정(법률 7427호 2005. 3. 31. 공포·시행)되어

2008년 1월 1일부터 민법상 호주제가 폐지됨에 따라 호적제도를 대체할

새로운 가족관계 등록제도를 마련하게 되었다.

 

기존의 호주를 기준으로 가(家) 단위로 국민의 가족관계를 편제하는 호적제도는

개인의 존엄과 양성평등의 헌법이념에 어긋난다는 비판에 따라

호적부를 대신하여 국민 개인별로 등록기준지에 따라 가족관계 등록부를 편제하고

사무의 전산화에 따라 각종 가족관계의 취득·발생 및 변동사항의 입력과 처리 및 관리를

전산정보처리조직에 의하도록 함으로써

국민 개개인별로 가족관계사항이 기록·공시됨에 따라 호주제 폐지의 취지 및 양성평등의 원칙을 구현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호적법 [戶籍法] (두산백과)

 

3. 조선시대 호적 열람

출처 : 호적(戶籍)제도 변천사 - 신라~조선~현대 | 시론 (時論)

 

역사적으로 한국에서 호적과 호주라는 개념을 일제가 처음 만든 것은 아니며 통일신라,

고려,조선을 거치면서 구체적인 내용은 조금씩 다르지만 이미 형성되어 적용되고 있던 제도이다.

일제는 단지 이미 전통적으로 존재하던 우리의 호주의 개념에 근대적 방법으로 재편하여

식민통치를 위해 악랄하게 이용한 것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그처럼 변질된 호주제를 해방이후 수십년간에 걸친 민법 개정으로 일제가 추가한 부분을

모조리 삭제하고 개정하여 현행 호주제에서는 호주라는 의미는 단지 호적 등재상의 기준인이라는

의미만 남아 있을 뿐이고 다른 어떠한 권한이나 의무도 없어졌다.

 

그 연대표는 다음과 같다.

❶조선시대의 호구단자

❷건양호적(1896년,건양원년)

❸민적법(1909년,융희3년)

❹조선민사령(1912년)

❺조선호적령(1922년)

❻조선민사령 3차 개정(1939년)

 

일제시기 민법에 해당하던 조선민사령 (1912년 4월 발효) 제 11조에는

조선인의 친족, 상속의 영역에 관하여는 특별한 법령이 없는 한 조선의 관습에 의거한다고 선포했다.

이는 바로 1912년 이전과 이후의 기간 동안 만들어진 호적체계(또는 호주제)는

조선의 가족문화를 반영한 것이라는 것을 뜻한다.

비록 그 후 조선민사령 11조가 1차(1921), 2차(1922), 3차(1939)에 걸쳐 개정되는 과정에서

친족ㆍ상속편 부분에 있어서 일본의 민법을 의용(依用)하게 되었으며

특히 3차(1939) 개정은 창씨개명과도 관련있는 등 호적제도의 내용이 일제에 의해

변질된 부분이 생기게 되었으나... <하략>

출처 : 호적(戶籍)제도 변천사 - 신라~조선~현대 | 시론 (時論)

http://blog.daum.net/_blog/hdn/ArticleContentsView.do?blogid=0CWjZ&articleno=17953685&looping=0&longOpen=

 

효전스님은 조선 후기 한 집안을 만석군으로 일군(만든) 증조모와

또 감영생 선생의 모(母)가 되시는, 손기수(분남) 여사의 인생관에 대해서 잠시 언급을 해 주었다.

아들인 감영생 선생의 비극을 당하면서, 근현대사의 영욕을 넘어

95세까지 기억력의 천재로서 살다, 맑은 정신으로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고 하였다.

 

손기수(분남) 여사는

밀양의 명문인 일직손씨 문중에서 회산(창원)감씨 문중의 감영생의 부(父 ) 감호현 선생에게 시집 온 분으로,

여사의 족보 내력을 저의 스승인 지경 손흥수 선생이 소장하시는

“일직(안동)손씨대동보”에서 다음과 같이 확인할 수 있었고

 

선조로부터 물려받아 기억력의 귀재(鬼才)라는 증손녀 효전스님으로부터

족보와 호적부에 기록이 없는 “분남”이라는 본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당시 족보에는 남자는 이름이 기록되었으나

출가한 여자는 “女” 라는 “性”과 함께 夫의 성명이 연서(連書)되어 것은

우리나라 족보 기록의 보편적인 사항이었다.

 

본 족보에 기록된 손유헌(孫瑜憲)의 자(子)인 또 한 분의 손기수(孫基守)는 손분남(호적부상 손기수로 기록) 여사의

남동생으로서, 일본에서 큰 약방을 경영하여 많은 돈을 벌어 부자였으며 효전스님이 어렸을 때

한국의 집(증조할머니 손기수의 집)에 오면 보름이나 한달 정도씩 머물다 가는 "일본할배"라고

불리는 아주 지적인 분으로 난리통으로 여러 자식이 돌아가셔서 자손이 없어

집안의 사람을 양자로 해서 많은 재산을 양자에게 물려준 것으로 알고 있고

그 할아버지(손기수)의 대를 잇고 있다는 것을 효전스님이 직접 들어 알고 있었다 하며

어릴 때부터 증조모의 이름에 대해서 "손기수"와 "손분남" 2가지라는 것을

증조모로부터 들어 알고 있었으나 왜 두 개의 이름을 가졌는지에 대해서는

증조모한테 아무리 물어도 빙그레 웃으면서 대답을 안하시더라는 것이다.

그리고 증조모님의 기억력도 대단해서 3살때부터 전부 기억을 하신다 했으며

이런 특이한 것이 유전이 되어, 효전스님은 1살때부터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다 나며

출가해서도 여러 불경을 빠르게 많이 외우고 아무도 못 외우는 "모든 도반들의 이름"도 다 외워서

주위의 스님들이 눈이 휘둥그래졌다 한다.

 

정직(正直)

출처 : 효전스님 수필집 춘몽(春夢) 내 나이 일곱 살이던 그해 여름방학 때의 일이다.

흙먼지가 바싹 타 마르고 여름 더위가 한창 따락따락 하던 어느 날

나는 연필을 사러 산을 두 개 넘고, 집에서 십리나 떨어진 학교까지 간 일이 있다.

동네 어귀를 돌고 돌아 들길을 따라 산길을 따라 걷고 걸어 학교 앞 문방구에 갔었다.

<중략>

제비표 연필과 게실 지우개를 사러 갔는데 값이 15원이라는 것이었다.

“오늘같이 더운 날 이 멀리까지 어린 니가 어찌 찾아왔느냐” 며

시원한 물을 아지매가 얼른 한 사발 주셨다.

안녕히 잘 계시리라 하고 돌아서서 십리길을 다시 팥죽 같은 땀을 뻘뻘흘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대문 앞에 들어서면서 손에 든 연필을 보니, 이거 큰일 났다 싶었다.

왜냐면 물건 값을 셈을 해보니 20원인데, 내가 5원을 덜 주고 온 것을 그때서야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 주인 점방 아지매가 연필과 게실 지우개를 주고 내게 주리를 5원을 내 주길래,

그냥 나는 아무 생각없이 무심결에 그것을 받아 가지고 왔던 것인데

집에 와서 생각을 해보니 내가 그 돈을 받아서 오면 안 되는 거였다.

나는 십리 길을 여지껏 왕복으로 걸어 “이제 집에 드디어 다 왔구나” 는 덮어두고

오던 길을 다시 또 돌아서 급하게 다시 그 십리 길을 냅다 내달려 뛰어 갔다.

아까 갔다왔을 때보다 훨씬 빨리 그곳을 눈썹을 휘날리며 뛰어서 갔다.

헐레벌떡 그 더운 여름 왕복 이십리 길을 또 간 것이었다.

내가 두어 시간 만에 다시 그곳을 갔더니 그 점방 아지매가 의아하였던지 눈을 둥글게 뜨며

“뭐 여기 흘린 거라도 있어 찾어러 다시 왔느냐” 라고 하며 주변을 이리저리 살폈다.

<중략>

늦게 오면 얼마나 아지매가 나를 이상하게 생각할꼬하여

이렇게 급하게 왔노라고 했더니 "오늘이 보통 덥지 않은데

사리 같은 어린 니가 십리길을 왕복으로 오늘 두 번씩이나 걷게 되는구나" 라며

니가 계산 잘못한게 아니고 내가 20원인데

니가 아주 이 먼곳까지 십리를 걸어와 연필을 사로 온 것이

하도 기특하고 이뻐보여 내가 오원을 깎아주었던 거다" 라고 하였다.

<중략>

"니가 참 정직하고 기특하구나, 앞으로도 항상 오늘처럼 정직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앞으로도 항상 훌륭한 사람이 되거라" 며 칭찬을 하셨다.

그리고는 내 손에 연필 몇 자루를 쥐어주시며

"공부 열심히 하고, 더운데 쉬어가며 가고, 더위 먹지 말라"고 하셨다.

그리고는 집이 여기서 머니 녹여 먹으면서 가라며

왕눈깔사탕과 십리(十里) 가는 동안 녹여 빨아 먹을 수 있다던 십리사탕도 쥐어 주셨다.

<중략>

나는 내가 특별히 착하게 한 것도 없고 내가 할 일을 당연히 한 것 뿐인데

착하다는 칭찬도 듣고, 새 연필도 더 생기고, 맛있는 왕눈깔사탕도 얻게 되니

너무 기분이 좋아 깨곰 춤을 추면서 십리사탕을 녹이며

산을 두 개나 넘어 그렇게 돌아 왔는데 하나도 힘이 들지 않았다.

어린 내가 온 몸에 땀을 쫄쫄 팥죽같이 흘리며 삼복더위에 안보이다 나타나자

"도대체 어디를 이렇게 더위 먹고 다니냐"고

<중략>

이만저만 하고 이렇게 저랗게 되어, 이 사탕을 먹고 있노라 하였더니

마당에서 이불 호청에 풀 먹이던 어머니가 일을 그만두고 내 머리를 쓰다듬어시며

"오늘 니가 참 잘 하였다. 사람은 늘 바르고 정직해야

훗날 대들보도 되고 큰 그릇이 될 수 있다" 시며 몹씨 나를 대견스러워 하셨다.

 

나는 이 일을 두고 두고 가슴에 새겼다.

거짓말을 하면 정말 못쓰고, 사람은 자고로 정직해야 한다는 생각이

이 날 완전히 내 마음속 깊이 다시 새겨졌다.

 

※ 이 글에서 “게실(일본어로 지우개)”이라든가 “주리(일본어로 잔돈)”를

예전에 쓰던 그대로 쓴 것은 글의 질감을 위해 예전말 그대로 인용 수록한 거임을 밝혀둡니다.

출처 : 효전스님 수필집 <春夢> 中 정직(正直)

 

이런 이야기까지 다 기록하는 것은 효전스님이 어릴 때부터 천성이 정직했고

어린 아이가 중세천 마을에서 인산마을에 있는 상남국민학교까지

두 번이나 걸어서 또 산고개를 두 개나 넘어 왕복했다는 것을 볼 때

"그 기억력과 정직함, 어린 아이에게 강인하고 끈질긴 도덕적 책임감이

천성적으로 몸에 배어 있었고, 또 가족 어른들로부터 그런 교육을 받아왔다" 는 증거이며

그가 조모와 증조모로부터 들은 "조부 감영생(甘泳生) 등 가족에 대한 이야기가 사실이다" 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효전스님의 어린 아이때의 착한 모습"을 수필 춘몽(春夢)에서 발췌합니다.

 

* 중세천 마을에서 상남초등학교까지 길은 지금의 승용차가 다닐 수 있는 길은 들길과 산고개를 하나 넘는

1회 왕복거리가 6km나 된다. 또 그 당시의 들길과 산고개를 두 개나 넘는 단축된 좁은 오솔길(산고개길은

지금은 사람이 다니지 않아 없어짐)은 1회 왕복 거리가 4km가 조금 넘는 길이다.

 

요즘은 집에서 학교까지 500m 정도만 넘어도 초등학교 저학년 특히 1 ~ 2학년 아이들은 평지 도로에도

거의 승용차로 학교까지 데려다 준다. 효전 스님이 한여름 뙤약볕에 학교 정문 앞 문방구까지

2회 왕복한 10km 넘는 길을 요즘 어린이한테 걷게 하면 어떤 어린애도 걸을 수 없을 것이다.

 

인용발췌/카페,밀양광장 글.도재국

 

 

 

 

10. 감영생(甘泳生) 선생의 처가(妻家) 사람들

 

일직(안동)손씨는 밀양뿐만 아니라 전국에서도 이름난 문중이다.

단장면 구미마을에 거주하시는 지경(地耕) 손흥수(孫興銖) 선생의 집을 방문하여

일직(안동)손씨대동보 [ 一直(安東)孫氏大同譜 ] 에서

감영생(甘泳生) 선생의 처(妻) 손성조(孫性兆) 여사의 친정사람들을 찾아

독립운동 관련 자료가 있는지 여부를 조사해 보았다.

 

밀양의 보물같은 향토 사학자로 제가 스승으로 모시는 지경 손흥수 선생께서는

"일직손씨 영모재파(永慕齋派)인데, 감영생(甘永生) 선생의 장인이신 손태헌(孫太憲) 선생과는 같은 파에 속한다"
하시면서,"감영생 처가쪽과 더 가까운 일족분들은 대체로 촉망받는 인물이 많이 배출되었다 " 하셨다.

또 "우리 집안에는 만주 등에서 독립운동을 크게 한 분이 계시는데

그 분이 바로 獨立義士 成河 孫庚憲 先生이며, 선생의 항일독립운동 발자취가 기록된

"독립의사 성하 손경현 선생 기적비 (獨立義士 成河 孫庚憲 先生 事跡碑)"가

산외면 다죽리 다원마을 입구 도로변 산 아래에 있다" 하셨다.

 

본인(도재국)도 수 년전에 밀양 전체의 독립운동을 하신 분들의 비문을 찾아

사진을 찍는 일환으로 그 분의 비문을 사진을 찍어 이 카페에 올린 적이 있는데

그때 찍은 "獨立義士 成河 孫庚憲 先生 事跡碑" 사진을 아래에 올린다.

감영생 선생 처가의 족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첫째 : 장인 손태헌의 전 가족이 만주에서 돌아가신 것으로 되어 있고

둘째 : 돌아가신 년령대를 보아서 한일 강제병탄 직전 및 직후로 추정되며

셋째 : 모두 만주에서 돌아 가셨다는 것이 특이하다.

위와 같은 시기에는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제의 탄압과 검거를 피하기 위해

우리의 수많은 애국자들이 만주로 피신을 하여

그곳에서 강력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는 것은

우리 항일독립 투쟁의 역사 기록에서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감영생의 손녀인 효전스님으로부터

"감영생이 딸을 데리고 백두산에 올랐다.(피신으로 추정)

이러한 이야기는 "감영생의 손녀가 자기의 증조모(95세까지 생존)와 큰고모로부터 들었다" 라고 했다.

그렇다면 감영생은 약산 김원봉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대면서

위기 상황에 만주로 이주한 처가쪽으로 일시적으로 피신을 하거나

그곳에서 독립운동을 했을 가능성을 추정해 볼 수 있다.

하나의 작은 실마리라도 발견되면,

그것을 연결하고 맞추어 가면서 행력을 찾아

그 분들이 진정한 독립운동가라면 우리는 가족 즉 후손 여부를 떠나서

민족의 일원으로서 그 분들의 발자취를 찾는데 온 힘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밀양 향토 사학자, 도재국 글>

일직(안동)손씨대동보 [ 一直(安東)孫氏大同譜 ] 를 통해 본

감영생(甘泳生) 선생의 처가(妻家) 사람들

[ 일직손씨 중추공(中樞公) 이자(二子) 죽계공(竹谿公) 휘(諱) 작파(派) ]

24世 태헌(太憲) : 1874 ~ 卒日未詳, 墓는 만주, (감영생의 장인)

24世 배(配) 密城朴氏: 1874 ~ 卒日未詳, 墓는 만주, (감영생의 장모)

자녀

一男 : 기홍(基洪) : 1896 ~ 卒日未詳, 墓는 만주, (감영생의 처남)

配 : 廣州李氏, 1900. 8. 24 ~ 卒日未詳, 墓는 만주

子 : 억수(億洙)

二男 : 기범(基範) : 1898. 1.6 ~ 卒日未詳, 墓는 만주, (감영생의 처남)

配 : 海州吳氏, 1904. 7. 2 ~ 卒日未詳, 墓는 만주

三男 : 성갑(聖甲) : 1906. 6. 29 ~ 卒日未詳, 墓는 만주 (감영생의 처남)

配 : 昌寧曺氏, 1910. 10. 21 ~ 卒日未詳, 墓는 만주

一女 : 원주(元珠) : 기재 생략(아레 족보 참조), (감영생의 처형)

二女 : 형주(亨珠) : 기재 생략(아래 족보 참조), (감영생의 처형)

三女 : 성조(性兆) : 夫 甘泳生, 子 甘仁穆, 子 甘義穆

 

 

 

 

 

 

 

甘泳生 先生 妻家 족보

 

 

 

다원(茶院)마을 입구

본 마을은 다원1구와 다원 2구로 되어 있다.

(1) 다원 1구(茶阮 1구, 다원 茶阮, 죽서 竹西)는 "일직(안동)손씨" 문중이 집성촌을 이루고

(2) 다원 2구(茶阮 2구, 죽원 竹阮, 죽동 竹東)는 "밀성(밀양)손씨" 문중이 집성촌을 이룬다.

위 두 마을은 씨족(氏族) 집성촌으로서 서로 쌍벽을 이루면서

우리나라의 유서깊은 문중(門中) 문화를 꽃피우는 대표적인 곳 중의 한 곳이

지명인 마을 이름의 유래가 차()나무와 혜산서원(惠山書)에서 유래했다

혜산서원 내에는 일직손씨의 선조의 위패가 봉안된 숭덕사와

밀양에서 가장 오래(600년)된 차나무가 있다.

본 마을인 밀양시 산외면 다죽리 "다원마을은 죽서와 죽동마을로 구분된다"

죽서마을은 일직(안동)손씨 문중이 집성촌을 이루고

죽동마을은 밀양(밀성)손씨 문중이 집성촌을 이룬다.

 

실혜산(實惠山) 아래 살기좋은 다원 마을

일직(안동)손씨 집성촌과 문화유적

 

혜산서원(惠山書院) 경역의 가장 엄숙한 공간인 숭덕사(崇德祠)

선조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이다.

신성한 공간이므로 마당에 잔디를 심거나 포장을 하지 않고 자연 흙 그대로다.

 

격재(格齋) 손조서(孫肇瑞) 先生신도비(神道碑)

 

경상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일직손씨 혜산서원

 

밀양에서 가장 오래된 600여 년의 수령 차나무

일직(안동)손씨 모든 분들은 아마도 이 차나무를 보면서 자랐을 것이다.

타지의 역사문화 탐방 단체에서 혜산서원을 자주 답사를 온다.

다원서당

 

 

獨立義士 成河 孫庚憲 先生 事跡碑

 

다원마을 원경

지경 손흥수 선생과 함께 몇 년전에 호두산성 터(유허)에 올라 조사하면서 바라본 다원마을 원경

다원마을은 밀양시시 산외면 사무소 소재지이다.

 


11. 스승, 조선 후기 말 대학자 錦洲 허 채 先生과 그의 글씨

 

 

조선 후기 말 학자 錦洲 허 채 先生 글씨 (1859~1935)乙未年 12月12日 1895年

금주(錦洲) 先生(1859∼1935)은 조선후기의 유명하신 학자.

그의 문하생들이 생전에 스승을 흠모하면서 많은 편지를 보냈는데 바로 그 분의 문하생이었던 甘泳生.

 

 


12. 스승 錦洲 허 채 선생에게 보낸 친필 편지

 

 

금주(錦洲) 先生(1859∼1935)은 조선후기의 유명하신 학자,
그의 문하생들이 생전에 스승을 흠모하면서 많은 편지를 보냈는데
바로 그 분의 문하생이었던 甘泳生. 그리고 이 편지.甲戌年 (1934年)

 

 

 

13. 甘泳生 친필 편지

 

 

회산 감씨,삼열공파 36세손(1914.4.14~1950.7.24)사진(우)

이 친필 편지는 甲戌年 7월25일(1934) 쓰신 것이다.

21세(회산 감씨 족보 2009년 8월30일 발행본.제2편 63쪽)

족보에 등재시 生死가 不明하고 돌아가신 날을 몰라 집에서 마지막으로 나가신 날을 돌아가셨다고 기록하였으나

2014년 4월에야 1950년 7월24일, 음,6.10(월) 마산 구산면 괭이바다에서 원통하게 이승만에 의해 학살되심을 알아냄.

 

 

 

 

 

 

 

14. 祖父 甘泳生이 쓰시던 벼루

 

벼루 크기

가로 14cm× 세로 21cm× 두께 3.5cm

벼루 보관함 (오동나무,옻칠)

가로 18.5cm×28cm ×두께 6cm

벼루 뒷면에는 단기 4240년 1907년이라 송곳같은 것으로 긁어 쓴 글이 있다.(할아버지의 필체로 추정)

당시 쌀 2섬(80kg×4가마니)을 주고 산 질이 아주 좋은 것이라 한다.

1907년이라면 할아버지가 태어나기 전이어서 당시 증조부가 사신거냐고 하자 분명 <할아버지>라고 하였다.

어쩌면 증조할머니가 고조할아버지가 이 벼루를 샀느냐고 묻는 걸로 착각해 <할아버지>라고 했을 수도 있는데

왜 벼루 밑에다가 1907년이라고 단기까지 정확하게 적어두었는지는 모른다.

 

여러 각도로 생각하면서 이 벼루의 제작시기를 할아버지가 적어둔 것게 아닌가 추정도 해보았지만 그건 좀 아닌거 같다.

적어도 110년 이상을 쓴 것으로 보며 1965년이라고 나무 케이스에 쓴 글은 아버지의 필체로 추정된다.

오동나무로 만들어졌는데 나무 케이스가 낡아 새로 짜서 옻칠한 거라고 들었다.

이 벼루의 특징은 다른 벼루보다 확실히 면이 상당히 부드럽고 먹물이 잘 마르지 않는데

다른 벼루하고는 확실히 특이하고 질이 아주 뛰어난 벼루이다.

아홉살 때부터 내가 붓글씨에 취미가 있었고 늘 학교에 가지고 다니며 이 벼루를 사용했다.

출가후 속가에 처음 갔을 때 이 벼루를 달라고하여 내가 소장하게 된 것이다.

할아버지는 초서를 잘 쓰셨으며 神筆이었다. 또 영어 일어 쓴 것을 본 적 있는데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의

놀라운 글씨였다. 그리고 주역을 초서로, 세필(細筆)로 한 권을 쭈욱 쉬지않고 달아 쓴 것을 보았는데

그것은 과연 神筆이 확실하였다.

할아버지는 놀라운 神童이었는데 5개 국어에 능통하였다.

나는 이 벼루를 볼 때마다, 여기에 먹을 갈 때마다 여기에 먹을 갈고 있는 고조부 고조모 증조부 증조모

그리고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큰고모 작은 고모 작은 아버지 오빠, 남동생, 그리고 나의 어린 시절을 생각한다.

13살때 세상을 떠난 나와 우애가 남달랐던 남동생이 자기 이름을 벼루 케이스에 연필로 써둔 것을 발견하고

어찌나 반갑던지 동생을 만난듯이 눈물을 글썽이며 어루만지고 또 어루만졌다.

훗날 좋은 날이 오거든 이 벼루는 길이 보존하고 싶다.

文集에 할아버지의 이 벼루도 실어 세상에 알리게 되어 너무 기쁘다.

언젠가 내가 이 세상을 떠날 즈음 마땅한 곳에 기증을 하여 오래도록 할아버지의 기록물로

남기고 싶으며 그럴 생각이다. 아버지가 살림을 다 날리고 유품등을 전혀 챙기지 않아 여기저기

흩어졌는데 이 벼루를 만약 내가 30년전에 챙기지 않았다면 이것도 없어졌고 여기에 실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 때 챙기길 정말 잘 했다는 생각을 이 벼루를 볼 때마다 한다.

 

 

 

 

 

 

 

 

 

 

 

 

 

 

 

 

15. 甘泳生의 단발(斷髮)前 사진

 

 

 

내가 10살쯤 이 사진을 처음 보고 이 분들이 누구냐고 했더니 세번째가 할아버지라고 하였다.

아주 눈이 동그레가지고 신기해하며 아무리 봐도 아닌거 같다고 했더니 할아버지가 상투를 자르고

단발(斷髮)을 하기 바로 직전이며 나이는 스물 갓 넘은 나이쯤이라고 하였으니 1934년~5년경으로 추청한다.

 

같이 사진을 찍은 이 분들은 당시 할아버지와 친하게 교류하셨던 분이라고 들었으므로

짐작컨대 스승 錦洲 허채 선생의 문하생들일거라고 보며 사진 촬영지가 우리집 대문 앞 같기도 한데

당시 어른들 말씀으로는 모여서 공부하던 향교 앞이 아닐까 하였다.

할아버지는 외동이라 4살 연상의 할머니와 14살(1927년)에 早婚, 15살에 첫 아들을 낳았다.

또래아이들은 골목길에서 머리를 닿아내리고 놀았는데 장가를 가고 다른 아이보다는 훨등하게

키도 크고 정신적으로 조숙은 했으나 아이는 아이.

 

골목길에서 또래의 아이들과 있을 때 아들이 자박 자박 걸어와
"아부지, 아부지" 라고 불렀는데 그 때 가만히 아이를 붙들고 엿을 쥐어주며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한다.
"아무꺼씨야, 맛있는 이 엿을 줄테니 아부지라 부르지 말고 형이라고 불러다오" (笑)

팔이 다른 사람들보다 길었다고 하였는데 사진을 보면 팔이 긴 것을 알 수 있다.
당시에 옆에 분처럼 정자관을 쓰고 상당히 잘 찍은 스냅사진들이 앨범에 꽉 차 있었는데

모두 할아버지가 직접 촬영한 것이라 하였다.
할아버지는 사진을 상당히 잘 찍으셨는데 그것은 아버지도 나도 마찬가지이다.
나도 팔이 다리가 체격보다 길다는 소리를 들어 할아버지를 닮았다는 말을 들었다.

 

사진/ 왼쪽에서 세번째. 甘泳生(1934~5년경)21~22세

16. 제적부 고조부까지 표기된 것

 

 


 

17. 비밀 의열단원(秘密 義烈團員) 감영생(甘泳生)

 

일제(日帝)에 항거(抗拒)한 비밀 의열단원 감영생(甘泳生)은 어떤 인물인가?

일제에 항거한 사실이 확인되고 드러난 여러 독립운동가를 추모하고 그 뜻을 기리는 것은

민족과 국민된 도리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은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일제의 땅에서 목숨바쳐 독립운동하고

거부(巨富)의 재산 다 바쳐 독립운동한 분의, 해방된 조국에서 민주구국항쟁을 하다가

참혹하게 타살된 사실을 명예회복을 시키고 더 나아가 독립운동의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민족과 나라의 중차대한 책임이라 생각합니다.

1. 출생일 : 1914. 음 4. 14

2. 출생지 : 경남 밀양시 상남면 동산리 세천동 중마(안마)

3. 부 모 : 父 감호현(甘豪鉉), 母 손기수(孫基洙 : 昐男)

4. 형 제 : 외동아들, 20살아래 여동생이 있었으나 5살때 사망.

5. 자 녀 : 4남 4녀6. 집안 배경:대지주 만석군 집안

불쌍하고 가난한 소작인들에게 땅문서 돌려서 해준 보기드문 인물.

7. 성장 배경, 7세 : 향교 백일장에 장원을 할 정도로 신동(神童)

8. 학력 : 조선말기 대학자 단주 허 채 선생 문하생.일본국 사립명문인 와세다대학 정치학부에서 정치학 공부,

수석 졸업,지식인.

9. 외국어 능력 : 일어, 영어, 불어, 독어, 중국어 능통.

10. 독립운동

밀양의 대지주의 아들로서 독립투사 약산 김원봉(若山 金元鳳, 1898~1958)장군에게 막대한 독립운동 자금 조달

11. 구국 투쟁(항쟁) 참여

1945년 : 해방과 동시에 이승만 정권과 미군정(美軍政)으로 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구국항쟁 발생

1948. 2. 7 : 일본 유학생 출신 위주로 구국 항쟁 발생

감영생 구국 항쟁(투쟁) 참여

- 1948. 2. 7 : 고향에서 한학을 가르치던 중에 밀양경찰서에 끌려감

- 2.7 구국투쟁으로 전국적으로 18,478명 끌려가고, 2,200명 미군정청 포고령 위반으로 재판 회부

- 감영생도 재판 회부, 2.7 구국투쟁 주동자 발설토록 회유당했으나,거절함,.

1948. 8. 22 : 미군정 포고령 위반죄로 5년형 구형, 마산형무소 수감

1950. 6. 25 : 한국전쟁 발발후, 며칠 지나서 마산형무소 수감자 전원 실종

- 감영생 자녀 2남 2녀가 실종된 부친 찾기 시작.

- 1950. 7. 24 : 다른 이감자 230명과 함께 마산 육군헌병대 이감 사실 확인

- 마산 육군헌병대에서 어디론가 끌려가 집단 학살 당했음을 추측.

- 정부에서 60여년간 집단학살 은폐.

2009 : 감영생을 포함한 끌려간 사람 전원 집단 학살되었음을 확인

끌려간 장소 : 마산 괭이바다

끌려간 시기 : 한여름 야밤중

학살 상태 : 산 채로 줄에 묶이고 다리에 돌을 달아 수장 및 총살당함.

유족이 "감영생이 국가로부터 학살당한 사실을 확인받고, 결정문"을 받아냄.

2012 : 현재 국가를 상대로 소송중임

출처 : 다음 >블로그 >깊은 산속 옹달샘

(조봉암과 1950년대. 下卷. 역비한국학 연구총서16/ 역사비평사 서중석 책중에서 일부 발췌)

18. 감영생과 약산 김원봉 장군

 

 

1950.7.24. 리승만, 미군정이 바로 이곳에서 비밀의열단원이자 약산 김원봉 장군에게 거금의 독립자금을 대고

독립운동 했었던 할아버지와 1,681명(200명은 할아버지를 따르던 분들)을 빨갱이로 몰아 야밤에 두 눈 가리고

두 손 두 발 꽁꽁 묶고 알몸으로 두 발에 돌덩거리달아 산 채로 바다에 밀어넣고 기관총 난사를 했고 거기다

확인사살하며 웃었다는 마산 구산면 괭이바다이다.

 

1948.8.22. 이 날 할아버지가 체포되신 것으로 확인한 바 약산 김원봉 장군의 형제들 6명이

참변 당했다는 8월중순이 바로 8.22일 것이다.

 

나도 자료로 이 글을 본 적 있으며 그 살아남은 막내 여동생의 증언글도

본 적이 있다. 어릴적부터 하도 약산 김원봉 장군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어왔고 이 건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여러 자료를 훑다보니 내가 들어왔던 것과 모두 일치하여 너무 놀랐다.

 

어른들 말씀으로 애국자들이 세월을 잘못 만나 거꾸로 역적이 되어 아까운

큰 인물들이 참변을 당하고 집안이 망가가 되고 재산은 흩어지게 되어

만고의 큰 슬픔이다라고 장탄식을 하셨다.

 

몽양 여운형 선생과 조만식 선생, 김 구 주석과 교류가 많으셨다하며 그 분들은 연하의

할아버지에게 <감 선생>이라고 하셨다고 한다.

해방되고 당시 독립투사들이 월북을 하고 사회주의쪽으로 눈을 많이 돌린 것은 이념보다는 친일파때문이기도 했다.

 

김원봉 장군이 친일악질경찰 노덕술에게 해방후 경찰에 끌려가 따귀를 여러차례나 맞는 등 심한 모독을 당하고

독립군들을 다 죽이고 가족마저 몰살하자 월북, 그 때문에 형제들이 도륙 당했다.

어릴 때 어른들 말씀으로 약산 김원봉 장군 집이나 우리 집이나 모두 똑같이 낭가가 되었다고 들었다.

 

비밀의열단원이자 독립자금을 대던 할아버지는 당시 중학생인 큰 딸을 데리고 백두산 천지에 올랐으며

약산 김원봉 장군,독립군들과 함께 그곳에 태극기를 꼽았다. 큰고모는 독립군들에게 아버지의 편지 심부름을 한 죄로

빨갱이로 몰려 보도연맹명단에 올랐다가 학살을 당할 뻔했으나 아버지의 편지 심부름만을 했을 뿐이니

딸아이는 거기서 빼라고 할아버지가 이야기하여 구사일생으로 살렸다.

 

그러나 먼 훗날 새 날, 새 세상이 오면 너희 할아버지는 다시 재조명되고 알아줄 때가 있게 될 것이다고 하셨다

새 날 새 시대가 열리는 하늘을 볼 때,그 때가 바로 지금이라고 생각한다.

뿌옇게 동이 트기 바로 직전.여명의 그 시퍼런 아침 말이다.

약산 김원봉 장군.

<가면권력> 69~70쪽. 한성훈.

 

 

마산 구산면 괭이바다.

19. 독립운동가 감영생(甘泳生) 선생의 고향

출처, 밀양광장 도재국

 

 

 

20. 해방후 1948년 2.7구국항쟁 당시의 우리나라 정치 상황

 

제주도 4.3의 정치적 배경
제 1절 5.10선거 결정전까지의 일반적 정치상황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항복이 발표되자 여운형,안재홍 등은 1944년 이미 조직되어 있었던 항일 비밀결사인

건국동맹을 모태로하여 건국준비위원회를 수립하고 신속하게 전국적인 통치조직을 건설해 나갔다.

이 결과 8월말까지 건준은 전국 각지에 145개의 인민위원회를 설치하고 초기의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된다.

 

건준의 이러한 활동에 대하여 국내 우익은 건준을 용공시하여 참여하지 않았고 또한 임정봉대론을 명분으로 하여

미군의 진주시까지 사태를 관망함으로 건준의 초기 정국의 주도권은 강화되어 나갔는데

이러한 상황은 미군의 진주가 알려지고 또 미군의 진주함으로써 반전되어 가기 시작한다.

미군의 진주가 알려지자 건준은 9월 6일 전국인민대표자대회를 개최하고 사실상의 정부라고 할 조선인민공화국을

수립함으로써 이를 기정사실로하여 미군을 맞으려는 노력을 명백히 하였다.

좌익계의 이러한 움직임에 대하여 국내 우익은 미군의 진주가 알려지자 비로소 조직결성에 착수하여

힘을 규합해 나갔고, 9월 8일 미군의 진주와 때를 맞추어 ‘인공타도’라는 팜플렛을 제작하여

서울시내에 살포함으로써 인공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였으며마침내 9월 16일에는 한민당을 창당하였다.

미군의 한반도 진주는 9월 8일 하지의 제 24군단의 인천 상륙을 시발로하여 시작되었다.

미군은 진주 이전부터 9월 2일 “민중에 대한 포고 및 제 명령은 현존하는 제 관청을 통하여 공포된다.”는

하지의 포고문을 살포하여 일제의 식민통치 기구의 존속을 당연시하였고 이러한 입장은 9월 9일 발포된

맥아더의 포고 제 1호를 통하여 확인되었다.

 

특히 미군정장관 아놀드는 “현재의 경찰조직은 그것이 한국인에 의해 대체될 때까지 계속 유지될 것”이라고

발표함으로써 한국이 ‘점령국’이 아니라 ‘해방국’이라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

이러한 사정은 미군 진주 당시의 모습을 통해서도 투시되고 있는 바 미군은 인천 상륙 당일에

미군 환영대회에 나갔던 조선인들을 학살한 일본군의 행위는 묵인했고 서울 진주시에도 조선인에 대한

멸시와 적의를 숨기려 하지 않았다. 미군의 당시의 서울 진주 모습을 한 목격자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나는 미군이 9월 9일 서울에 들어왔을 때 그 모습을 보기 위하여 서울시청 앞까지 나갔는데

한국인을 보는 미군의 눈은 멸시와 적개심으로 가득차 있었다.

나는 이러한 미군의 모습을 보고 끓어 오르는 모욕감을 참으며 생각하였다.

‘이러한 미군의 자세는 전쟁 중에 적국에 상륙한 군대의 모습과 조금도 다를 바 없지 않은가!

한국 민중은 미군을 적으로 보고 있지 않은데 왜 그들은 우리들을 마치 적을 보는 것처럼 하는가!

금방이라도 우리들에게 달려들어 총검으로 찌를듯한 자세가 해방자의 모습이란 말인가!

결국 미군은 해방자로서 (한국을)점령하여 일제의 식민통치기구를 합법적 통치기구로 온존시키려고 시도함으로써

해방된 한민족의 감정과 의사를 무시하려 했으며 동시에 9월 20일 “군정청은 남한에 있어서 유일한 정부”라고

선언하여 인공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어느 것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그 결과 인공과 적대관계에 있고

부일요소가 있다고 지탄받던 한민당과 미군정과의 제휴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은 우연히 이루어졌던 것일까?

어느 연구가의 평가와 같이 미군은 한국의 점령에 있어서 어떤 특정한 이기적인 목적도 가지지 않았으며

정책도 갖지 못했었고 그 결과 우연히 그리고 별 고려없이 이러한 역사적 과정이 출현하였던 것일까?

제 2차 세계대전 후의 미국의 대외정책, 특히 대아시아정책에 관한 한 연구는 이것을 부인한다.

 

즉 제 2차 세계대전 후의 미국의 아시아 점령정책은 기존의 반식민지 해방운동체의 셩격에 대한 정보분석에

기초하여 보수적 민족주의 세력이 우세한 곳에서는 반식민주의 입장을 취했고 독립에 찬성했으나

좌익이 우세한 곳에서는 ‘신탁통치’나 혹은 식민주의의 ‘해방된’계속 유지를 하는 것이었다.

한국에 대한 미군정의 정보는 일본의 패퇴와 더불어 이미 조직되어 있던 지하정부구조 (인민위원회, 즉 건준)가

손쉽게 권력을 인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었고 또한 일본인 및 한국인 지주에 의한 강탈적인

토지소유제에 대해 언급하면서 미국무차관 그류는 전쟁의 종결로 한국의 소농계층은 전면적인

토지개혁을 기대할 것이며 일반적으로 말해서 “한국의 경제적, 정치적 상황은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채택하기 쉬울 것이다”라고 평가하고 있었다.

 

결국 이와 같은 상황에서 미국의 대한반도정책은 일제 식민통치기구를 온존시키는 방향으로의

식민주의의 ‘해방된’ 계속 유지에 일차적으로 두어질 수 밖에 없었으나 이것은 한민족의 격렬한 저항을

필연적으로 야기할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미국은 한국의 토착 좌파를 분쇄하여 한국에

“공산주의에 대한 방벽을 구축”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전환해 나갔고 동시에 카이로선언 이래

미국의 일관된 대한반도 문제해결 방식이었던 신탁통치안을 제기하게 된다.

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에 모인 미국, 영구, 소련의 삼국 외상은 이후 한국의 정치상황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 다음과 같은 요지의 한국에 관한 결정서에 합의한다.

1) 한국민주임시정부를 수립한다.

2) 한국민주임시정부의 수립을 원조하기 위해 미.소 점령군 사령부의 대표들로 구성되는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한다.

이 위원회는 그 제안 작성에 있어 한국의 민주주의 정당 및 사회단체와 협의하여야 한다.

3) 한국민주임시정부와 민주주의 단체의 참여하에서 작성된 공동위원회의 제안은 최고 5년 기한으로

4국 신탁통치의 협약을 작성하기 위하여 미, 영, 소, 중 정부가 공동 참작할 수 있도록 한국민주임시정부와

협의한 후 제출되어야 한다.

4) 한국에 관련된 긴급한 제 문제를 고려하기 위하여 미.소 점령군 사령부 대표로 구성되는 회의를 2주 안에 개최한다.

한국에 관한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결정이 알려지자 한국의 정국은 이 문제를 둘러싸고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김구 중심의 임정 세력은 모스크바삼상회의의 결정에 대하여 즉각적인 반발을 보이면서 전투적인 반탁시위를 주도해 나갔다. 임정세력은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 위원회’를 구성하고 반탁시위를 주도하고

경찰기구를 포함한 미군정기구들을 임정이 접수하겠다는 격렬한 내용의 임정 포고문을 발표함으로써

미군정과 임정 사이에는 심각한 갈등상태가 전개되었다.

이승만과 한민당 세력의 반탁운동은 신중하고도 조심스러운 것이었다.

 

그들은 반탁운동을 이미지 쇄신의 기회로 삼고 김구와 제유하였으나 김구가 ‘반탁’의 민족주의적 계기에

역점을 둔데 대하여 이승만은 미.소 냉전의 전망을 선취하여 어디까지나 반공을 기본으로 해서

신탁통치를 반대했던 것으로 이승만의 이러한 입장은 좌익계가 반탁 의사를 급작스럽게 철회함으로써 강화되었다.

 

좌익계는 처음 반탁의사를 명백히 했으나 46년 1월 3일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지지를 위한 시민대회’를 개최하여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총체적 지지’를 표명하였다.

그들은 신탁통치는 한국의 즉시 독립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나 4국의 보호하에 들어감으로써

식민지화의 위험이 제거된다고 강조하면서 소련 점령당국이 공포한 이른바 ‘후견제’의 논리로

민중을 설득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좌익계의 이러한 방향전환은 결국 반탁과 반공, 반소가 동일시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즉 미군정은 반탁운동에 나타난 민중의 지지에 착안하여 그 반공 이데올로기의 유효성을 충분히 이용하면서

우파의 반탁운동을 묵인했고 결과적으로 김구 중심의 전투적인 반탁세력의 에네르기는

미군정과 이승만의 반공노선에 흡수되어 좌익계를 공격하는데 이용되었던 것이다.

신탁통치안을 둘러싸고 좌.우익 세력이 ‘비상국민회의’와 ‘민주주의민족전선’으로 개편되면서

첨예하게 대립되어 가고 있을 때 개최된 미.소 공동위원회의 예비회담 (1946.3.20 ~ 5.8)와

제 2차 미.소공동위원회(1947.5.21 ~ 8.12)도 결국은 미.소공동위원회에 참가할 한국의 정당 및

사회단체의 자격문제 및 문제의 접근방식의 차이로 결렬되고 만다.

 

이 문제에 대한 소련의 일관된 입장은 반탁세력을 한국민주임시정부의 수립에서 배제시키고

한국민주임시정부의 수립을 최우선시하여 경제와 행정의 통일을 뒤로 미루는 정치 우선적인

접근방식이었음에 반하여, 미국의 일관된 입장은 소수파(결국 좌익세력)에 의한 한국지배를 방지하고

한국민주임시정부의 수립에 앞서 경제와 행정의 통합을 우선시하는 것이었다.

미.소공동위원회의 실패는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을 달성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놀라은 것이 못된다.

볼이 지적한 바와 같이, “미국은 소련에게 우호적인 정부의 수립을 기어코 봉쇄하려고 하였고

소련 역시 미국에게 우호적인 정부의 수립을 철저히 저지하려 한데서 결렬된 것”이었다.

더구나 남.북한의 분리발전 및 국제정치상의 냉전의 시작은 미.소공동위원회의 장래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였다.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은 미국의 대한반도정책에 전술상의 변화를 야기하였다.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뒤인 46년 5월 24일 미군정 정치고문 랭던은 미국무장관에게

“소련은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 루마니아에서 통일전선정책과 다를 뿐인 정책을

한국에서 강행할 위도임이 너무나 뚜렷하다.

만일 우리가 그러한 정책을 수락하지 않을 수 없게 되면 분명히 한반도 전역에 대한 소련의 지배를

촉진시키고 용이하게 만드는 결과가 될 것이다.”라고 보고했으며 5월 25일 미국무장관은

이에 랭던에게 보내는 전문에서 “미.소공동위원회가 재개되지 않으면 미국인은 남한에

단독정부의 수립을 추진해야한다.”는 하지의 정치고문 굳펠로우의 주장에 대한 논평을 요구함으로써

신탁통치안을 재고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전술상의 변화는 “공산주의에 대한 방벽을 구축”한다는 미군정의 대한반도 정책의 전략상의

원칙을 확인하는 것이었으며, 이것은 결국 좌익계에 대한 철저한 공격으로 연결되었다.

미군정은 반탁운동의 분위기에 편승한 반공노선의 확산에 힘입어 제 1차 미.소 공동위원회를 전후한 시기에

우익강화와 좌익계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미군정은 국제적 위임사항이 아니었으며

상부의 어떠한 동의도 없이 또 군의 창설이 소련을 자극하리라는 경고에도 불고하고 38선 방어와

소요 진압을 위한 건군사업을 계획.추진하여 마침내 1946년 1월 15일 남조선국방경비대를 창설하여

일본군의 배경을 가진 장교들을 주축으로 운영해 나갔다.

 

이와같은 우익강화작업과 함께 미군정은 좌익계의 약화를 시도해 나갔다.

미군정은 46년 2월 23일 정당의 비밀활동을 규제하려는 의도가 숨겨진 ‘정당등록법’을 발표하여

좌익계 정당들에게 커다란 타격을 가했으며 제 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직후부터는

좌익에 대한 공격을 감추려 하지 않았다.

 

특히 미군정은 46년 5월 조선정판사사건을 계기로 하여 건물들을 철저히 수색함과 동시에

9월초 박헌영, 이주하, 이강국등의 조선 공산당 지도자들에 대한 체포명령을 내렸고

또한 9월 7일 ‘조선인민보’, ‘중앙신문’과 ‘해방일보’ 및 여타 좌익계 신문들을

‘선동적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폐간하였다.

 

47년에 접어들자 미군정의 좌익계에 대한 공격은 더욱 가열되기 시작하여 경찰에 의한

직접공격 뿐만 아니라 경찰의 지원을 받는 우익테러집단의 좌익계에 대한 테러가 공공연히 자행되었다.
미군정의 전면적인 공격에 대응하여 좌익계는 46년 7월 소위 “정당방위의 역공세”를 주장하는 신전술을

채택하여 반격을 준비하였고, 이러한 때에 발생한 ‘9월총파업’과 이에서 발전한

‘10월인민항쟁’을 통하여 그들의 힘을 과시했다.

 

9월 24일 서울을 비롯한 전 철도종업원 4만명의 총파업으로부터 시작된 이 일련의 좌익계의 투쟁은

남한 전역의 73개 시군에 파급되어, 연인원 110만명이 참가하여 최고 1,000명이 사망하였고

16,000여명이 부상, 12,000여명이 체포되었던 해방후 가장 대규모의 대중투쟁이었다.

 

이 일련의 대중투쟁은 미군정에 가해진 최초의 충격으로서 그 과정을 통하여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친

미군정의 실정이 부각되었으나, 한편으로는 우익 특히 경찰세력의 강화를 촉진하여 인민위원회와

그 관련 단체의 몰락을 야기한 결과를 초래하였다. 특히 이 사건의 진압과정에서는 경찰의 야만성이

부각되고 있었는데 미군정 문서는 “봉기가 진행되는 동안 수많은 만행이 경찰에 의해 저질러졌다.”고

기록하여 경찰의 야만성과 폭력성을 비판하였다고 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하여 1946년 말에는 미군정과 좌익계의 관계가 두드러지게 적대적으로 되었다.

좌익계는 남조선노동당을 결성하여 조직을 정비한 다음 47년을 맞이하고 이후

‘국대안반대투쟁’, ‘3.1시위사건’, ‘3.22파업’, ‘7.27대회’등을 통하여 미군정에 저항해 감으로써

미군정과 좌익계는 이제 더 이상 화해할 수 없음을 보여 주었다.

46년과 47년에 걸치 좌익계의 대미군정 투쟁을 살펴볼 때, 우리는 그들이 준비가 없는 무모한 도발로

세력의 약화를 자초했으나, 여전히 전면적인 무장투쟁의 준비는 미처 안되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그들의 주장도 “권력을 인민위원회로 돌리라”는 정치적 요구가 투쟁목표 핵심으로

“미제 축축”의 주장은 전면에 부각되지 않고 있었다.

제 2절 5.10선거 결정전까지의 제주도 정치상황

일제의 항복이 발표되자 제주도민은 패전군임을 망각한듯한 일본군에 의해 여전히 자행되고 있었던 위

압적이고 폭력적인 행위를 극복하면서 제주도의 건준 및 인민위원회의 결성에 착수하였다.

45년 9월 10일 도민은 자주적으로 조직되고 있던 청년대, 보안대 및 관공서, 기업체, 학교 등의

‘...관리위원회’, ‘...복구위원회’ 등을 모태로 오대진을 위원장으로 한 제주도 건준을 결성하여

미군정의 탐사팀으로 제주도에 파견된 미군정 사법부요원 에모리 우달 및 당시 도사(대리) 치오타와

일본군 제 58군 사령관 가쓰키를 만나 다음의 3개항을 요구하였다.

1)치안유지와 건국사업을 위한 정치활동에 절대로 간섭과 방해를 말 것
2)일본군과 경관을 즉시 무장 해제할 것
3)행정을 건준이 도.읍.면의 결성과 함께 양도할 것

이러한 도민의 요구에 대하여 미군정은 일본군의 항복만 받고 본토로 귀환함으로써 도민의 요구를 묵살했고

일본군 또한 “미군의 도 군정장관이 부임하지 않았다.”는 등의 이유로 도민의 요구를 거절하고

오히려 도민을 위협, 공갈하여 건준을 파괴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일본군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도민은 9월 15일에는 제주읍 인민위원회를, 그리고 9월 22일에는

제주도 인민위원회를 결성하여 “조국의 자주 통일 독립과 민족의 완전 해방을 위하여 투쟁할 것과

일제의 잔재세력과 국제 파시스트 주구를 청산하여 민족의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할 것”이라는

기본 정책노선을 채택하여 도민의 지지를 호소하였다.

동시에 인민위원회는 산하단체의 조직에 착수하여 9월 하순에 청년, 부녀자, 교육자, 노동자,

문화인의 전도적 통일기구로 청년동맹 제주도위원회를 조직하고 여기에 이어 부녀자동맹, 교육자동맹,

노동조합, 소비조합, 제주문화협회를 조직하였다. 한편 이 해 12월 9일에는 조선공산당 제주도위원회가 조직되었다.

제주도 인민위원회는 이 당시 일본군의 간섭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제주도 전역을 지배한 도내의 자치행정기구로서

제주도의 유일한 정당. 즉 유일한 ‘정부’였으며 또한 출발초부터 전라남도에 속박됨이 없이 독립적으로 기능하였다.

인민위원회는 상대적으로 온건한 정책을 실시함으로써 도민의 적극적 지지를 얻을 수가 있었다.

 

인민위원회는 학습회, 강연회, 웅변회, 체육대회, 연예대회 등 계몽활동을 통해서 도민 속에 파고 들었고

국민학교와 중학교를 통제하고 있었으며, 제주도내에 유일한 신문인 ‘제주민보’를 간행하였다.

이 결과 제주도는 1945년 ~ 1946년 사이에 인민위원회의 완전한 통제하에 있었다.

미군의 제주도 진주는 9월 28일에 이루어졌다.

라우렐 대령이 이끄는 미군 1개 연대 병력은 10대의 군용기와 2척의 LST함정편에 분승하여

제주비행장과 산지부두를 통하여 제주도에 도착한 다음 일본군의 무장해제와 일본군과 민간인의

본국 귀환작업에 착수하였다. 동시에 미군은 도착 다음날부터 제주도 미군정청을 설치하여

군정관에 스타우드 소령을 임영하고 제주도 통치기구를 확립해 나갔다.

 

미군정청은 김누희를 도사대리로 임명하여 제주도청을 재조직하였고 감찰청(청장 김대봉) 및

제주경찰서 (서장 강동효)와 22개의 경찰서를 발족시켰으며 제주지방법원 (법원장 최원순)과

제주지방검찰청 (검찰청장 박종훈)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미군정은 한때나마 일본 경찰을 미군정의 경찰로 온존시키려는 결정적인 실수를 범하였고

또한 각 통치기구의 우두머리들은 모두 친일생각으로 비난받고 있었던 자였다고 한다.

결국 미군은 친일분자를 축으로 권력기구를 지탱하는 기반을 구축하고 그 통치기구를 확립하려고 시도했던 것이다.

 

그러나 미군정의 이러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기구들은 당시의 제주도 인민위원회의 활동을

능가하지도 못하였고 그것을 제어하기에도 역부족이었으며 따라서 미군정은 일본군 및 민간인을

본국으로 귀환시키는 일밖에 하지 못했다고 한다.

미군정이 제주도에 대한 본격적인 점령정책은 11월 10일 미군 제 6사단 20연대가 제주도에 도착함으로써 개시되었다.

그 후 곧바로 제 59군정 중대가 도착했지만 인원이 부족하여 통치업무를 수행하지 못하였고

이에 제주도의 우익은 “경찰과 미군정이 인민위원회를 탄압하기 위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다”고 불평했다.

 

미군정의 이러한 한계는 제주도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미군정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는 이유 외에

당시 제주도에서의 힘의 관계를 평가한 결과일 것이다. 미군정 자신이 이야기하고 있듯이

제주도 인민위원회는 강했고 숫적으로 우세했으며 온건한 정책을 실시하였기 때문에 도민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사실상의 정부 역할을 수행했고, 따라서 미군정은 그것을 지지하여 제주도를

통치할 방도 외에는 뚜렷한 대안을 가질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앞에서 살펴 보았듯이, 미국의 대한반도정책의 궁극적 목표는

“공산주의에 대한 방벽을 구축”하는 것이었으며 이것은 제주도에서도 예외일 수 없었다.

따라서 미국은 차츰 좌익계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우익의 우세를 보장하는 방향으로 제주도 점령정책을

전환시켜 나갔으며, 이때 발생한 ‘한라단사건’은 미군정의 그러한 시도의 관철을 평가하는 시금석이 되었다.

원래 한라단은 제주도 건준 산하의 보안대의 횡포를 견제하고 친일파 타도,반공사상 계몽활동을 목적으로

김태륜, 김기오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우익단체였다.

사건의 시발은 한라단이 제주도 인민위원회를 습격함으로써 이루어졌다.

이에 제주도 인민위원회는 “한라단을 비롯한 일체의 테러리즘을 배격한다:”는 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도 군정청까지 시위를 감행하여 미군정에 항의하였다.

 

이날 밤 한라단원들은 재차 인민위원회를 습격하였으나 오히려 보안대의 반격을 받고

10명의 한라단원이 포위되어 집단구타를 당하였다.

이 정보를 입수한 미군과 경찰은 인민위원회를 습격하여 보안대원 154명을 체포하고

그들이 소지하였던 무기를 압수하였으며, 시내 일원에 통행금지를 실시하였다.

 

이에 대하여 1,000여명의 도민이 다음날 “미군의 간섭 절대반대”, “피검자 즉시 석방”,

“테러단 즉시 해산”, “민주단체에 대한 탄압 반대”등을 요구하며 관덕정에서 항의시위를 벌이자

미군정은 무력으로 이를 해산하고 전날 체포된 154명에 대한 재판을 개시하여 전원에게

각자 50엔 이상의 벌금형을 언도하였다.

 

이 사건 이후로 미군정은 좌익계에 대하여 공공연한 공격을 시작하여 애월, 한림, 옹포, 금악, 고산, 대정,

중문, 안덕, 서귀, 조천 등지의 인민위원회와 산하단체의 간부들에 대한 자의적인 구금 등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그 탄압은 그렇게 효과적이지 못하였다.

1946년에도 여전히 인민위원회는 제주도를 지배하고 있었고 이에 미군정은 우익 강화책을 펼쳐 나가게 된다.

46년 7월 이후 미군정은 우익단체인 대한독립촉성회, 한국독립당, 비상국민회 등의 제주도지부의 조직을

적극 지원하였고 또한 광복청년회 (후에 대동청년단으로 개편)의 결성을 독려함으로써 우익단체들을 강화해 나간다.

한편 46년 본토에서의 ‘10월항쟁’이후 미군정은 본토에서 경찰과 100여명을 증파하여

경찰조직을 정비, 강화하였고, 그해 11월 16일에는 모슬포의 대촌에서 국방경비대 제 9연대(연대장 장창국)를

창설하였으며 해안경비대를 제주 근해에 배치하여 제주도의 좌익계를 압박하였다.

 

한편 47년 3.1절 시위사건이 발생하자 미군정은 여기에 대응하여 전북에서 100명, 전남에서 200명을

차출하여 제주도에 파견하고, 약 800명의 서북청년단원과 민족청년단원을 파견하여

좌익계에 대한 노골적인 공격을 개시해 나간다.

미군정의 공공연한 공격에 직면한 제주도 좌익계는 46년부터 이에 대항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 당시 미군정의 통치에 대항하는 제주도 좌익계의 저항의 특징은 사실상 제주도 통치경험에서

표출된 자신감, 그리고 정통성의 보유 등으로 인하여 그러한 통치질서를 부인하려는 미군정에 대한

직접적 공격, 즉 반미구호의 공공연한 제기에서 찾아진다.

 

이 점은 당시 전국적 상황에서 보면 인민위원회의 세력이 위축되고 있었던 관계로 그들 투쟁의 핵심구호가

“권력을 인민위원회로 돌리라”는 것에 비추어 볼 때 뚜렷이 부각된다.

46년 1월 버스회사 종업원들이 경제적 요구를 내건 투쟁을 시발로 하여 제주도의 좌익계는

2월 23일 민주주의 민족전선 제주도위원회를 결성하여 조직을 정비,강화해 나갔고

5월 중순 제주시내 중.고등학교 약 1,000여명의 군정청앞 시위 및 하반기의 제주농업중학교와

오현중학교의 동맹휴학을 조직함으로써 미군정에 대하여 그들의 힘을 과시하였는데

당시 이들 학생들의 요구의 핵심은 ‘미제’의 배격과 ‘반공적이며 파쇼적인 미제의 식민지교육’의

반대에 두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제주도의 좌익계와 미군정과의 관계는 그렇게 악화되어 있지는 않았다.

제주도의 좌익계와 미군정의 관계는 그렇게 악화되어 있지는 않았다.

제주도의 좌익계와 미군정의 관계는 제주도 우익이 도민의 독립주의적 심리를 이용한

도제 승격운동이 성공되고 난 후 (1946.8.1)에 급격히 악화되기 시작하였고

47년 3.1절 시위사건이 발생함으로써 더 이상 회복될 수 없게 되었다.

1947년 2월 하순 좌익폭동의 정보가 새어 나오자 제주도 미군정은 직장 단위의 기념식 외에는

일체의 3.1절 경축집회를 금한다고 발표하고 경계태세를 강화했다.

미군정의 이러한 경계태세에도 불구하고 약 2,000명의 학생과 군중은 오현중학교 교정에 모여

3.1절 기념식을 갖고 “미군은 남조선에서 당장 물러가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도민대회장이었던 북국민학교로 행진해 나갔고 이 과정에서 군중의 수는 점점 증가해

약 3,000명의 군중이 북국민학교에서 3.1절 기념식을 개최한 후 가두시위에 돌입하였다.

 

시위대가 관덕정 앞에 이르렀을 때 미군정 경찰은 갑작스런 발포를 하여 민간인 4명을 치사케 하고

수명에게 상해를 가한 후 군중을 무력으로 해산시켰다.

동시에 제주시 경찰서장은 목포의 국립경찰에 100여명의 증원경찰을 요청하여 그날 오후

증원경찰이 파견되어 옴으로써 제주도 경찰력을 보강하고 다음날부터 민전 간부를 비롯한

활동가들에 대한 대규모의 검거에 들어감으로써 제주도의 상황은 긴장되기 시작했다.


제 3절 남로당의 5.10선거 반대투쟁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미국은 9월 17일 한국문제를 제 3차 유엔 총회의 의제로 제출했는데

이는 미국의 카이로선언 이래 계속 추구해 왔던 대한반도정책인 4대국 신탁통치안의

전면적인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미국이 이처럼 한국문제를 유엔 총회에 회부한 이유에는 소련과의 불화라는 결정적 요인 이외에

미국의 국내사정이 있었다. 미국의 합참본부는 안보적 관점에서

“미국은 한국에 현재의 군대와 기지를 유지함에 있어서 거의 전략적 이득이 없다”고 판단하여

주둔군의 철수를 요청하고 있었고 국무성과 의회는 한국에서의 지위를 확보하고 군사정부를 유지함에

필요한 재정적인 지원을 거절하였으며, 게다가 미.소공위원회의 실패 이후 한국인의 반감이 극도로 고조되고 있었다.

 

한국문제를 고려할 때 특히 미국을 가장 괴롭힌 것은 북한의 발전으로서 북한 정권은 거짓이든 참이든 간에

한국인 지도자들이 자기 조국의 통치에 있어서 명목적인 권위 이상의 것을 가지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이러한 때에 한국문제를 유엔 총회에 회부한 미국의 정책입안자들이 유엔을 통한 통일된

민주적 한국정부 수립을 전적으로 기대하고 있었는지는 매우 의심스러운 것으로서

결국 47년 여름과 가을, 한국문제에 대한 미국의 고려는 한국의 독립을 위해 노력한다는 명분을 세우면서

한국문제로부터 빠져 나오려는 일종의 ‘탈한정책’에 있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북한의 독자적 발전에 충격을 받고 있었던 미국은 그들의 ‘기계적 다수’가 확보되어 있는

유엔을 통하여 국제기구의 지원을 받으면서 남한에 북한에 대항할 만한 “공산주의에 대한 방벽을 구축”하려 했고

이는 미국의 세계전략하에서 한반도 반쪽만이라도 그 구도에 짜맞추려는 것을 의미했다.

유엔을 통한 한국의 통일정부의 수립이 불가능하다는 예측은 유엔의 한국문제 토의과정에서 하나의 현실로 나타났다.

미국과 소련은 한국문제의 유엔 이관의 합병성 문제에서 처음부터 대립하였고 한국문제가 총회에서

유엔 정치위원회로 회부된 이후로는 한반도 점령군의 철수문제와 한국 대표의 참석문제를 놓고

또 다시 열띤 논쟁을 전개하였다.

 

미국은 선 정부수립, 후 점령군 철수와 유엔에 참석할 한국 대표의 선출을 위한 유엔 임시위원단의 설치를

요구했으나 소련은 한국문제의 유엔이관이 모스크바협정에 위반된다고 지적하고 동시에 그 불법성을

지적했으며 선 점령군철수, 후 정부수립과 남북한 대표의 동시초청을 우선적으로 내세웠다.

결국 미국의 기계적 다수가 확보되어 있는 유엔은 47년 11월 14일 다음과 같은 요지의 한국문제에 관한

미국측 제안을 가결시켰고 당연히 소련은 이에 협조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력히 선언하였다.

한국문제는 한국인 자신에 관한 문제이고, 한국의 자유와 독립에 관한 문제로써 한국인 대표의

참가 없이는 해결될 수 없으므로

1)본 문제 고려에 참가할 한국인 대표들을 초청할 것.


2)한국인 대표의 참석을 용이하게 하고 또 이 대표들이 한국인에 의해 정당히 선출되었다는 것을

보장하기 위하여 즉시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TCOK)를 창설하여 한국 전토를 여행, 감시,

협의할 권리를 갖고 한국에 주재하게 할 것.

3)UNTCOK은 호주, 캐나다, 중국, 엘살바도르, 프랑스, 인도, 필리핀, 시리아, 우크라이나의 대표로 구성할 것.

4)1948년 3월 31일 이전에 한국에서 UNTCOK의 감시하에 인구비례에 따라 보통선거 원칙과

비밀투표에 의한 총선거를 실시할 것

5)선거 후 가급적 빨리 국회를 소집하고 정부를 수립할 것.

6)한국정부가 수립되는 대로 동정부는 UNTCOK과 협의하여

ㄱ.국방군을 조직할 것

ㄴ.남북한의 군정 당국으로부터 정부 기능을 이양받을 것

ㄷ.가급적 빨리, 가능하면 90일 이내에 양 점령군이 완전 철퇴하도록 양 점령국과 협정을 할 것(이하 줄임)


UNTCOK은 1948년 1월 12일 서울에서 제 1차 회의를 개최하여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소련측의 비협조로 북한에서 그 활동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이 명백해지자

UNTCOK는 치열한 논쟁을 거쳐 유엔 소충회에 자문을 구할 것을 결의하였고 유엔 소총회는

이에 대하여 2월 26일, “한국문제에 관한 1947년 11월 14일의 유엔 총회의 결의와 그 이후의

사태 진전에 비추어 소총회의 견해는 위원단이 접근 가능한 한국의 지역에서 결의

제 2호에 규정된 사항을 실행하는 것이 UNTCOK의 임무라고 간주한다”는 내용의 회신을 보내왔다.

 

유엔 소총회의 이러한 회신에 따라 UNTCOK는 치열한 논쟁 끝에 “1948년 2월 26일 채택한 결의에서

소총회가 표명한 견해에 따라. 선거실시를 감시하며, 동선거는 늦어도 1948년 5월 10일 이전에

실시되어야 한다”는 요지의 결의를 채택하였는데 이는 결국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한국문제가 유엔에 이관되고 그것이 결국은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통한 단정수립을 의미한다는 것이

점차 명백해지자 남한의 정국은 단독선거의 실시라는 쟁점을 놓고 다시 가열되기 시작한다.

UNTCOK보고서는 이 문제를 둘러싼 주요 정치 세력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명료히 요약하고 있다.

1948년 1월 초 위원단의 서울 도착 이후 주요 제 정당의 대위원단 태도는 각양각색이었다.

수개 좌익정당과 극좌정당을 제외한 모든 정당은 각종각색의 어조로 위원단을 환영, 지지한다고 언명하였다.

그러나 위원단이 38이북 선거감시가 불가능할 것이라는 사실이 2월 초까지는 이미 명백히 되고

특히 이에 관한 유엔 소총회의 결정이 발표되자 한독당과 민족자주연맹 소속 정당의 대부분은

위원단의 감시하에 조선의 일부지역에서만 행하게 되는 선거는 이를 반대한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좌익주요 정당 및 사회 제단체는 위원난의 도착 당초부터 조선문제는 조선인 자신에게 맡기라고 주장하였다.

이들 단체의 위원단에 대한 비난의 한가지 특징은 위원단은 미 ‘제국주의’의 충복의 역할을 함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즉 이승만과 한민당, 그리고 북한 피난민을 대표하는 조선민족당은 단독선거를 강력히 지지하였는데

이것은 이승만의 46년 6월 23일 소위 ‘정읍발언’을 통하여 남한 단독정부의 수립을 추진한 인물이고

또한 한민당과 미군정과의 유착관계를 고려할 때 당연한 것이었다.

반면 김구는 처음부터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거부한다는 것을 명백히 하고 있었다.

즉 그는 48년 1월 UNTCOK과의 협의를 마치고 난 다음 “미.소 양군의 철퇴하지 않고 있는

남북의 현재 상태로서는 자유스러운 분위기를 가질 수 없다.

 

양군이 철퇴한 다음 남북요인회담을 하여 선거준비를 한 후 총선거하여 통일정부를

수립하여야 할 것이다.”라고 주장하고, 당일 UNTCOK에 제출한 의견서를 통해서도 점령군의 즉시 철퇴와

‘남북 한인 지도자회의’의 소집을 통한 통일정부의 수립을 주장하였다.

김구의 이러한 일관된 주장에 비하여 김규식은 처음 약간 애매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즉 그는 48년 1월 27일 UNTCOK과의 협의를 마치고 난 다음 “유엔이 이것(단정)을 주장한다면

한국의 북반을 영원히 타국의 위성국화 내지 연방화가 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도 동시에

“북한까지 합칠 고려가 있어 2/3이상의 인구를 가진 남한에 중앙정부로서 유엔에서 승인하고

통합 방도가 있게 된다면 재론할 문제이다”라고 함으로써 오해의 소지를 남기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김규식도 김구와 함께, 단정세력의 격렬한 비난에도 불구하고 조국의 통일을 위한

남북협상의 길로 나서는데 이는 결국 현실정치에서는 정치적 몰락의 길로 향하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한편 남로당의 좌익계는 처음부터 UNTCOK의 목표가 남한에서의 단선 단정수립이라고 규정하고

47년 12월 중순부터 단선 단정 반대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좌익계의 이 당시의 투쟁은 UNTCOK의 불법성을 지적하면서 한국통일 방안으로서

소련안의 채택을 요구하는 정도의 온건한 것이었고, 비록 UNTCOK의 입경 후부터 조금씩 강화되기

시작하였으나 단선에 반대하는 자신들의 전략 및 역량문제에 비추어 비관적으로 평가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박헌영의 총파업에 대한 5개의 지령을 밮표함으로써 반전되기 시작하였다.

박헌영은 이 지령을 통하여 투쟁의 계속을 지시하였고 이러한 박헌영의 지령은 투쟁역량이

현저하게 감소하였으며, UNTCOK과의 협조가 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있던 당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관철되어 결국 좌익계는 ‘2.7구국투쟁’에 돌입하게 되었다.

1948년 2월 7일 전평 산하의 각 노동조합이 주도한 총파업에서 시작된 ‘2.7구국투쟁’은 경인 일대를 위시하여

경상남북도, 전라남북도, 제주도에 이르기까지 거의 전국적인 규모로 파급되었다.

그 결과 각 지역에서는 단선에 반대하는 폭동과 파업이 빈발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합법적 방법과 비합법적 방법을 병용하고 또 노동문제와 정치적 요구를 내포시킨 것으로

공산주의 세력의 토대가 유약하다는 것과 그들에 대한 추종이 적다는 것을 충분히 표시하였다는

하지의 평가에도 불구하고 남로당의 조직역량과 동원역량을 과시하는 계기로 되어

국내외에 걸쳐 단독 정부 수립에 상당한 충격을 주는 요소로 작용하였으며 동시에

5.10선거의 직접적인 방해투쟁의 서곡을 이루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 투쟁의 목표는 제한되어 있었고 특히 미국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은

아직까지도 발견되지 않고 있었다.
좌익계에 의한 5.10선거 반대투쟁은 ‘2.7구국투쟁’을 계기로 록 강도의 차이는 있었으나 속되어 갔다.

 

한때 잠잠했던 좌익계의 공격은 2월말의 2차 총파업을 계기로 재연되었고

5.10선거가 다가옴에 따라 다시 가열되었다.

좌익세력은 당시 개최되었던 남북협상을 이용한 공개적이고 합법적인 정치투쟁과 함께

비합법적이고 격렬한 폭력투쟁을 추진하였고 이를 위하여 ‘남조선단선반대투쟁위원회’를 조직하고

이 위원회로 하여금 5.10선거 반대를 위한 모든 투쟁을 총지휘케하여 파업과 동맹휴학,

생산기관 파괴, 관공서 습격 등을 단행하였다.

 

이러한 좌익계의 5.10선거 반대투쟁은 두 단계로 구분되었다.

즉 그것은 일차적으로는 선거를 거부하고, 선거가 제대로 시행되면 무효화 투쟁을 전개해 나가는 것으로

그 결과 선거를 전후하여 경찰관서의 습격, 방화, 경찰관.선거 관리위원 및 우익 인사의 암살,

통신망과 철도의 파괴 등이 감행되었다


제 4절 제주도 4.3폭동의 발발


경찰은 3.1절 시위사건 이후의 검거과정에서 약2,500명의 청년들을 구금하고 이중 3명을 고문 치사케 하였으며

후에 이 시체를 강에 던져 버리려고 시도함으로써 도민들을 격앙케 하였다.

이에 대하여 제주도의 민전은 “싸우면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자”는 구호아래 각 직장에

‘3.1공동투쟁위원회’ 및 시민 사이에 ‘3.1사건대책위원회’를 조직하여 직장에서의 파업과 학교에서의

동맹휴학을 주도하였고 3월 10일에는 ‘제주도총파업투쟁위원회’를 구성하여

총파업에 들어갈 것을 지시하였다.

 

이 결과 제주도에서는 미군정청 직원과 전도의 관공서 직원 및 대정, 중문, 조천 등의 경찰관을 포함하여

연인원 40,852명이 참가한 “한국에서 처음보는 관공리의 총파업”이 개시되어 3월 18일까지 계속되었다.
이 결과로 전도의 질서가 완전히 마비되고 일체의 행정기능이 상실되자 미군정은

3월 7일 계엄령을 선포하고 3월 13일 조병옥 및 본토 경찰과 우익청년단을 파견하여

파업의 분쇄에 착수함으로써 이후의 제주도에서는 미군정 및 우익계와 좌익계의 폭력이

서로 교차하면서 팽팽하게 긴장되어갔다.

3월 13일 곤봉과 돌로 무장한 1,000여명의 군중이 중문형무소로 몰려가 투옥자의 석방을 요구하면서

시위를 감행하였고 경찰은 이에 발포하여 4명에게 부상을 입히고 무력으로 해산시켰으며

6월 6일 구좌면 종달리에 민주애국청년회를 기습하였던 3명의 경찰이 오히려 체포되어 구타당하고

철사로 묶이자 다음날 경찰은 100여명의 무장경관을 파견하여 종달리 주민 70여 명을 체포하여 보복을 가하였다.

 

8월 13일 약 200명의 군중들이 함덕지서를 공격하여 경찰관 2명을 체호하여 구타하자 경찰이 발포하여

여자 1명에게 부상을 입히고 무력으로 해산시켰으며,같은 날 조천면 북촌리를 공격하던 경찰 2명이

군중에게 체포되어 구타당하였다.

 

한편 좌익계는 극우파인 제주도지사 유해진의 암살을 요구하는 전단을 살포하는 선전공세도 동시에 진행해 나갔으며

그들의 이러한 선전 공세는 “미군 축출”, “경찰 공격”. 그리고 “우익 저주”를 요구하는 전단의 살포를 통하여

더욱 가열되어 갔다. 이에 대하여 미군정은 8.15를 기하여 다시 좌익계에 대한 체포를 대대적으로

개시하여 3.1절 시위사건 이래 각지에서 발생하였던 제 사건의 관련자를 예비검속하고

좌익이라 의심되는 자는 모두 검거, 투옥하는 공격을 단행하였다.

 

이러한 검거열풍을 피하기 위하여 수십명의 좌익 지도자들이 한라산으로 입산할 것을 비롯하여

점차 많은 수의 도민이 한라산으로 입산하기 시작한다.
좌.우익계의 폭력이 교차되며 난무하는 가운데 제주도의 좌익계는 본격적인 무장투쟁을 위하여

조직을 정비, 강화해 나갔다. 남로당 제주도당은 3.1절 시위사건 이후 제주도민 사이에 만연되고 있던

미군정 및 우익세력에 대한 반감의 열기를 조직하여 47년 가을부터 당원충원을 시작하였고

이 결과 48년 초가되면 60,000명의 당원과 전체 도민중 80%의 도민의 지지를 확보했다고 추정되었다.

 

이와 함께 남로당 제주도당은 지도부의 조직개편에 착수하였는데 이 당시 조직개편은 군사적인 경험이 더 많고

교육 수준이 더 높으며, 보다 젊고 급진적인 리더쉽을 구축하는 방향으로 추진되었다.

또한 남로당 제주도당은 군사부를 새로이 설치하고 1948년 2월경부터 무장투쟁조직으로서의

‘자위대’를 편성하기 시작하여 각 구.면.리 단위까지 그 조직을 확대해 나갔다.

 

이에 따라 ‘자위대’는 한라산을 비롯한 여러 산악과 밀림, 고지, 암굴과 방공호 등을 근거지로

확보하고 훈련에 돌입하였다.

남로당 제주도당은 도민에 침투된 그들의 전 조직을 효과적으로 동원함으로써

자위대의 훈련 및 본격투쟁에 소요되는 식량과 무기의 조달을 최대한으로 뒷받침하였는데

여기에는 부녀자와 학생, 아동까지 가담하여 통신, 연락, 의료와 구호지원의 활동을 하였다고 한다.

제주도 좌익계의 이와 같은 조직정비, 개편 등의 이유로 인하여 한때 소강상태에 빠져 있던

제주도의 정국은 1948년초 UNTCOK의 입국과 활동 시기를 전후하여 다시 가열되기 시작하였다.

경찰은 48년 1월 1일 표선면 가시리와 인접 부락을 습격하여 좌익계 주민들을 체포,

투옥한 것을 시발로 하여 동 3일과 4일에 걸쳐서는 중문면, 대정면,

제주시 일대 지역의 좌익계에 대한 공세를 재개하였다.

1월 22일 경찰은 조천에서 개최되고 있던 남로당 제주도당의 회합을 습격하여

습격 당일에 106명을 포함하여 동 26일까지 총 221명을 체포하였고 동시에

등사기 및 다수의 문서를 압수하였다.

 

그런데 이 당시 압수된 문서에서 좌익계에 의해 계획되고 있던 2월 중순과 3월 5일 사이에

폭동의 음모가 발견되자 경찰은 1월 23일부터 조천면 신촌리 및 그 인접 부락민들을 체포하였고

동시에 전도에 걸쳐서 좌익계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를 재개하는 한편 도민이 은닉하고 있던

일제시대의 무기류의 자진반납을 종용하였다.

이렇게 경찰이 공격을재개학 또한 전국에서 ‘2.7구국투쟁’이 폭발함에 따라

제주도의 좌익계는 즉각적인 반격에 돌입하였다.

2월 5일 서귀포에서 경찰과 충돌한 좌익계는 동일 한경면 고산지서를 습격하고 피검자의 석방을 요구하는

강력한 시위를 단행하였으며, 구좌면 일대에서도 세화, 김녕지서까지 시위를 단행하였다.

 

2월 7일 좌익계는 안덕면 서광리의 동향을 감시하던 경찰관 1명을 생포하여 생매장하였고

이에 경찰은 동지역 주민 1명을 체포하여 고문 치사케 함으로써 즉각적으로 보복하였다.

좌익계의 공격은 2월 9일부터 11일 사이에 특히 치열하였다.

 

이 기간동안 제주도에서는 야음을 틈탄 17차례의 폭동과 시위가 발생하였는데 칼과 곤봉으로 무장하고

소련 국가를 부르는 군중들에 의한 경찰서 습격, 전단 살포 및 시위 등의 과정을 통하여

2명의 경찰관이 심하게 구타당하였고 약 290명의 군중이 경찰에 체포되었다.

 

한편 ‘자위대’를 통하여 무장을 강화해나가고 있던 좌익계는 2월 13일 한경면 저지지서

소속의 경찰관 수십명이 한림읍 금악리를 습격하자 일제의 38식 보병총, 수류탄, 일본도 등을

사용하여 경찰과 교전하여 격퇴하였고, 동 중순경 안덕지서 소속의 경찰관 및 우익청년단이

안덕면 사계리를 습격하자 자갈, 곤봉 등으로 반격하여 지서장을 생포하고 무기를 탈취하였다.

48년 초에 제주도 좌익계에 대한 경찰의 공격으로 재개된 이러한 격렬한 공방은

3월에 접어 들면서 다시 완화되었다.

즉 이 시기에는 3월 초순에 발생한 도민에 의한 함덕지서 습격사건과 경찰 및 우익청년단에 의한

한림, 애월 지구의 ‘자위대’모임 기습사건을 끝으로 별다른 충돌이 발생하지 않고

잠시 동안의 냉전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제주도의 좌익계가 4.3폭동을 감행하기 위하여 그동안 발생하였던 쌍방간의 공방을 분석하고

자체의 역량을 재충전하기 위한 시간을 필요로 하였음에 기인한 것으로 추측된다.

따라서 이 짧은 기간 동안의 냉전도 결국 3월말경 개최된 김달삼, 조몽구 및 국방경비대 제 9연대 문상길 등의

회합에서 무장폭동이 결정됨으로써 종결되고 마침내 1948년 4월 3일 오전 2시 한라산을 비롯한

각지의 산악 위에서 무장투쟁을 알리는 봉화가 불타오름으로써 승자도 패자도 없고

오직 피해자만 남은 기나긴 싸움의 서곡이 시작되었다.


<진행과정>

1948년 4월 3일


1948년 4월 3일 자정, 마침내 무장항쟁의 신호탄인 봉화가 각 오름에서 붉게 타올랐다.

제주 도민의 무장전위대인 '자위대' 5백여 명과 그 동조자 1천여 명은 도내 20여 개의 경찰지서 중

10여 개의 경찰지서를 습격하는 것을 시작으로 경찰과 서북청년단의 숙사 및 국민회,

독립촉성회, 대한청년단 등 우익단체의 요인과 관공리의 집을 공격하였다.

초기 공세에 성공을 거둔 무장세력은 곧 도민과의 협력체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조직개편을

단행하여 각 면에서 투철한 사상성 및 전투 경험을 소유한 자를 30명씩 선발하여 연대와 소대로

구분 편성된 '인민유격대'를 조직하였다.

유격대의 기습 공격에 놀란 미군정은 이의 확산을 저지하기 위하여 4월 5일 제주도 비상경비사령 부를 설치한 후

통행증제를 실시하고 월 10일에는 부산 주둔의 국방경비대 제5연대 제2대대를 제9연대에 배속하여

경비대의 병력을 증강시켰으며 또한 유격대와의 연고가 짙어서 진압작전을 효율적으로 치르기에

부적당한 제주 출신의 경찰 대신 타도로부터 차출한 1,700여 명의 경찰을 파견하였다.

 

특히 미군정은 국방 경비대가 폭동 발생의 초기부터 도민의 불만을 정당한 것으로 보고

적극적인 진압작전을 추진하지 않는 것에 강력한 불만을 표시하는 한편 제9연대장 김익렬에게

사람을 보내 '초토화작전' 을 계속 요구하였다.


4.28 평화협상과 5.1 오라리 방화사건


미국은 김익렬의 거부로 초토화 작전이 시행의 불가능해지자 유격대와의 협상을 명령했다.

이리 하여 4월 28일 김익렬과 유격대 사령관 김달삼이 대좌하여 72시간 내 전투중지에 합의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평화협상은 그 다음날 미 군정장관 딘(W. Dean)의 내도 후에 즉각 파탄에 직면하게 되었다.

딘은 평화협상을 거부하였던 것이다.

5월 I일 오전 12시 경 제주읍 외곽 오라리가 서북청년단 및 대동청년단 소속 청년 30여명에 의해 기습되어

12채의 민가가 불타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마을에서 1.5km가량 떨어진 민오름 주변에 있던 유격대원 20여 명이 총과 죽창을 들고 내려와

이 청년들을 추적하자, 이 청년들의 보고를 받은 경찰이 즉각 출동하여 유격대가 이미 사라진 마을을 향해

총을 난사하며 진입하였다.

 

이 일련의 과정에서 유격대와 경찰에 의해 경찰관 가족 I인과 마을 주민 1인이 각각 희생되었고

경찰은 오후 4시 30분까지 마을에 주둔하면서 주민들을 심문하다가 김익렬 등의 국방경비대 가 출현하자

황급히 마을에서 철수하였다.

이후의 사건 진상규명 과정에서 미군정과 경찰은 오라리방화사건이 우익청년에 의해 자행되었다는

국방경비대의 진상보고를 묵살하고 이를 유격대의 소행이라고 몰아 붙이는 조작을 감행하였다.

그들은 {동아일보} 등의 언론을 통하여 조작된 보도를 하도록 하는 한편, 사건 당시 오라리 상공을

정찰하면서 찍은 필름을 편집하여 {제주도의 5월 1일 (May Day on Cheju-do)}라는 기록 영화를 제작하고

이를 유격대의 만행을 증언하는 홍보물로 이용했다.

5월 3일에는 미 고문관 드루스 대위의 지휘 하에 귀순자를 호송해 오던 제9연대 7명과 미군 사병 2명에게

괴한들이 총기를 난사하여 귀순자 중 일부가 죽고 나머지는 다시 산으로 도망하는 사건 이 발생하였다.

경찰은 처음 이를 유격대의 소행이라고 발뺌하였지만, 미군에 의해 체포된 괴한 중 1인이

제주경찰서 소속이라는 것이 밝혀지자 다시 이것을 경찰에 대한 중상모략을 위해서

경찰과 미군정, 그리고 경비대와의 이간을 시킬 목적으로 자행된 유격대의 경찰 가장기습사건이라 고 주장했다.

미군정은 이에 4.28평화협상과 이후 조작된 사건의 책임을 9연대와 김익렬에게 뒤집어 웠다.

미군정은 김익렬을 용공으로 몰아 해임하고 강경파인 박진경을 기용하여 대규모 초토화 작전을 준비해 나갔다.


5.10선거 거부 투쟁


이에 대응하여 '인민유격대'는 5.10선거가 다가오자 그것을 파탄시키기 위한 공세를 강화하였다.

이 공세로 관련인사와 경찰, 우익청년단체 관련 인사들이 살해되었고 각종 시설이 습격당하여 파괴되었다.

이와 함께 도민들도 5. 10선거를 거부하기 위한 투쟁에 동참하기 시작하였다.

많은 선거 관련 공무원들이 근무지를 이탈하거나 선거 사무를 보지 않았다.

도민들은 경찰 및 극우청년단체의 회유 와 협박에도 굴복하지 않았다.

 

향보단에 가입하기를 완강히 거부하였고, 선거날이 되자 더욱 강화 된 협박과 폭력에도 불구하고

입산해 버림으로써 적극적인 선거 거부를 단행하였다.

이 결과로 제주도에서의 5.10선거는 3개 선거구 중 북제주군 갑, 을 두 선거구의 선거가 무효화되고

남제주군 선거구만의 선거가 간신히 치러졌다.

도민들은 그들의 항쟁목표의 하나로서 5.10단선 을 완벽하게 파탄시킨 것이다.


박진경의 초토화작전


이에 미국은 즉각 제주도의 해안선을 봉쇄하고 박진경에게 초토화작전을 명령한다.

초토화작전을 명령받은 박진경은 5월 12일부터 공격을 개시하여 2개 마을에서 218명의 도민들을 체포한데 이어

5월중에만 무려 3,126명의 '포로'를 붙잡는 전과를 올린다. 6월 중순이 되면 '포로' 의 숫자는 6천 명으로 불어난다.

한라산 서쪽에서 동쪽으로 일소하는 박진경의 강력한 투망식․토끼몰이식 공격 은 도민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특히 그의 광폭함은 국방경비대에 대한 이전의 도민의 호 의적인 반응을 무색케 하는 것이었다.
마침내 국방경비대는 " ,,,,미군 철모에 미군복, 미군화에 미군 총, 비가 오면 그 위에 미군 우장을 쓴다.

멀리서 보면 키가 작은 미군부대가 전진하고 있는" 모습으로 "동족의 섬멸에 동원되기" 시작한 것이다.

박진경과 국방경비대의 이와 같은 강력한 토벌에 대응하여 유격대는 5월말 그 편제를 '인민해방 군'으로 바꾸었고, 도민들 또한 생존의 극한 상황에서 국방경비대의 동향을 적극적으로 탐지, 감시하기 시작하였다.
6월 18일 토벌 방식에 불만을 품은 문상길 등이 박진경을 살해하자 미군정은 최경록을 그 후임에 임명하여

박진경 암살사건의 전모를 파헤치는 한편, 도민들에 대한 수색작업을 계속하였다.

이어 7월15일에는 송요찬을 새로운 연대장으로 임명하여 그로 하여금 약 한달 동안 새로이 부대정비를

하게 한 다음 유격대에 대한 공격을 재개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때 8월 초순, 김달삼, 강규찬 등 유격대 주요 지휘관 6명이 해주의 남조선인민 대표자의

참석을 명분으로 제주를 탈출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또한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는 등의 정

치일정 등으로 인하여 유격대는 장기항전 준비에 돌입함으로써 경비대의 대유격대 진압작전

또한 일시적으로 소강상태에 들어가게 된다.


학살, 삼광(三光),삼진 (三盡)작전


그러나 부대를 정비한 송요찬이 9월초부터 대유격대 진압작전을 전개하기 시작하면서

다시 무차별적인 초토화작전이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송요찬과 그의 뒤를 이은 김상겸에 의해 강력한 토끼 몰이식 수색작전과 모두 불사르고

모두 죽이고, 모두 약탈하는, 그리하여 불태워 없애고, 죽여 없애고, 굶겨 없애는 이른바

'삼광(三光)', '삼진 (三盡)' 작전이라는 전율할 대량학살작전이 전개되면서 유격대는 축소되어 갔고

유격대 세력의 몇 배에 달하는 숫자의 '폭도사살' 전과가 기록되어 갔다.

특히 제주도 출동을 거부한 국군 14연대의 여․순 봉기를 진압한 10월 하순 이후에는 유격대와의 연결을

차단한다는 명분으로 중산간 지역을 중심으로 소개작전과 소개민심사, 이를 명분으로 한 대량 학살이 연일 이어졌다.

1949년이 되자 정부와 미국의 주한 시군사고문단은 여․순 봉기를 성공적으로 진압한 함병선의

제2연대 병력을 제주도로 이동시켜 육․해․공군의 연합작전으로 대토벌을 더욱 강화하였다.

해군에서는 18척의 함정을 동원하여 해안선을 완전 봉쇄하고 37밀리 포로 함포사격을 가하였고,

공군에서는 L-4, L-5형 연락기를 이용하여 수류탄과 폭탄 투하작전을 개시하였다.

 

또한 동시에 육군은 대전차포, 박격포, 0.5인치 기관총, 로케트포, M1 소총 등의 새로운 무기로 무장하여

집단 학살과 무차별 방화를 자행하였다. 이러한 무자비한 육․해․공군의 연합작전의 결과로

해안에서 4km 이상 떨어진 한라산에 오르는 부락은 그나마 남아 있던 것도 완전히 초토화되었고,

학살을 피한 도민들은 삶을 찾아 다시 산으로, 해안의 안전지대로 도피해야 하는 운명에 직면하게 되었다.


하산민들


그러나 이들의 삶 또한 죽음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 것이었다.

입산한 도민들은 여전히 토벌대의 추적에 시달려야 했고 여기에 다시 굶주림과 혹독한 추위라는

새로운 적과 직면하였던 것이다.

 

해안부락의 안전지대로 피신한 도민들 또한 형편이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산 사람과 협력한 마을 사람'으로, 또는 '공산당 물이 들었다'고 많은 의심과 감시의

눈초리를 겪어야 했으며 끝내는 목숨을 잃기도 했다.

 

또한 그들은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면서도 소개된 마을을 유격대로부터 방어하기 위한 대대적인

축성 작업에 의무적으로 참여하고 민보단원이 되어 이를 지킴으로써 자신들에게 가해지는

의심을 해소할 필요가 있었다.


지속되는 대학살과 항쟁의 종식


제2연대의 육․해․공군 연합작전에도 불구하고 유격대가 완전히 소멸되지 않았다고 판단한 정부와 미국은

1949년 3월 2일 제주도지구 전투 사령부(지휘관:유재흥 대령, 참모장:함병선 중령)를 설치하고

김용주 대령의 독립 유격대대를 투입하여 유격대의 잔존 세력을 일소하기 위한 최후의 총공세를 감행한다.

유재흥은 한편으로 3월 25일 기한의 사면계획을 발표하는 선무공작을 전개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강력한 무장진압의 2단계 작전을 구사하였다.

이 결과 사면기간 동안 강경한 토벌작전에 대한 공포와 굶주림과 혹독한 추위에 시달리는 죽음같은 삶을

벗어나려는 하산민의 두려움과 의구심 에 찬 투항이 늘어나고 이들에 대한 회유, 고문, 협박 등을 통하여

유격대의 규모와 주둔 위치, 무장력 등이 속속 드러나게 되었다.

선무공작을 전개하면서, 한편으로 여전히 강경한 무장진압을 전개하던 유재흥 부대는 사면기간이 끝나자

즉각 대대적인 최후공격을 단행하였다.

이 결과로 3윌 12일부터 4월 12일간의 한달 동안 유재흥 부대는 2,345명의 '유격대'를 살해 혹은 부상시켰고

1,608명의 민간인을 살해하였으며, 동시에 3,600여 명의 유격대 동조자를 생포하였다.

이러한 전과는 당시 미군 비밀 문서가 과장 집계 한 무장유격대의 숫자가 250여명,

그리고 그 동조자의 숫자가 1,000~1,500명에 불과하였다는 것에 비추어 볼 때, 유격대 색출을 빙자하여

도민에게 가해진 철저한 대토벌, 대학살을 반증하는 것이었다.

즉 유재흥 부대는 '선무'라는 탈의 뒷면에 도민 대학살이라는 본모습을 감추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유격대 세력은 거의 붕괴되었다. 이에 따라 1949년 4월 9일 이승만은 제주도를 방문하여

폭동이 종식되었음을 대내 외에 과시했다.

같은 해 5월 10일 북제주군 갑, 을 두 선거구에 대한 재선거가 실시되었다,

5월 15일 제주도지구 전투사령부가 해체되고, 대부분의 군경이 17일, 18일에 걸쳐 육지로 철수했다.
이리하여 마침내 항쟁과 그것에 따른 피의 보복, 대살륙이 일단락 되었다.



백조일손지지 (百祖一孫之地)

그러나 학살은 이에 멈춘 것이 아니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정부는 도내 도처에서

소위 '전향자' 에 대한 대검거 및 처형을 재개하였던 것이다.

이 와중에서 경찰은 대정, 한경, 한림, 애월, 안덕, 중문, 서귀 등지에서 이전에 체포되었다.

 

풀려난 양민들을 예비검속이란 명목 하에 소집하여 모슬포 송악산 부근 섯알오름에 위치한

식민지 시대의 탄약고로 끌고 간 다음, 이들을 학살했다.

사망자 192명, 도민들은 뒷날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시신을 수습하여 사계리 공동묘지에

'백 할아버지에 한 자손의 땅'이라는 뜻의 백조일손지지 (百祖一孫之地)를 조성하여

이들의 억울한 죽음을 기리고 있다. <옮긴 글>

 

 

21. 1948. 2·7구국항쟁

 

2·7 사건1948년 2월 7일에 훗날의 대한민국 영역에서 일어난 파업 및 봉기 사건이다.

비판하는 측에서 2·7 파업이나 2·7 폭동, 옹호하는 측에서는 2·7 구국투쟁으로 부른다.

 

개요

1948년 5월로 예정된 대한민국 제헌국회 총선을 앞두고 미군정 지역에서 단독 선거가 실시되어

단독 정부가 수립되는 것을 반대하여 총선에 반대하는 흐름이 형성되었다.

남조선로동당이 이같은 여론을 선도했고, 이 사건 이틀 후인 1948년 2월 9일 백범 김구

〈삼천만 동포에게 읍소한다〉라는 제목으로 단선단정 반대 의사를 분명히 하는 등

이승만 계열 외에는 이에 동조하는 파벌이 적지 않았다.

미군정에 의해 불법화된 남로당과 민주주의민족전선은 총선 일정이 발표되자 단선단정을 반대하며

2월 7일을 기해 전국적인 대규모 파업을 일으켰고, 이 파업 중 일부가 과격화 되어 경찰과 물리적 충돌을 일으켰다.

이 사건은 두 달 뒤에 큰 인명 피해를 가져온 제주 4·3 항쟁의 전초전이 되었다.

제주 4·3 항쟁여순 14연대 반란사건 등 더 규모와 파급 효과가 큰 사건이 연이어 터졌기 때문에,

대한민국 현대사 학계에서는 상대적으로 연구가 깊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편집] 전개

1948년 2월 5일에 군정장관 A.L. 러치가 미군 철수설을 부인하는 성명을 발표한 이틀 후에 발생했다.

남로당의 단선반대 구국투쟁위원회가 지휘한 노동자 파업을 중심으로, 전기 노동자들이 송전을 중단하고

철도 노동자들은 철도 운행을 중지하며 통신 노동자들은 통신 설비를 파괴하는 방식을 통해

미군정을 압박하며 이루어졌다.

이에 호응한 농민들의 가두 시위와 학생들의 동맹휴학이 더해졌다. 이들의 주장들은 다음과같다.

  1. 조선의 분할 침략 계획을 실시하는 유엔 한국 위원단을 반대한다.
  2. 남조선의 단독 정부 수립을 반대한다.
  3. 양군 동시 철퇴로 조선 통일 민주주의 정부 수립을 우리 조선 인민에게 맡기라.
  4. 국제 제국주의 앞잡이 이승만,김성수등 친일 반동파를 타도하라.

경상남도 밀양군에서는 2월 7일 이른 아침에 농민들이 지서 두 곳을 습격하여 경찰이 발포로 맞서면서

10여명이 사살되고 100여명이 검거되었다. 합천군에서는 오전과 오후 두 차례에 걸쳐 농민들이

지서를 공격하여 역시 100여 명이 검거되었다.

이와 유사한 충돌이 전국에 걸쳐서 일어나면 2월 20일까지 2주 동안 진행되었다.

약 전체 참가 인원은 약 200만명이며, 이 과정에서 사망한 사람은 100여명, 투옥된 사람은 8,500명 정도로 추산된다.

[편집] 의의 및 영향

2·7 사건은 자연발생적이며 우발적인 요소가 많았던 대구 10·1 사건과 달리 사전에 충분히 계획되고

준비되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미군정 지배하에 있던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시에 사건에 돌입할 수 있었다.

'단선단정 반대'라는 이해와 공감이 쉬운 구호와 함께 투쟁의 목표 또한 분명히 통일되어 있었다.

2·7 사건을 계기로 미군정 지역에서 미국에 반대하는 세력은 지구전 태세에 들어가게 되었고

이는 각 지역 산악 지대를 중심으로 조선인민유격대의 초보적 형태를 구성하면서

결국 제주 4·3 사건이라는 무장 봉기로 이어졌다.

참고 자료

  • 박세길 (1999년 5월 1일). 〈제3장 배신과 음모 - 2·7 구국투쟁〉
  •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1)》 서울: 돌베개.

 

22. 나는 이와같이 들었다.1

 

 

나는 姓이 甘家라 어릴때부터 특이한 姓氏때문에 단감,감초,땡감,떨감,홍시등으로 불리며

놀림을 참 많이 받았는데 할아버지도 역시 그랬던 모양이다.

클 때 동네 어른들이 신동이었던 일곱살의 어린 할아버지에게 귀엽다고 장난치며

" 영생아, 영생아, 너거 甘氏는 순 쌍놈 백정 姓이재? 맞재?라고 웃고 놀리자

 

" 예, 저희집 어른들이 돼지를 잡을 때 아재들은 돼지 뒷다리를 하나씩 붙잡고 있었지요?."라고

딱 받아쳤다고 한다.

 

천한 백정도 급이 다 있는데 소를 잡는 백정보다 돼지를 잡는 백정이 더 천한 취급을 받았고

또 그 돼지를 잡는 백정보다 더 천한 취급을 받는 이가 바로 돼지를 잡을 때 돼지가 버둥거리지 못하게

네 다리를 꽉 눌러 잡고 있는 사람들인데 일곱살짜리 어린 아이에게 괜히 장난 한번 잘못쳤다가

졸지에 돼지잡는 백정보다 더 천한 사람들이 되고 말았다.

 

어른들이 말 한 번 잘못했다가 어린 아이에게 한 방 먹고 찔끔 놀라 두 번 다시는 감씨라는 성씨로 놀리거나

아이라고하여 함부로 하지 않았다고하며 그 비범함에 모두 혀를 내두르고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고 한다.

또 할아버지는 키가 182cm로 말을 아주 잘 타셨다고 하며 할머니가 시집왔을 때 14살 어린 할아버지가

조랑말을 타고 다녔는데 그 위에서도 책을 읽으셨다하며 다리가 길어 다리를 덜렁거리며 다녔는데

그 모습이 보기가 참 좋았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늘 어른들과 함께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셨으며 새벽이면 낭랑하게 책을 읽으셨는데

그 글 읽는 소리를 밖에서 듣고 무학이셨던 증조할머니가 천자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 자도 안틀리고

다 외우시고 일본어 가다가나 히라가나.그리고 영어 알파벳도 외우게 되었다고 하셨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좀처럼 화를 잘 내지 않으셨는데 어쩌다 참기 힘들 정도로 화가 나는 일이 있으면

참을 忍자를 細筆로 100번을 쓰며 그 분노를 삭혔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실제로 내가 어릴 때 한번 따라 해보았고 화가 많이 날 때 참을 忍자를 100번 쓰는 것을

머릿속으로 연상하는 버릇이 그 때부터 생겼다.

이 이야기는 할아버지 이야기만 나오면 어른들이 웃으면서 늘 하시던 이야기였다.

 

 

23. 나는 이와같이 들었다. 2

 

할아버지 감영생이 와세다에 공부한 시기는 해방직전후로 그 정확한 년도를 알지 못한다.

왜냐면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 고모 둘도 당시 너무 어렸기 때문이고 할머니와 증조모는 무학이라 그렇다.

 

집을 위주로 사방 30리가 모두 우리집 땅이라 어른들 말씀으로 평생 남의 땅을 밟고 살지 않았다고 늘 말씀하셨는데

나는 어릴때 그 말씀을 들을 때마다 내가 커서 그 땅들을 반드시 다 도로 찾고 말겠다는 생각을 하곤 하였으며

와세다에 들어가 할아버지의 후배가 되어 교정을 걸으며 할아버지의 발자취를 찾고 싶었다.

그 때 내 나이 11살때의 일이며 그때부터 나는 일본어를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상남면 구배기, 은산 종남산 일대 군부대 있는 곳 20만평이 등기를 토지정비시 미등기했다는 이유로

(당시 해방전후, 한국전쟁등, 혼란기이기도 했고 그런 중에 또 할아버지가 그런 일을 당해

도무지 정신이 하나도 없을 때 땅이 너무 많아)정부가 뺏아갔으며

아버지가 생전에 이 땅을 찾으려했으나 공소시효가 1년인가 지났다며 찾지못했고

 

창원 39사단 금싸라기 땅도 할아버지 거였는데(싯가 수조원) 그것도 그런 식으로 정부가 뺏아가서

39사단을 세운 거였으며 3년전인가 정부에서 팔았다느니 하는 억장이 무너지고 기막힌 소문을 매스컴에서 들은 바 있다.

 

39사단안에 감가 시조할아버지 묘가 있고 해마다 거기서 시제를 지낸다 하였으며 몇 해전

<KBS 6시 내 고향 >에 나온걸 생방송으로 우연히 자세히 보았다.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 말씀으로 39사단을 아무도 못건드리게 할아버지가 명의를 할아버지 감영생과

문중명의로 걸어두었더라고 하였다.

 

시조 할아버지묘가 거기에 있어 그랬는가 추정만 하였다.

종남산 아래가 거의 우리집 땅이라 들었다

할아버지는 창씨개명은 하지 않았다 들었으며 백산 수산을 바라보고 펼쳐진 평야가 전체 할아버지거였다.

 

할아버지의 빛바랜, 마치 전생같은 희미한 발자취를 추적,찾으면서 어떤 조그만 건덕지라도 기록하고자 한다.

창원 유족회에서 책자를 내는데 할아버지에 대해서 책에 올린단다.

이상하게 할아버지건으로 글을 쓰면서 자꾸 화제가 되면서 여기저기 주목이 되곤 한다.

 

할아버지와 윗대 할아버지께서 김종직 선생을 매우 흠모하였다하며 증조부 고조부께서 예림서원 중창할 때

많은 돈을 내어 중창했다는 말씀을 들었다.예림서원은 너희 몇 대 조부님들이 중창하신거라 하셨고

거기서 찍은 증조부 독사진을 본 적 있다

 

당시 할아버지가 사진을 아주 잘 찍으셔서 덕분에 고조모 사진까지 본 적 있고 그 사진이 내게 있다.

아버지가 노름으로 재산을 다 날리고 비록 집이 망가가 되어 엉망이 되었지만 어린 나의 두 손을 잡고

증조할머니와 할머니는

 

" 부디 용기를 내거라. 무조건 용기백배하거라.

너는 왕대나무 집안의 훌륭한 혈통임을 잊지 말거라, 왕대나무밭에서 왕대나무가 나느니라,

너는 왕대나무 자손임을 절대 잊지말거라"하셨다.

 

이렇게 늘 머리를 쓰다듬고 각인시키며 자긍심을 갖게 했으며 반드시 커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라고 하셨다.

나는 자랑스런 할아버지의 손녀가 되고자한다.

 

 

할아버지께 바치는 詩

 

24. 넋두리

 

 

간다 간다. 나는 간다.

구산 앞바다 괭이바다 검은 그 바다

오밤 중 그 바닷물에 죽으러 나는 간다.

 

갑인생 사월 열 나흘생 甘泳生이

꽃 같이 풀잎 같이 살아만 와 달라고

어머니 나를 위해 빌고 또 비셨건만.

바다물에 나의 몸은 해덜 해덜

갈치 대구 물고기 밥 해파리 밥

물속에 여러날 浮草처럼 떠다녔다네.

아 아. 가여운 나의 魂아.

정신 차리고 불러 세워

휘이 휘이 흙먼지 바람따라

고향집 洗川으로 다리 절며 걸어 갔다오.

 

대문안을 들어서니

정든 집은 날보고 통곡하고

장독대에 물 떠놓고 밤이 새도록

나를 기다리던 우리 어머니.

이제는 소용 없소

아무것도 모두 다 씰데 없소.

벌써 번에 벌써 번에

외아들 이 내 몸은 물에 빠져 죽었다오.

칠월이라 삼복더위 오밤중에 끌려 나가

말캉 말캉 생 목숨들 모도 모도 죽었다오.

 

도라꾸에 손 묶여 올라 탈때 눈치를 모두 챘소.

골로 가서 죽나보다 생각 했더니

여기가 어디인가 둘러다 보니 비릿한 갯내음에

꼼짝없이 고깃밥이 되나 보다고

우리들은 머리 뜯고 치 떨며 통곡을 했소.

 

칠흙같이 검은 밤 바닷가 당도 하니 시꺼먼 배

모조리 줄에 엮여 한 꾸러미 굴비가 되고

합바지 다리에는 무거운 돌 덩거리.

도라꾸서 모두 내려 뱃전에 서서

울고 불며 피눈물로 살려 달라

애원 해도 소용 없었네.

 

수 백명 젊은 청춘

붉은 동백 꽃송이 찢어지듯

발길질에 등 밀려서

어머니 찾고 울며 불며 모두 죽었소.

무신 놈의 죽을 죄를 그리도 지었길래

오밤 중 눈 가리고 꽁 꽁 묶여

총 맞고 水葬 되었나.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는 날 살아오라 비시지만

살 길이 더는 없소.

이 아들은 오래전에 총 맞고

바닷물에 水葬이 벌써 벌써 되었다오.

몽운아. 인목아 ,의목아, 방자야.

우지 마라 우지 마라.

이 아부지는 오래전에

벌써 벌써 고깃밥이 되었구나.

꽃다운 나의 아내여.

우지를 마시게.우지를 마시게.

이 몸은 오래전에

벌써 벌써 고깃밥이 되었구려.

 

세월은 파도처럼 다시 또 흘러

江山이 그 단새에 여섯번 돌고도 남은 이태.

큰 아들 인목이 所生 머리 깎은 손녀 딸이

날 찾아와 피눈물로 젖은 얼굴 울면서 닦아 주네.

 

우지 마라 우지 마라. 나의 손녀여.

우리의 魂과 魄은 바다속에서

해초 속을 이리 저리 울면서 다니는구나.

부디 부디 우리들의 깊은 원한 좀 풀어다고.

 

오밤 중 추진 머리, 몸 끌고서

허공중에 먼지처럼 날아 다녔소.

어머니. 아 아. 가여운 우리 어머니.

대문 열고 밤마다 이제 다시는

이 못난 자식 기다리지 마소.

뜨신 밥 살강위에 떠 놓고

기다리는것도 이제 더는 하지 마소.

괭이 바다 해초속에

이 내 몸은 엎드려 피눈물 삭이고 있다오.

 

"갑인생 사월 열나흘 生 꽃같은 甘泳生이.

하늘이 감동하고 조상님네 감읍하야

부처 신령 모두 도와

부디 부디 티끌만한 상처없이 살아만 돌아오소."

어머니의 치성소리

바다속의 우리 모두 풀쭉 풀쭉 울었다오.

고향집 세천 중마.

어머니. 아 아. 가여운 우리 어머니.

뜨신 밥 살강위에 떠다 놓고

더는 더는 다시는 우지 마오.

풋콩이 푸리푸리 달릴 즈음에

소쩍새가 훌쩍 훌쩍 울 즈음에

나 벌써 물에 빠져 죽은줄 모르고

삽짝 문 활짝 열고 기다리셨네.

어머니. 아 아. 가여운 우리 어머니.

나 죽은줄 모르는 꽃다운 아내와 어린 자석들

괭이 바다 검은 바다 삼복 더위에

뜨거운 그 바다에 빠져 나는 죽었다네.

나는 죽었다네. 나는 죽었다네.

경인년 그 무덥던 삼복더위 칠월 이십 사일.

오밤 중 도라꾸 타고 물에 빠져 총 맞고 죽었다네.

 

 

1950년 7월 삼복 더위 날 그 때

할아버지와 한 날 한 시에

그 모진 일을 당한
젊디 젊은 수백,수천 수만,

130만명의 그 가엾은 영혼들께

울면서 이 시를 바칩니다.

 

25. 아버지,그리고 아버지의 아버지.

 

고향집이 내려다 보이는 선산에서

아버지가 아버지의 어머니를 땅에 묻고

산아래를 내려다보며 멀리

수산 낙동강쪽을 바라보며

아버지가 아버지의 아버지를 招魂한다.

 

아버지는 아버지의 아버지를

두번도 채 부르지 못하고

아이처럼 울면서 마저 아버지를 부른다.

아. 招魂..

그렇게 아버지의 아버지를 부르며

통곡하던 우리 아버지.

아버지는 아버지의 어머니를

찬땅에 묻으며 난리통에 行不된

아버지의 아버지의 모시옷을

함께 빈묘에 묻으며

아버지는 아버지의 아버지를

목매어 招魂한다.

 

"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의 아버지를 세번도 못다 부르고

통곡하며 부르던 아버지가 부르던

그 아버지의 아버지.

 

오늘 나는 그 아버지의

아버지를 부르던 아버지와

아버지의 그 아버지를 招魂하며

오늘 하루종일 눈이 진무르도록

한없이 울고 또 울었다.

 

 

26. 눈썹달 곱게 뜰 때

 

어머니, 어머니,

아, 아, 어머니.

그리운 나의 어머니.

 

눈썹달 곱게 뜰 때
쌍가락지 사 가지고
이 아들 달려갈겁니다.
기다리세요,기다리세요.

어머니,

아, 가엾은 나의 어머니!

꽃다웁던 나의 아내여!

 

 

27. 忌日

 


어머니, 어머니,

아, 가엾은 나의 어머니.

오늘은 당신의 기일 입니다.

괭이바다 속의 제가

어머니께 잔을 올립니다.

 

살아돌아가지 못해 죄송합니다.
기다리게해서 죄송합니다.


피눈물 적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어머니.

 

 

28.누가 알리. 이 가슴의 핏빛 슬픔을.

 

희뿌연 회색 하늘

슬픈 우물가.

 

구름 너머 지켜보는

저 별들은 누구의 눈물인가?

 

누가 알리.

이 가슴의 핏빛 슬픔을.

 

누가 알리.

바다의 눈물을.

 

누가 알리.

바다속에 박힌 핏빛 눈동자를.

 

 

29. 할아버지께.

할아버지, 할아버지, 아, 아, 할아버지...!!!

이 머리깎은 손녀가, 이 머리깎은 손녀딸이 엎드려 큰 절을 올립니다.

할아버지를 직접 뵙지는 못했으나 할아버지의 살과 뼈를,그리고 정신을, 피를 물려 받았음을

너무나 너무나 저는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위패속의 할아버지는 젊디 젊은 서른 일곱의, 청년의 모습으로 서 계시고 할아버지보다

50년 늦게 세상에 나온 저는 이제 쉰을 넘겨 머리에 흰 서리가 많이도 앉았습니다.

할아버지의 일을 알고 나서 하루도 울지 않은 날이 없는데 할아버지께선 이런 저를 보고 계시겠지요.

할아버지와 저는 무슨 억겁의 인연이 있어 할아버지와 손녀로 만났을까요?

할아버지가 다니셨을 고향의 언덕과 산과 들을, 그리고 할아버지를 그리며 종남산에 가서 좀 살았습니다.

비가 오면, 달빛이 고운 밤이면 할아버지를 만나러 괭이바다에 가는데 할아버지도 저처럼 좋으시지요?

 

할아버지,이미 아시겠지만 저는 머리깎고 열 아홉에 중이 되었습니다.

아버지를 미워하였는데 할아버지 때문에 아버지를 이해하고 용서하고 놓아주었습니다.

할아버지, 아버지가 어리석어 마음을 잡지 못하고 그 많던 집안 살림을 다 말아먹고 亡家를 만들었을 때

찬 바닷물속에 엎드려 얼마나 피눈물을 흘리셨을지 저는 그 마음을 마음으로 짐작하여 알고 있습니다.

 

할아버지! 100년전엔 어느 곳에 계시다가 이 세상에 오셨고 65년전 그 날은 또 어디로 돌아가셨습니까?

구름이 되었다가 비가 되고 다시 내(川)가 되고 강이 되고 바다가 되고 돌고 도는 인생길,

앞산에 진달래가 곱게 피면 태어나고 뒷산에 갈잎이 지면 돌아간다 생각하면 편하지 않겠습니까?

이 생에 온갖 슬픔 괴로움 그리고 피맺힌 여한은 이제 미련없이 모두 훌훌 털어 버리십시오.

할아버지에게 몹쓸 짓을 저질렀던 그 사람들은 모두 자기의 악업대로

그 자손 천대 만대에 걸쳐 다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할아버지께서는 生死를 이미 다 뛰어 넘었는데 더 이상 그 무엇을 슬퍼하겠습니까?

두레박이 천길 우물안을 오르락 내리락 하듯이 생사를 오르내리는데 생사의 물을 긷는 바로

그 우물가에서 할아버지와 저는 극적으로 이렇게 다시 또 만났습니다.

100년전 증조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낳기전엔 할아버지는 어디 계셨으며 그리고 또

그 증조 할아버지를 낳았던 고조 할머니가 증조 할아버지를 낳기전엔 할아버지는 어디에 계신 누구셨습니까?

 

저는 할아버지가 저의 할아버지인 것을 늘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이 다음 다음 세상에서도

영원히 할아버지의 자랑스런 손녀로 다시 꼭 태어나기를 빕니다.

그리고 할아버지 너무 외로워 마십시오. 언제나 제가 할아버지 곁에 꼭 있겠습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할아버지!

할아버지를 마음 다해 깊이 깊이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진달래 붉게 핀 어느 봄날에 할아버지를 눈물로 그리는 손녀 감효전 올림.

 

 

30. 할아버지께 2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내주신 숙제

깨끗하게 다 풀고

할아버지한테 가겠습니다.

우리는 다시 꼭 만나게 될 것입니다.

아니, 늘 함께 합니다.

외로워 마십시오.

더 이상 울지도 마십시오.

제가 다 대신 하겠습니다.

할아버지, 존경합니다.

그리고 깊이 사랑합니다.

 

손녀 효전 올림.

 

 

31. 학살(虐殺)

 

세상에 어떤 공포가 이보다 더 할 수 있을 것인가?
그 때 그 일을 당하신 분들의 공포.
분명 그분들은 자신들의 운명을 직감하셨으리라
총을 맞는 그 순간 어떤 심정이었을까?

자신의 몸이 나딩굴고 수장이 되어
더운 여름날 바다속을 무심한 파도에
이리 저리 떠다니게 되었을 때
심정이 또 어땠을까?


그들의 가족들이 가슴을 쥐어 뜯으며
고통으로 데굴데굴 구를 때 그것을 보는
그들의 심정은 또 어땠을까?
60년이 넘도록 아직도 이러고 있는 것을 보며 또 어떨까?

 

 


32. 아,어쩌면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아,아, 어쩌면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4년간 줄기차게 할아버지의 발자취를 찾고 퍼즐을 맞추어 가면서 방금 알게 된 충격적 사실은

증조부 기일날 바로 그날 밤 할아버지가 학살되었다는 기막힌 사실이다. 아, 미쳐버릴 것 같다.정말

 

그러니까 할아버지가 김원봉 장군과 똑같이 쫒기는 몸이 되어 발이 묶였을 때 증조부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외아들임에도 초상을 볼 수 없었고 바로 마산 형무소.수감 2년 되던해인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

1달되던 1950년7월24일 (음,6.10)날 밤 마산 구산 괭이바다에서 학살되셨다.

그런데 바로 그날은 기막히게도 증조부의 제삿날 밤이었다.

 

제적부, 즉 호적부에는 감호현 증조부가 단기 4280년 6 월11일,

서기 1947년 6월11일 돌아가신 거로 기록되어 있는데 삼복에 돌아가셨다면 6월11일이 음력이 맞다.

 

호적부에 적힌 증조부 감호현의 사망일자 1947년 6 월11일을 양력으로 환산하면 7월 28일이고

조부 감영생이 학살된 날1950년7월24일(월)을 음력으로 환산하면 6월10일

그럼 기일은 음력 6월 9일이 된다.

 

그러니까 당시 아버지가 증조부의 사망신고를 하면서 음력으로 6월11일로 한듯

아버지가 15세 때 할아버지 사건이 났고 그러니 누구 한 사람 조력자가 없었다.

할아버지가 그렇게 되니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고 세상 눈초리와 정보경찰의 사찰과 감시로

아버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어른들 말씀으로 가까운 일가친척들이 재산을 많이 빼돌렸는데 그걸 다 알면서도 모르는 걸로

눈을 감고 넘어간게 많다고 들었다. 가만히 있으니까 정말 모르는가 하더라는,

아무튼우리집 어른들은 자타공인 너무 어지셨다.

 

내가 오래전에 출가하여 새삼스레 속가의 형제 자매 일가 친척하고 전혀 가까이하고 싶지 않는데

할아버지 덕분에 족보 뒤지고 어쩌고 저쩌고 하려니 이만 저만한 고역이 아니고 스트레스가 너무 심하다.

그러나 어쩌랴, 이 일은 내가 아니면 누가 할 이도 없고 반드시 내가 해야만 한다.

 

 

 

 

33. 65년만의 귀가(歸家)

 

 

어릴적부터 벼루어 온 할아버지 문집을 만들기위한 작업을 한지가 4년째다.

자료를 찾고 기억을 더듬고하여 글을 썼다.밀양의 항토 사학자 두분의 도움을 받아

할아버지와 증조,고조부 윗대 어른들이 아주 훌륭하셨다는 것을 다시 한번 더 확인하였고

게다가 할머니의 가계가 독립운동하셨던 성하(成河) 손경현(孫庚憲)선생의 집안이고 온 식구가 일정때

만주로 가서 거기서 다 돌아가셨다는 특이한 기록을 찾아내고 어떤 상황이었는지를 추정하게 되었다.

 

이런 여러가지 놀라운 기록을 마주하면서 가슴이 너무나 감격으로 벅차오르고

핏줄에 대한 긍지를 다시금 다져 갖게되는 확실한 계기가 되었다.

어젯밤 밤이 늦도록 서문을 쓰고 그대로 쓰러져 잤는데 꿈에 할아버지가 가마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셨는데

내가 안아서 가마에서 내려드리려고 했더니 "내가 내리마" 하셨다.

아마도 선몽인듯 그 꿈내용이 생시처럼 선명하다.

 

아침밥을 먹으려고 밥숟갈을 입에 넣자마자 눈물이 목구멍을 차고 넘어와 혼자 통곡하고 한참 울었다.

증조모가 33년간 매일 할아버지가 어디가서 있더라도 배곯고 있지 말라며 살강위에 따신 밥을 차려두고

부디 눈꼽만큼도 다치지 말고 꽃같이 풀잎같이 살아만 돌아와 달라고 달빛아래 장독대에 정안수 떠놓고

할머니와 빌고 또 빌었던, 밤마다 대문을 걸지않고 애타게 기다리셨던,내 똑똑한 아들,

감영생이는 절대 죽을리 없다던 바로 그 외아들의 65년만의 귀가(歸家)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