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어쩌면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아,아, 어쩌면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4년간 줄기차게 할아버지의 발자취를 찾고 퍼즐을 맞추어 가면서 방금 알게 된 충격적 사실은
증조부 기일날 바로 그날 밤 할아버지가 학살되었다는 기막힌 사실이다. 아, 미쳐버릴 것 같다.정말
그러니까 할아버지가 김원봉 장군과 똑같이 쫒기는 몸이 되어 발이 묶였을 때 증조부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외아들임에도 초상을 볼 수 없었고 바로 마산 형무소.수감 2년 되던해인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
1달되던 1950년7월24일 (음,6.10)날 밤 마산 구산 괭이바다에서 학살되셨다.
그런데 바로 그날은 기막히게도 증조부의 제삿날 밤이었다.
제적부, 즉 호적부에는 감호현 증조부가 단기 4280년 6 월11일,
서기 1947년 6월11일 돌아가신 거로 기록되어 있는데 삼복에 돌아가셨다면 6월11일이 음력이 맞다.
호적부에 적힌 증조부 감호현의 사망일자 1947년 6 월11일을 양력으로 환산하면 7월 28일이고
조부 감영생이 학살된 날1950년7월24일(월)을 음력으로 환산하면 6월10일
그럼 기일은 음력 6월 9일이 된다.
그러니까 당시 아버지가 증조부의 사망신고를 하면서 음력으로 6월11일로 한듯
아버지가 15세 때 할아버지 사건이 났고 그러니 누구 한 사람 조력자가 없었다.
할아버지가 그렇게 되니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고 세상 눈초리와 정보경찰의 사찰과 감시로
아버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어른들 말씀으로 가까운 일가친척들이 재산을 많이 빼돌렸는데 그걸 다 알면서도 모르는 걸로
눈을 감고 넘어간게 많다고 들었다. 가만히 있으니까 정말 모르는가 하더라는,
아무튼 우리집 어른들은 자타공인 너무 어지셨다.
내가 오래전에 출가하여 새삼스레 속가의 형제 자매 일가 친척하고 전혀 가까이하고 싶지 않는데
할아버지 덕분에 족보 뒤지고 어쩌고 저쩌고 하려니 이만 저만한 고역이 아니고 스트레스가 너무 심하다.
그러나 어쩌랴, 이 일은 내가 아니면 누가 할 이도 없고 반드시 내가 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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