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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조상들의 멋과 슬기가 담긴 생활도구들 (7)

감효전(甘曉典) 2012. 8. 16. 21:59

 

 

 

 

 

 

 

 

 

 

 

 

 

 

 

 

 

 

 

 

 

 

 

                                

 

맷돌질하는 두 여인

말끔하게 차려 입고 맷돌질하고 있는 두 여인.

일반 농가이긴 하지만 벽에 붙어 있는 글씨로 미루어 꽤 학식 있는 집이 아니었을까 한다.

 

달걀 꾸러미

일제시대(1922년까지 조선에 있던 미국사람이 찍음) 달걀꾸러미.

짚으로 만든 것이 신기했는지 의자 위에 올려 놓고 사진까지 찍었다.

한 꾸러미에 보통 달걀 10개가 들어간다.

기름틀

참깨·들깨·콩 등의 식물로 기름을 짜는 틀.

기름틀의 구조는 가위다리모양으로 가랑이가 벌어진 나무의 머리 쪽에 구멍을 뚫고 지면과 약 30도의 각도를 이루도록 받침대를 세워, 가랑이진 부분에는 홈을 파고 대롱을 아래쪽으로 향하도록 박아서 짠 기름이 흘러내리도록 되어 있다.

깨가 든 주머니인 ‘기름떡’을 이 홈 위에 올려놓고, 그 위에 다시 ‘기름채 날’ 너비 30㎝, 길이 2m 정도의 널쪽을 덮고 돌을 실어둔다.

 

또 다른 기름틀은 사다리 모양으로 두개의 세장을 걸어서 짠 머리틀을 지면에서 직각이 되게 세우고 아래 세장에 의지하여 서까래 같은 굵은 나무 둘을 약간 벌려놓으며, 그 사이에 홈이 패인 널쪽인 ‘떡판’을 걸쳐둔다. 그리고 이에 기름떡을 올려놓은 뒤에 윗세장에 기름채날을 끼우고 무거운 돌을 실어서 압력을 가한다.

경상남도 진양에서는 팔자(八字)모양으로 벌어진 두툼한 나무 아래쪽에 세장을 끼우고 그 위에 서까래 같은 긴 나무를 좌우로 벌려둔다.

 

기름채날 중앙에는 둥근 구멍이 있어, 거기에 떡밥을 베보에 싸서 넣는다. 그리고 그 구멍에 알맞은 나무토막을 다시 올려놓은 뒤, 긴 기름채날을 끼우고 무거운 돌을 실어서 짠다. 이것은 지렛대의 원리를 이용한 것으로 떡밥에 더 큰 압력을 가할 수 있는 합리적인 구조로 이루어졌으며, 조립도 간단한 장점이 있다.

우리의 재래식 기름틀로는 하루에 한 말의 기름을 짤 수 있다. 기름떡은 원료를 잘 씻은 다음 볶아서 절구에 찧었다가 다시 체에 곱게 내린다. 그리고 그것을 기름주머니에 담아 솥에 넣고 김을 쬔 뒤, 식기 전에 짜야 한다.

갈퀴

나뭇잎·검불 따위를 긁어 모으는 데 쓰는 도구.

 

갈퀴는 여러 개의 대쪽이나 철사 또는 싸릿대 등의 끝을 갈고랑이지게 휘어 부챗살 모양으로 일매지도록 펴고, 그 중간을 가로댄 나무에 얽어 매어 긴 자루를 붙인 것이다. 경기도 덕적에서는 길게 자란 2년생 싸릿대를 통째로 구부려 만들어 쓰는데, 자루와 살이 한 몸을 이룬다.

싸리의 밑동을 불에 구워서 어느 정도 휘어서 붙잡아 매면 영구히 그대로 굳어 있으나 비를 맞으면 다시 펴진다. 갈퀴의 발은 보통 10여 개이나 20여 개가 되는 것도 있다. 발을 대로 만든 것의 무게는 1㎏ 안팎이다.

 

갈퀴에는 여러 가지 부분 명칭이 있다. 곧 위치마(갈퀴의 앞초리 쪽으로 대고, 싸리나 끈으로 엮은 코), 갈퀴코(원몸에 잡아매도록 갈퀴자루의 앞끝을 에어 잡아맨 부분), 뒤초리(갈퀴의 여러 발의 끝이 한데 모여 엇갈려진 곳), 또아리(갈큇발의 다른 끝을 모아 잡아맨 부분), 아래치마(갈퀴의 뒤초리 쪽으로 초리가 풀리지 않게 대나무를 가로대고, 가는 새끼로 묶은 가장 짧은 코), 갈큇발(갈퀴의 원몸을 이룬 갈고랑이진 부분의 하나하나), 갈큇밑(갈큇발의 꼬부라지지 않은 부분), 가운데치마(갈큇코를 잡아매도록 갈퀴의 위아래 두 치마 사이에 가로지른 나무), 콧등노리(갈퀴의 가운데치마를 맨 자리) 등이 그것으로 지방에 따라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경상남도에서는 새해 첫 장에 가서 반드시 갈퀴를 사온다. 이것은 갈퀴가 무엇인가를 긁어 모으는 연장이므로 새해에도 많은 복과 재물이 모이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드베

주로 북한지역에서 썼고, 함경도에서는 ‘드베’ 또는 ‘두베’로, 평안도에서는 ‘씨앗통’으로 불렀다.

지름 15㎝쯤 되는 바가지의 좌우 양쪽에 적당한 크기의 구멍을 뚫고, 여기에 굵기 4∼5㎝의 둥글거나 네모난 작대기를 꿴 것으로 위쪽은 손잡이로 삼으며, 길이 1.5m 가량의 아래쪽으로는 씨가 흘러내리게 되어 있다.

 

아래쪽의 내부에는 작은 구멍이 뚫려 있으며 적당량의 씨가 떨어지도록 주둥이에 붓모양으로 짚뭉치를 끼워둔다. 이것으로 씨를 뿌릴 때에는 바가지에 씨를 넣은 다음 왼손으로 작대기의 아랫도리를 쥐고 오른손에 든 짧은 막대기로 바가지를 탁탁 두드리면서 앞으로 나간다.

 

떨어지는 씨의 양은 작대기로 두드리는 강도나 끝에 박은 짚뭉치의 배고 성긴 정도에 따라 다르므로 작물의 종류를 가려서 잘 맞추어야 한다. 드베로는 하루 한 사람이 약 3,960㎡의 밭에 씨를 뿌릴 수 있으며 대형인 경우에는 끈을 달아 어깨에 메기도 한다.

 

이와 같은 연장은 만주 지방에서도 널리 사용되었으며 어깨에 메는 대형은 작대기의 길이가 90∼95㎝이며 손에 드는 작은 것은 50㎝ 정도이고, 씨가 흘러 떨어지는 아가리의 지름은 2∼3㎝이다. 또 대형 바가지에는 씨가 한되 반, 작은 것에는 2∼6홉 든다.

 

중국 원나라의 왕정王禎이 1333년에 지은 ≪농서農書≫나 명나라의 서광계徐光啓가 지은 ≪농정전서農政全書≫에도 이 드베瓠種에 대한 비교적 상세한 설명과 그림이 실려 있는데, 이 내용과 우리 것 사이에 차이가 없는 점 등으로 미루어 드베는 중국에서 들어온 연장으로 생각된다.

감자독

국립민속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감자독.

지금은 생명을 잃었다.

주로 강원도 산간 지방에서 썼다고 한다.

 

개똥망태

개똥을 주워 모으는 망태기.

거름이 귀하던 시절에는 개똥도 좋은 거름이었다.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는 속담도 있지 않은가.

 

깍지

한여름 논에 김을 맬 때, 뜨거운 햇살도 힘들지만 손도 무지하게 아프다.

호미질도 하지만 손으로 맬 때도 있기 때문이다.

그럴 때 손가락도 보호하고 일의 효율도 높이기 위해 손가락에 끼는 도구이다.

 

극젱이

이것은 지역에 따라 ‘굽젱이(경기도 안산)·훌쳉이(경상남도 영산)·훌찡이(강원도 봉평)·술쳉이(전라남도 광산)·훌치기(전라남도 보성)·끌쟁기’로도 불린다.

대체적인 모습은 쟁기와 거의 같다. 그러나 쟁기에서 큰 구실을 하는 볏이 없으며 보습도 덜 휘었고(거의 평면을 이룸), 끝이 뾰족하지 않고 둥그레하다. 또, 술은 곧은 편이고 몸체도 매우 빈약하다. 손잡이도 쟁기와는 달리, 술 위쪽에 나무 비녀를 질러서 양쪽에서 잡을 수 있다.

보통 호리로 끄는데, 소가 귀하거나 소가 들어서기 어려운 곳에서는 사람이 지게를 지고 지게 가지에 끈을 매어 끌기도 한다.

 

극젱이의 형태는 지역에 따라 큰 차이를 보인다. 강원도나 전라북도의 일부 산간지대에서는 양쪽으로 뻗어 나간 자연목을 성에로 쓰기도 하는데(길이 150㎝ 정도), 한마루를 가랑이진 부분에 세워서 힘을 받도록 한다. 또, 전라북도 진안 일대에서는 좌우로 뿔이 달린 술을 써서 손잡이로 이용한다.

보습을 술 끝에 고정시키는 방법도 여러 가지이다. 안산에서는 보습의 뒤쪽 아랫부분을 움푹하게 하고 그 안에 술 끝을 박은 다음 쐐기로 고정시킨다.

이에 비해 강원도에서는 보습 위에 술과 나란히 덮장을 대고 그 사이에 쐐기를 박아 보습의 앞쪽을 덮누르게 한다. 충청도에서는 보습 뒤에 쇠띠를 두르고 이에 쐐기를 박아서 고정시킨 것을 쓰기도 한다.

극젱이는 논에 쓰기도 하지만 주로 밭을 가는 데 쓴다. 바닥이 좁고 험한 곳에서 얕게 갈 때, 또는 쟁기로 갈아 놓은 땅에 이것을 끌어서 골을 타기도 한다. 쟁기로 갈면 볏밥이 한쪽으로만 갈려 나가나, 이것을 쓰면 양쪽으로 나가기 때문에 감자밭 따위를 매는 데 편리하다.

 

극젱이는 쟁기보다 힘이 약한 게 흠이다. 토질에 따라 차이는 있으나 극젱이로는 하루 6백∼1천 평의 땅을 다룰 수 있다. 무게는 11∼15㎏이다.

 

극젱이의 부분 명칭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① 부리망:가는 새끼로 그물처럼 얽어서, 논밭을 갈 때 소가 곡식이나 풀을 뜯어먹지 못하도록 주둥이에 씌우는 망.

② 한태:소의 등 위로 둘러 감아 봇줄에 맨 줄로서 봇줄이 아래로 처지지 않게 하는 것.

③ 봇줄:멍에의 양끝 턱진 곳에 매어, 물주리막대에 연결한 끈으로 멍에에서 비롯되는 소의 힘을 이 줄이 받아서 전한다.

④ 배때끈:소의 배에 둘러 감아 봇줄에 맨 줄. 봇줄이 위로 떠올라가지 않게 한다.

⑤ 물주리막대:봇줄이 소의 뒷다리에 닿지 않도록, 봇줄의 두 줄 사이에 끼우는 막대.

⑥ 까막머리:봇줄을 매기 위해 성에 끝에 박은 비녀목.

⑦ 성에:한 끝이 술의 윗부분에 연결되어 앞으로 길게 뻗어 나간 나무로, 허리에 한마루 구멍이 있고 앞 끝에 까막머리가 가로 꽂혀 있다.

⑧ 한마루:성에와 술을 연결시키는 나무나 쇠막대.

⑨ 술:극젱이의 몸 아래로 비스듬히 뻗어 나간 나무로 끝에 보습을 맞추는 넓적하고도 뾰족한바닥이 있고, 그 뒤에 네모난 한마루 구멍이 뚫렸다.

⑩ 보습:술 바닥에 맞추어 끼우는 삽 모양의 쇳조각으로 땅을 갈아서 흙덩이를 일으킨다.

⑪ 손잡이:술 뒷부분에 가로 끼운 짧은 막대이다.

 

이와 같은 부분 명칭들은 지역에 따라 다음과 같은 차이를 보인다.

전라남도지방에서는 새해의 첫 소날(上丑日)에는 논밭에 나가 극젱이를 씌워서 몇 두락의 땅을 갈게 한다. 그곳에서는 그것을 ‘소 방아리 붙인다’고 하는데, 일종의 시경試耕인 셈이다. 이렇게 하면 소가 한 해 동안 건강하고 풍년이 든다고 믿는다.

다른 지역에서는 좋은 날을 따로 잡아 일을 시킨다. 그러나 충청남도지방에서는 첫 소날을 ‘소달깃날’이라고 하여 일을 시키지 않고 잘 먹이고 쉬게 한다.

그네

이것은 지역에 따라 ‘기네·베홀깨’·(이상 인천광역시 덕적), ‘훌챙이·치개’(이상 충청북도 봉양), ‘청치기개·찌깨·첨치’(이상 충청남도 서산), ‘왜홀태’(전라남도 보성), ‘벼훑이’(전라북도 봉동), ‘호리깨’(경상북도 안강), ‘홀태’(전라남도)라고도 한다.

길고 두툼한 각목의 앞·뒤쪽에 네개의 다리를 달아 가위다리 모양으로 떠받치게 하고, 빗살처럼 날이 촘촘한 쇠틀을 몸에 끼웠다. 경상남도 영산에서는 작업중에 틀이 흔들리지 않도록 몸 양편에서 줄을 늘이고 발판을 달아서 일하는 사람은 한 발로 발판을 밟는다.

덕적에서는 앞발 중간에 막대를 가로대고, 이에 의지하여 발판을 놓아 사용한다. 날과 날 사이에 볏대를 넣고 훑어내면 나락이 떨어진다. 주로 여자들이 사용하는데, 하루에 벼 여섯가마 정도를 떨어낼 수 있다.

 

여물바가지

쇠죽을 쑤어서 퍼 줄 때 쓰는 여물바가지

 

여물주걱

여물주걱. 쇠죽을 쑬 때 휘휘 휘젓고 뒤집는 데 쓰는 도구.

 

옥수수까기

 

섬틀

섬(곡식)을 담기 위하여 짚으로 엮어 만든 멱서리를 치는 연장. 가랑이가 벌어진 나무 두 개를 마주 세우고 위쪽에 둥근 나무를 꿰어 고정시켰다. 그리고 둥근 나무에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날눈을 파서 고드레돌을 앞뒤로 걸쳐 놓는다.

고드레돌은 주먹만한 돌이나 네모진 나무에 새끼를 꿰거나 얽어서 만들며, 짜인 것을 아래로 촘촘하게 내리뜨리는 구실을 한다. 섬틀로는 섬의 바닥과 몸을 이루는 부분만을 짚으로 거적처럼 짜며, 이 것이 완성되면 사람이 한복판에 들어서서 양끝을 당긴 다음 밑에서부터 엮어 올라가서 우긋한 모양이 되게 한다.

따라서, 섬틀로 바닥과 몸을 짜는 것을 ‘친다’라고 하며, 사람이 섬의 모양을 만드는 것을 ‘우긴다’라고 한다. 능숙한 사람은 하루 10여 장의 섬을 치거나 우긴다. 일본에서 들어온 가마니가 나오면서 섬은 자취를 감추었다.

 

소털고르기

 

소가 털갈이할 때 긁어주는 빗.

 

발고무래

씨를 흩뿌리고 흙을 덮을 때나 나락을 말릴때 쓰는 도구.

 

대감신

부엌의 대감신

 

 닭둥우리

짚으로 만든 닭둥우리.

저기에 알을 낳는다.

용마름 엮기

몇 년에 한 번씩 초가집 지붕을 손 보았다

 

맞두레

 

논에 물을 퍼 올리는 맞두레.

두 사람이 서로 마주 보고 물을 푸기 때문에 맞두레라고 한다.

곧 마주 보는 두레박이라는 뜻.

아래는 이 맞두레를 써서 물을 퍼 올리는 모습.

 

 

모찌기

모를 내려면 먼저 못자리에서 모를 쪄서 옮겨야 한다.

이를 모찌기라고 한다.

힘이 많이 드는 일이라 모찌기부터 나르기까지 주로 남자들이 하는 일이었다.

지금과 달리 모가 아주 긴 것을 볼 수 있다.

바로 손으로 심기 때문이다.

뒤에서 구경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귀엽다.

지금은 다들 할아버지거나 돌아가신 분들이겠지.

모를 찌는 또 다른 사진이다.

멀리 듬성듬성 서 있는 집들이 보인다.

산에는 나무가 적은데, 아마 땔감으로 썼기에 그렇지 않을까?

아이들은 지게 지고 멀리까지 나무하러 다니곤 했다.

 

출처 : 영영소나무
글쓴이 : 영영소나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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