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찬 기상과 강인함으로 상징되는 고구려는 기원전 37년 홀본(현재 중국의 환인)에 도읍을 정한 이래로 700년이 넘도록 동북아시아를 호령하며 우리 민족의 기상을 드높였다. 특히 5세기에 들어서면서 북으로는 송화강을 건너고, 동으로는 연해주 남부, 서로는 요하를 넘고, 남으로는 한반도 중부까지 국경선을 넓히며, 우리 역사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확보하였다.
이러한 강대한 국가의 원동력은 강력한 군사력과 방어력 이었다. 산성 중심의 방어체계를 자랑하는 고구려는 자연 방어가 가능한, 삼면이 험한 높은 산을 골라 고도의 축성법을 이용하여 수많은 산성을 쌓았으며, 첫 번째 수도가 있었던 중국의 환인을 비롯하여 두 번째, 세 번째 수도가 있었던 중국의 집안과 평양에는 아직까지도 고구려만의 견고한 산성이 남아 있다. 험준한 산악지대가 많았던 고구려에서는 말을 탄 기마병이 강력한 군사력의 핵심이었다. 수많은 고구려 벽화를 통해서 활을 쏘고, 갑옷과 투구, 방패와 칼로 무장한 고구려 군사의 모습을 볼 수 있으며 전투력을 높이기 위해 말에도 갑옷과 투구를 입혔던 '개마무사'의 모습도 발견할 수 있다.
우표는 고구려의 첫 도읍지였던 환인(홀본)의 오녀산성과 중국 요동벌판에 위치한 백암성, 집안 삼실총 벽화 중 기마전의 장면, 그리고 삼엽환두 대도(세 개의 잎사귀로 장식된 둥근 고리자루 칼)와 집안 말구유무덤 고분벽화의 개마무사의 모습을 담고 있다. 우표 전지의 변지에는 백암성 뒤로 평양의 대성산성과 평양성의 장대였던 을밀대가 보이고, 덕흥리무덤벽화 중 철갑기병의 행렬 장면, 광개토호태왕릉비 비문위로 삼실총 벽화의 문지기 모습, 전성기의 고구려 지도와 집안 무용총 수렵도가 함계 보이고 있다.
또 하나의 고구려, 고분과 벽화. 고구려의 고분과 벽화를 통해 우리는 고구려인의 사상과 생활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고구려 초기의 무덤은 돌로 거대한 봉분을 올린 돌무지무덤(적석총)으로 고구려 고유의 무덤 양식을 보여준다. 후기에는 중군의 영향을 받아 널길과 주검이 안치되는 널방이 있는 돌방무덤(석실분)으로 변화하는데 고분 벽화는 주로 돌방무덤에서 발견되고 있다.
고구려의 고분벽화는 생활풍속과 장식, 사신의 세 가지 주제로 변화된다. 3세기 말에서 5세기 전반에 걸치는 초기에는 현세의 생활이 내세에서도 재현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주로 생활풍속이 그려졌으며, 6세기 초까지의 중기에는 생활풍속과 사신(四神), 연꽃 등의 장식 무늬가 뒤섞여 있는 그림과 장식무늬만을 주제로 한 그림이 많이 그려졌는데 이는 불교신앙의 확산이 내세에 대한 인식과 표현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볼 수 있다. 6세기 중반부터 7세기 전반에 이르는 후기에는 지배층 간의 갈등과 전쟁으로 인해 현세에 대한 불안감이 커지고 내세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하게 되면서 주로 사신을 주제로 한 벽화가 그려졌다. 특히 연꽃, 혹은 사신으로만 장식된 벽화는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봉 수 없는 것으로 고구려 벽화만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우표에는 돌무지무덤인 '장군총과 산성하고분군'(중국 집안), 고구려 특유의 힘과 에너지를 느끼게 해주는 5회분 4호묘(중국 집안)의 '해신과 달신'이 소개되고 있다 또한 5회분 5호묘의 '불의신과 농업신', 강서대묘 널방의 북벽에 그려진 '현무'와 내부의 모습, 그리고 대표적인 삼족오 유물로 진파리 7호분에서 출토된 해�음무늬 금동관이 보여지고 있다.
고구려인의 삶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 5 세기 중입 고구려는 우리나 라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확보하였고 이 시기 전후에 만들어진 초기 고분벽화는 생전의 풍요로움이 내세에서도 재 현되기를 바라는 생활 풍속을 주로 그리고 있다 . 고구려 시리 즈 마지막 묶음으로 고구려 고분벽화를 통해서 본 고구려인들 의 모습과 그들의 생활상을 소개한다 .
고구려인은 남넌 모두 저고리와 바지를 입고 여자는 바지 위 에 흔히 치마를 입었다 웃옷이나 겉옷의 소매 끝과 깃 , 치마의 단 등 쉽게 더러워지고 헤질 수 있는 곳에 다른 색의 전을 대었는데 장식적인 효과도 겸하고 있다 식생활을 살펴보면 조와 콩을 비롯하여 밀 , 보리 , 수수 , 기장 등 곡물류를 가루를 내어 시루에 쪄 먹고 소 , 돼지 , 닭 , 개를 사육하고 멧돼지 , 노루 , 꿩 등을 사냥하여 육식을 하였다 . 고구려의 고기 요리 가운데 하 나로 여겨지는 맥적 ( 鎬炙 ) 은 오늘날의 불고기의 전신이리 할 수 있다 . 고분벽화에는 다양한 건물 양식이 표현되었는데 귀족 의 저택은 사랑채와 안채로 나뉘어 뒤쪽 안채를 중심으로 부엌과 고깃간 , 방앗간 , 외양간 , 마구간 , 차고 등을 두고 넓은 뜰 한편에는 정윈도 가꾸었다 . 평민의 집은 집터 유적을 통해 볼 수 있는데 한 칸이나 두 칸의 방을 가진 간단한 구조를 보여 준다 또한 , 벽화를 통해서 고구려인들 활쏘기 , 사냥과 함께 무 용 , 악기 연주 등의 예술을 즐겼음을 알 수 있다 .
우표는 안악 3 호무덤 ( 북한 황해남도 ) 벽화 중 부엌의 모습과 무용총 ( 중국 집안 ) 벽화 중 주인이 손님을 맞이하고 있는 모습을 담고 있다 우표 전지의 변지는 덕흥리벽화무덤 ( 북한 남포 ) 의 귀족 부인의 나들이 모습과 무용총 중에서 무용수들이 춤추는 장면 , 시종들이 상을 나르는 모습 , 뿔나팔을 부는 모습 , 수산리 벽화무덤 ( 북한 남포 ) 벽화 중 재주 부리는 장면 , 그리고 고구려 의 대표적인 항아리인 귀가 네 개인 사이호 ( 四目壺 ) 를 소개하 고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