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심사/화폐 엽서 우표

[스크랩] 세계 최초 우표

감효전(甘曉典) 2012. 7. 21. 12:05

 

우표의역사
4뎁스블릿세계 최초 우표
세계 최초의 우표 1페니/1penny와 2펜스/2pence
이 세상에 우표가 처음 나온 것은 1840년입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약 170여 년 전의 일입니다. 우표가 없었던 아주 먼 옛날에도 우편의 왕래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우표가 없었던 시대에는 오늘날과 같이 편지를 부치는 사람이 우편 요금 대신 우표를 붙이는 것이 아니라, 편지를 받는 사람이 우편 요금을 현금으로 주는 제도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당시의 우편 요금은 오늘날의 기차 요금처럼 비록 국내에서 부치는 편지라 해도 거리마다 달랐고, 무게와 편지의 장수마다 달랐기 때문에 우체부가 편지를 전해 줄 때 개봉하여 그 자리에서 우편 요금을 계산하는 복잡한 제도였습니다.
그런데 언제 편지가 올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요금을 지불할 돈이 없을 때에는 부득이 우편물을 되돌려 주고 다시 와 달라고 사정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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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당시에는 돈이 없어서 기다렸던 편지를 받지 못하는 안타까운 사람이 더 많았으며, 더군다나 우편 요금이 비쌌던 이유로 우편을 이용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일반 국민들에게 널리 이용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불편한 우편 제도에 대해 개혁안을 연구, 제의한 사람은 영국의 교육자이자 세금 개혁가인 로랜드 힐(후에 로랜드 힐 경)이었습니다
세계 최초의 우표 창시자 로랜드 힐 경
/ Sir Rowland Hill(1795~1879)
그는 1836년 12월 「우체국의 개혁 그 중요성 Post office : Its Importance and Practicability」이란 논문에서 우편 요금의 지불 방법으로 우체국에서 판매하는 우표를 붙이는 새로운 방법을 고안해내고 이 안을 정부에 제출했습니다. 그러나 3년이란 긴 논쟁 끝에 하원과 상원에서 통과되어 드디어 1839년 8월 17일 빅토리아 여왕의 재가를 얻어 다음 해부터 역사적인 영국내의 균일 우편요금 제도를 실시하게 되었고, 이 개혁안에 따라 요금 선불을 위한 방법으로 우표가 창안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오랜 노력 끝에 1840년 5월 6일 빅토리아 여왕의 옆모습을 그린 1페니와 2펜스로 된 2종의 우표가 세계 최초로 발행되었습니다. 수집가들은 이 우표를 색깔에 따라 페니 블랙(Panny Black), 펜스 블루(Pence Blue)라는 애칭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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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초 우표의 디자인
편지에 우표를 붙이자는 안이 확정되고 우표 디자인을 위하여 영국의 제무국에서 우표 도안을 공모한 결과 자그마치 2,600건의 작품이 접수되었으나, 그 중 한 건도 채택되지 않자 생각다 못한 로랜드 힐 경이 직접 우표 디자인에 착수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우표의 모델로 조각가 윌리엄 욘(William Wyon)이 만든 빅토리아 여왕의 초상이 든 아름다운 메달을 선정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메달을 모델로 두 장의 우표 디자인을 물감으로 스케치하고, 찰스와 프레드릭 하이스 (Charles and Fredric Heath) 부자(父子)에게 조각을 부탁하여 완성된 조각으로 퍼킨스 베이콘사(社)(Perkins, Bacon and co.)에서 인쇄함으로써 세계 최초 우표가 탄생된 것입니다.

이 우표는 1840년 1월 1일 발행될 예정이었으나 디자인이 늦어져 1840년 5월 6일에야 역사적인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윌리엄 욘(Willam Wyon)이 만든 기념 메달로 우표 도안의 모델이 된 빅토리아 여왕의 옆모습
이렇게 하여 발행된 세계 최초 우표는 1페니(1 Penny)의 흑색 우표와 2펜스(2 Pence)의 청색 우표 두 종류로 전지 구성은 240장이며 우표인면 하단의 양쪽 귀퉁이 □안에 알파벳 문자를 각각 다르게 넣었습니다. 또 변지에는 판번호와 각종 문자를 넣었기 때문에 문자와 기호에 따라 우표 한 장 한 장 마다 평가를 달리하고 있습니다.

당시 전지(全紙) 한 장의 판매가는 1페니 전지 한 장에 1파운드, 2펜스 전지 한장은 2파운드로 판매하였습니다. 인쇄는 요판(凹版)이며 전부 무공(imperforate)우표로 되어 있습니다.
로랜드 힐 경이 직접 스케치한 세계 최초 우표의 시안
세계 최초 우표 1페니(Penny) 판 번호와 문자가 들어 있는 제 3코너   세계 최초 우표 2펜스(Pence)판 번호와 문자가 들어 있는 제4코너 블럭
회색블릿최초 우표 발행 당시 영국의 화폐 단위

12 Pencd = 1 Shilling(실링) 20 Shillings = 1 Pound(파운드) 현재는 100 Pence 가 1 Pound
Penny와 Pence는 같은 화폐 단위로 우리나라의 원(Won)과 같다. Pence 와 Penny의 복수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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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뎁스블릿세계 최초의 우편 봉투
세계 최초의 우편 봉투는 호가 윌리엄 멀레디(William Mulready)가 도안하였다하여 수집가들은 멀레디 봉투(Mulready Envelope)라고 부릅니다.
세계 최초의 우편 봉투(Mulrady Envelope): 이 봉투의그림은 우주, 자연, 과학 등을 묘사한 것으로 우편사를 연구하는 수집가에게는 물론, 테마틱 자료로도 활용도가 매우 높은 봉투이다. 이 봉투는 1840년 5월 1일자 일부인이 찍혀 있는데 최초 우표 발행일보다 5일이 빠르다.
‘POSTAGE ONE PENNY’란 요금이 표시된 이 봉투는 1840년 5월 6일 세계 최초의 우표가 탄생되기 전에 이미 제작되어 최초 우표와 같은 시기에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우표에 의하여 실제로 체송된 것이 있는 것으로 보아 세계 최초 우표보다 이전에 발행되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 봉투를 처음 발행할 당시에는 우편 요금 균일 제도의 일환으로 요금 선납을 목적으로 하였기 때문에 일정한 크기의 봉투에 POSTAGE ONE PENNY(우편료 1페니)라는 요금이 표시되어 있어, 내용물(우편물)이 봉투보다 크거나 부피가 많았을 때에는 취급할 수 없는 등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어 별도로 우표를 만들게 된 것입니다. 이 봉투에 넣을 수 있는 우편물의 중량은 1온스 당 1페니였으며, 무게가 초과되면 1온스 당 1페니를 추가로 받았는데 이 때에 요금이 초과되면 그 금액에 해당하는 요금만큼의 우표를 붙이게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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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뎁스블릿우리나라 최초 우표
(1) 문위(文位)우표의 탄생
문위우표 5문(文)   문위우표 10문(文)
우표 아래쪽 여백에 우표를 인쇄한 곳(명판)인 ‘대일본제국정보 대장성인쇄국제조’(大日本帝國政府 大藏省印刷局製造)라는 문자가 보인다.
우리나라 신식 우편 제도의 아버지로 불리는 홍영식(洪英植)을 중심으로 한 신진개혁파 정치 지도자들의 끈질긴 노력으로 1884년 11월 18일(음력 10월 1일) 역사적인 우정총국이 업무를 개시함으로써 우리나라 최초의 우표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문의우표는 이 때 발행된 우표의 액면이 당시의 화폐 단위인 ‘문(文)’이었기 때문에 수집가들 사이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우정총국이 폐쇄될 때까지 도착이 안 되어 사용하지 못한 우표 3종
우리 정부에서 5종의 우표 인쇄를 일본 대장성인쇄국에 의뢰하고, 우정총국의 개국과 동시에 발매할 예정이었으나, 우정총국 개국일까지 5문과 10문 2종만이 도착되어 한성(서울)과 인천 간에 체송된 우편물에 사용되었을 뿐, 나머지 25문과 50문, 100문의 3종은 같은 해 12월 4일 발발한 갑신정변의 실패로 우정총국이 폐쇄될 때까지 현품이 도착되지 않아 미 발행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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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근대 우정의 창시자 홍영식
금석 홍영식 선생 (1855~1884)
홍영식(洪英植)은 본관이 남양으로 철종 6년(1855년) 12월 29일 영의정 홍순목(洪淳穆)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호는 금석(琴石)으로 남달리 총명하여 18세의 나이로 칠석사(七夕試)에 급제한 영재였다고 합니다.

금석 홍영식은 개화의 선각자로서 한국 근대 우편과 통신의 창시자이자 신식 문물 도입의 주역으로 김옥균 등과 갑신정변(1884년 12월)을 일으켜 급진적인 개화를 시도하였으나 3일 만에 실패로 끝나자, 동지들이 외국으로 망명을 가라는 것도 듣지 않고 고종을 호종(護從)하다가 창덕궁 담 넘어 옥류천 상류에서 사지를 30세의 젊은 나이로 청병에 의해 피살되고 말았습니다. 갑신정변 실패로 노륙(努戮/사지를 찢어 죽임)의 형을 당하였으나, 1895년 갑오경장 뒤 그의 공적을 인정받아 억울하게 뒤집어쓴 죄를 씻어 주는 신원(伸寃)을 받았으며 1910년에는 규장각 대제학의 추증(追贈)으로 시호를 충민공(忠愍公)에 봉임하게 되었습니다.
 
(3) 20여 일의 단명에 그친 근대 우편제도
문위우표는 1884년 11월 18일 우정 사업 개시와 함께 발행되었으나, 갑신정변의 실패로 같은 해 12월 8일 왕명에 의하여 폐지됨으로써, 대한민국 최초로 발행되었던 문위우표는 모처럼 이룩한 신식 우정 사업제도와 함께 불과 20여 일 만에 그 명을 다 했던 것입니다.
우정총국청사(종로구 견지동)와 그 당시의 우체통
우정 사업을 시작한 지 18일째 되던 1884년 12월 4일 우정국 개설 축하연을 계기로 개화파의 홍영식,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이상재등의 일으킨 갑신정변의 실패로 여기에 가담한 자는 물론 개화당 일파의 몰락을 가져오고 말았으며, 이에 연루된 사람은 대부분 자취를 감추게 되었고, 증거를 없애기 위하여 그 동안 오간 서신 등 물증이 될 만한 것은 철저히 없앴거나 불태워 버렸기 때문에 당시에 사용한 우편물의 실체봉투나 우편 사료가 될 만한 물증이 없는 실정입니다.

 

 

 

 

<출처;tong.nate.com/kwdkr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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