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심사/고서화(古書畵)

[스크랩] 67. 천자문(宋ㆍ趙佶)

감효전(甘曉典) 2012. 7. 10. 13:23

 

 

67. 千字文(宋ㆍ趙佶)

 

이는 송 휘종인 조길(趙佶)이 쓴 작품으로 지본이다.

남조의 양나라 주흥사(周興嗣)가 『천자문』을 편찬한 이후 이 책은 민간에 널리 알려졌다. 아이들의 교과서로 쓰임과 동시에 일반 학자들의 환영을 받아 위로는 황제에서 아래로는 백공에 이르기까지 모두 『천자문』을 알았을 뿐만 아니라 각종 서체로 이를 쓴 사람이 대대로 이어졌다. 그 중에서도 조길의 <천자문>은 가장 빛나는 작품이다.

조길(趙佶, 1082-1135)은 신종의 11번째 아들로 처음에 단왕(端王)에 올랐다가 황제에 즉위했다. 그를 휘종 또는 유릉(裕陵)이라 부르는데, 황제가 된 뒤에 정사를 돌보지 않고 사치를 즐겨 충신을 멀리하고 간신을 가까이 하여 국력이 약하고 백성이 빈곤에 빠졌다. 정강지변(靖康之變) 이후 나라가 망하고 포로가 되어 북녘에서 죽었던 역사상 유명한 혼군이었다. 오직 서화와 시사의 예술에만 조예가 깊었기 때문에 황제가 직업이 아니라 오히려 예술가가 직업이었다. 재위 25년 동안 내부에 소장한 법서와 명화는 이전보다 백배나 많았다. 그는 서화의 배움을 크게 일으키고 서화원(書畵院)을 설치하여 조회에 참석시킬 정도로 우대했다. 일찍이 문신들을 불러 내부에 소장한 역대 서화를 편찬하도록 칙령을 내려 『선화서보(宣和書譜)』ㆍ『선화화보(宣和畵譜)』ㆍ『선화박고도(宣和博古圖)』를 펴냈다. 그는 서화ㆍ산수화ㆍ화조화ㆍ인물화ㆍ묵죽 등에 정통하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로 대가였다. 그의 서예는 설직ㆍ황산곡을 배워 그 법도를 변화시켜 스스로의 면모를 이루었다. 필세가 굳세고 표일한 것으로 유명한 ‘수금체(瘦金體)’가 바로 이것이다.

이 작품은 ‘수금체’의 대표작으로 23세에 썼다. ‘수금체’는 본래 마땅히 수근체(瘦筋體)이나 ‘筋’을 ‘金’으로 바꾼 것은 황제의 글씨를 존중함에서 나온 것이다. 고증에 의하면, ‘수금체’는 조길이 창제한 것이 아니라 당나라 설요(薛曜)가 쓴 <하일유석종시(夏日遊石淙詩)>에서 나왔다. 그러나 이를 배운 사람이 적고, 또한 황제가 썼으므로 천하가 모두 이를 본받았기 때문에 후인들은 이를 조길이 창제한 것이라 했다.

조길의 ‘수금체’와 설요의 면모를 자세히 살펴보면 다른 점이 있다. 용필은 전체적으로 가지런하고 가파르며, 필획은 더욱 과장이 두드러진다. 비록 각 글자 필획의 굵고 가는 변화가 크지 않지만, 단정한 점과 절필(折筆)ㆍ절점(折點), 그리고 짧은 획과 세로획의 강조와 과장을 통해 골력을 굳세게 만들었다. 따라서 필획은 비록 가늘고 파리하나 조금도 유약한 느낌이 없다. 별과 날획 및 긴 획의 처리가 매우 특색이 있다. 충분히 펼쳐 표일하고 탄력성이 풍부하다. 별획은 마치 비수와 같고, 날획은 칼로 자른 듯 하며, 갈고리는 가늘고 길면서 안으로 수렴시켰다. 표일한 곳은 마치 대나무와 난초 잎사귀와 같고, 굳센 곳은 또한 절차고와 같으니 이른바 ‘철획은구(鐵?銀鉤)’가 여기에서 볼 수 있다. 기운으로 보면, 맑고 굳세며 엄정하여 하나의 필획도 구차함이 없고, 갈고리로 연결하여 조합을 이룸에 질서가 정연하다. 게다가 행서의 필세를 섞어 표일한 자태와 활발한 특색이 풍부하고 서권기가 물씬거린다. 이러한 점은 일반적 해서가 이를 수 없는 경지이다. 탐구해보면, 송나라 때 ‘산탁필(散卓筆)’이 유행하여 궁중에서도 여전히 경호를 많이 사용했다. 조길은 공필화에 뛰어났고 경필의 탄력성을 잘 이용했기 때문에 필획들이 마치 활시위를 당기는 것 같이 빠르게 달려 표일함을 벗어나 사람들이 접할 겨를이 없는 것 같다. 그 현란하고 아름다운 곳은 설요의 글씨를 훨씬 능가한다. 그러므로 ‘수금체’가 천하에 유행하자 화공들은 이러한 서체로 제발을 썼으니, 이는 실제로 필연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글씨는 파리하고 굳세야 비로소 정신이 있음을 귀히 여긴다[書貴瘦勁方有神].”라는 것으로 조길은 여기에서 깊은 삼매의 경지를 얻었다.

옛날부터 서화를 즐겼던 제왕들이 많았지만 진정 뛰어난 사람은 적었다. 그 중에 뛰어난 사람으로는 이전에 이후주가 있은 뒤에 송 휘종이 있었으니 ‘십전노인(十全老人)’이라 일컫는 건륭황제 조차도 이들을 따를 수 없다.

출처 : 한국서학연구소
글쓴이 : 한국서학연구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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