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정당사엔 공당(公黨)만 있는 게 아니다. 지하당(地下黨). 당비를 내는 ‘당원’이나 당사, 선거를 통해 확보한 ‘영토’ 따위는 애초에 있을 수 없는 비밀조직이다. 북한의 지령과 이념, 조직원만 있을 뿐이다. 이런 비밀조직이 엄연히 실재했던 게 사실이다.
지하당의 뿌리는 깊다. 역사도 오래다. 해방 후 우파 민족주의 정당과 주도권 다툼을 벌이다 김일성에 숙청당한 박헌영의 남로당(남조선노동당)에서 1980년대 이후 북한 주체사상에 심취한 NL(민족해방) 계열이 1992년에 만든 민혁당(민족민주혁명당)까지 지하당은 반세기가량 명맥을 유지해왔다.
최후의 지하당 격인 민혁당 사건 연루자들이 요즘 한꺼번에 수면 위로 떠올랐다. 김영환, 이석기, 하영옥. 1982학번 동기로 NL의 원조다. ‘종북 주사파의 뿌리’인 셈이다. 그러나 현재 세 사람의 운명은 엇갈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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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서울대 법대 82학번인 그는 북한에 포섭되지 않은 채 스스로 ‘구국의 소리’ 방송과 주체사상 관련 서적을 탐독한 자생적 종북주의자였다. 그러곤 “식민지인 한국은 반미투쟁을 전면화해야 한다”며 NL혁명이론(주체사상)을 주창했다.
그는 그런 자신의 생각을 수도권 대학에 전파하기 위해 『강철서신』을 썼다. 『강철서신』에 담긴 주체사상은 마르크스-레닌주의로는 한반도의 현실을 설명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느낀 학생들에게 솔깃했다. “어차피 사회주의 혁명을 하려면 사회주의 세력인 북한을 우군으로 삼아야 한다”면서 한 민족·통일을 외치는 ‘토착 전술론’에 매력을 느낀 거다.
그런 김영환에게 89년 7월 “김 선생과 통일사업을 논하고 싶소”라며 접근한 사람이 있었다. 윤택림이란 남파 간첩이었다.
김영환은 그와 만난 후 조선노동당에 입당했다. 평양으로 가서 91년 정식으로 입당식까지 치렀고, 북한으로부터 ‘관악산 1호’란 대호(代號·암호명)를 얻었다.
윤택림으로부터는 평양방송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암호책자, 난수표, 해독표도 받았다. 그해 5월엔 북한 잠수정을 타고 두 번째 밀입북했다. 북한에 17일간 머물면서 급기야 묘향산에 있는 김일성 별장에서 김일성(당시 주석)과 두 차례 면담까지 하기에 이른다.
국정원 수사기록에는 김일성이 그때 김영환에게 ‘선생’이란 호칭을 사용하면서 “강철서신은 참 훌륭한 글”이라고 칭찬했다는 대목이 있다.
수사 기록에 따르면 김일성은 이런 말도 했다.
“이란의 라프 산자니 대통령이 공화국을 방문했을 때 내가 ‘이란은 어떻게 혁명에 성공했느냐’고 물어봤더니 ‘따로 혁명조직이 있었던 게 아니라 회교조직을 통한 사상의 전파로 성공할 수 있었다’고 하더라. 중국 공산당은 국민당 사령관의 부관을 먼저 끌어들인 뒤 (부관의 상사인) 사령관을 항복하도록 했다. 이렇게 해서 피 한 방울 안 흘리고 군인 30만 명을 끌어들일 수 있었다. 남조선이 미국의 식민지라는 사실을 폭로하고 남조선 인민 1000명만 주체사상으로 무장시키면 남조선 혁명은 이룩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에 김영환은 “수령님의 뜻을 받들어 남한에서 조직활동을 열심히 하겠다”고 답변했다고 한다.
‘민혁당’은 그 후 창당됐다. 92년 3월, 김일성을 면담하고 온 뒤 8개월 뒤의 일이다. 김영환은 강화군 외포리의 ‘드보크’(간첩장비 비밀매설지)를 통해 40만 달러(당시 3억원), 권총 2정, 실탄, 무전기 2대 등을 받았다. 민혁당 출신 홍진표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이사는 저서 『지성과 반지성』에서 민혁당의 조직원이 “전국적으로 100명 정도”라고 했다. 그러나 영향권에 있던 사람을 포함하면 수천 명에 달했을 거라는 추정도 있다.
그런 김영환이 왜 전향을 한 것일까. 김영환은 훗날 “북한의 주체사상은 황장엽이 만든 주체철학에 민족주의, 마르크스-레닌주의, 수령론을 합친 것인데 김일성은 주체사상에 대해 막상 거의 관심도 없고 잘 모른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북한 학자들과의 토론에서도 주체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 사람들의 창의성이 발휘되지 않았음을 느꼈다고 했다.
북한 상급자가 하급자를 고압적으로 대하는 모습에도 회의 하게 됐다. 자생적 종북주의자 김영환을 전향하게 한 계기가 아이러니하게도 북한 방문 후였던 것이다. 민혁당은 결국 94년 김일성 사망 후 주체사상에 회의를 느낀 김영환이 97년 7월 해체했다. 그러나 이때까지 당국에 의해 지하당 민혁당의 실체가 드러난 건 아니었다. 김영환은 민혁당 해체를 선언했지만 이에 불응하고 민혁당을 계속 하려 한 이가 하영옥이다.
◆하영옥=국정원 수사기록에 따르면 그는 민혁당 ‘넘버2’였다. 82년 서울대 법대에 입학한 하영옥은 89년 ‘반제청년동맹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조선노동당에 입당했다. 김영환(‘관악산 1호’)에 이어 ‘관악산 2호’가 됐다. 그는 북한에는 가지 않고 서울 도봉산에서 입당식을 했다. 그 자리에서 하영옥은 “조선노동당에 입당해 매우 영광스럽고 당원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할 것을 맹세한다”는 결의를 표명했다고 한다. 그는 97년 민혁당이 해산하자 이에 반발, 영남위원회와 경기남부위원회를 중심으로 당 조직을 수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98년 서울대 교수회관에서 북한이 직접 파견한 간첩으로부터 북한이 자신을 김영환 대신 민혁당 총책으로 임명한 사실과 입북 제의를 듣게 된다. 그러나 98년 12월 그가 타고 가려던 북한 반잠수정이 군에 발각돼 밀북 계획은 미수에 그친다.
민혁당의 단서가 포착된 것은 이때였다. 당시 남해상에서 해군에 격침된 북한 간첩 침투용 반잠수정 안에서 발견된 유류품 때문이다. 잠수정 안에 있던 공작원의 시신 등에서 김영환·하영옥 등의 이름과 전화번호 등이 나왔고, 이를 토대로 국정원이 추적 수사를 하는 과정에서 민혁당 하부망의 핵심 인물로 이석기를 찾아낸 것이라고 국정원은 발표했었다.
국정원은 하영옥이 북한 공작원과 잠수정을 타고 밀입북하려 했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자 북한 공작원만 입북하려다 격침된 것으로 봤다. 김영환은 잠수정 침몰로 민혁당의 실체가 드러난 줄 모르는 상태에서 99년 8월 귀국했다. 그러나 국정원이 민혁당의 존재를 파악한 것을 뒤늦게 안 김영환은 월간 말지를 통해 ‘간첩사건이 조작되고 있다’는 인터뷰를 한 뒤 출국을 시도했다. 말지 인터뷰는 김영환이 민혁당 관련자들에게 도피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주기 위해서 한 것이었다. 당국은 이런 움직임을 알면서도 김영환을 체포하지 않다가 나중에 하영옥 등과 함께 해외로 출국하려던 김영환을 체포했다.
『진보의 그늘』 저자 한기홍 북한민주화네트워크 대표에 따르면 ‘2차 민혁당’, 즉 재건된 민혁당은 97년 김영환이 해체한 직후부터 99년 그가 구속될 때까지 조직됐었다고 한다. 그는 99년 9월 반국가단체 구성 혐의로 8년형을 선고 받아 4년간 복역한 뒤 2003년 4월 30일 노무현 대통령 취임 특별사면으로 석방됐다. 이후 경기도에서 학원 강사를 하고 있다. 그가 민혁당 재건을 꾀하고 있다고 최근 동아일보가 보도하자 하영옥은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아무리 자기들의 정치적 목적이 있다고 해도, 선입견에 (맞춰) 내가 뭐 하고 있을 것이라고 짐작하는 식으로 함부로 소설을 쓰는 짓은 너무한 게 아닌가”라고 항변했다. 그러면서 “지금 (통합진보당) 당원이지만 아무런 활동을 한 바 없다. 민혁당 사건으로 옥살이를 한 후 애들을 먹여 살리려고 학원 강사를 한 지 8년이 됐고 아무런 활동도 못했다”고 말했다.
◆이석기=두말할 것 없이 논란의 중심에 있는 인물이다. 현재는 ‘이석기 정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국정원 수사 결과 그는 민혁당의 경기남부위원장이었다.
82년 한국외대 용인캠퍼스 중국어통번역과에 입학한 그는 89년 하영옥 등과 함께 민혁당 전신 격인 ‘반제청년동맹’ 결성에 참여했다. 당시 하영옥이 중앙위원장, 이석기 등 4명은 중앙위원을 맡았다. 반제청년동맹엔 89년에 김영환도 중앙위원으로 합류했다.
최근 하태경 새누리당 당선인은 “비례대표 2번 이석기 당선인은 민혁당의 경기남부위원장 출신으로 서열 5위의 핵심 고위직이었다”고 주장했다. ‘넘버 5’란 하태경 당선인의 지적은 이석기가 중앙위원 신분이었기 때문에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이석기는 하영옥 등 99년 8월부터 민혁당 사건 연루자들이 줄줄이 검거됐을 때 붙잡히지 않고 2년 넘게 도피생활을 했다. 그러다 2002년 5월 체포된 뒤 징역 2년6개월을 선고 받고 2003년 8·15 특사로 풀려났다. 그에게 여전히 ‘종북’이란 의혹의 시선이 모아지는 이유는 이런 전력 때문이다.
한기홍 대표는 “이석기가 합법 정당으로 진입한 것은 검거 후 신분이 수사기관에 노출되면서 지하활동에 장애가 생겼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이런 질문이 나올 때마다 애매모호한 화법으로 상세한 설명을 하지 않고 있다.
지하당의 뿌리는 깊다. 역사도 오래다. 해방 후 우파 민족주의 정당과 주도권 다툼을 벌이다 김일성에 숙청당한 박헌영의 남로당(남조선노동당)에서 1980년대 이후 북한 주체사상에 심취한 NL(민족해방) 계열이 1992년에 만든 민혁당(민족민주혁명당)까지 지하당은 반세기가량 명맥을 유지해왔다.
최후의 지하당 격인 민혁당 사건 연루자들이 요즘 한꺼번에 수면 위로 떠올랐다. 김영환, 이석기, 하영옥. 1982학번 동기로 NL의 원조다. ‘종북 주사파의 뿌리’인 셈이다. 그러나 현재 세 사람의 운명은 엇갈려 있다.
그는 그런 자신의 생각을 수도권 대학에 전파하기 위해 『강철서신』을 썼다. 『강철서신』에 담긴 주체사상은 마르크스-레닌주의로는 한반도의 현실을 설명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느낀 학생들에게 솔깃했다. “어차피 사회주의 혁명을 하려면 사회주의 세력인 북한을 우군으로 삼아야 한다”면서 한 민족·통일을 외치는 ‘토착 전술론’에 매력을 느낀 거다.
그런 김영환에게 89년 7월 “김 선생과 통일사업을 논하고 싶소”라며 접근한 사람이 있었다. 윤택림이란 남파 간첩이었다.
김영환은 그와 만난 후 조선노동당에 입당했다. 평양으로 가서 91년 정식으로 입당식까지 치렀고, 북한으로부터 ‘관악산 1호’란 대호(代號·암호명)를 얻었다.
윤택림으로부터는 평양방송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암호책자, 난수표, 해독표도 받았다. 그해 5월엔 북한 잠수정을 타고 두 번째 밀입북했다. 북한에 17일간 머물면서 급기야 묘향산에 있는 김일성 별장에서 김일성(당시 주석)과 두 차례 면담까지 하기에 이른다.
국정원 수사기록에는 김일성이 그때 김영환에게 ‘선생’이란 호칭을 사용하면서 “강철서신은 참 훌륭한 글”이라고 칭찬했다는 대목이 있다.
수사 기록에 따르면 김일성은 이런 말도 했다.
“이란의 라프 산자니 대통령이 공화국을 방문했을 때 내가 ‘이란은 어떻게 혁명에 성공했느냐’고 물어봤더니 ‘따로 혁명조직이 있었던 게 아니라 회교조직을 통한 사상의 전파로 성공할 수 있었다’고 하더라. 중국 공산당은 국민당 사령관의 부관을 먼저 끌어들인 뒤 (부관의 상사인) 사령관을 항복하도록 했다. 이렇게 해서 피 한 방울 안 흘리고 군인 30만 명을 끌어들일 수 있었다. 남조선이 미국의 식민지라는 사실을 폭로하고 남조선 인민 1000명만 주체사상으로 무장시키면 남조선 혁명은 이룩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에 김영환은 “수령님의 뜻을 받들어 남한에서 조직활동을 열심히 하겠다”고 답변했다고 한다.
‘민혁당’은 그 후 창당됐다. 92년 3월, 김일성을 면담하고 온 뒤 8개월 뒤의 일이다. 김영환은 강화군 외포리의 ‘드보크’(간첩장비 비밀매설지)를 통해 40만 달러(당시 3억원), 권총 2정, 실탄, 무전기 2대 등을 받았다. 민혁당 출신 홍진표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이사는 저서 『지성과 반지성』에서 민혁당의 조직원이 “전국적으로 100명 정도”라고 했다. 그러나 영향권에 있던 사람을 포함하면 수천 명에 달했을 거라는 추정도 있다.
그런 김영환이 왜 전향을 한 것일까. 김영환은 훗날 “북한의 주체사상은 황장엽이 만든 주체철학에 민족주의, 마르크스-레닌주의, 수령론을 합친 것인데 김일성은 주체사상에 대해 막상 거의 관심도 없고 잘 모른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북한 학자들과의 토론에서도 주체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 사람들의 창의성이 발휘되지 않았음을 느꼈다고 했다.
북한 상급자가 하급자를 고압적으로 대하는 모습에도 회의 하게 됐다. 자생적 종북주의자 김영환을 전향하게 한 계기가 아이러니하게도 북한 방문 후였던 것이다. 민혁당은 결국 94년 김일성 사망 후 주체사상에 회의를 느낀 김영환이 97년 7월 해체했다. 그러나 이때까지 당국에 의해 지하당 민혁당의 실체가 드러난 건 아니었다. 김영환은 민혁당 해체를 선언했지만 이에 불응하고 민혁당을 계속 하려 한 이가 하영옥이다.
민혁당의 단서가 포착된 것은 이때였다. 당시 남해상에서 해군에 격침된 북한 간첩 침투용 반잠수정 안에서 발견된 유류품 때문이다. 잠수정 안에 있던 공작원의 시신 등에서 김영환·하영옥 등의 이름과 전화번호 등이 나왔고, 이를 토대로 국정원이 추적 수사를 하는 과정에서 민혁당 하부망의 핵심 인물로 이석기를 찾아낸 것이라고 국정원은 발표했었다.
국정원은 하영옥이 북한 공작원과 잠수정을 타고 밀입북하려 했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자 북한 공작원만 입북하려다 격침된 것으로 봤다. 김영환은 잠수정 침몰로 민혁당의 실체가 드러난 줄 모르는 상태에서 99년 8월 귀국했다. 그러나 국정원이 민혁당의 존재를 파악한 것을 뒤늦게 안 김영환은 월간 말지를 통해 ‘간첩사건이 조작되고 있다’는 인터뷰를 한 뒤 출국을 시도했다. 말지 인터뷰는 김영환이 민혁당 관련자들에게 도피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주기 위해서 한 것이었다. 당국은 이런 움직임을 알면서도 김영환을 체포하지 않다가 나중에 하영옥 등과 함께 해외로 출국하려던 김영환을 체포했다.
『진보의 그늘』 저자 한기홍 북한민주화네트워크 대표에 따르면 ‘2차 민혁당’, 즉 재건된 민혁당은 97년 김영환이 해체한 직후부터 99년 그가 구속될 때까지 조직됐었다고 한다. 그는 99년 9월 반국가단체 구성 혐의로 8년형을 선고 받아 4년간 복역한 뒤 2003년 4월 30일 노무현 대통령 취임 특별사면으로 석방됐다. 이후 경기도에서 학원 강사를 하고 있다. 그가 민혁당 재건을 꾀하고 있다고 최근 동아일보가 보도하자 하영옥은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아무리 자기들의 정치적 목적이 있다고 해도, 선입견에 (맞춰) 내가 뭐 하고 있을 것이라고 짐작하는 식으로 함부로 소설을 쓰는 짓은 너무한 게 아닌가”라고 항변했다. 그러면서 “지금 (통합진보당) 당원이지만 아무런 활동을 한 바 없다. 민혁당 사건으로 옥살이를 한 후 애들을 먹여 살리려고 학원 강사를 한 지 8년이 됐고 아무런 활동도 못했다”고 말했다.
82년 한국외대 용인캠퍼스 중국어통번역과에 입학한 그는 89년 하영옥 등과 함께 민혁당 전신 격인 ‘반제청년동맹’ 결성에 참여했다. 당시 하영옥이 중앙위원장, 이석기 등 4명은 중앙위원을 맡았다. 반제청년동맹엔 89년에 김영환도 중앙위원으로 합류했다.
최근 하태경 새누리당 당선인은 “비례대표 2번 이석기 당선인은 민혁당의 경기남부위원장 출신으로 서열 5위의 핵심 고위직이었다”고 주장했다. ‘넘버 5’란 하태경 당선인의 지적은 이석기가 중앙위원 신분이었기 때문에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이석기는 하영옥 등 99년 8월부터 민혁당 사건 연루자들이 줄줄이 검거됐을 때 붙잡히지 않고 2년 넘게 도피생활을 했다. 그러다 2002년 5월 체포된 뒤 징역 2년6개월을 선고 받고 2003년 8·15 특사로 풀려났다. 그에게 여전히 ‘종북’이란 의혹의 시선이 모아지는 이유는 이런 전력 때문이다.
한기홍 대표는 “이석기가 합법 정당으로 진입한 것은 검거 후 신분이 수사기관에 노출되면서 지하활동에 장애가 생겼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이런 질문이 나올 때마다 애매모호한 화법으로 상세한 설명을 하지 않고 있다.
82학번 세 명 중 ‘넘버 1’이었던 주사파의 대부 김영환은 전향 후 북한 주민을 위한 운동을 하다 ‘국가안전위해죄’라는 죄목으로 52일째 중국에 구금돼 있다. 민혁당 조직 중 김영환의 지휘 하에 있던 수도권의 지하지도부 등은 전향 후 활동을 접거나 북한 민주화 운동을 하고 있다. 반면 이석기는 통합진보당 비례대표의 이름으로 의회 권력에 다가가고 있다. 10여 일 뒤면 그는 ‘지하당 출신 국회의원’으로 기록될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