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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규 유신헌법을, 이것은 반드시 개정돼야 된다, (1973년 3군단장 시절부터) 이렇게 생각을 했지만은…. (76년 12월) 중앙정보부장으로 가고 난 이후에 잘됐다, 이 기회에 순리적인 방법으로 한번 대통령의 머리를 한번 돌려 보자. …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또다시 내렸습니다.
변호사 그렇게 내린 것이 언제쯤 내렸습니까?
김재규 그러니까 작년(1978년)…, 도저히 안 되겠다 생각한 것은 작년 12월…. 생각을 해가지고서 금년 4월에 결행을 할려고 하다가 그거를 여러가지 여건이 안 맞아서 연기한 것이 10월26일.
변호사 아니, 4월달에 결행한 거는 어떤 방법으로 결행했습니까?
김재규 이거랑 마찬가지 방법입니다. 조건이 똑같습니다.
변호사 아, 그런 방법으로 했는데 그때 기회를 놓쳤다?
김재규 예. 그때는 경비가 너무 강화돼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연기가 된 겁니다.
◇ 궁정동의 거사와 한계
김재규 그때(1974년 건설부 장관 취임식) 당시에… 가슴에 딱 품고 몸 안에다가 총 메고 갔습니다. 만에 하나… 이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변호사 예.
김재규 그때는 혁명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대통령하고 나하고 둘이 그냥 같이 없어지자, 그렇게 해서 없앤다, 생각이었습니다.
변호사 예~.
김재규 여기에 건설부 장관 차를 타고 가는 그 자리가 바로 나하고 대통령 끝내는 순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변호사 참~나.
김재규 그것이 1974년 9월14일입니다. 그다음에 75년 정월 27일, 건설부 장관으로 있을 적에도, … 그때부터 사실 내가 마음속으로 생각을 했습니다.
김재규 육성 진술 파일 1
김재규 육성 진술 파일 2 [녹취록 다운받기. 한글파일] 김재규 마지막 소회 “전쟁에서 이긴 장군이적의 포로가 된 기분그래도 민주주의는 온다” 1979년 11월30일 류택형 변호사가 남한산성 육군교도소에서 만나 녹음해온 ‘첫 육성 진술 테이프’에서 김재규는 이미 수년 전부터 ‘박정희 제거’를 계획해왔다고 밝혔다. 구체적인 날짜와 상황까지, 듣는 귀를 의심할 정도로 놀라운 사실을 털어놓고 있었다. 김재규가 ‘차지철과 충성 경쟁에 밀리자 우발적으로 박정희를 쐈다’는 신군부의 발표를 완전히 뒤집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72년 선포 직후부터 유신헌법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한 그는 73년 3군단장에서 유신정우회 소속 국회의원, 이어 중앙정보부 차장을 거쳐 6개월 만인 74년 9월 건설부 장관으로 임명되자 장관 취임식 때 ‘동반폭사’를 구상했다가 포기했다. 또 79년 4월에도 궁정동 안가에서 결행을 모의했다가 박 대통령에 대한 경호 강화 때문에 미뤘다. 그리고 마침내 79년 10월26일, 오후 6시 무렵 궁정동 안가에 대통령과 경호실장, 비서실장이 도착하자 예정대로 만찬이 시작되었다. ‘두 여인’으로 불리던 대학생과 가수가 동석해 흥을 돋웠다. 7시40분께 김재규는 옆에 앉은 김계원 비서실장에게 “대통령을 똑똑히 모시라”고 질책한 뒤, 차지철에게 “이 버러지 같은 새끼”라며 먼저 한 발을, 다음으로 박정희를 향해 한 발을 쏘았다. 총알이 명중되지 않아 차지철이 화장실로 도망가자 그는 방 밖으로 나와 박선호의 권총을 받아들고 들어와 차지철을 다시 쏘고, 이어서 여자 가수가 무릎으로 받치고 있던 박정희의 머리에 결정적인 한 발을 쏘았다. 유신의 심장은 이렇게 멈췄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는 그 이후의 사태를 장악하지 못했다. 몇시간 뒤 그는 유신체제와 전두환 군부의 포로가 된다. 그것이 ‘10·26 혁명’의 한계였다. 전두환 군부의 음해에 대해 김재규는 자신이 비록 대통령을 희생시켰지만, 그 무덤 위에 올라설 만큼 타락하지 않았다며, 10·26 민주혁명으로 자유민주정권이 안전하게 출범하면 자신은 박 대통령의 묘소에 묘막을 짓고, 시묘하면서 여생을 바치겠다고 했다. 김재규의 말대로, 그때 박정희와 3700만 국민의 자유민주주의는 숙명적인 관계에 있었다. 부마민중항쟁이 그것을 잘 말해준다. 그때 박정희가 국민의 광범한 저항과 희생 끝에 물러났다면 오늘처럼 박정희에 대한 향수가 되살아나고 아주 영명했던 지도자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이 과연 가능했을까. ‘박정희 향수’는 그쯤에서 박정희가 죽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그렇다면 박정희 향수는 역설적으로 김재규의 ‘10·26 혁명’ 덕이라고 할 수 있다. 박근혜 인기의 배경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역사란 참 묘하게 흐른다. » 1979년 12월4일 육군본부 계엄보통군법회의 1차 공판을 시작으로 12월18일 9차 결심의 사형 구형까지 ‘10·26 사건’ 재판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김재규는 재판 과정에서 시종일관 의연한 태도로 자신의 ‘민주혁명 성공’을 주장했다. 어느날 재판정에서 피고인석으로 다가오는 가족들을 보고 환한 얼굴로 말을 건네는 김재규. <격동의 80년대> 중에서 박정희의 사생활 부인 육영수 피살된 뒤여성·측근들과 ‘황음’ 빠져궁정동 안가서 잦은 술판 ◇ 궁정동의 대행사·소행사 유신 말기 중앙정보부 의전과장이 하는 일은 중앙정보부 궁정동 본관 및 부장 집무실, 그리고 대통령이 사용하는 구관의 가동·나동·다동(한옥)의 관리와 특히 대통령의 저녁 대소연 행사를 지원하는 일이었다. 1974년 8월15일 부인 육영수가 문세광의 흉탄에 쓰러진 뒤, ‘황음’에 빠진 박정희는 외부와는 완전히 차단된 이들 안가에서 주연을 벌이고 주흥을 돋우기 위해 젊은 여자들을 불러들이기 시작했다. 이런 술판은 소행사와 대행사로 구분되는데, 대행사는 두 명 이상의 여인과 비서실장·경호실장·정보부장 등 권력자 3~4명이 참석해 벌이는 연회였고, 소행사는 대통령 혼자서 한 여인만을 불러서 즐기는 밀회를 말한다. 한 달에 대행사가 2~3회, 소행사가 7~8회, 도합 10회 안팎의 대소연이 벌어졌다. 이 자리에 여인을 공급하는 것도 의전과장의 몫이었다. 당시 의전과장 박선호가 서울 장충동에 있는 요정의 한 마담에게 소개받아 공급한 여인만도 100명을 넘는다. 이런 일에 신물이 난 박선호와 사무관 남효주가 “대통령이지만 너무 심하다”는 말을 나눈 적도 있었다. 특히 박선호는 자식을 키우고 있는 아버지로서 그런 일을 하는 것이 너무 괴로워 김재규에게 여러 번 그만두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그러나 김재규는 “자네가 없으면 궁정동 일을 어떻게 하느냐”며 그 뜻을 받아주지 않았다. 10·26은 나동에서 대행사를 벌이다 일어난 사건인 만큼, 재판 과정에서 변호인들이 대소연 행사에 대한 집중적인 신문을 펼쳤지만, 박선호의 답변을 가로막고 나선 것은 김재규였다. 김재규는 박정희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함구했고, 인간적 타락상이 공개되는 것을 한사코 저지했다. 그는 박정희를 지칭할 때는 꼭 “각하께서는 … 하셨습니다”라고 최상의 경의를 표하고 있었으며, 재판중에는 물론 죽는 날까지 그런 자세에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었다. 평소에도 대통령을 만날 때면 먼저 몸과 머리를 단정히 손질하고, 보고하는 서류 한장 한장에도 정성과 경의를 다 담았다. 이처럼 박정희에 대한 존경과 예의를 잃지 않았던 김재규가 변호인에게 구술해 자신의 이름으로 제출한 항소이유보충서에서 ‘구국여성봉사단과 큰 영애(박근혜)의 문제’를 언급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그때 김재규가 지시해서 작성한 보고서(박근혜 파일)는 지금도 중앙정보부 어딘가에 보관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박정희 향수’의 연원 독재 심장 쏜 10·26의 역설국민저항에 물러났다면박정희 찬양 가능했을까 ◇ 김재규 구명운동의 실패 김재규 나 하나, 나 지금 현재요. 아무것도 겁나지 않아요. … 누가 무슨 소리 하더라도 혁명은 성공했습니다. 변호사 알겠습니다. 예예. 김재규 이제는요, 아무리 물리적으로 막아도 이 나라는 자유민주주의 오지. 변호사 그렇죠. 김재규 자유민주주의 안 오지 않습니다. 시간이 문제입니다. 김재규의 10·26으로 긴급조치는 해제되고, 간헐적이기는 했지만 구속자는 석방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해 11월10일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은 유신헌법의 개폐 문제를 공개적으로 언급하기도 했다. 누가 뭐래도 그것은 김재규의 공이었다. 그러나 김재규는 묶인 몸이었다. 그는 그런 자신의 처지를 이렇게 말했다. “전쟁에서는 승리한 장군이 적에게 포로가 된 기분입니다. 저는 혁명을 성공시켜 놓고 심판받고 있습니다. 재판은 유신의 배경을 가지고 있고, 저는 자유민주주의의 배경을 가지고 여기에 서 있습니다.” 나는 79년 12월초 김재규의 첫 육성 진술 녹음을 들으면서 ‘김재규를 우리가 구해낼 수 있다면 10·26에서 민주화로의 이행이 가능하지만, 만약 그를 살려내지 못한다면 민주화는 군부세력에 가로채기당할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도움으로 김재규 구명을 위한 자료집을 엮었다. 김재규의 진실을 세상에 알리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했기 때문이다. 김재규의 진면목, 그가 누구이며, 왜 10·26을 일으켰는지 진실 그대로를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김재규가 어머니에게 바친 시, 재판 과정, 1·2심 최후진술, 항소이유서, 항소이유보충서, 강신옥 변호사의 접견록을 바탕으로 내가 작성한 ‘인간 김재규’, 이돈명 변호사가 쓴 변호인단 상고이유서, 구명을 위한 각종 성명과 진정서·기도문 등 관계자료를 한 권으로 묶었다. » 1975년 10월 영동고속도로 개통식 때 박정희 대통령 일행. 왼쪽부터 차지철(경호실장), 박정희, 김재규(건설부장관), 전경환(경호실 근무·전두환 전 대통령의 동생), 박근혜. 김재규는 1974년 9월 건설부장관 취임식 때 권총을 품고 가는 등 ‘10·26’ 이전부터 여러 차례 ‘박정희 제거’를 모의했다고 진술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그때 구명운동이 성공하지 못한 데는 전두환 군부의 탄압과 정치권이 구명을 외면했던 탓이 크다고 할 수 있다. 80년 안개정국 속에서 많은 사람들은 박정희가 죽었으니 이제 민주화가 되겠지 하는 기대 속에 안주했고, 정치권은 대권경쟁을 벌이거나 당시 정국을 주도하던 전두환 신군부의 눈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구명운동을 의도적으로 외면했다. 10월26일 그 궁정동의 만찬에서 여러 번 박정희가 꺼낸 화제의 대상이었던 김영삼과 신민당이 그랬고, 복역중이던 김대중을 서울대병원으로 입원시킨 뒤 “어머니, 추운 감방에서 고생하는 한 분을 따뜻한 방으로 옮겨 모셨습니다” 하며 김재규가 자신의 일처럼 좋아했던 그 김대중 쪽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학과 국외에서는 구명운동이 계속 확산되었지만, 국내에서는 천주교회와 윤보선 전 대통령을 비롯한 일부 재야만이 구명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을 뿐이다. 거기다 전두환 군부의 탄압이 조여오고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그들은 김재규와 그 일행을 서둘러 처형했다. 전두환은 김재규 구명운동에 대해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다. 본인은 구명운동에 극소수 종교인이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우리 사회의 기본적 도덕심의 마비를 보는 것 같아서 마음 아프게 여기는 바이다”라고 공개적으로 협박했다. 다시금 ‘10·26’이 가까워오는데, 한국의 민주주의는 어떻게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한번쯤 멈춰서서 생각해볼 일이다. 전 청와대 교육문화사회수석 <한겨레 인기기사>
김재규 육성 진술 파일 2
[녹취록 다운받기. 한글파일] 김재규 마지막 소회 “전쟁에서 이긴 장군이적의 포로가 된 기분그래도 민주주의는 온다” 1979년 11월30일 류택형 변호사가 남한산성 육군교도소에서 만나 녹음해온 ‘첫 육성 진술 테이프’에서 김재규는 이미 수년 전부터 ‘박정희 제거’를 계획해왔다고 밝혔다. 구체적인 날짜와 상황까지, 듣는 귀를 의심할 정도로 놀라운 사실을 털어놓고 있었다. 김재규가 ‘차지철과 충성 경쟁에 밀리자 우발적으로 박정희를 쐈다’는 신군부의 발표를 완전히 뒤집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72년 선포 직후부터 유신헌법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한 그는 73년 3군단장에서 유신정우회 소속 국회의원, 이어 중앙정보부 차장을 거쳐 6개월 만인 74년 9월 건설부 장관으로 임명되자 장관 취임식 때 ‘동반폭사’를 구상했다가 포기했다. 또 79년 4월에도 궁정동 안가에서 결행을 모의했다가 박 대통령에 대한 경호 강화 때문에 미뤘다. 그리고 마침내 79년 10월26일, 오후 6시 무렵 궁정동 안가에 대통령과 경호실장, 비서실장이 도착하자 예정대로 만찬이 시작되었다. ‘두 여인’으로 불리던 대학생과 가수가 동석해 흥을 돋웠다. 7시40분께 김재규는 옆에 앉은 김계원 비서실장에게 “대통령을 똑똑히 모시라”고 질책한 뒤, 차지철에게 “이 버러지 같은 새끼”라며 먼저 한 발을, 다음으로 박정희를 향해 한 발을 쏘았다. 총알이 명중되지 않아 차지철이 화장실로 도망가자 그는 방 밖으로 나와 박선호의 권총을 받아들고 들어와 차지철을 다시 쏘고, 이어서 여자 가수가 무릎으로 받치고 있던 박정희의 머리에 결정적인 한 발을 쏘았다. 유신의 심장은 이렇게 멈췄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는 그 이후의 사태를 장악하지 못했다. 몇시간 뒤 그는 유신체제와 전두환 군부의 포로가 된다. 그것이 ‘10·26 혁명’의 한계였다. 전두환 군부의 음해에 대해 김재규는 자신이 비록 대통령을 희생시켰지만, 그 무덤 위에 올라설 만큼 타락하지 않았다며, 10·26 민주혁명으로 자유민주정권이 안전하게 출범하면 자신은 박 대통령의 묘소에 묘막을 짓고, 시묘하면서 여생을 바치겠다고 했다. 김재규의 말대로, 그때 박정희와 3700만 국민의 자유민주주의는 숙명적인 관계에 있었다. 부마민중항쟁이 그것을 잘 말해준다. 그때 박정희가 국민의 광범한 저항과 희생 끝에 물러났다면 오늘처럼 박정희에 대한 향수가 되살아나고 아주 영명했던 지도자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이 과연 가능했을까. ‘박정희 향수’는 그쯤에서 박정희가 죽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그렇다면 박정희 향수는 역설적으로 김재규의 ‘10·26 혁명’ 덕이라고 할 수 있다. 박근혜 인기의 배경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역사란 참 묘하게 흐른다. » 1979년 12월4일 육군본부 계엄보통군법회의 1차 공판을 시작으로 12월18일 9차 결심의 사형 구형까지 ‘10·26 사건’ 재판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김재규는 재판 과정에서 시종일관 의연한 태도로 자신의 ‘민주혁명 성공’을 주장했다. 어느날 재판정에서 피고인석으로 다가오는 가족들을 보고 환한 얼굴로 말을 건네는 김재규. <격동의 80년대> 중에서 박정희의 사생활 부인 육영수 피살된 뒤여성·측근들과 ‘황음’ 빠져궁정동 안가서 잦은 술판 ◇ 궁정동의 대행사·소행사 유신 말기 중앙정보부 의전과장이 하는 일은 중앙정보부 궁정동 본관 및 부장 집무실, 그리고 대통령이 사용하는 구관의 가동·나동·다동(한옥)의 관리와 특히 대통령의 저녁 대소연 행사를 지원하는 일이었다. 1974년 8월15일 부인 육영수가 문세광의 흉탄에 쓰러진 뒤, ‘황음’에 빠진 박정희는 외부와는 완전히 차단된 이들 안가에서 주연을 벌이고 주흥을 돋우기 위해 젊은 여자들을 불러들이기 시작했다. 이런 술판은 소행사와 대행사로 구분되는데, 대행사는 두 명 이상의 여인과 비서실장·경호실장·정보부장 등 권력자 3~4명이 참석해 벌이는 연회였고, 소행사는 대통령 혼자서 한 여인만을 불러서 즐기는 밀회를 말한다. 한 달에 대행사가 2~3회, 소행사가 7~8회, 도합 10회 안팎의 대소연이 벌어졌다. 이 자리에 여인을 공급하는 것도 의전과장의 몫이었다. 당시 의전과장 박선호가 서울 장충동에 있는 요정의 한 마담에게 소개받아 공급한 여인만도 100명을 넘는다. 이런 일에 신물이 난 박선호와 사무관 남효주가 “대통령이지만 너무 심하다”는 말을 나눈 적도 있었다. 특히 박선호는 자식을 키우고 있는 아버지로서 그런 일을 하는 것이 너무 괴로워 김재규에게 여러 번 그만두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그러나 김재규는 “자네가 없으면 궁정동 일을 어떻게 하느냐”며 그 뜻을 받아주지 않았다. 10·26은 나동에서 대행사를 벌이다 일어난 사건인 만큼, 재판 과정에서 변호인들이 대소연 행사에 대한 집중적인 신문을 펼쳤지만, 박선호의 답변을 가로막고 나선 것은 김재규였다. 김재규는 박정희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함구했고, 인간적 타락상이 공개되는 것을 한사코 저지했다. 그는 박정희를 지칭할 때는 꼭 “각하께서는 … 하셨습니다”라고 최상의 경의를 표하고 있었으며, 재판중에는 물론 죽는 날까지 그런 자세에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었다. 평소에도 대통령을 만날 때면 먼저 몸과 머리를 단정히 손질하고, 보고하는 서류 한장 한장에도 정성과 경의를 다 담았다. 이처럼 박정희에 대한 존경과 예의를 잃지 않았던 김재규가 변호인에게 구술해 자신의 이름으로 제출한 항소이유보충서에서 ‘구국여성봉사단과 큰 영애(박근혜)의 문제’를 언급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그때 김재규가 지시해서 작성한 보고서(박근혜 파일)는 지금도 중앙정보부 어딘가에 보관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박정희 향수’의 연원 독재 심장 쏜 10·26의 역설국민저항에 물러났다면박정희 찬양 가능했을까 ◇ 김재규 구명운동의 실패 김재규 나 하나, 나 지금 현재요. 아무것도 겁나지 않아요. … 누가 무슨 소리 하더라도 혁명은 성공했습니다. 변호사 알겠습니다. 예예. 김재규 이제는요, 아무리 물리적으로 막아도 이 나라는 자유민주주의 오지. 변호사 그렇죠. 김재규 자유민주주의 안 오지 않습니다. 시간이 문제입니다. 김재규의 10·26으로 긴급조치는 해제되고, 간헐적이기는 했지만 구속자는 석방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해 11월10일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은 유신헌법의 개폐 문제를 공개적으로 언급하기도 했다. 누가 뭐래도 그것은 김재규의 공이었다. 그러나 김재규는 묶인 몸이었다. 그는 그런 자신의 처지를 이렇게 말했다. “전쟁에서는 승리한 장군이 적에게 포로가 된 기분입니다. 저는 혁명을 성공시켜 놓고 심판받고 있습니다. 재판은 유신의 배경을 가지고 있고, 저는 자유민주주의의 배경을 가지고 여기에 서 있습니다.” 나는 79년 12월초 김재규의 첫 육성 진술 녹음을 들으면서 ‘김재규를 우리가 구해낼 수 있다면 10·26에서 민주화로의 이행이 가능하지만, 만약 그를 살려내지 못한다면 민주화는 군부세력에 가로채기당할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도움으로 김재규 구명을 위한 자료집을 엮었다. 김재규의 진실을 세상에 알리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했기 때문이다. 김재규의 진면목, 그가 누구이며, 왜 10·26을 일으켰는지 진실 그대로를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김재규가 어머니에게 바친 시, 재판 과정, 1·2심 최후진술, 항소이유서, 항소이유보충서, 강신옥 변호사의 접견록을 바탕으로 내가 작성한 ‘인간 김재규’, 이돈명 변호사가 쓴 변호인단 상고이유서, 구명을 위한 각종 성명과 진정서·기도문 등 관계자료를 한 권으로 묶었다. » 1975년 10월 영동고속도로 개통식 때 박정희 대통령 일행. 왼쪽부터 차지철(경호실장), 박정희, 김재규(건설부장관), 전경환(경호실 근무·전두환 전 대통령의 동생), 박근혜. 김재규는 1974년 9월 건설부장관 취임식 때 권총을 품고 가는 등 ‘10·26’ 이전부터 여러 차례 ‘박정희 제거’를 모의했다고 진술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그때 구명운동이 성공하지 못한 데는 전두환 군부의 탄압과 정치권이 구명을 외면했던 탓이 크다고 할 수 있다. 80년 안개정국 속에서 많은 사람들은 박정희가 죽었으니 이제 민주화가 되겠지 하는 기대 속에 안주했고, 정치권은 대권경쟁을 벌이거나 당시 정국을 주도하던 전두환 신군부의 눈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구명운동을 의도적으로 외면했다. 10월26일 그 궁정동의 만찬에서 여러 번 박정희가 꺼낸 화제의 대상이었던 김영삼과 신민당이 그랬고, 복역중이던 김대중을 서울대병원으로 입원시킨 뒤 “어머니, 추운 감방에서 고생하는 한 분을 따뜻한 방으로 옮겨 모셨습니다” 하며 김재규가 자신의 일처럼 좋아했던 그 김대중 쪽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학과 국외에서는 구명운동이 계속 확산되었지만, 국내에서는 천주교회와 윤보선 전 대통령을 비롯한 일부 재야만이 구명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을 뿐이다. 거기다 전두환 군부의 탄압이 조여오고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그들은 김재규와 그 일행을 서둘러 처형했다. 전두환은 김재규 구명운동에 대해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다. 본인은 구명운동에 극소수 종교인이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우리 사회의 기본적 도덕심의 마비를 보는 것 같아서 마음 아프게 여기는 바이다”라고 공개적으로 협박했다. 다시금 ‘10·26’이 가까워오는데, 한국의 민주주의는 어떻게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한번쯤 멈춰서서 생각해볼 일이다. 전 청와대 교육문화사회수석 <한겨레 인기기사>
[녹취록 다운받기. 한글파일]
김재규 마지막 소회
“전쟁에서 이긴 장군이적의 포로가 된 기분그래도 민주주의는 온다”
1979년 11월30일 류택형 변호사가 남한산성 육군교도소에서 만나 녹음해온 ‘첫 육성 진술 테이프’에서 김재규는 이미 수년 전부터 ‘박정희 제거’를 계획해왔다고 밝혔다. 구체적인 날짜와 상황까지, 듣는 귀를 의심할 정도로 놀라운 사실을 털어놓고 있었다. 김재규가 ‘차지철과 충성 경쟁에 밀리자 우발적으로 박정희를 쐈다’는 신군부의 발표를 완전히 뒤집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72년 선포 직후부터 유신헌법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한 그는 73년 3군단장에서 유신정우회 소속 국회의원, 이어 중앙정보부 차장을 거쳐 6개월 만인 74년 9월 건설부 장관으로 임명되자 장관 취임식 때 ‘동반폭사’를 구상했다가 포기했다. 또 79년 4월에도 궁정동 안가에서 결행을 모의했다가 박 대통령에 대한 경호 강화 때문에 미뤘다.
그리고 마침내 79년 10월26일, 오후 6시 무렵 궁정동 안가에 대통령과 경호실장, 비서실장이 도착하자 예정대로 만찬이 시작되었다. ‘두 여인’으로 불리던 대학생과 가수가 동석해 흥을 돋웠다.
7시40분께 김재규는 옆에 앉은 김계원 비서실장에게 “대통령을 똑똑히 모시라”고 질책한 뒤, 차지철에게 “이 버러지 같은 새끼”라며 먼저 한 발을, 다음으로 박정희를 향해 한 발을 쏘았다. 총알이 명중되지 않아 차지철이 화장실로 도망가자 그는 방 밖으로 나와 박선호의 권총을 받아들고 들어와 차지철을 다시 쏘고, 이어서 여자 가수가 무릎으로 받치고 있던 박정희의 머리에 결정적인 한 발을 쏘았다.
유신의 심장은 이렇게 멈췄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는 그 이후의 사태를 장악하지 못했다. 몇시간 뒤 그는 유신체제와 전두환 군부의 포로가 된다. 그것이 ‘10·26 혁명’의 한계였다.
전두환 군부의 음해에 대해 김재규는 자신이 비록 대통령을 희생시켰지만, 그 무덤 위에 올라설 만큼 타락하지 않았다며, 10·26 민주혁명으로 자유민주정권이 안전하게 출범하면 자신은 박 대통령의 묘소에 묘막을 짓고, 시묘하면서 여생을 바치겠다고 했다.
김재규의 말대로, 그때 박정희와 3700만 국민의 자유민주주의는 숙명적인 관계에 있었다. 부마민중항쟁이 그것을 잘 말해준다. 그때 박정희가 국민의 광범한 저항과 희생 끝에 물러났다면 오늘처럼 박정희에 대한 향수가 되살아나고 아주 영명했던 지도자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이 과연 가능했을까. ‘박정희 향수’는 그쯤에서 박정희가 죽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그렇다면 박정희 향수는 역설적으로 김재규의 ‘10·26 혁명’ 덕이라고 할 수 있다. 박근혜 인기의 배경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역사란 참 묘하게 흐른다.
박정희의 사생활
부인 육영수 피살된 뒤여성·측근들과 ‘황음’ 빠져궁정동 안가서 잦은 술판
◇ 궁정동의 대행사·소행사
유신 말기 중앙정보부 의전과장이 하는 일은 중앙정보부 궁정동 본관 및 부장 집무실, 그리고 대통령이 사용하는 구관의 가동·나동·다동(한옥)의 관리와 특히 대통령의 저녁 대소연 행사를 지원하는 일이었다. 1974년 8월15일 부인 육영수가 문세광의 흉탄에 쓰러진 뒤, ‘황음’에 빠진 박정희는 외부와는 완전히 차단된 이들 안가에서 주연을 벌이고 주흥을 돋우기 위해 젊은 여자들을 불러들이기 시작했다.
이런 술판은 소행사와 대행사로 구분되는데, 대행사는 두 명 이상의 여인과 비서실장·경호실장·정보부장 등 권력자 3~4명이 참석해 벌이는 연회였고, 소행사는 대통령 혼자서 한 여인만을 불러서 즐기는 밀회를 말한다. 한 달에 대행사가 2~3회, 소행사가 7~8회, 도합 10회 안팎의 대소연이 벌어졌다. 이 자리에 여인을 공급하는 것도 의전과장의 몫이었다.
당시 의전과장 박선호가 서울 장충동에 있는 요정의 한 마담에게 소개받아 공급한 여인만도 100명을 넘는다. 이런 일에 신물이 난 박선호와 사무관 남효주가 “대통령이지만 너무 심하다”는 말을 나눈 적도 있었다. 특히 박선호는 자식을 키우고 있는 아버지로서 그런 일을 하는 것이 너무 괴로워 김재규에게 여러 번 그만두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그러나 김재규는 “자네가 없으면 궁정동 일을 어떻게 하느냐”며 그 뜻을 받아주지 않았다.
10·26은 나동에서 대행사를 벌이다 일어난 사건인 만큼, 재판 과정에서 변호인들이 대소연 행사에 대한 집중적인 신문을 펼쳤지만, 박선호의 답변을 가로막고 나선 것은 김재규였다. 김재규는 박정희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함구했고, 인간적 타락상이 공개되는 것을 한사코 저지했다. 그는 박정희를 지칭할 때는 꼭 “각하께서는 … 하셨습니다”라고 최상의 경의를 표하고 있었으며, 재판중에는 물론 죽는 날까지 그런 자세에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었다. 평소에도 대통령을 만날 때면 먼저 몸과 머리를 단정히 손질하고, 보고하는 서류 한장 한장에도 정성과 경의를 다 담았다.
이처럼 박정희에 대한 존경과 예의를 잃지 않았던 김재규가 변호인에게 구술해 자신의 이름으로 제출한 항소이유보충서에서 ‘구국여성봉사단과 큰 영애(박근혜)의 문제’를 언급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그때 김재규가 지시해서 작성한 보고서(박근혜 파일)는 지금도 중앙정보부 어딘가에 보관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박정희 향수’의 연원
독재 심장 쏜 10·26의 역설국민저항에 물러났다면박정희 찬양 가능했을까
◇ 김재규 구명운동의 실패
김재규 나 하나, 나 지금 현재요. 아무것도 겁나지 않아요. … 누가 무슨 소리 하더라도 혁명은 성공했습니다.
변호사 알겠습니다. 예예.
김재규 이제는요, 아무리 물리적으로 막아도 이 나라는 자유민주주의 오지.
변호사 그렇죠.
김재규 자유민주주의 안 오지 않습니다. 시간이 문제입니다.
김재규의 10·26으로 긴급조치는 해제되고, 간헐적이기는 했지만 구속자는 석방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해 11월10일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은 유신헌법의 개폐 문제를 공개적으로 언급하기도 했다. 누가 뭐래도 그것은 김재규의 공이었다. 그러나 김재규는 묶인 몸이었다. 그는 그런 자신의 처지를 이렇게 말했다. “전쟁에서는 승리한 장군이 적에게 포로가 된 기분입니다. 저는 혁명을 성공시켜 놓고 심판받고 있습니다. 재판은 유신의 배경을 가지고 있고, 저는 자유민주주의의 배경을 가지고 여기에 서 있습니다.”
나는 79년 12월초 김재규의 첫 육성 진술 녹음을 들으면서 ‘김재규를 우리가 구해낼 수 있다면 10·26에서 민주화로의 이행이 가능하지만, 만약 그를 살려내지 못한다면 민주화는 군부세력에 가로채기당할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도움으로 김재규 구명을 위한 자료집을 엮었다. 김재규의 진실을 세상에 알리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했기 때문이다. 김재규의 진면목, 그가 누구이며, 왜 10·26을 일으켰는지 진실 그대로를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김재규가 어머니에게 바친 시, 재판 과정, 1·2심 최후진술, 항소이유서, 항소이유보충서, 강신옥 변호사의 접견록을 바탕으로 내가 작성한 ‘인간 김재규’, 이돈명 변호사가 쓴 변호인단 상고이유서, 구명을 위한 각종 성명과 진정서·기도문 등 관계자료를 한 권으로 묶었다.
그때 구명운동이 성공하지 못한 데는 전두환 군부의 탄압과 정치권이 구명을 외면했던 탓이 크다고 할 수 있다. 80년 안개정국 속에서 많은 사람들은 박정희가 죽었으니 이제 민주화가 되겠지 하는 기대 속에 안주했고, 정치권은 대권경쟁을 벌이거나 당시 정국을 주도하던 전두환 신군부의 눈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구명운동을 의도적으로 외면했다. 10월26일 그 궁정동의 만찬에서 여러 번 박정희가 꺼낸 화제의 대상이었던 김영삼과 신민당이 그랬고, 복역중이던 김대중을 서울대병원으로 입원시킨 뒤 “어머니, 추운 감방에서 고생하는 한 분을 따뜻한 방으로 옮겨 모셨습니다” 하며 김재규가 자신의 일처럼 좋아했던 그 김대중 쪽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학과 국외에서는 구명운동이 계속 확산되었지만, 국내에서는 천주교회와 윤보선 전 대통령을 비롯한 일부 재야만이 구명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을 뿐이다. 거기다 전두환 군부의 탄압이 조여오고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그들은 김재규와 그 일행을 서둘러 처형했다. 전두환은 김재규 구명운동에 대해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다. 본인은 구명운동에 극소수 종교인이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우리 사회의 기본적 도덕심의 마비를 보는 것 같아서 마음 아프게 여기는 바이다”라고 공개적으로 협박했다.
다시금 ‘10·26’이 가까워오는데, 한국의 민주주의는 어떻게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한번쯤 멈춰서서 생각해볼 일이다.
전 청와대 교육문화사회수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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