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초 김응현 선생이 지난 2000년 조선일보 미술관에서 열린 전시회를 앞두고 글씨를 쓰고 있다.<사진출처:조선일보> |
한국 서단에서 일가(一家)를 이룬 21세기 최고의 서예가로 손꼽힌 여초(如初) 김응현(영문48)교우가 지난 2월 1일 별세했다. 형인 일중(一中) 김충현(金忠顯), 동생 백아(白牙) 김창현(金彰顯)과 함께 형제 서예가 집안으로도 유명하다. 그의 작품 세계는 중국에서 전해 온 모든 서예의 장점을 흡수하고 해서·행서·초서·예서·전서와 같은 모든 서체들을 연습해 그 정화(精華)를 흡수한 뒤 마음과 손의 조화를 이룬 것으로 유명하다. 1956년 결성된 ‘동방연서회’를 중심으로 펼쳐 온 그의 필치는 중국과 일본에까지 그 이름을 널리 알렸다.
김 교우는 한국전각학회 회장과 국제서법예술연합 한국본부 이사장으로 활동하며 월간 ‘서법예술’을 창간하는 등 서예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1994년엔 전 10권 분량의 방대한 서예 교본인 ‘동방서범(東方書範)을 출간했다. 이 책에서 그는 동양 서법사의 대표적인 문헌과 금석문 중에서 각 서체의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들만 골라 직접 글씨를 썼다. 동방 서체의 백미로 꼽는 광개토대왕비의 서체를 수록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비문 일부를 일본인들이 변조한 게 있어 고심 끝에 뺄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의 서예 철학은 마음과 손의 조화를 이루면서 ‘근본’을 중시하는 것이었다. 그는 “원래 서예란 모범이 되는 글씨를 닮으려고 노력하는 데서 출발하는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법첩 위에 얇은 종이를 올려놓고 거기 비친 글자대로 붓질을 하는 과정을 선인들이 중시했던 것도 다 그런 까닭이었다는 것이다. “요즘은 초보자라도 근본은 생각하지 않고 덮어놓고 창작만 하려 하니 큰일”이라 한탄하기도 했다.
김 교우의 인생에 큰 시련이 닥친 것은 지난 1999년 5월. 불의의 교통사고로 오른쪽 손목 골절상을 입었다. 그는 “매일같이 붓을 들던 생활에 변화가 생겼다. 어쩔 수 없이 좌수(왼손)로 글을 쓸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설악산에서 3개월을 단련한 끝에 잔 기교에 집착하지 않는 대범한 경지를 보였다. 이후 오른손은 완치됐기 때문에 그의 왼손 글씨는 2000년 6월 단 한 번의 전시회로 끝났다.
1993년부터 설악산에 머물면서 창작 활동을 해 왔던 김 교우는 2004년 건강 악화로 붓을 놓기 직전까지도 작품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2005년 2월에는 조선일보 미술관에서 열린 ‘여초 김응현 작품 개인소장품’ 전시에서 그의 작품 117점을 선보였다. 김 교우는 모교 교우회를 위해 그의 친필을 여러 차례 기꺼이 선사했다. 1996년 5월에는 <高麗大學校 校友會館 竣工記>의 현판 글씨를 직접 썼으며, 교우회보 제호 역시 김 교우의 글씨로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교우회관 곳곳에 남은 김 교우의 노작들이 그의 깊고 넓은 작품세계를 기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