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심사/고서화(古書畵)

[스크랩] 완당 歲寒圖 跋文(세한도 발문)

감효전(甘曉典) 2012. 3. 30. 20:04

세한도는 추사(秋史) 김정희가 제주도 유배생활 중에

그의 제자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의 한결같은 마음에 감격하여 그려 보낸 작품입니다.

 

“去年以晩學大雲二書寄來 今年又以藕耕文編寄來

此皆非世之常有 購之千萬里之遠 積有年而得之

非一時之事也 且世之滔滔 惟權利之是趍 爲之費心費力如此

而不以歸之權利 乃歸之海外蕉萃枯槁之人 如世之趨權利者

太史公云 以權利合者 權利盡而交疏 君亦世之滔滔中一人

其有超然自拔於滔滔 權利之外不以權利視我耶 太史公之言非耶

孔子曰歲寒然後知松栢之後凋 松栢是毋四時而不凋者 歲寒以前一松栢也

歲寒以後一松栢也 聖人特稱之於歲寒之後 今君之於我

由前而無可焉 由後而無損焉 然由前之君 無可稱 由後之君

亦可見稱於聖人也耶 聖人之特稱 非徒爲後凋之貞操勁節而已

亦有所感發於歲寒之時者也 烏乎 西京淳厚之世 以汲鄭之賢

賓客與之盛衰 如下邳榜門 迫切之極矣”

悲夫 阮堂老人書 

 

그대가 지난해에 계복(桂馥)의 만학집(晩學集)과 운경(惲敬)의 대운산방문고(大雲山房文藁) 두 책을 부쳐주고, 올해 또 하장령(賀長齡)이 편찬한 황조경세문편(皇朝經世文編)120권을 보내주니 이는 모두 세상에 흔한 일이 아니다.

 

천만리 먼 곳에서 사온 것이고 여러 해에 걸쳐서 얻은 것이니, 일시에 가능했던 일도 아니었다. 지금 세상은 온통 권세와 이득을 좇는 풍조가 휩쓸고 있다. 그런 풍조 속에서 서책을 구하는 일에 마음을 쓰고 힘들이기를 그같이 하고서도 그대의 이권을 보살펴줄 사람에게 주지 않고, 바다멀리 초췌하게 시들어 있는 사람에게 보내는 것을 마치 세상에서 잇속을 좇듯이 하였구나!

 

태사공(사마천)이 말하기를 “권세와 이득을 바라고 합친 자들은 그것이 다하면 교제 또한 성글어진다”고 하였다. 그대 또한 세상의 도도한 흐름 속에 사는 한 사람으로 세상 풍조의 바깥으로 초연히 몸을 빼내었구나. 잇속으로 나를 대하지 않았기 때문인가? 아니면 태사공의 말씀이 잘못되었는가?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한겨울 추운 날씨가 된 다음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알 수 있다”고 하셨다. 소나무, 잣나무는 본래 사계절 없이 잎이 지지 않는 것이다. 추운 계절이 오기 전에도 같은 소나무, 잣나무요, 추위가 닥친 후에도 여전히 같은 소나무, 잣나무다. 그런데도 성인(공자)께서는 굳이 추위가 닥친 다음의 그것을 가리켜 말씀하셨다.

 

이제 그대가 나를 대하는 처신을 돌이켜보면, 그 전이라고 더 잘한 것도 없지만, 그 후라고

전만큼 못한 일도 없었다. 그러나 예전의 그대에 대해서는 따로 일컬을 것이 없지만, 그 후에 그대가 보여준 태도는 역시 성인에게서도 일컬음을 받을 만한 것이 아닌가? 성인이 특히 추운 계절의 소나무, 잣나무를 말씀하신 것은 다만 시들지 않는 나무의 굳센 정절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역시 추운 계절이라는 그 시절에 대하여 따로 마음에 느끼신 점이 있었던 것이다.

 

아아! 전한(前漢)시대와 같이 풍속이 아름다웠던 시절에도 급암(汲黯)과 정당시(鄭當時)처럼 어질던 사람조차 그들의 형편에 따라 빈객(賓客)이 모였다가는 흩어지곤 하였다. 하물며 하규현(下邽縣)의 적공(翟公)이 대문에 써 붙였다는 글씨 같은 것은 세상 인심의 박절함이 극에 다다른 것이리라. 슬프다   

완당 노인이 쓰다.

세한도 발문(歲寒圖 跋文)
저자 : 김정희 | 역자 : 김동석

  지난 해(1843, 헌종9)에 『만학집(晩學集)』과 『대운산방집(大雲山房集)』 두 책을 부쳐주었고, 금년에 또 우경(藕畊)이 지은 『황청경세문편(皇淸經世文編)』을 부쳐주었다. 이들 책은 모두 세상에서 언제나 구할 수 있는 책이 아니니, 천만리 먼 곳에서 구입한 것이고 여러 해를 거듭하여 입수한 것이지, 한 때에 해낸 일이 아니다. 그리고 세상의 도도한 풍조는 오로지 권세가와 재력가만을 붙좇는 것이다. 이들 책을 구하려고 이와 같이 마음을 쓰고 힘을 소비하였는데, 이것을 권세가와 재력가들에게 갖다주지 않고 도리어 바다 건너 외딴섬에서 초췌하게 귀양살이 하고 있는 나에게 마치 세인들이 권세가와 재력가에게 붙좇듯이 안겨주었다.

 사마천(司馬遷)이, “권세나 이익 때문에 사귄 경우에는 권세나 이익이 바닥나면 그 교제가 멀어지는 법이다” 하였다. 그대 역시 세속의 거센 풍조 속에서 살아가는 한 인간이다. 그런데 어찌 그대는 권세가와 재력가를 붙좇는 세속의 도도한 풍조로부터 초연히 벗어나, 권세나 재력을 잣대로 삼아 나를 대하지 않는단 말인가? 사마천의 말이 틀렸는가?

 공자(孔子)께서, “일년 중에서 가장 추운 시절이 된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그대로 푸르름을 간직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하셨다. 소나무 · 잣나무는 사철을 통해 늘 잎이 지지 않는 존재이다. 엄동이 되기 이전에도 똑같은 소나무 · 잣나무요, 엄동이 된 이후에도 변함 없는 소나무 · 잣나무이다. 그런데 성인께서는 유달리 엄동이 된 이후에 그것을 칭찬하셨다.

 지금 그대가 나를 대하는 것을 보면, 내가 곤경을 겪기 전에 더 잘 대해 주지도 않았고 곤경에 처한 후에 더 소홀히 대해주지도 않았다. 그러나 나의 곤경 이전의 그대는 칭찬할 만한 것이 없겠지만, 나의 곤경 이후의 그대는 역시 성인으로부터 칭찬을 들을 만하지 않겠는가? 성인께서 유달리 칭찬하신 것은 단지 엄동을 겪고도 꿋꿋이 푸르름을 지키는 송백의 굳은 절조만을 위함이 아니다. 역시 엄동을 겪은 때와 같은 인간의 어떤 역경을 보시고 느끼신 바가 있어서이다.

 아! 전한(前漢)의 순박한 시대에 급암(汲黯)과 정당시(鄭當時) 같이 훌륭한 사람들의 경우도 그 빈객들이 그들의 부침(浮沈)에 따라 붙좇고 돌아섰다. 그러고 보면 하규(下邽) 땅의 적공(翟公)이 대문에 방(榜)을 써 붙여 염량세태(炎凉世態)를 풍자한 처사 따위는 박절한 인심의 극치라 하겠다. 슬프다!

완당 노인(阮堂老人) 씀.

 

김정희(金正喜 : 1786(정조10)~1856(철종7))는 조선 말기의 문신·학자·서화가. 자(字)는 원춘(元春), 호(號)는 추사(秋史)·완당(阮堂)·예당(禮堂)·노과(老果)·시암(詩庵) 등이며,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24세 때 부친 김노경(金魯敬)을 따라 연경(燕京)에 가서 청(淸) 나라의 거유(巨儒) 옹방강(翁方綱)·완원(阮元) 등으로부터 지우(知遇)를 입었다. 1840(헌종6)년에 윤상도(尹尙度)의 옥사(獄事)에 연루되어 9년간 제주도에서 귀양살이를 하였다. 위의 글은 완당이 1844(헌종10)년에 제주에서 『세한도(歲寒圖)』를 그리고 그 끝에 쓴 발문(跋文)인데, 『완당전집』 제 4권에 “이우선에게 보냄(與李藕船)”이라는 편지로 실려있다. 이 글에 의하면 『세한도』는, 불우한 처지에서 귀양살이하는 작자 자신을 조금도 괄시하지 않고 옛날처럼 변함없이 대해주는 제자 이상적(李尙迪)의 태도에 감동한 나머지, 그의 인품을 엄동이 된 뒤에도 잎이 지지 않는 송백(松柏)의 지조에 비유하여 그림으로 그려준 것이다. 이상적은 역관(譯官)인데, 호가 우선(藕船)이다. 우선은 그 이듬해에 이 그림을 가지고 연경에 가서 그곳의 명사 장악진(章岳鎭)·조진조(趙振祚) 등 16인에게 보이고 그들의 찬시(讚詩)를 받아 발문에 이어 붙였다. 그 뒤 완당의 문하생 김석준(金奭準)의 찬(贊)과 오세창(吳世昌)·이시영(李始榮)의 배관기(拜觀記) 등이 다시 첨가되어 이 그림은 긴 두루마기를 이루게 되었다. 그림의 오른쪽 여백에는 작자가 큰 글씨로 ‘세한도’라는 화제(畵題)를 가로로 쓰고 작은 글씨로 ‘우선은 감상하라[藕船是賞]’라는 관지(款識)를 세로로 쓴 다음, 행을 바꾸어 ‘완당(阮堂)’이라는 호를 쓰고 ‘정희(正喜)’라는 이름이 새겨진 도서(圖署)를 찍었다. 화면에는 수묵으로 집 한 채와 소나무·잣나무를 각각 두 그루씩 대칭을 이루도록 그렸을 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여백으로 처리하였는데, 고상한 문인화의 품격이 돋보이는, ‘서화(書畵)가 함께 잘 어우러진 걸작이다. 이는 현재 개인이 소장하고 있으며, 국보(제180호)로 지정되어 있다. 발문의 끝에 보이는 적공(翟公)의 고사는 이러하다. “한(漢) 나라 때 적공이 정위(廷尉)가 되자 그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문전성시(門前成市)를 이루었다. 그러나 그가 실각하자 이내 그의 대문에는 참새 그물을 칠 정도로 인적이 끊기고 말았다. 그 뒤 그가 다시 정위가 되자 또 당초처럼 사람들이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이에 그는 대문에다 ‘죽고 사는 갈림길에 서봐야 교정을 알게 되고, 사업에서 망하고 흥해봐야 교태를 알게 되며, 벼슬길에서 귀천을 겪어봐야 교정이 나타난다.[一生一死, 乃知交情, 一貧一富, 乃知交熊, 一貴一賤, 交情乃見.]’라고 써 붙여 세상 사람들의 염량세태를 신랄하게 책망하였다.”(『史記· 汲鄭列傳』)

 

 

출처 : 法古創新
글쓴이 : 고 방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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