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심사/고서화(古書畵)

[스크랩] 추사의 不作蘭과 畵論

감효전(甘曉典) 2012. 3. 30. 20:01

   不作蘭 < 不二禪蘭>    지본수묵  55 * 31센티

1. 不作蘭의 題記연구

<1>
不作蘭花二十年 偶然寫出性中天 閉門覓覓尋尋處 此是維摩不二禪
난초를 안 그린지 20년에 우연히 그려냈다.마음 속의 자연을 문을 닫고 거듭 생각해보니 이 것이 바로 유마(維摩)의 불이선(不二禪)이다.

유마 불이선이란 유마경 불이법문품<維摩經 不二法門品>에 있는 이야기이다.모든 보살이 선열<禪悅>에 들어가는 상황을 설명하는데 최후에 유마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이에 모든 보살들은 말과 글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진정한 법이라고 감탄했다는 것이다. 지면에다 그리는 것의 설명보다는 마음 속으로 체득하는 것이 난 예술의 진정한 경지를 이해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내려쓰기 문장임에도 불구하고 왼쪽에서 오른 쪽으로 전개되는 장법이 특이하다.

<2>
若有人强要爲口實 又當以毘耶 無言謝之 曼香
어떤 사람이 그 이유를 설명하라고 강요한다면 또한 비야리성<毘耶離城>에 있던 유마의 말 없는 대답으로 응하겠다.  만향<曼香>

<3>
以草隸奇字之法爲之 世人那得之 那得好之也 구竟又題

초서와 예서,기자법으로 그린 것인데 세상 사람이 이를 어떻게 알 것이며  이를 어찌 좋아하랴?  구경우제<구竟又題>
구<삼수변+나눌 구> -  담글 구. 거품 구

<4>
始爲達俊放筆 只可有一不可有二 仙客老人
처음으로 달준에게 주려고 그린 것이다. 이런 그림은 한번이나 그릴 것이지 두 번도 그려서는 안될 것이다. 선객노인<仙客老人>

<5>
吳小山見而豪奪可笑
오소산<吳小山>이 이를 보고 억지로 빼았아가는 것을 보니 우습다. 달준<達俊>과 오소산<吳小山>이 어떠한 인물인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으며 이 부분은 나중에 별도로 써넣은 것 같이 보인다.

2. 不作蘭의 畵法연구

<1>좌로 향한 우출엽<右出葉>
바람에 불리듯 우측으로 쏠리는 형세인데 제1,제2엽으로 봉안<鳳眼>을 이룬 후 제3엽으로 파봉<破鳳>함에 있어 봉안을 두 번 거쳐감이 특이하며 제4엽 역시 제3엽과 같은 양상으로 파봉을 하고 있다.

우측에 또 한 촉의 란이 있는데 왼쪽의 란과 모양이 다를 뿐, 같은 화법으로 제5-7엽이 전개되다가 제8엽으로 1회 파봉하고 제9엽과 제10엽은 독립되어있다.

1개의 봉안을 제3엽으로 2회에 걸쳐 파봉하는 것도 특이한데 또 다시 그 다음 제4엽으로  2회 파봉한다는 것은 기상천외의 기법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그 것도 모자라  오른 쪽 또 다른 한 촉에서도 이러한 변칙 파봉이 이루어지고 있으니 그야말로 기이하기 짝이 없고 부작란이  아니고서는 듣지보 보지도 못할 절세의 일품이 아닐 수 없다고 하겠다.


<2>
삼절법<三折法>의 내면화
각 엽마다 삼절(三折.또는 三轉>의 변화가 역력함은 추사의 서체가 그러하기 때문이며  삼전<三轉>의 묘를 살려 필획 긋듯이 난엽을 처야 한다는 지론에 걸맞게 내면적 심경이 그대로 밖으로 표출되었음을 볼 수 있다.

<3>우출엽<右出葉>과 좌출<左出> 꽃대의 묘한 대비
실제 그림에서는 왼쪽과 오른쪽의 란이 좀더 가까이 배치되므로서 긴밀감을 주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좌출엽(左出葉>이 전혀없는 가운데 단지 꽃대와 꽃잎만이 좌측으로 향하도록 하면서 좌우를 극도로 대비시키는 장법이 특이하다. 또한 일반적인 경우 난엽 중간에서 꽃대가 솟아나도록 구성하지만 이 경우에서는 좌측에서 난엽에 휩싸이지 않고 꽃대가 나와 돌아앉으므로서 강인한 꽃대와 꽃을 시도하였는데 어쩌면  당시 조정에서 특정 문중인<門中人>들이 권력을 남용함에 늘 못마땅히 여기던 그의 심정을 말없이 화폭에 옮겼는지도 모를 일이다.

<4>농묵<濃墨>과 담묵<淡墨>의 조화
잎과 꽃대,꽃은 모두 담묵<淡墨>이며 단지 화심<花心>만 농묵<濃墨>으로 굵게 처리하므로서 담묵의 단조로움에 강인함을 주었으며 이 검고 굵은 화심이 그림과 화제와의 연결고리가 되고 있다. 5개의 꽃잎이 일반적인 경우이지만 이중 4개의 꽃잎으로 한송이를 이루고 있는 것 역시 법칙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화론<畵論>을 뒷받침 해주는 부분이다.

<5>제기<題記>의 의외성
제기<題記.또는화제>가  각기 독립된 문장으로 5군데나 기록되어있으며 낙관<落款>에 사용한 호만해도 만향<曼香>,선객노인<仙客老人>,구경<구竟>등 3가지나 되고 글의 진행방향 또한 좌에서 우로 가는 등 통상의 예에서 모두 예외가 되고 있으므로 추사 이후 이 란은 아무도 흉내내지 못하였다.

<6>무수한 인영<印影>
이 그림에는 유난히도 많은 인장이 찍혀있다. 아마 이 인영들은 부작란도가 소장자를 달리하여가면서 보존되는 과정에서 추가로 찍혀진 것이 한 원인이되기도 하겠지만 추사 자신이 찍은 도장도 적지않다. 
인문<印文>의 해독은 좀더 연구를 해보아야 할 과제이다. 인영<印影>이 비교적 작고, 인쇄과정에서 절단된 듯 일부분만 보이는 인영도 있어 원본을 직접 보아야 할 것이지만 원본 대하기가 쉽진 않을 것 같으니 결과를 예측하기 어렵다.

<7>느끼는 점.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란그리기를 쉰지 20년만에 처음 친다는 이 묵란은 그야말로 의외성의 연속이다. 마음 속에서 조용히 이는  파장이 아니고 대 격동의 표현인 것이며 그러면서도 유별나지 않게 조용히 우리에게 전하고 싶은 바를 모두 전하고있다. 역시 깊은 예술은 대중 곁에 친근하다는 진리를 보여주는 한 예인 것이다.
그간 추사의 거처함이 편안하기만 하였다면 그도 평범한 선비에 그치고 말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정파싸움에 하급 관리에게 문초를 당하면서 자존심에 상처를 입고 귀양살이로 인해 10년 가까이나 벽지에 머무르고 하는 동안 그의 심중에는 현실에 대한 강한 거부감이 자리잡았을 것이며 이로 인해 그의 예술혼은 늘 도전적으로 발휘되었다고 본다. 그러한 환경에서 나타난 것이 부작란이니 평범하지 않은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나는 추사의 이 한 작품이 노년기 그의 예술관을 가장 잘 대변하는 대표작으로 보고 싶다. Vincent van  Gogh<1853 - 1890>가 죽기 직전 해에 그린  세계적 명작 "별이 빛나는 밤"에서 느껴지는 것도 역시 현실부정적이라는 점에서 부작란에서 느껴지는 감흥과 유사하다는 나만의 느낌이 드는 까닭에 추사 서거 33년 뒤에 그려진 Gogh의  이 유화 한 점을 부작란에 비견해본다.

 


고흐작 -  별이 빛나는 밤
<이 그림 1년 후 그는 운명하였다>

3. 不作蘭의 印影연구   -    현재 진행 중에 있음.

난에 관한 화론<畵論>

1. 불기심란도<不欺心蘭圖>의 題記

士寫蘭 亦當 自不欺心 一별葉一點瓣 內省不구可以示人 十目所見  十手所指  其嚴乎 雖此小藝  必自誠意正心中來  始得爲下手宗旨  書示佑兒
난초를 그리는 때에는 자기의 마음을 속이지 않는데에서 시작하여야한다.잎 하나 꽃술 하나라도 마음 속에 부끄러움이 없게된 뒤에 남에게 보여야 한다. 모든 사람의 눈이 주시하고 모든 사람의 손이 다 지적하고 있으니  이 또한 두렵지 아니한가? 이 것이 작은 재주이지만 반드시 생각을 진실하게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는데에서 출발해야 비로서  손을 댈 수 있는 기본을 알게 될 것이다.  아들 상우에게 써서 보인다.

 

2. 상우<商佑>에게 보낸 화론<畵論>편지
   < 이 편지는 제주도 유배 8년째인  1848년에 쓴 편지임>

與佑兒

蘭法亦如隸近 必有文字香書卷氣 然後可得 此蘭法 最忌畵法 若有畵法 一筆不作可也 如趙熙龍輩 學作吾蘭而終未免畵法一路 此其胸中 無文字氣故也

今此多紙送來 汝尙不知蘭境趣味 有是多紙之求寫 殊可憤筍寫蘭 不得過三四紙 神氣之相진 境遇之相融 書畵同然而寫蘭尤甚 何由多得也

若如畵工輩 隨應法爲之 雖一筆千紙可也 如此作不作可也 是以畵蘭 吾不肯多作 是汝所嘗見也 今以略干紙寫去 無以盡了來紙 須領其妙可耳

寫蘭必三轉爲妙 今見汝所作 一抽筆卽止 須於三轉處 用工爲佳  凡近日寫蘭者 皆不知此三轉之妙 妄加塗抹耳

아들 상우(商佑)에게

난초 치는 법은 역시 예서 쓰는 법과 가까워서 반드시 문자향과 서권기가 있은 연후에야 얻을 수 있다.또 난법은 그림그리는 법을 가장 꺼리니 만약 화법이 있다면 한 붓도 대지 않는 것이 좋다.조희룡 같은 사람들이 내 난초그림을 배워서 치지만 끝내 화법이라는 한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가슴 속에 문자기가 없는 까닭이다.

지금 이렇게 많은 종이를 보내왔으니 너는 아직도 난초치는 경지와 취미를 이해하지 못하는구나. 이처럼 많은 종이에 그려달라고 하지만 특별히 싹을 토해내서 난초를 그릴 수 있는 것은 서너장의 종이를 지나칠 수 없다.신기가 모여들고 경우가 무르익어야 하는 것은 서화가 모두 같으나 난초가 더욱 심하거늘 어찌 많이 얻을 수 있겠느냐?

만약 화공들과 같이 화법에 따라서 치기로 한다면 비록 한 붓 가지고서라도 천장의 종이에 친다고 해도 가능할 것이다.이와 같이 치려면 치지 않는 좋다.이 때문에 난초를 치는데 있어서는 나는 많이 치는 것을 즐겨하지 아니하니  이 것은 너도 일찌기 보던 바이다.이제 약간의 종이에 그려보내고 보낸 종이에 죄다 그리지는 않았다. 모름지기 그 묘법을 깨달았으면 좋겠다.

난을 치는데는 반드시 삼전으로 묘법을 삼아야하는데 이제 네가 난 친 것을 보니 붓을 한번 쭉 뽑고 곧 끝내 버렸구나. 꼭 삼전하는 것을 힘써 익혔으면 좋겠다. 대체로 요사이 난을 친다는 사람들이 모두 이 삼전의 묘법을 알지 못하고 함부로 찍어바르고 있을 뿐이니라

 

3,군자문정첩<君子文情帖>에 제<題>함

寫蘭 當先左筆一式 左筆爛熟 右筆隨順 叉損卦先難後易之義也

君子於一擧手之間 不以苟然 以此左筆一劃 可以引而伸之於損上益下之大義 旁通消息 變化不窮 無往不然  

此所以 君子下筆 動輒寓戒 不爾何貴乎君子之筆

此鳳眼象眼 通行之規 非此無以爲蘭 雖此小道 非規不成 況進而大於是者乎

是以一葉一瓣 自欺不得 又不可以欺人 十目所視 十手所指 其嚴乎 是以寫蘭下手 當自無自欺始 趙子固寫蘭 筆筆向左 蘇齋老人 屢稱之

난을 치는데는 마땅히 왼 쪽으로 치는 한 법식을 익혀야한다. 왼 쪽으로 치는 것이 익숙하게되면 오른 쪽으로 치는 것은 따라가게 된다.

군자는 손 한번 드는 사이에도 구차스러워서는 아니되는 것이니 이 왼쪽으로 치는 한 획으로서 가히 이끌어 "윗 것을 덜고 아랫 것을 보태는 것"을 대의로 하되 곁으로 여러 가지 소식에 통달하면 변화가 무궁하여 가는 곳마다 그렇지 않은 것이 없는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군자가 붓을 대면 움직일 때마다 문득 계율에 들어맞는 것이다.그렇지 않다면 어째서 군자의 필적을 귀하게 여기겠는가?

이 봉안이니 상안이니하여 통행하는 규칙은 이 것이 아니면 난을 칠 수 없으니 비록 이것이 작은 법도이긴 하지만 지키지 않으면 이룰 수 가 없다. 하물며 나아가서 이보다 더 큰 법도가 어디있겠는가?

이로서 한 줄기의 잎,한 장의 꽃 잎이라도 스스로 속이면 얻을 수가 없으며 또 그 것으로서 남을 속일 수도 없으니 열 사람의 눈이 보고 열 사람의 손이 가리키니 엄격한 것 아닌가?  이로서 난초를 치는데 손을 대는 것은 스스로 속이지 않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조자고가 난을 침에 붓마다 왼쪽으로 향하였으니 소재<옹방강 翁方綱>노인이 여러 번 칭찬하였다.

군자문정첩<君子文情帖> - 밝혀지지 않았지만 어느 문인화첩인 듯하다.

 

4.화론<畵論> 정리

추사의 여러 묵란도와 화론<畵論>중에서 중요한 화론이 들어있는 글로 중복되지 아니하게 선택하여 예시하였는데, 위의 그림과 편지에서 볼 수 있듯이 추사가 강조하는 화론<畵論>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심경<心境> 측면에서 문자향과 서권기를 주장하였다. 이는 굳건한 필력을 가지고 솔직한 심정으로 글씨,그 중에서도 특히 예서 쓰듯이 난을 치라는 것으로서 조선의 손꼽히는 화가 조희룡의 난에대하여 서권기가 없고 그림의 기법이 들어있으므로 한 획도 배우지 말라고 아들에게 말한 것에서도 그가 이 부분을 얼마나 강조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둘째 방법론에서 오로지 삼전<三轉> 1가지를 강조하면서도 군자문정첩<君子文情帖>에서는  좌출엽<左出葉>과 봉안<鳳眼>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모든 것은 마음에 있는 것이고 모든 법칙을 털어버린 후, 텅 빈 마음으로 내키는 대로 란을 치라고 여러차례 강조하면서도 최소한의 기법은 지킬 것을 아울러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추사는 30여년간 난을 즐겼는데 옛 명인<名人>의 경지에 오른다는 것이 몹시 어려움을 뒤늦게야 깨우쳤다고 하였다. 그의 여러 편지글과 각종 화론에 해당하는 제발<題跋>에서 일관되게 주장하는 것은 고도의 정신세계를 구현하므로서 모양에 개의치않고 심경<心境>을 구현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20여년간 난을 치지 않았다. 수 많은 세월 동안 농축해두었던 표현이길래 자신이 스스로 화제로 적은 "20년만의 우연한 외출" 부작란은 그렇게 솔직한 모습으로 우리를 대하고 있는 것이다.

참고자료
추사 김정희의 서화.<최순택.1994.원광사출판사>
한국의 미 17권< 1985.중앙일보사>
근역인수<1968.국회도서관>
근역서화징(오세창>
추사집<김정희>

출처 : 法古創新
글쓴이 : 鄭白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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