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취 제
사람의 뇌는 컴퓨터처럼 일정하게 정보가 입력되는 것이 아니라, 때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반응합니다. 따라서 충격적인 경험인 경우, 다른 기억보다 더욱 더 선명하게 뇌리에 남을 수도 있지만, 때에 따라서는 아예 기억조차 못하기도 합니다.
너무나 충격적인 사건의 경우, 인간은 스스로를 보호하고자 하는 본능으로 인해 기억 자체를 아예 묻어버리는 일이 종종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여대생도 납치와 그 후에 일어났던 일련의 사건들을 떠올리는 것이 두려워 스스로 기억을 봉인한 것일까요?
너무 충격적인 일을 겪게 되면 이때의 기억을 잃는 부분적 기억상실증이 일어나기도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일은 드물게 일어나는 일이고, 또한 조절할 수도 없는 일이죠. 실제로 이런 경우보다는 드라마 속 여대생처럼 약물에 의한 기억상실이 더 현실적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납치에 대한 기억을 잃은 여대생의 몸 속에서는 로히프놀(rohypnol) 성분이 발견됩니다. 원래 로히프놀은 플루니트라제팜(flunitrozepam)이라는 화학약품의 상품명으로, 체내에 들어오면 근육을 이완시키고 정신을 진정시켜 수면 상태로 빠져들게 하는 물질이지요.
특히나 로히프놀은 일시적인 기억상실도 유도하여, 로히프놀에 취해 있을 때의 기억을 사라지게 하는 특징을 지니기 때문에, 마취시 보조제로 쓰였던 약물입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는 이 로히프놀을 불법적으로 사용하여 범죄에 이용하는 경우가 생겨나 몇몇 국가에서 판매 금지를 당하기도 했지요.
범죄자들이 피해자들에게 술이나 음료수 등에 몰래 로히프놀을 섞어 먹이고 무력화시킨 뒤 범죄를 저지르는 사건들이 일어났거든요. 의도하지 않게 로히프놀을 먹은 피해자들은 근육에 힘이 빠지고 수면 상태에 빠지기 때문에 범죄에 대해 속수무책으로 노출될 뿐 아니라, 로히프놀에 취해 있었던 시간의 기억마저 잃어버려서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드라마 속 여대생 납치의 경우에도 범인은 피해자에게 로히프놀이 든 술을 먹여 피해자를 무방비 상태로 만든 뒤 납치를 실시했던 것이죠.
웃음과 마취
이 경우에는 마취제가 범죄에 이용되어 부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주지만, 사실 마취제는 인류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물질입니다. 만약 마취제가 발명되지 않았더라면, 아무리 간단한 수술일지라도 생사의 기로를 오가는 심각한 일이 되었을 것입니다.
2007년에 개봉했던 영화 ‘리턴’이 이런 소재를 다루고 있는데, 이 영화 속에서는 ‘수술 중 각성’이라는 특이한 소재가 등장합니다. ‘수술 중 각성’이란 일종의 마취 부작용으로, 의식은 깨어있는데 몸은 움직일 수 없어 수술시의 통증은 그대로 느끼면서도 어떠한 조치를 취할 수 없는, 말하자면 눈 뜨고 몸을 베는 고통을 그대로 느끼면서도 비명조차 지를 수 없는 끔찍한 경우를 말합니다.
굳이 영화의 줄거리를 듣지 않더라도 저런 일을 겪고 난 사람에게는 커다란 정신적 상처가 남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 가능합니다. 마취제는 사람이 견디기에는 너무 힘든 고통스러운 시간들을 건너뛰게 함으로써 인간의 삶에 커다란 위안을 주었지요.
마취(痲醉, anethesia)의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면, ‘감각·지각의 소실이나 마비, 특히 외과적 수술 및 동통성 처치를 수행하기 위한 통각 소실에 적용한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처럼 마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통각 소실’, 즉 통증을 없애는 것입니다. 지난 칼럼에서 진통제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했지만, 통증을 없애기 위한 노력은 아주 오래 전부터 있어 왔습니다.
심각한 부상을 치료하기 위해서 아예 환자를 기절시키거나 독한 술을 잔뜩 먹여 의식을 잃게 하는 것은 원시적인 형태의 마취 방법이었습니다. 그 밖에도 다양한 허브나 약초, 양귀비, 코카나무의 잎, 차가운 얼음, 식초 등이 통증 제거에 사용되었지만, 이들 모두 마취제라고 불리기에는 모자란 것들이었습니다.
현대적 의미의 마취제가 처음으로 개발되어 이용된 것은 19세기 들어서였습니다. 18세기 말경부터 화학의 발전으로 인해 다양한 화학물질이 발견되거나 합성되어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는데, 그 중 험프리 데이비(Humphrye Daby, 1778~1829)는 아산화질소(N2O)에 주목했습니다.
질소 원자 둘에 산소 원자 하나로 구성된 아산화질소는 소기(笑氣, 웃음가스)라는 이름처럼 이를 들이마시면 감각이 점차 무뎌지면서 눈앞에 별들이 돌아가는 듯한 느낌이 나고 기분이 좋아져서 마구 웃고 싶어지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후 아산화질소는 ‘신기하고 재미있는 물질’로 분류되어 파티에서 흥을 돋구는 레크리에이션 물질로 사용되었지요.
호레이스 웰스라는 치과의사가 처음 아산화질소를 접한 것도 한 파티에서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거기서 웃음가스를 들이킨 한 젊은이가 다리를 다쳐서 피를 흘리고 있음에도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다니는 것을 봅니다.
이에 웰스는 아산화질소가 통증을 차단시키는 작용이 있다고 생각하고, 치과의사답게 아산화질소를 들이킨 뒤 자신의 이를 뽑는 ‘투철한 실험정신’을 발휘하게 됩니다. 이 실험의 결과로, 웰스는 건강한 이 한 개를 잃었지만 전혀 아프지 않게 이를 뽑는 기술을 획득하게 되어 치과의사로서는 큰 인기를 끌게 되었지요. 이후 특정 기체들이 마취 작용을 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에테르나 클로로포름과 같은 흡입마취제들이 발견되어 여러 분야에서 사용되었습니다.
특히나 1853년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레오폴드 왕자를 낳을 때 클로로포름을 이용하여 무통 분만에 성공한 이후, 클로로포름은 산고의 고통을 진정시키는 데도 이용됩니다. (단, 현대는 클로로포름의 부작용으로 인해 대신 척추를 둘러싼 경막에 마취제를 주사하는 경막외 마취를 무통분만에 사용합니다)
현재는 아산화질소에 비해 더욱 효능이 좋은 마취제가 많이 발명되어 수술시 아산화질소를 쓰는 경우는 많지 않지만, 아직도 치과 진료시에는 환자의 불안을 덜어주고 통증을 경감시킬 목적으로 아산화질소를 사용하곤 한답니다.
근육을 이완시키는 마취제
흔히 우리는 마취제라고 하면 통증을 없애는 약물이라고만 생각합니다. 하지만 실제 수술에 사용되는 마취제, 특히 전신마취제에는 통각을 차단하는 성분 외에도 다양한 성분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진정제와 근육이완제입니다.
단순히 통증을 제거하는 것이라면 진통제만으로도 가능하지만, 수술처럼 정교하고도 위험한 작업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환자가 움직이거나 힘을 주면 곤란합니다. 그래서 보통 전신마취를 할 경우에는, 진정제와 근육이완제를 사용해 환자의 의식을 없애고 근육이 경직되는 것을 막아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것이죠.
하지만 근육이완제를 사용하게 되면 수술은 수월해지지만, 환자는 전신 근육이 모두 이완되므로 스스로 호흡조차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대개 전신마취를 할 경우에는 인공 호흡 조절 장치를 같이 사용해, 수술이 끝날 때까지 환자의 호흡을 보조해야 한답니다.
마취제는 적절히 사용하면, 끔찍한 고통을 자각하지 않고서도 수술을 받을 수 있게 해주는 고마운 존재입니다. 하지만 마취제라는 것은 의식을 잃게 하고, 전신의 근육을 이완시켜 버리는 특징을 지닌 존재들이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그 자체가 인간에게 위협이 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전신마취를 하는 경우, 아주 드물지만 무서운 마취제 부작용이 나타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심각한 마취제 부작용란 마취제에 대한 알러지 반응이나 기타 다양한 원인으로 인해 마취 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심하면 사망에 이르는 경우를 말합니다. 실제로 마취제로 인해 혼수상태에 빠지는 경우는 약 8천~1만 건의 수술당 1건의 비율로 일어나고 있어, 드물기는 하지만 그 결과는 매우 치명적입니다.
또한 이렇게 심각한 경우가 아니더라도, 마취제로 인한 구토나 두통, 근육통, 오한, 일시적인 기억상실 등이 드물지 않게 일어나며, 이로 인해 2차적으로 기도 폐쇄, 폐렴 등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마취제는 매우 유용한 약물이기는 하지만, 가끔씩 치명적인 부작용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항상 전문가를 통해서만 사용되어야 하는 약물입니다. 병원마다 마취과 의사 선생님이 따로 있는 것은 그만큼 마취가 중요하고도 전문적인 기술이 요구되는 분야이기 때문이랍니다.
수술 전, 혹은 수술 후 처치들
전신마취를 해 보신 분들이라면 아시겠지만, 전신마취를 필요로 하는 수술을 해야 하는 경우 대개는 수술 전날부터 환자에게 아무 것도 먹이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마취제 부작용으로 가장 흔한 것이 구역질인데, 위장에 음식물이 남아 있는 경우 이것이 위로 올라와 구토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구토 그 자체는 그다지 위험하지 않지만, 마취로 인해 근육이 이완된 상태에서는 넘어온 구토물을 뱉을 수 없어서 이 것이 기도를 막아 숨을 쉴 수 없게 만들어 환자를 위험한 상태에 빠뜨릴 수 있기 때문에 ‘수술 전 금식’이 기본이 된 것이죠.
또한 전신마취로 가슴이나 복부에 수술을 받고 나면 항상 병원에서는 환자들에게 크게 기침을 해서 가래를 뱉어내라고 합니다. 저도 맹장수술을 받은 경험이 있는데 그 때 회진하는 의사나 간호사들이 억지로 기침을 해서 가래를 뱉어내야 한다고 하더군요. 가뜩이나 배를 째 놔서 아픈데 거기에다가 기침까지 하려니 배가 여간 땡기는 게 아니어서 투덜투덜 하면서 억지로 기침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렇게 수술을 받은 환자들에게 억지로 기침을 시키는 건 위에서 말한 마취제의 특성 탓입니다. 마취제로 인해 근육이 모두 이완되는 경우, 기관지의 섬모마저 활동을 멈춰 기관지 안에 쌓이는 노폐물을 밖으로 내보내지 못합니다. 따라서 전신마취로 수술을 받은 후에는 기관지 안에 평소보다 많은 노폐물이 쌓여 있기 마련인데, 이것이 그대로 폐로 넘어가는 경우 폐렴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전신마취 수술 후에는 이런 노폐물들을 가급적 빨리 배출하는 것이 좋은데 특히나 가슴이나 복부 수술을 받은 환자들의 경우에는 통증 때문에 숨을 깊게 쉬지 못하므로, 일부러 심호흡이나 기침을 해서 가래를 뱉어낼 필요성이 있기 때문에 고통스럽지만 억지로라도 기침을 하라고 하는 것이죠.
마취제는 조심스레 잘 사용하면 인류에게 매우 도움이 되는 존재이지만, 함부로 사용하게 되면 오히려 사람을 망가뜨리는 양날의 칼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주의사항을 숙지하고 조심스레 사용하면 인류에게 도움을 더 많이 주는 존재임은 확실하답니다.
그러니 마취제를 함부로 사용하는 것도 위험하지만, 마취제에 대한 막연한 공포심으로 인해 꼭 필요한 수술을 거부하는 것도 모두 좋은 방법은 아니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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