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本 早稻田 와세다 대학교 정치학부 동문들과/甘泳生/東京.사진(右)1946년 33살
1914년 4월 14일 밀양 上南 東山 洗川에서 아버지 甘豪鉉(감호현)과 어머니 孫基洙(昐男)사이에서 출생.
감영생은 당시 밀양 만석군 집안의 외아들로 7세에 향교 백일장에 장원을 할 정도의
놀라운 신동이었고 학식이 출중할 뿐만이 아니고 고매한 인품을 가져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 당시 밀양에 만석군 집이 두 집 있었는데 한 집은 白氏 성을 가졌고 또 다른 한 집이 바로 그의 집이었다.
사는 집 위주로 사방 30리의 어마어마한 땅을 가진 대지주였으며
집안의 땅을 그 땅을 부쳐 소작을 하고 사는 불쌍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모두 땅 문서를 풀어서 그들 앞으로 땅문서를 돌려서 해 준 그런 보기 드문 인물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그는 일어 영어 불어 독일어 중국어 5개국어에도 아주 능통하였다.
해방 당시 일본 와세다 대학교 정치학부에서 정치학을 공부하였으며
하나를 배우면 열을 알아 스승님이 혀를 내둘렀으며 제자가 스승을 능가하니
더 이상 자네에게는 내가 가르칠게 없다라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막대한 독립자금을 전설적인 독립투사 밀양 김원봉 장군에게 대어 주었다.
1945년,해방이 되고 이승만 정권과 미군정으로 나라가 엉망이 되자
일본 유학생이 주축이 되어 구국항쟁이 일어났다.
바로 이것이 1948년 2.7 구국 투쟁. 이때 1만 8,478명이 끌려가 2,290명이 재판에 회부되어
미군정 포고령 위반으로 모두 실형을 선고 받았다.
항일운동과 1948. 2. 7 구국투쟁에 동참하였고 한학을 가르치던 중 밀양 경찰서로 끌려갔는데
2.7구국 투쟁의 주동자와 참가자를 모두 고발하면 석방 해 주겠다는 회유를 끝까지 거절하였다가
그 해 8월 22일 5년형을 선고 받았으며 마산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 다,다음해인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고 며칠 후 마산 형무소에서 다른 수감자들과 동시에 증발,실종되었다
슬하에 4남 4녀의 자녀가 있어 1989년에 부친의 사인 진상 규명을 위해 사방으로 뛰어 다니다가
아버지가 1950년 7월 24일 마산형무소에서 마산 육군 헌병대로 230명의 다른 재소자와 함께
이감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며,부친이 어디론가 끌려가 집단 학살을 당했을 것이라 추측만을 하였다.
천인공노할 엄청난 일을 민주국가가 저질러 놓고도 어떠한 사실도 그 가족에게 알려 주지 않고
철저히 은폐되었다가 60년이 흐른 2009년 그런 추측들이 모두 다 사실임이 확인 되었다.
학살된 장소는 마산 괭이바다이며 한여름 삼복더위 야밤에 바다로 모두 끌려가서
살아있는 채로 온 몸이 줄로 꽁꽁 묶이고 두 다리에 무거운 돌덩거리를 매단 채 생수장.총살되었다고 한다.
2012년 현재 국가 상대로 소송중이다.
(조봉암과 1950년대.下권.역비한국학 연구총서16/ 역사비평사.서중석.책 중에서.일부 발췌.)
넋두리
간다 간다. 나는 간다.
구산 앞바다 괭이바다 검은 그 바다
오밤중 그 바닷물에 죽으러 나는 간다.
갑인생 사월 열 나흘생 甘泳生이
꽃같이 풀잎같이 살아만 와달라고
어머니 나를 위해 빌고 또 비셨건만.
바닷물에 해덜 해덜
갈치 대구 물고기 해파리 밥
물속에 여러날 浮草처럼 떠다녔다네.
아 아. 가여운 나의 魂아.
정신차리고 불러세워
휘이 휘이 흙먼지 바람따라
고향집 洗川으로 다리절며 걸어갔다오.
대문 안을 들어서니
정든 집은 날보고 통곡하고
장독대에 물 떠놓고 밤새도록
나를 기다리던 우리 어머니.
이제는 소용 없소
아무것도 모두 다 씰데 없소.
벌써 번에 벌써 번에
외아들 이 내 몸은 물에 빠져 죽었다오.
칠월이라 삼복더위
오밤중 끌려나가
모두 모두 죽었다오.
도라꾸에 두 손묶여 올라탈 때 눈치를 모두 챘소.
여기가 어디인가 둘러다 보니
비릿한 갯내음에
우리들은 머리뜯고 치떨며 통곡 했소.
칠흙같이 검은 밤 바닷가 당도하니 시꺼먼 배
모조리 줄에 엮이고
합바지 다리에는 무거운 돌덩거리.
뱃전에 서서
울고 불며 피눈물로 살려달라
애원해도 소용없었네.
수 백명 젊은 청춘
붉은 동백꽃송이 찢어지듯
발길질에 등 밀려서
어머니 찾고 울며 불며 모두 죽었소.
무슨 놈의 죽을 죄를 그리도 지었길래
오밤중 눈 가리고 꽁꽁 묶여
총맞고 生水葬되었나.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는 날 살아오라 비시지만
살 길이 더는 없소.
이 아들은 오래전에 총맞고
바닷물에 生水葬이 벌써 벌써 되었다오.
몽운아, 인목아, 의목아, 방자야!
우지마라 우지마라.
이 아부지는 오래전에 고깃밥이 되었구나.
꽃같은 아내여!
우지를 마시게.우지를 마시게.
이 내 몸은 오래전에 고깃밥이 되었구려.
세월은 파도처럼 다시 또 흘러
江山이 그 단새에 여섯번 돌고도 남은 이태.
머리깎은 손녀딸이
날 찾아와 피눈물로 젖은 얼굴 울면서 닦아주네.
우지마라 우지마라. 손녀 딸아이야.
우리의 魂과 魄은 바닷속에서
해초속을 이리저리 울면서 다니는구나.
부디 부디 우리들의 깊은 원한 좀 풀어다고.
오밤중 추진 머리, 몸 끌고서
허공중에 먼지처럼 날아다녔소.
어머니. 아 아. 가여운 우리 어머니.
대문열고 밤마다 이제 다시는
이 못난 자식 기다리지 마소.
뜨신 밥 살강 위에 떠놓고
기다리는 것도 이제 더는 하지 마소.
괭이바다 해초속에
이 내 몸은 엎드려 피눈물 삭이고 있다오.
"갑인생 사월 열나흘 生 꽃같은 甘泳生이.
하늘이 감동하고 조상님네 감읍하야
부처 신령 모두 도와
부디 부디 티끌만한 상처없이 살아만 돌아오소."
어머니의 치성소리
바닷속의 우리 모두 풀쭉 풀쭉 울었다오.
고향집 세천 중마.
어머니. 아 아. 가여운 우리 어머니.
뜨신 밥 살강 위에 떠다놓고
더는 더는 우지 마오.
풋콩이 푸리푸리 달릴 즈음에
소쩍새가 훌쩍 훌쩍 울 즈음에
나 벌써 물에 빠져 죽은 줄 모르고
삽짝문 활짝 열고 기다리셨네.
어머니. 아 아. 가여운 우리 어머니.
나 죽은 줄 모르는 아내와 어린 자식들
괭이바다 검은 바다 삼복더위에
뜨거운 그 바다에 빠져 나는 죽었다네.
나는 죽었다네. 나는 죽었다네.
경인년 그 무덥던 삼복더위 칠월 이십사일.
오밤중 도라꾸 타고 물에 빠져 총맞고 죽었다네.
1950년 7월 삼복더위 그 날 그 때 할아버지와 한 날 한 시에
그 모진 일을 당한 젊디 젊은 수백,수천 수만,
130만명의 그 가엾은 영혼들께 울면서 이 시를 바칩니다.
시/ 曉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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