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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1948년 ‘2·7 총파업투쟁’

감효전(甘曉典) 2012. 2. 7. 10:13

1948년 ‘2·7 총파업투쟁’
[노동자역사 한내] 이달의 노동자 역사
 

전평 노동자들은 무엇을 위하여 살고 무엇을 위하여 죽었는가?
 
최근 동료 배우 유해진과의 열애사실을 공식 인정하여 관심 있는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톱스타 김혜수도 자신의 미니홈피에 게재했다는, ‘대중의 비자주성’ 등을 비판했던 덴마크 철학자 키에르케고르(1813.5.5 ~ 1855.11.11)의 명언 하나를 옮겨본다.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알아야 하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뚜렷하게 정립하는 것이다.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일은 나 자신을 아는 것이며, 세상이 내가 어떤 일을 하기를 진정으로 바라는지를 아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무엇을 위하여 살고 무엇을 위하여 죽어야 하는지를 정확하게 아는 것이다.”
 
1947년 8·15 해방기념행사를 금지하기 위하여 8월2일 미군정(재조선 미육군사령부 군정청) 당국은 행정명령 제5호를 발표했다. 전평(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과 산하 노조 대표들은 5일에 미군정 당국을 방문하여 행정명령 제5호를 철회하라고 요구했다. 그들은 “우리민족의 국경일 8·15 해방기념일을 앞두고 발령된 행정명령 제5호 8·15 해방기념대회 금지법령은 성스러운 우리 민족의 해방을 모독하고 인민의 자유의사를 억압하려는 부당한 조치”라고 항의했다. 전평 부집행위원장 이인동은 8일 기자회견에서 “당국으로서 조선민족을 위하고 민주주의를 위하는 양심이 있다면 동법(同法)을 철회하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민의 요망에도 불구하고 무성의함에 대하여 반성을 촉하며 인민의 힘이 반드시 이 문제를 해결하리라는 것을 확신한다”면서 ‘악법 철회투쟁’을 벌였다.
 
그러나 전평 총무부장 문은종은 1947년 8월11일 오후 수도(서울시)청에 가서 8·15 기념대회를 위한 ‘교섭투쟁’을 벌이다가 그 자리에서 피검되었으며, 문화부의 박봉우는 11일 대낮에 남대문로에서 피검되었다. 12일 아침 5시 경관대가 전평회관에 와서 조합원 40명을 체포하고 서류 집물까지 압수해 갔다. 이후 전평회관을 형사대가 점거했다. 이렇게 미군정은 8월 11, 12일 이후에 진보적 민주주의 기관과 인물을 일제히 수색 검거했다. 13일까지 문은종을 비롯하여 산업별단일노조 대표 등 전평 조합원 198명이 자택이나 가두에서 피검되었다. 민전(민주주의민족전선)의 경우도 13일까지 간부급만 해도 60여 명이 검거되었고 민전회관도 폐쇄되었다. 결국 23일 현재 진보적 민주주의 진영의 인사들이 서울시의 125명을 비롯하여 남조선(38선 이남지역) 각지에서 2000여 명이 검거되었다.
 
이렇게 모스크바 삼상(미국·영국·소련 외상)회의 결정과 그에 따라 실시하는 미소(美蘇)공동위원회 사업을 지지하는 세력인 진보적 민주주의 진영에 대하여 미군정은 1947년 ‘8·15 폭압’이라는 일종의 ‘반공쿠데타’를 감행하여 국제적 차원의 반파쇼 ‘좌우연합전선’격인 미소공위 사업을 실질적으로 파괴했다. 이에 전평은 8월 하순 전후부터 미군정의 성격을 ‘조선인민의 주적(主敵)인 미국제국주의’로 규정하여 그 이전까지의 미군정의 정책에 대한 ‘투쟁과 협력’이라는 양면적 인식과 대응태도에서 벗어났다. 이후 전평은 미군정에 대한 ‘전면적인 투쟁’만을 벌이게 되었다.
 
1947년 9월17일 미국 국무장관 대리 ‘로베트’는 ‘조선문제의 유엔(국제연합) 상정을 제안’하는 서한을 미소공위에 보냈다. 그러나 미국측의 ‘조선문제의 유엔 상정안’을 거부한 소련측은 26일에 내년 봄까지 미소 양군의 조선으로부터 동시 철퇴를 제안했다. 10월9일에 소련의 모르토프 외상은 미국의 국무장관 마샬에게 재차 동시 철병안을 확인시켰다. 그러나 이를 거부하고 미국은 17일 일방적으로 유엔총회에 ‘조선문제’를 상정했다. 그리고 미국측은 18일에 미소공위 휴회를 공식화했다.
 
전평은 1947년 11월5일 창립 2주년 기념일을 맞이하여 성명서를 발표했다. 여기에서 전평은 미군정에 대한 전면적인 투쟁만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들을 제시했다. 전평은 “오늘의 정세는 소위 8·15 음모라는 허위적 모략적인 구실로써 전 민주진영에 대하여 테러, 검거, 학살로서 전대미문의 일대 폭압”을 미군정이 저지르는 파쇼적이고 반민주적인 상황이라고 했다. 전평은 “조선의 민주독립을 보장하는 삼상회의 결정을 결사반대하는 친일 매국도당의 방해와 그 방해를 빙자한 미소공위 미국대표의 무성의로 말미암아 공위는 또다시 무기휴회로 들어갔다”고 하여 미국이 국제적인 차원의 ‘좌우연합전선’격인 반파쇼 민주주의 국제노선에서 일탈했다고 했다. 전평은 “조선의 독립을 지연 복잡화시키며 1개국 신탁과 단정을 구실 삼기 위하여 조선문제를 유엔에 상정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하여 미국의 ‘조선문제의 유엔 상정’은 조선을 미국의 식민지 내지 ‘분단국가’로 가게 하는 한 과정이라고 파악했다. 전평은 “친일파, 반역도배들을 제외한 민주주의 인민정권이 수립되지 않고는 노동자·사무원 대중을 해고·실업과 폭압으로부터 그 생활과 권리를 보장할 수 없으며 조국의 민주완전독립을 바랄 수 없다”고 했다. 전평은 이와는 반대되는 입장에 있는 미군정에 대한 전면적인 투쟁을 벌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전평은 “소미 양군의 동시철퇴 후 외국의 간섭 없는 민주주의적 조건과 환경 아래서 민주정부의 수립을 실현하기 위하여 더욱더 과감히 투쟁할 것을 굳게 맹서”한다고 했다.
 
조선문제 해결에 있어서 직접 관계가 있는 한반도의 주민인 조선인민 대표의 참가 없이, 그리고 한반도를 현실적으로 점령하고 있는 미소 양국의 합의 없이, 미국이 주도하는 유엔에 의해서 결정된 미국의 조선정책으로서 단선단정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남북총선거’를 대행하기 위하여 유엔조선위원단이 1948년 1월7일 남조선에 들어왔다. 그러자 전평 산하 조합원들의 일부는 8일에 이미 파업투쟁으로 항의하고, 28일에는 전평과 산하 노조, 즉 금속·출판·어업·식료·토건·일반봉급자·전기·철도·광산·해원 노조 등이 유엔조선위원단의 활동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1948년 1월 14일 유엔조선위원단 환영대회.

 

드디어 1948년 2월7일을 기하여 전평이 조직한 ‘유엔조선위원단항의남조선총파업위원회’는 단선단정반대 총파업 투쟁을 전개했다. 이 총파업위원회는 ‘토지의 무상몰수 무상분배, 적산과 중요산업의 국유화와 인민의 관리’ 등의 경제적 요구와 주장 그리고 ‘단선단정의 반대와 외국 군대 철퇴 하 남북통일 자주정부 수립’ 등의 정치적 요구와 주장이 담긴 <총파업 선언서>와 <항의서>를 유엔조선위원단에 보냈다. 이렇게 경제적·정치적 기치를 내걸고 전개된 ‘2·7 단선단정반대 총파업투쟁’ 3일(7~9일) 동안에 8만여 명의 노동자들이 파업투쟁으로 참가한 것을 비롯하여 맹휴 5만3000여 명, 시위 57만5000여 명, 집회 72만9000여 명, 봉화 2만9000여 명, 쌀투쟁 9000여 명 등 남조선 각 지방에서 약 150만 인민이 동참했다. 이 투쟁으로 57명이 사망하고, 146명이 중경상을 입고, 1만854명이 검거되었다. 

 

『우리신문』1948년 2월8일.

전평은 1948년 ‘2·7 단선단정반대 총파업투쟁’ 직후 “우리 조국의 흥망은 실로 우리들의 결의와 투쟁여하에 달려있습니다. 우리는 조국과 인민을 사랑하는 전 인민대중이 노동자들의 구국투쟁에 대해서 절대적인 성원과 공투가 있기를 확신하는 동시에 또 기대하는 바입니다. 우리는 노동자들의 이번 투쟁을 전적으로 지지하는 동시에 이번 파업의 요구와 목적이 달성될 때까지 죽음으로써 싸울 것을 성명하는 바입니다”라고 하여 한층 더 미군정에 대한 전면적인 투쟁의지를 가다듬었다.
 
나는 지금으로부터 62년 전의 전평 노동자들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았다고 본다. 그들은 자기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뚜렷하게 정립했다고 본다. 그들은 자기 자신이 무엇을 위하여 살고 무엇을 위하여 죽어야 하는지를 알았다고 본다. 즉 당시 전평 노동자들은 ‘주객관적으로’ 명실 공히 노동자로서 ‘토지의 무상몰수 무상분배, 적산과 중요산업의 국유화와 인민의 관리’ 등의 경제적 요구와 주장 및 그것을 실현하기 위하여, ‘단선단정 반대와 외국 군대 철퇴 하 남북통일 자주정부 수립’ 등의 정치적 요구와 주장 및 그것을 실현하기 위하여, 살았고 죽었다.

 

『우리신문』1948년 2월14일.

 

그런데 오늘날 나는 노동자대중의 한 구성원이지만, 아직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인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뚜렷하게 정립”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나는 노동자대중의 한 구성원이지만, 아직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일”인 “나 자신을 아는 것”과 “세상이 내가 어떤 일을 하기를 진정으로 바라는지를 아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 역시 나는 노동자대중의 한 구성원이지만, 아직 “내가 무엇을 위하여 살고 무엇을 위하여 죽어야 하는지를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있다. 정말 부끄럽다.

 

안태정(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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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프롤레타리아네트워크뉴스
글쓴이 : [PNN] 사회주의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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