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동안 빈센트 반 고흐는 가난과 굶주림과 질병에 시달렸다. 1890년에 37세의 나이로 고흐가 죽었을 때, 그의 작품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상황은 완전히 뒤집혔다. 고흐는 지금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라 해도 부족함이 없다. 1987년 에 그의 작품<해바라기>는 런던에서 2,500만 달러라는 기록적인 가격에 파렸다. 반 고흐 의 그림은 색채가 뚜렷하고 대담하고 열정적이며, 100년 전의 작품이데도 현대적이고 열기 에 넘치는 세계를 잘 표현하고 있다.
빈센트 반 고흐는 1853년 3월 30일, 네델란드 남부에 있는 조그만 마을 흐로트 쥔데르트에 서 태어났다. 고흐의 아버지는 목사였고 그의 가족은 존경 받는 중산층 가족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고흐는 책 읽기와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지만 화가가 될 생각은 없었다. 화가가 되기로 한 것은 고흐가 어른이 되고도 한참 뒤에 결정한 일이었다.
고흐는 종교에 더욱 몰두하게 되어 24세 때에는 마침내 목사가 되기로 결심을 한다. 그는 네델란드로 돌아와 암스테르담과 브뤼셀에서 3년 동안 목사 수업을 받았다. 그러나 교회 시험에 계속 낙제를 하자 고흐는 황량한 탄광 지대로 가서 가난한 노동자들에게 선교를 하기 시작했다. 그는 노동자들을 돕고 그들에게 신의 뜻을 전하기 위해 짚풀 위에서 잠을 자는 생활을 했다. 그는 그들과 함께 밥을 먹고 그들과 같이 옷을 입었으며, 탄광 안으로 함께 들어가기도 했다. 그는 이 일에 너무나 열정을 쏟은 나머지 선배 성직자들의 태도를 비난하기에 이르렀고, 1879년 7월에는 '품행 불량'을 이유로 전도사의 직위를 잃게 된다.
* 농부를 그리는 화가
27세 때 소흐는 일생일대의 결심을 한다. 화가가 되기로 한 것이다. 그는 1880년에서 1885년 까지 꾸준히 그림 실력을 키워 갔다. 그는 돈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네델란드 곳곳에 있는 싸구려 방을 전전하며 살았다. 드렌테라는 황량한 시골에 살며 그 곳에 있는 주민들을 그리 기도 했다. 그는 자주 병에 걸리고 절망에 빠졌지만, 화가로서 성공하리라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 감자를 먹는 사람들
1885년에 고흐의 아버지 테오도루스 반 고흐가 뇌넨의 교회에서 돌아가셨다. 고흐는 이에 충격을 받지만 화가로 성공하겠다는 결심은 한층 굳어졌다. 그의 첫 번째 걸작 <감자를 먹는 사람들>은 지금까지 고흐가 배웠던 모든 것을 집약해서 보여 주는 작품이다. 그 해 말경에 고흐는 앤트워프와 파리의 화가들이 보여 주는 새로운 스타일을 만나게 된다.
* 파리
고흐는 파리에 온 뒤 그림 상인이 된 동생 테오와 함께 몽마르트 언덕 근처에서 2년동안 살았다. 당시 프랑스 미술은 아주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고흐는 테오를 통해 새로운 '인상주의' 운동의 선두에 서 있는 화가들을 만나게 되었다. 어두운 북부 스타일의 그림을 그려 온 고흐에게 이들이 끼친 영향은 아주 컸다.
* 일본의 영향
고흐는 파리 생활과 인상주의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지만 여전히 자신의 스타일을 찾고 있었다. 평생 동안 고흐는 새로운 생각과 기법을 기꺼이 받아들여 자신의 작업에 응용 하였다. 파리를 떠나기 직전에는 일본 판화가 고흐에게 강렬한 영향을 미쳐 그의 그림에 색채와 생기를 더욱 불어넣었다. 고흐는 그런 일본 판화를 400점 가량 모았는데, 1887년 봄에 아고스티나 세가토리라는 카페 주인이 그가 모은 판화로 전시회를 열어 주었다.
* 아를
아를에 있을 때 고흐는 카렐이라는 카페에서 생활했다. 고흐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마을 주민들은 붉은 머리에 쉰 목소리가 나는 이 네델란드 화가를 이상 하게 여겼다. 고흐는 혼자 있을 때 행복을 느꼈다. 그는 남부 지방의 풍경과 빛과 평온 을 좋아해서, 봄 꽃이 가득 핀 들이나 과수원으로 나가 오랫동안 그림을 그리곤 했다.
* 단순함 위대함
1888년 여름에 고흐는 그 유명한 <해바라기>를 비롯한 많은 걸작들을 그려 냈다. 그는 자주 정신을 잃었고 또 위장병을 앓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고흐는 엄청난 양의 물감을 써 가며 쉬지 않고 그림을 그려댔다. 고흐에게 물감을 보내 주던 테오는 결혼을 준비하면서도 여전히 다달이 생활비를 보태 주었다.
* 노란집
1888년 여름에 고흐는 아를에 있는 플라스 라마르틴이라는 집의 한쪽에 세를 들었다. 그 집은 노란 칠이 되어 있었고 실내에는 작업하기 좋게 햇빛이 잘 들었다. 고흐는 이 집을 화가들이 교제 장소로 쓰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스스로 집 안팎을 꾸몄다. 그리하여 이 집은 마음의 평화를 찾는 고흐를 상징하게 되었다.
* 정신병
1888년 12월에 고흐와 고갱은 심각한 갈등을 겪게 되었다. 고흐는 자주 병에 결리고 환각 에 빠졌는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상태는 더욱더 악화되었다. 12월 말에 고흐는 정신 상태 가 몹시 위태로워져서 아를에 있는 정신 병원에 입원하였다. 정신병에 걸리고 만 것이다. 그러나 입원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고흐는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 생 레미
1889년 5월에 고흐는 아를 병원에서 생 레미 정신 병원으로 옮겨간 후 거기서 1년을 지냈 다. 테오는 고흐가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그의 침실과 화실을 꾸며 주었다. 여전히 신경 발작과 병치레에 시달리면서도 고흐는 천천히 회복하는 낌새를 보였고, 그림도 계속 그려 나갔다.
* 다시 북부로
1890년 5월에 고흐는 생 레미 정신 병원을 떠나 파리로 갔다. 테오는 결혼을 했고 그 부인 은 임신 중이었다. 고흐는 북부로 가고 싶어져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오베르 쉬르 우아즈로 옮겨갔다. 폴 가셰 박사가 고흐를 돌봐 주었다. 가셰 박사는 정신과 의사로 그 자신 짬짬이 그림을 그리는 화가였다.
* 끝 그리고 시작
오베르에서 두 달을 보낸 후 고흐는 완전히 기운을 잃고 말았다. 1890년 7월 27일, 그는 들에 나가 권총으로 자신을 쏘았다. 그의 나이 37세였다. 이틀 후에 고흐는 테오의 품 안 에서 숨을 거두었다.
* <참고문헌> 앤드류 휴즈 글, 햇살과나뭇꾼 옮김.
세계의 미술가 기행 5 반 고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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