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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Gustav Klimt -- 죽음으로 둘러싸인 희망과 사랑

감효전(甘曉典) 2012. 2. 15. 09:24

Gustav Klimt - 죽음으로 둘러싸인 희망과 사랑

 

    

 

                    구스타프 클림트( Gustav Klimt, 1862 - 1918, 오스트리아 )

구스타프 클림트는 다혈질이었고, 살아 생전에 명성을 누렸고 주변 사람들로부터도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루마니아 여행에서 돌아온지 얼마 안되는 1월 11일 아침, 클림트는  자기 집에서 옷을 갈아 입으려 하다가 뇌일혈 발작으로 오른쪽 반신이 불수가 되고 말았다. 그의 부친도, 그의 동생도 뇌일혈로 사망하였으므로, 클림트는 늘 자신도 그같이 될까 두려워하였다. 그는 '60세까지는 살고 싶다'고 되풀이하여 말했다고 한다. 

그의 증세는 잠시동안 꽤 호전되었으나, 스페인 독감이 폐렴에 이르러 결국 2월 6일 아침 6시에 숨을 거두고 만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처럼 오랜 세월 병마에 시달리지 않았고, 56세의 나이로 죽었다. 그는 평생 자신을 죽게 만들 병으로 뇌일혈을 걱정했지만 그를 죽게 만든 것은 그런 뇌 출혈이 아니라 '스페인 독감'이었다. 에곤 실레는 클림트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비엔나종합병원의 해부병리학과 지하실에서 그의 사체를 화폭에 담았다. 클림트의 저주였을까? 실레 역시 스페인 독감에 걸려 죽고 만다.

황금색의 황홀하고, 몽환적인 그림으로 카페의 벽 어딘가 남녀가 부대끼는 장소에 걸려 있을 법한 그림 1순위에 오르는 화가가 바로 구스타프 클림트이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인들의 아름다움은 때로 풍성함으로, 때로 앙상함으로 드러나지만 그것이 어떤 양감을 지녔던 클림트의 그림이 묘사하는 여인들은 아름답다. 그도 그럴 것이 클림트만큼 여성을 사랑(?)한 화가가 또 어디 있었을까? 오죽하면 그의 별명이 '빈의 카사노바'였겠는가.

생전의 구스타프 클림트는 어머니와 누이동생을 끔찍이 아끼며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의미였을 뿐이다. 그는 동료 화가인 에밀 쉰들러의 딸 '알마 쉰들러'(훗날 구스타프 말러, 발터 그로피우스의 아내, 오스카 코코슈카의 연인이었던 알마 말러)부터 에밀리 플뢰게에 이르기까지 수 많은 여인을 품었고, 그 결과 14명이나 되는 사생아들을 세상에 남겼다.

그 중 '미치 짐머만'은 클림트에게 두 명의 아들을 낳아 주었고, 마리아 우치키는 아들 하나를 낳앗다. 두 여인 모두 첫 아이의 이름을 아버지의 이름을 따 '구스타프'라 지었다. 믿던 그렇지 않던 간에 자신의 모델이 된 여성과는 꼭 잠자리를 했다는 풍설이 있을 만큼 그를 둘러싼 여성 편력에 대한 이야기들은 풍성하다. 그의 작품 중 임신한 여인을 그린 세 개의 작품이 있는데 그중 <희망Hope I>의 작품에 등장하는 임신한 여성 모델이 바로 '미치 짐머만'이다. 제목은 희망이지만 마치 해골과 적의를 띤 남성들에 둘러싸인 채 창백하게 질려 있는 듯 하다.


 

     
 

                                      Gustav Klimt, Hope I, 1903, Oil on canvas,

                                 189 x 67 cm, National Gallery of Canada, Ottawa -

                               그의 작품 중 임신한 여인을 그린 세 개의 작품이 있는데

                             그중 <희망Hope I>의 작품에 등장하는 임신한 여성 모델이

                                  '미치 짐머만'은 클림트의 사생아를 임신하고 있었다.

 

2월 6일 클림트가 죽자 14명이나 되는 사생아들의 어머니들이 아이들을 대신해 상속을 요구해왔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클림트를 만날 당시 18살이었던 에밀리 플뢰게에게는 아이가 없었다. 그녀에게는 생전의 클림트가 시시콜콜하게 적어 보낸 엽서들 (가령, "여기는 바르셀로나요. 이 곳의 아름다운 여자들을 보고 난 탓인지, 어제는 당신 꿈을 꾸었소." 같은 것) 만이 남겨졌다. 결국 에밀리 플뢰게가 죽은 클림트를 대신해서 그들에게 남겨진 유산을 분배해주어야만 했다.

 

생명의 활력과 죽음의 그림자 사이에서


1862년 7월 14일, 오스트리아 제국의 수도 비엔나 근교였던 바움가르텐에서 태어난 구스타프 클림트. 그의 아버지 아버지 에른스트는 보헤미아 출신의 동판조각사이자 금세공사였고, 모친인 안나는 오페라 가수가 꿈이었다고 한다. 구스타프는 아들 셋, 딸 넷 중 장남이었는데, 그의 바로 아랫 동생인 에른스트는 28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형을 도와 미술계에서 많은 활동을 했다.

구스타프의 아버지 에른스트는 8세 때 양친을 따라 비엔나로 이주하여 동판 조각사가 되었지만 벌이가 시원치 않은 탓인지 워낙 다혈질이었던 탓이었는지 평소에는 친절하고 다정했으나 종종 격노하여 폭력을 휘두르곤 했다. 클림트는 "어느 해인가는 크리스마스 때인데도 집에 빵 한 조각 없었다."는 여동생의 회고처럼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장녀와 막내딸을 잃은 양친은 남은 다섯 아이를 어떻게 해서든 잘 길러보려 했지만 장남인 구스타프를 짐나지움(독일계 학제에서 짐나지움은 우리식으로 하자면 대학진학을 목적으로 하는 인문계 고등학교)에 입학시키지 못하고 공장 노동자나 장인의 삶이 예정된 고등공민학교인 '뷔르거'슐레(슐레는 실업계 직업교육학교)에 입학시킨다.


 
     
 
아터 호반에서
 
이토록 극심한 빈곤에 허덕이며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그의 데생 솜씨를 눈여겨 보았던 친척의 도움으로 1876년 '비엔나 장식미술학교'전문적인 미술의 길에 들어설 수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페르디난트 라우프베르거, 한스 마카르트와 같이 당대의 저명한 화가들의 주목을 받으며 화가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그는 자신의 뒤를 이어 진학한 동생 에른스트, 그리고 그와 마찬가지로 주목을 받던 프란츠 마츠와 함께 동인을 결성하여 예술적 이상을 교류하며 링 거리의 교회 창문 디자인, 체코슬로바키아의 칼스바트 온천장의 천장화, 라이헨헤브크 국립극장의 천장화 제작 같은 일들을 주문받아 학비를 조달하기도 했다.
그가 비엔나 장식미술학교를 졸업할 무렵에는 이미 화가로서 나름의 명성을 얻고 있었다. 이 무렵의 그는 관습적인 주제를 아카데믹한 양식으로 그리는 벽화가였다. 그는 동생 에른스트, 마츠와 함께 '쿤스틀러 콩파니'를 설립하고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간다. 이때 구스타프 클림트는 루마니아 부쿠레슈티 국립극장 장식, 피우메의 리예카 국립극장 장식, 비엔나 미술사 박물관의 대계단 장식 등을 함께 해나갔다. 1890년에는 비엔나 구(舊) 국립극장의 실내 장식 작업으로 그해 처음 제정된 "황제 대상'의 수상자가 되는 등 명성을 얻기 시작한다.

그러나 호사다마(好事多魔)라 했던가? 1892년 그에게 있어 둘도 없는 예술적 동반자이자 동지였던 동생 에른스크가 젊은 나이에 뇌일혈로 사망하고, 그 얼마 뒤 애증의 대상이었던 아버지 에른스트 마저 뇌일혈로 사망하고 만다. 아직 한창 젊음을 구가해야 할 동생과 아버지의 죽음은 그에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심어주고, 남은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하게 만든다. 그의 작품 속에서 삶과 죽음의 이미지가 늘 공존하는 까닭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른다.


     
 

                                            동생의 처제이자 그의 연인이었던

                                      에밀리에 플뢰게와 함께 한 구스타프 클림트

 

몰락해가는 유럽의 불꽃, 클림트와 비엔나 분리파 

동생 에른스트의 죽음은 그에게 적지 않은 충격과 두려움을 주었으나 구스타프 클림트는 아직 젊었고, 예술가로서의 성공에 대한 야심도 있었다. 당시 비엔나는 몰락해가는 구체제의 유럽, 그 압축된 모순으로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수도였다(좀더 자세한 내용은 에곤 실레편에). 당시 비엔나는 늙은 대륙 유럽에서도 가장 완고한 예술가들이 아카데미를 틀어쥐고, 현대 예술의 새로운 흐름에 대해서는 외면하는 형국이 지속되고 있었다.

그들은 때로 아카데미의 권위로, 때로 상업적인 배려로 답보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비엔나의 숨막히는 분위기를 더욱 옴짝달삭할 수 없게 틀어지었다. 비엔나의 화단은 새로운 기운을 고취시킬 수 있는 운동이 필요했다. 구스타프 클림트는 비엔나의 보수적인 예술가 집단인 '쿤스틀러 하우스'를 탈퇴하고, 요셉 호프만, 콜로만 모저 등과 함께 '비엔나 분리파'를 결성하고 초대 회장이 된다.

비엔나 분리파에게 사상적 토대를 제공한 헤르만 바는 "우리는 삭막한 일상과 너절하고 하찮은 것에의 집착, 그리고 모든 형태의 악취미에 대해 선전 포고를 하련다."라고 외쳤고, "오스트리아를 아름다움으로 덮어 버리자!"고 촉구했다. "각 세기마다 고유한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이란 슬로건을 내세운 그들의 야심은, 예술로부터 상업성의 비계를 걷어 내고, 외국의 탁월한 작품들을 소개하여 비엔나를 문화적 고립으로부터 구출하며, 위대한 예술과 부수적 예술 부자들의 예술과 빈자들의 예술을 가르는 구분을 철폐하고 도시 계획, 건축, 가구, 생활 필수품 등 생활의 모든 국면에서 예술을 창조하겠다는, 말하자면 '총체 예술'을 확립하겠다고 선언하고 나선 것이다.

그들은 기관지 <성스러운 봄>을 창간하고, 기금을 모금하여 '분리파 전당'을 건설하고, 이후 8년 간 '일본 미술전', '인상파 미술전' 등 스물 세 번의 분리파 전시회를 기획, 추진한다. 바야흐로 낡은 세기는 가고, 그들에게 새로운 세기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서구문명을 말할 때 단순하게는 서유럽에 구축된 문명, 좀더 넓게 보자면 과학과 기술 그리고 세계시장을 기반으로 하는 문명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인간이 자유와 평등, 그리고 정의라는 미덕에 의해 이 세상에서 좀더 행복해질 수 있다는 사상(그것을 계몽주의를 그 기원하는 사상으로 볼 수도 있고, '진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을 의미하기도 한다.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던 무렵의 유럽은 마치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가고 있는 현재 미국 주도의 세계화가 의미하는 것처럼 이런 서구의 문명을 받아들이는 독립된 국민국가에 의해 인류의 진보가 가능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이 정치체제는 동시에 그로 인한 반동(향)을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이런 서구 문명의 정치 체제는 민족주의가 일어나 그 강한 힘으로 자기를 낳은 문명 자체를 파괴할 듯한 위기를 되풀이해서 초래하게 될 것이란 사실을 알지 못했다. 모순처럼 들리겠지만 유럽 문명은 이렇게 확대되면서 동시에 쇠퇴해갔다.

 

     
 

                                       아델 블로흐 바우어 Adele Bloch-Bauer

식민지로 쌓아올린 부와 무너져가는 도덕

1882년 제국주의 국가 영국은 착실한 서구화의 길을 밟아 가고 있던 이집트에 함대를 파견하고, 알렉산드리아를 포격한다. 이집트는 수에즈 운하의 건설에도 한 몫 끼어 있었고, 철도도 부설하려 하고 있었다. 오늘날의 '세계화'처럼 '근대화'라고 불리던 서구화를 앞당기기 위해 당시 이집트 정부는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막대한 차관을 들여와 유럽에 대한 의존도를 더욱 높이게 되었고, 이런 사실은 이집트 민중들의 강한 반발을 불러 일으키게 된다.

결국 1882년 6월 이집트의 육군 대령 아흐메드 아라비는 민족주의 반란을 일으키게 되고, 수에즈 운하를 비롯한 이집트에서 자국의 이권을 보장받기 위한 영국은 그에 대한 보복으로 알렉산드리아를 포격한 뒤 군대를 상륙시켜 이집트를 보호령으로 만들었다. 조치는 일시적인 것이라 변명했으나 결국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영국은 이집트를 점령했다.

프랑스 역시 이에 질세라 알제리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고, 이탈리아는 대 터어키전에 승리하여 리비아를 획득한다(이 부분에 대해서는 영화 <바람과 라이언>, <사막의 라이언>, <아라비아의 로렌스>, <하르툼> 편에서 좀더 자세히 다루겠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독일의 철혈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이런 정세를 방치해 두었다가는 국제적인 위기가 발생할 것이라 하여 1885년 베를린에서 국제회의를 개최한다.

당시 독일은 식민지 경쟁에서 뒤처지고 있었으므로 이 회의가 식민지 쟁탈전을 저지할 목적이었다기 보다는 독일도 한 몫 보자는 뜻에서 이루어진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결국 1885년 이후 극히 짧은 기간 동안 사하라 사막 이하 아프리카 전역이 식민지화되고 말았다.

클림트가 활발하게 활동하던 시기 유럽의 부르주아지들은 식민지 쟁탈과 착취를 통해 쌓아올린 부를 통해 유럽 대륙이 세계 제일의 문명이자 인류의 미래가 진보해갈 것이라 확신했다. 새로운 세기인 20세기가 시작될 무렵 클림트는 비엔나 대학으로부터 대회랑 천장 벽화 작업을 의뢰받게 된다.

그는 법학, 철학, 의학을 주제로 그린 3부작을 통해 인간의 삶 속에 투영되는 고통과 두려움, 인간의 정신적 방황에 대해 추상적 패턴을 도입해 복합적이고 왜곡된 양식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그러나 비엔나의 대중들과 심지어는 비엔나 대학의 교수들조차 발끈해서 들고 일어났다. 그들은 평소 여인들의 자위행위 장면이나, 남녀간의 성교 장면을 거침없이 그렸던, 풍문이 좋지 않았던 클림트의 작품을 참아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클림트는 이런 비판에 대해 자신의 예술에는 조금의 문제도 없다고 생각했다

 "이 돈, 더 이상 필요없으니 어서 가져가시오!"

클림트는 천장벽화작업을 스스로 포기하고, 작품 제작비 일체를 돌려주었다.

 
     
 

                            아프리카풍의 스먹(Smock)을 입고 있는 구스타프 클림트

                            비엔나의 작업실에서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작업에 몰두고,

                            나머지 반은 동생의 처제인의상 디자이너 에일리에

                            함께 아터 호반에서 고요한 명상과 휴식을 즐겼다.

 

부르주아 사회의 퇴폐와 창녀, 팜므 파탈

퇴폐적인 에로티시즘'. 구스타프 클림트의 작품들은 당대에도 이미 퇴폐적인 에로티시즘이라는 비판을 받았지만, 그가 살았던 시대는 그의 작품보다 더 퇴폐적이었다. 부르주아의 청교도적인 도덕률은 제국주의와 함께 오간데없이 사라졌고, 매독은 창궐했다. 클림트의 작품을 보며 퇴폐적이란 비난을 서슴없이 가한 사람들은 잠시후 뒷골목 매음굴에서 지갑을 잃어 버렸다.

그의 작품에는 어째서 그토록 많은 여인들이 등장하며 이전의 예술가들이 그리듯 그렇게 다소곳한 표정의 수줍게 고개 숙인 누드가 아니라 그토록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있는가? 어째서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역사 속의 정숙한 여인, 혹은 유대 민족을 구원한 유디트는 금방 정사를 끝낸 여인의 몽롱한 눈빛을 하고 있는가? 그들은 과연 팜므 파탈인가.

현대예술이 이렇듯 요부상이나 창부상 등을 통해 현실을 드러낸 것과 관련해 예술사회학자 아놀드 하우저(Arnold Hauser)는 다음과 같은 언급을 했다.

 "창부는 격정의 와중에서도 냉정하고, 언제나 자기가 도발한 쾌락의 초연한 관객이며, 남들이 황홀에 도취에 빠질 때에도 고독과 냉담을 느낀다. 요컨대 창부는 예술가의 쌍둥이 짝이다."

왜 한 시대의 여성 이미지가 바로 그 시대를 극복하기 위해 창부의 상으로 압도돼야 했는지를 매우 잘 설명해주는 지적이다. 역사 이래 가장 치열한 '성(性)간의 전투'가 시작되면서 그들은 냉정해져야 했고 그로 인한 고독을 회피하지 말아야 했다. 이는 현대의 예술가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 황금률이었다.

부르주아와 같이 혁명을 일으켰으마 혁명 뒤 그들로부터 버림받은 근대의 예술가들은 (예술가들은 부르주아 혁명의 가치를 담아 작품을 제작했으나, 주지하듯 권력을 장악한 부르주이지는 그런 예술을 멀리하고 오히려 고전적 작품을 선호하는 등 급속히 복고적이 돠어갔다) 스스로를 창부와 동일시함으로써, 또는 창부를 동경함으로써 스스로 창부가 되고, 그럼으로써 세상을 향해 특히 부르주아 사회를 향해 "네가 오히려 진짜 창부다"하고 절규할 수 있었다.

『미술로 보는 20세기』/ 이주헌 지음/ 학고재/ 2001년 중에서

 

강력한 군사력과 부를 원했던 왕들과 부자를 열망한 상인, 은행가들의 결탁으로 시작된 유럽의 팽창 사업은 16세기 동안 서유럽의 무역상인들을 통해 전유럽으로 흘러들었고, 이 시기에 지속된 서유럽의 인구 증가는 서서히 자본주의의 맹아로 자리잡았다. 그리고 프랑스 혁명은 부르주아들에게 확고한 지위를 주었다. 자본주의는 복잡하게 설계된 미로와도 같이 인간을 가둬두게 된다.

과연 자본주의가 여성들에게 자유를 선사했는지를 판단할 능력이 나에게는 없지만 모택동이 '하늘의 절반을 떠받치고 있는 여성들을 부엌에 가둬두고 혁명은 불가능하다'고 했던 명제의 역관계가 성립한다면 모든 인간을 그런 미로에 가둬두고서 여성들에게 자유가 주어졌다는 것은 믿을 수 없다. 가령 현대의 여성들이 이전보다 자유로와졌다면 그것은 피임약의 발명과 같은 과학의 발전 혹은 전쟁을 통해 남성들의 노동력을 더 이상 착취할 수 없었던 자본주의가 여성의 노동력을 시장으로 끌어내기 위한 적정한 타협의 산물일 수도 있다(이와 관련해서는 영화 <그들만의 리그>를 참조해주기 바란다).


     
 
 

성녀에서 악녀로 - 유디트의 변천

클림트의 작품 <유디트Judith>와 그의 남겨진 유작 <아담과 이브>를 보자. 유디트는 성서 속에서 앗시리아의 침공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여인이지만 동시에 '홀로페레느스Holofernes'라는 앗시리아 '남성' 장군의 목을 베는 여인이기도 하다.

유디트는 서양 미술에서는 오래된 고전의 주제 중 하나였다.  주로 패덕과 욕망을 단죄하는 겸손과 순결, 믿음의 승리를 드러내기 위한 기독교적인 미덕의 소재로 다루어지다가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를 거치면서 살인과 폭력의 흥분되는 순간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소재로 다루어지는 변화를 보인다. 그럼, 역사적으로 등장하는 유디트를 살펴보도록 하자.

 

     
 

                            Sandro Botticelli(1445- 1510), The Return of Judith to Bethulia,

                            1472, Oil on panel, 31 x 24 cm, Galleria degli Uffizi, Florence

 

시간 연대 순으로 배치해 보았는데 이탈리아 플로렌스 출신의 화가. 보티첼리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유디트는 이미 적장의 목을 베어서 돌아가고 있는 중이다. 그녀는 한 손엔 적장 홀로페레느스의 목을 베었을 칼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평화를 상징하는 나뭇가지를 들고 있다.

그녀의 뒤를 따르는 하녀가 이고 있는 것은 적장의 목이고, 그녀가 손에는 적장을 취하게 만들었을 술병이 들려 있다. 유디트가 돌아가는 발 아래로 장군의 죽음에 놀란 앗시리아 병사들이 허둥지둥 패퇴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여기에는 살인의 장면은 드러나지 않는다. 역시 이탈리아 베네치아 출신의 화가 티치아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유디트를 보자.


 
     
 

                                      Vecellio Tiziano, (1490-1576), Judith with

                                     the Head of Holofernes, 1515, Oil on canvas,

                                     89,5 x 73 cm, Galleria Doria-Pamphili, Rome

 

원래 성서에 의하면 유디트의 하녀 아브라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받아 곡식자루에 넣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티치아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유디트는 마치 세례자 요한의 목을 쟁반에 받아든 살로메의 구도로 보인다. 얼핏 보아서 드러나지 않은 적장의 목은 마치 유디트의 연인이 편안히 누워 쉬고 있는 듯이 보인다. 유디트의 하녀 역시 매우 어린 소녀로 나타나고 있으며 유디트는 적장의 목을 벤 당찬 여걸이라기 보다는 부끄러움에 살며시 고개를 숙인 순결한 처녀의 형상에 가깝다.

그런데 이것이 카라바조에 이르면 모양새가 많이 달라진다. 드디어 적장의 목을 베는 장면이 적나라하게 그려진다. 홀로페르네스는 편안히 잠들어 있다가 유디트의 불의의 일격을 당하여 눈을 치켜뜨지만 이미 목은 절반을 잘려 나갔고, 피는 분수처럼 침대를 적시며 빠져나가는 그의 생명처럼 보인다. 그런데 적장의 목을 자르는 유디트의 손을 보자. 적장의 머리털을 움켜쥐고 있는 그녀는 더러운 듯 한껏 몸을 뒤로 젖히고 있으며 칼을 쥔 손은 파리 한 마리로 잡아보지 않은 듯 보인다. 그녀를 뒤따라온 하녀 역시 매우 늙은 여인으로 그려지고 있으며 아무 하는 일없이 떨어지는 목을 냉큼 주워 담으려는 듯 포대를 들고 있다. 


 
     
 
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 1832-83), 올랭피아 - 마네는 전통적인 여인 도상의 구도를 따르는 듯이 보이지만 이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다루고 있다. 우선 그림 속의 여인은 바라보는 관객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으며 도발적으로 관객을 쏘아본다. 이 순간 관객은 이 이름없는 익명의 여인(창부)를 찾아온 손님이 된다.
우리는 그녀의 육체를 훔쳐보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보여주는 육체를 보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육체는 전혀 이상화되어 있지않다. 그녀는 비너스가 아니라 창녀이다. 짧고 세련되지 않은 체구에 목은 굵고 얼굴은 무표정하며 때묻은 침대 위에 닳아빠진 신발을 신고 앉아있다. 이것은 그녀가 비너스가 아니라 인간이며, 원래부터 나신이 아니라 벌거벗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게다가 그녀의 뒤편에는 흑인 시녀가 간밤의 고객 또는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며 고객이 보내온 꽃다발을 들고 있다.(실제로도 당시 창녀들의 하녀들은 대개 흑인이었다고 한다.) 그녀의 발밑에는 부부 생활의 충실을 상징하는 개대신 성적 방종을 상징하는 검은 고양이가 꼬리를 곧추세우고 있다. 발기된 성기의 상징이다. 마네는 전통적인 누드화를 토대로 신화 속 여인이나 도덕률이 아니라 부르주아 사회의 도덕적 겉치레를 냉소적으로 바라본다. 그녀들은 더이상 고객의 얄팍한 위선과 희롱의 베일에 가려져 있지 않고, 당당하게 정면을 쏘아보는 비너스인 것이다.
 

17세기에 이르러 우리는 여성의 시각으로 그려진 유디트를 볼 수 있게 되는데,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Artemisia Gentileschi, 1593~1652)의 작품이다. 아르테미시아는 카라바조의 영향을 받은 듯한 구도를 보이고 있지만 그 생생함은 카라바조와 비교할 수도 없다.

유디트는 매우 건강한 팔뚝을 지닌 여인으로 등장하고 있으며 카라바지오의 유디트처럼 양미간을 찌푸리고 있지도 않다. 그녀는 매우 결연한 표정으로 홀로페르네스의 머리털을 힘센 팔뚝으로 움겨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칼을 단단히 틀어잡고 있다. 성서에는 밖에서 기다리는 것으로 표현된 하녀 역시 저항하는 적장의 양팔을 내리누른다.

 

     
 

                                               Caravaggio (1573-1610),

                               Judith Beheading Holofernes, 1598, Oil on canvas,

                                    Galleria Nazionale dell'Arte Antica, Rome

 

보티첼리, 티치아노, 카라바지오와 아르테미시아의 차이는 단 하나 아르테미시아가 여성 화가였다는 것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예술에 있어 여성의 대상은 그야말로 꽃의 역할에 불과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관음증의 대상이었거나 아니면 남성을 위한 뮤즈가 되어 자신들의창조적 재능을 소진하는 것만으로 그 역할이 한정되어 있었다.

아르테미시아는 페미니스트들에 의해 재발견된 화가였다. 그녀는 여성에게 제한된 역할을 뛰어넘은 최초의 화가였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유디트는 위험천만한 적진 한 가운데에서 능동적이고 진취적인 여성의 이미지로 그려지고 있다. 여기에는 아르테미시아의 뼈아픈 과거가 숨어 있다.

 

     
 

                                  Judith” by Artemisia Gentileschi(1593~1652) ,

                                                  Capodimonte Museum

 

그녀는 19세 때 아버지의 친구이자 동료화가였던 아고스티노 타시에게 강간 당하고 그 일로 인해 법정에 섰던 경험이 있다. 그러나 7개월이나 계속된 재판에서 상대 남자인 타시는 자신의 혐의를 부인하면서 오히려 아르메시아를 음란한 여자로 매도한다. 결국 아르테미시아는 법정에서 자신의 순결을 증명할 것을 요구받았고, 고문까지 받아야 했다. 그녀가 살았던 시대 아르테미시아가 맘껏 주체적인 여성, 자신을 강간한 남자에 대한 복수심을 발현시킬 수 있는 소재는 유디트였던 것이다.

 
     
 

                           비잔틴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와 막시미안 주교와 사제들

                          Justinian with Bishop Maximian, clergy, courtiers, and

출처 : 화 곡 치 킨& 피 자(돈치킨)
글쓴이 : 이경규치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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