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헌의 유럽 미술 기행(9)] 클림트의 ‘키스’ 숭고한 에로티시즘의 미학 | |||||||
클림트에 따르면, 예술가는 유한한 인간의 운명으로부터 무력함을 제거하고 순간적인 정사의 덧없음을 초월해 욕망의 숭고한 충족에 이르도록 하는 구원자가 돼야 한다. 그의 이른바 ‘숭고한 에로티시즘의 미학’은 인류에 대한 그런 사명감으로부터 나왔다. ‘키스’는 그 대표적인 성과물인 것이다. 그림의 구성은 단순하다. 꽃이 잔뜩 핀 벼랑 위에 남녀가 서로 껴안고 있다. 남자는 여자의 뺨에 입맞춤을 하고 여자는 그 감흥에 몰입해 있다. 여자의 손가락이 말려들어가는 모습에서 그 감흥의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남녀 모두 금빛 찬란한 가운 같은 옷을 입었는데 남자의 옷은 직사각형의 패턴으로 남성성을, 여자의 옷은 원형의 패턴으로 여성성을 각각 부각시키고 있다. 금장식은 남녀의 옷에 그치지 않고 여자의 발뒤꿈치에서 남자의 어깨 부분까지 일종의 후광 같은 것을 형성하며 밝게 빛나고 있다. 남성성과 여성성의 찬란한 화해를 보는 듯한 그림이다. 사랑의 가장 아름다운 표현으로서 키스의 이미지가 무척 인상적으로 포착된 이 작품의 진정한 모델이 누구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비록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클림트의 진정한 동반자였던 에밀리가 모델이라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클림트와 한때 진한 사랑을 나눈 아델레가 모델이라는 주장도 있다. 전자는 이 작품 제작 10년쯤 뒤인 1917년, 클림트가 한 스케치에서 같은 주제를 반복해 그리면서 그림 왼편에 큰 글자로 ‘에밀리’라고 쓴 것을 그 근거로 든다. 후자는 여자의 얼굴 골상이나 표정이 아델레와 아주 가깝다는 데서 그 정당성을 찾는다. 두 사람 가운데 누구인지 혹은 두 사람의 이미지가 한데 섞인 것인지 지금으로서는 확인할 방도가 없다. 분명한 것은 클림트의 개인적인 사랑의 경험이 이 그림에 매우 진하게 담겨 있다는 사실이다.
클림트는 여성들에 대해 매우 뚜렷한 이분법적 태도를 취했다고 한다. 그에게 여성은 성녀(聖女) 아니면 요부(妖婦)였다. 직업모델들은 클림트의 요구에 따라 매우 관능적이고 때로 외설적이기까지 한 포즈를 취해 주었다. 클림트는 이들 가운데 여러 사람과 육체의 욕망을 나눴고 자연히 이들로부터 자식들을 얻었다. 평생 독신이었던 클림트가 죽었을 때 14건 이상의 유자녀 양육비 청구소송이 제기돼 이 가운데 4건이 받아들여졌다는 기록에서 그가 모델들과 얼마나 자유분방한 관계를 맺었는가를 알 수 있다. 이렇듯 정을 나눴다고는 하나 클림트가 이들 모델들과 주고받은 것은 철저히 육체적인 사랑에 국한된 것이었다. 클림트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을 느끼고 이를 실천한 대상은 지체 높은 사교계 여성들이었다. 그는 그들에게서 구원의 여인상을 보았다. 클림트는 이들과 육체적인 관계를 갖지 않았다. 오로지 ‘플라토닉 러브’만을 추구했다. 그 대표적인 대상이 앞서 언급한 에밀리 플뢰게였다. 에밀리는 클림트로부터 평생 편지를 400여통이나 받았고 클림트의 임종 자리를 지키는 등 일종의 정신적인 부인 역할을 했다. 물론 클림트에게 이 같은 이분법으로 명쾌히 분류되지 않는 여성도 전혀 없지는 않았다. 바로 ‘키스’의 또 다른 모델로 추정되는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이다. 그녀는 상류층 출신의 여성이면서도 클림트를 위해 매우 관능적인 그림의 모델이 돼 주었고, 그와 정신적, 육체적 사랑을 나눴다. 매우 부유한 오스트리아의 유대인 금융업자의 딸로 태어난 아델레는 이른 나이에 자신보다 18살 많은, 역시 유대계의 부유한 설탕 제조업자와 결혼했다. 아델레와 클림트 사이에서 특별한 관계의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클림트가 그녀의 초상 주문을 맡은 1899년부터이다.
클림트의 그림에서 유디트의 파멸적인 에로티시즘은 그 표정뿐 아니라 풀어헤친 젖가슴과 속이 비치는 옷, 그리고 죽은 적장의 머리를 애인 얼굴 쓰다듬듯 어루만지는 제스처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클림트는 유디트 이야기에서 유디트의 애국심보다는 남자를 유혹함으로써 파멸에 빠뜨릴 수 있는 여성의 성적 파워, 그 ‘위험한 마력’에 주목했다. 그리고 그 모델로 아델레를 선택했다. 아델레에게서 그가 그림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강렬하고도 파괴적인 에로티시즘을 보았음에 틀림없다. ‘키스’와 ‘유디트 I’을 보려면 빈 오스트리아 미술관으로 가야 한다. 이 작품들을 비롯해 클림트의 대표적인 걸작 상당수가 이곳에 모여 있다. 오스트리아 미술관은 빈의 환상(環狀)도로 남쪽 벨베데레 궁전에 자리하고 있는데, 벨베데레 궁전은 18세기 전반 오스만 투르크와의 전쟁에서 빈을 구한 영웅 프린츠 오이겐 공의 여름 별궁으로 지어진 건물이다. 이곳 상궁에서 클림트와 에곤 쉴레 등 19~20세기 오스트리아와 독일어권의 대표적인 화가들 작품과 인상파 등 다른 유럽 작가들 작품을 볼 수 있다. 미술관을 나오면 상궁에서 하궁까지 길고 완만하게 흐르는 경사진 정원이 왈츠처럼 밝고 경쾌한 기분을 선사한다. 미술평론가 ◆ 클림트(1862~1918)
클림트는 당시 유행하던 상징주의 미술, 아르 누보와도 밀접한 관련을 맺었으며 순수와 응용의 구분 혹은 장르간의 구분을 넘어 총체적인 예술을 지향한 빈 분리파 운동의 지도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관능적인 여성 모티프와 유려한 선, 화사한 색채가 특징인 그의 그림은 성과 사랑, 죽음에 대한 풍성하고도 수수께끼 같은 알레고리로 많은 애호가를 매혹시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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