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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김정일 국방위원장 이후 북녘의 미래 ① “나에겐 정말 시간이 없소!”

감효전(甘曉典) 2012. 2. 9. 20:42

김정일 국방위원장 이후 북녘의 미래 ① “나에겐 정말 시간이 없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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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01월 18일 (수) 18:02:55 정기열 tongil@tongilnews.com

정기열 (중국 청화대학교 초빙교수, 북경소재 영문매체 제4언론 책임주필)

정기열 교수가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부고 발표 사흘 후인 12월 22일 평양에 들어갔다. 정 교수는 북녘땅 곳곳을 방문하면서 북녘동포들이 당한 대국상 기간의 모습들을 통일뉴스를 통해 몇 차례에 걸쳐 외부세계에 있는 그대로 전할 것이다. / 편집자 주

   
▲ 평양 '음악정보쎈터'에 걸린 김정일 위원장의 대형 초상화 앞에 조문객들이 줄지어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사진-정기열]

“나에겐 정말 시간이 없소!”란 말은 아마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역사에 남긴 생의 마지막 말로 기록되지 않을까 싶다.

바깥 세상에 잘 알려진 북녘의 정기풍 교수(김철주 사범대 철학강좌장)가 12월 30일 고려호텔 오후 3층 면담실을 찾았다. 당시 평양에 아직 체류 중인 재미동포 몇 분이 그와 대담자리를 함께 했다. 아래 인용한 몇 가지 대화내용은 그가 대표단과 약 1시간에 걸쳐 나눈 대담 때 소개한 것들이다.

정 교수는 필자의 평양방문 때 거의 예외 없이 매번 대화를 나누는 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대단한 달변가다. 논리적인 것은 물론 해박한 지식, 정보 특히 상세한 연도, 수치들을 줄줄 외는 것으로 유명하다. 10여 년 대화하며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된 그를 본 적이 없다. 그러나 이번은 예외였다.

김 위원장은 서거 이틀 전인 “12월 15일 함남을 현지지도”했다. 그는 다음 날 12월 16일 곧 서거 전날도 “끝없는 현지지도”의 길에 있었다. 그날 김 위원장은 “새해를 맞는 수도평양을 비롯 대도시들에 충분한 물고기를 보장할 데 대한 사업”과 관련 “동해안 수산물” 현장을 “현지지도”했다. 그곳은 아마도 김 위원장 생의 “마지막 현지지도” 장소로 역사에 기록될 것 같다. 그는 그곳에서 생의 “마지막 과업지시”가 된 듯싶은 물고기대책 관련 서류에 “마지막 수표”를 하곤 곧 바로 함경남도(함남)로 다시 떠날 채비를 서둘렀다. 당시 “잠시의 휴식도 없이” 또 다시 함남으로 떠나려는 그를 동행한 “책임간부들과 주치의들이 진정을 다해 말리고 또 말렸다”고 한다.

“나에겐 정말 시간이 없소!”라는 이 글의 부제는 12월 16일 저녁 자신을 간곡히 말리고 또 말리던 간부들과 주치의들을 향해 김정일 위원장이 했다는 말이다. 당시 간부들과 주치의들은 김 위원장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간곡히 당부했다고 한다. 정기풍 교수가 들려준 말을 그가 했던 표현 그대로 인용한다:

“이제 며칠이면 어머니(김정숙 여사) 생신과 장군님께서 최고사령관으로 추대되신 지 20돌이 되는 날입니다. 평양에 돌아가셔서 다만 몇 일이라도 쉬셨다가 어머니 생신도 맞고 특히 김정은 동지께서 장군님을 최고사령관으로 모신 20돌을 기념하기 위해 준비한 축하공연도 보신 뒤 다시 현지지도의 길에 오르십시오!”

“나도 그렇게 하고 싶소. 평양에 돌아가 며칠 쉬었다가 어머님 생신 때 대성산(혁명열사릉)도 찾고 김정은 동지가 준비했다는 축하공연도 보고 싶소. 그러나 ‘나에겐 정말 시간이 없소!’” 그리고 김 위원장은 자신을 말리던 동행한 간부들과 주치의들을 오히려 거꾸로 설득한 채 그의 생의 마지막이 된 “현지지도” 길에 다시 올랐다. 그때가 “12월 16일 저녁시간”이었다.

노동신문의 표현을 빌면 “위대한 한 생의 운명을 가른 그 야전열차”는 밤새 달려 다음 날 새벽 도착지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나 그는 계획한 생의 마지막 “현지지도”를 결국 마치지 못한 채 (대한민국 국정원장이 12월 20일 국회 정보위에서 증언했다는 “12월 16일, 평양 관저”에서가 아닌) “12월 17일 아침 8시 반 현지지도를 향해 달리던 야전열차 안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 서거 관련 국정원장 국회 허위증언과 언론매체들의 악마화 선전

   
▲ 눈이 내려도 조문객들의 문상이 이어지고 있다. [사진-정기열]

국정원장의 20일 국회 정보위에서의 발언 직후 같은 국회건물 국방위에서 국방부 고위관리가 국정원장의 주장을 단번에 뒤집는 발언을 했다. “미국군사지휘체계에 종속된 연고로 대북(군사)정보 관련 국정원보다 상위에 있다는 국방부”가 김 위원장 “전용열차가 16-18일 평양을 벗어나 움직였다”고 발표한 것이다. 발언자는 김관진 국방장관이었다.

그는 같은 날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김 위원장 사망 장소와 관련 “여러 상황을 검토 중이며 아직 정확하게 밝혀지지는 않았다”고 에돌아 발언하긴 했으나 대신 “열차가 이동했다”는 사실을 “열차가 이동한 위치는 알 수 있다”는 표현으로 결국 국정원장의 발언을 뒤집은 셈이 됐다. 물론 그는 김 위원장이 “그 열차에 탔는지는 알 수 없다”는 말로 동료(?)의 체면을 살려주는 일도 잊지 않았다.

국정원의 “아니면 말고 식의” 거짓, 허위, 조작, 날조행위는 그들이 수십 년 밥 먹고 늘 하는 대북 악마화 선전의 일환으로 치부할 수 있다. 문제는 국가 최고정보기관인 국정원이 그것도 최고정보기구의 수장이 다른 일도 아닌 대국상을 당한 북녘의 국가 최고지도자의 서거사실을 놓고 남녘언론 보도 대부분의 지적처럼 “자신의 무능과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황당한 거짓범죄를 그것도 백주대낮에 국회증언대에서 벌였다는 사실이다.

먼저는 “국정원이 서거소식 자체를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며 “경질설” 등 사면초가에 빠졌을 국정원장이 얼마나 다급하고 당황스러우며 궁색했으면 스스로 제 무덤을 파는 그런 악수를 그리도 쉽게 또 두었을까 싶다. 그렇지 않고서야 “12월 16-18일 김정일 위원장 전용열차가 평양에서 아예 움직이지 않았다”는 엉터리 주장도 모자라 그런 류의 소위 쓰레기 수준의 거짓첩보들에 기초해 서거 시기와 장소까지 자신이 아예 찍어 “12월 16일, 평양 관저”라는 당장 거짓으로 드러날 황당한 주장까지 했을까 싶어서다.

국정원장의 날조주장에 대한 남녘의 보도 대부분은 (주장자체가 너무 황당하고 또한 국방부에 의해서조차 이미 허황된 주장임이 드러난 조건에서) 국정원장이 “김 위원장 서거자체를 북의 공식발표 이후에야 알았다”는 “국정원의 극도의 무능”에 대한 “비판을 모면하고 세상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거짓으로 증언한 것이라는 논조가 대부분이었다. 소위 쓰레기 수준의 엉터리 “첩보” 혹은 “면피용”으로 하루 만에 자체 제작(조작)된 근거없는 허위정보라는 비난이 주를 이룬 것이다.

국정원장의 문제는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더 큰 문제는 쓰레기 수준의 그런 류의 첩보, 황당한 거짓주장들에 기초 수십 년 반북소설쓰기에 이골 난 조중동 같은 남녘의 대표적 사대매판언론매체들이다. 그들이 한미일 정보당국과 서로 주거니 받거니 상부상조(?)하며 수십 년 즐겨 쓰는 반북소설은 일본, 미국 등을 거치며 더욱 뻥튀기되고 각색되어 미국서구지배하의 온 세상 주류언론매체들에 버젓이 마치 사실처럼 둔갑하여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김 위원장 서거 직후부터 벌어지고 있는 온갖 형태의 거짓, 날조, 조작행위는 특히 거짓, 날조, 조작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일본당국과 그들의 보수주류언론매체들에 의해 오늘 극에 달해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끝없는 현지지도의 길에서 생을 마쳤다

   
▲ 울음을 터트리는 북녘 아이들. [사진-정기열]

북녘 체류 열흘 내내 접한 노동신문을 포함한 모든 자료들에 의하면 김 위원장 “서거 전후 함경남도 지방엔 60년래 보기 드문 폭설, 한파가 밀어닥쳤다.” 함남지역 간부들이 “현지지도를 오시더라도 날씨가 좀 좋을 때 오시라고 간곡히 부탁했었다”는 일화의 배경이다. “현지지도의 길”에서 생을 마감한 김 위원장이 “잠시도 쉬지 않은 채 하루가 멀다고 달리는 자동차와 기차 안에서 줴기밥과 쪽잠으로 지냈다”는 북녘동포들이 입만 열면 이야기하는 “현지지도” 관련 일화들은 수도 없이 많다.

2008년 8월 첫 심장병을 앓은 뒤로 2011년 세밑 마지막 며칠을 남겨둔 12월 17일 아침 “8시30분 달리는 야전열차 안에서 급성 심근경색과 심장성 쇼크”가 그를 영면에 들게 하기까지 그는 정말 북녘동포들 말 표현 그대로 “잠시도 쉬지 않고 일했던 것” 같다. <통일뉴스>에 실은 <제4언론> 평양통신 제1신에 김 위원장의 마지막 순간을 “마치 산화하듯” 혹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을 불사르듯”이라고 표현했던 이유다.

자신에게 시시각각 다가왔을 죽음의 순간을, 2008년 여름 그의 목숨을 심각히 위협했던 첫 “심장질환” 이후 끝없이 그를 따라다녔을 죽음의 검은 그림자를 그는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 같다. 오히려 최선을 다해 혼신을 기울여 만약의 상황을 준비하고 또 준비했던 것 같다. 뒤에 남겨두고 가는 모든 이들의 안녕은 물론 오히려 그들의 신심과 의지를 더욱 드높여 자신의 유고 시에도 드팀 없이 일해나갈 수 있도록 남은 마지막 한 호흡마저도 온전히 그들을 위해 바쳤던 것 같다.

특히 머지 않아 그 누구에게 의존함 없이 “자력갱생”의 힘으로 “인민들의 먹는 문제를 자체적으로 풀기 위해” 북녘 표현대로 “인민경제발전”을 위해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을 불사르듯 일하며 살다 훌쩍 떠난 것 같다.

지난 3-4년 언제 다가올지 모를 죽음의 그림자를 한편에 늘 달고 살면서도 놀라운 열정과 신념, 의지 하나로 마지막 호흡까지 자신이 “그리도 사랑했다”는 “인민들과 나라의 안녕”을 위해 쉼 없이 일하고 일하며 또 일하다가 영원한 휴식에 든 것 같다.

이런 류의 해석, 판단은 아마도 필자 한 사람만의 경우만은 아닐 것 같다. 필자 외에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필자와 비슷한 혹은 같은 해석과 판단을 하고 있을 수 있다. 특히 열흘(12월 19일부터 29일까지)의 “대국상 추모기간” 약 “1억 회수”가 넘는 “추모의 발걸음”이 전국에 끝없이 이어지고 북녘 방방곡곡을 “애간장 끊어내듯 피눈물의 바다로 만든 2천5백만 북녘동포” 가운데 많은 이들 또한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 싶다.

감당키 어려운 슬픔을 딛고 그 모든 아픔을 오히려 “천백 배 힘과 용기”로 바꾸어 믿기 어려우리만치 다시 우뚝 일어서고 있는 그들 모두의 모습에서 도대체 무엇이 저들로 하여금 끝없이 다시 일어서게 만들까? 도대체 그 힘의 실체는 무엇일까 묻고 또 묻게 된다.

그들 모두를 끝없이 다시 일으켜 세우며 추동하고 있는 힘의 실체는 도대체 무엇일까? 혹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을 불사르듯 혼신을 다해 일하고 또 일했던 그래서 죽음으로조차 인민들에게 말할 수 없는 큰 감동으로 영원히 잊지 못할 유훈을 남기고 떠난 국방위원장은 아닐까?

그는 마치 오늘도 살아서 인민들을 끝없이 독려하며 지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른다. 비록 살아 움직이는 육신의 모습으로 눈에 보이진 않으나 그는 오늘도 (중국 국가 최고지도부의 표현처럼) “영생하는” 어떤 영적인 (혹은 정신적인) 힘으로 그들 모두를 끝없이 추동하고 격려하며 이끌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하늘이 주저앉고 땅이 꺼지는 것 같은 슬픔”과 “하늘도 울고 땅도 우는 것 같은 비통함”을 딛고 다시 일어선 북녘동포들의 모습에서 김 위원장의 놀랍도록 경이롭고 감동적인 생의 마지막 순간이 그의 마지막 유훈으로 되어 여전히 그들 모두를 감동시키고 추동하고 이끌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어서다.

영원히 잊기 어려운 어떤 큰 감동으로 큰 가르침으로 그의 마지막 유훈으로 인민들 모두의 가슴 속 깊이에 그들의 심장마다에 깊이깊이 각인되지 않고서는 상상키 어렵고 설명키 어려운 놀라운 변화들이 오늘 북녘에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결국 죽어가는 순간에도 자신의 심장에서 인민들의 심장에 마지막 말 곧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기고 떠난 것 같다. 곧 “불타는 신념과 의지로 그 어떤 상황(곧 김 위원장의 유고 시)에도 두려움 없이 온갖 절망과 슬픔을 딛고 넘어 오히려 그 모든 것을 천백 배의 힘과 용기로 바꾸어 밝은 미래를 향해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하려 했던 것 같다.

김 위원장이 숨은 거둔 만 열흘 뒤인 12월 28일 그는 “전체인민들이 일심단결의 힘으로 그 어떤 난관과 시련도 감당할 수 있다!”는 어떤 확신을 가진 뒤 비로소 자신의 영결식을 맞은 것 같다. 그리곤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조선인민들과 영결”(永訣)한 채 홀연히 세상을 떠난 것 같다.

12월 28일 BBC 보도기사: “인류사에 전무한 장례, 추모사건”

   
▲ 12월 28일 진행된 영결식에 대해 영국 BBC는 “인류사에 전무한 장례, 추모사건”이라고 보도했다. [사진-정기열]

자신들 “최고지도자”의 죽음을 그리도 슬퍼하며 추모했던 북녘동포들의 모습은 한국, 일본, 미국을 필두로 세상주류언론매체들의 북에 대한 온갖 악담, 음모, 시기, 거짓증언, 악마화에도 불구하고 다른 한편으론 세상의 또 다른 부류의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북에 대해 전혀 새롭게 생각하고 그들의 마음 문을 열게 만들었는가 하면 또한 도저히 믿기 어려운 놀라운 현실 앞에서 북녘사람들의 가늠키 어려운 슬픔과 아픔의 깊이를 이해하기 위해 진심으로 노력하게 만들기도 했던 것 같다.

지어는 서방의 대표적 주류매체들마저도 북녘사람들이 자신들의 “최고지도자”를 잃고 그리도 애통히 슬퍼하는 모습을 보며 “인류사에 보기 드문 어쩌면 역사에 전무한 추모행사와 장례사건”이라는 보도를 가능케 했던 것 같다. 그것도 반제자주국가들과 그들의 최고지도자들에 대해 거짓, 왜곡, 악마화 선전으로 일이백 년 이골이 난 세계 최대주류언론매체인 영국 BBC가 그랬다.

12월 28일 BBC 보도기사를 읽고 들은 사람들의 전언을 종합하면 그 기사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역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운 경우다. 국가 최고지도자를 잃은 슬픔이 절대다수 인민들에게서 저리도 절절히 표현된 경우는 역사에 전무한 것 같다. 북녘사람들이 보인 슬픔과 아픔의 정도를 가늠키 어려울 정도로 역사에 전무한 추모의 모습과 장례행사다.”

반면 미국을 중심으로 특히 일본, 한국의 거의 모든 보수주류언론매체들은 김 위원장 서거와 관련 온갖 악담, 험담, 거짓증언, 악마화를 한편 계속하고 있다. 그런데 그들의 그런 “조선악마화” 모습은 악의적으로 누군가를 음해하면서 즐거워하는 일종의 정신병에 속하는 사디즘적(sadistic) 행태를 연상케 한다. 그들의 그런 정신병적 증세는 60여 년 전이나 오늘이나 한치의 변화도 없다.

아니다. 그들의 그런 정신병 증세는 날이 갈수록 오히려 더 악화된 것 같다. “망할 것”이라 믿던 대상이 망하기는커녕 온갖 위기, 고난, 시련에도 자신을 끄떡없이 지켜낼 뿐 아니라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핵무장국가”로 발돋움하는 등 백방으로 더 강해지고 있는데서 오는 두려움과 무기력, 좌절감 같은 것들이 그들의 병증세를 더 악화시키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의 모습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혹은 컴컴한 어둠 속에 갇힌 사람이 흔히 두려움에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듯 맹목적으로 상대를 끝없이 음해하고 악마화하며 한편으론 자신의 그런 행위를 통해 (성적) 즐거움을 취하는 전형적인 사디즘적 정신병 환자의 모습이다.

그들의 대표적인 병증세는 1994년 김일성 주석 서거 때처럼 오늘 김정일 위원장 유고 시에도 더욱 악화되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그들은 과거에 그랬듯 오늘도 북이 “김 위원장이 내부의 군부쿠데타로 사망했다”느니 “머지 않아 붕괴할 것”이라느니 그런가 하면 “인민들을 추모행사에 강제로 동원하고 슬피 울지 않으면 강제수용소로 보내며 3족을 멸하겠다고 협박했다”느니 등등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온갖 악담과 저주, 거짓 등의 “조선악마화”를 끊이지 않고 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무너지고 있는 것은 북이 아니라 오히려 북은 “승승장구하는 것 같고” 그때나 지금이나 “계속 무너져 내리고 있는 것은 자신들”이기 때문이다. 어젠 부시-체니가 무너졌고 오늘은 오바마가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다. 특히 세상역사에 유례가 없는 경우로 1년도 멀다고 끝없이 무너지고 또 무너지는 어제 오늘의 일본정부가 그렇다. 그리고 오늘은 남측정부가 같은 처지로 전락하고 있다. 날이 갈수록 더욱 악화되는 그들의 정신병 증세가 한편으로 이해되는 이유다.

하여 그들의 악의에 찬 끝없는 악마화 선전은 앞에서 지적한 사디즘적 정신병 연장선상에서 이해해야 옳다. 그들은 예나 지금이나 고장 난 축음기에 똑 같은 판을 올려놓은 채 시간과 돈, 정력만 낭비하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아마도 영원히 모르고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의 지극히 제한된 삶이해, 세상이해, 인간이해 틀로는 어제와 오늘의 “조선”은 물론 아마도 제3세계 과거 식민지경험을 겪은 국가들 거의 모두의 역사를 결코 바르게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겐 “조선”을 선두로 온갖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반제자주독립해방투쟁을 멈추지 않는 세상의 숱한 양심들과 그들의 맑은 정신세계를 결코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틀 자체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그냥 사디즘적 정신병의 일환으로 일종의 정신적 자위행위를 계속하며 시간과 돈을 낭비할 뿐이다.

그들 자신들이 무너저내리는 것은 물론 제 자식들과 자신들의 국민, 세상다수를 바보로 만드는 일을 계속하면서다. 중요한 것은 BBC 말 그대로 “인류역사에 전무한 장례와 추모행사가 역사에 탄생했다”는 사실일 것 같다. 오늘 그 “인류사에 전무한 북녘동포들의 장례대서사시”가 끝났다.

12월 22일 도착 때와 31일 떠날 때 본 북녘동포들 모습의 차이

   
▲ 조문객들에게 따뜻한 음료를 제공하고 있다. [사진-정기열]

앞에 소개한 <제4언론> 평양통신들에서 이미 소개했듯 12월 22일 도착했을 때의 순안공항, 평양시내 특히 조선중앙통신과 노동신문을 통해 본 북녘 방방곡곡의 모습은 말 그대로 “온 세상이 슬픔과 비통에 빠진 피눈물의 바다” 그 자체였다. 당시의 모습을 필자는 북녘동포들의 눈길을 “제대로 마주치기조차 어렵기까지 했다”고 썼을 정도였다.

그러나 12월 31일 이른 아침 평양을 떠날 때 순안공항에서 만난 북녘동포들의 모습은 “슬픔을 이미 천백 배 힘과 용기로 바꾸어낸” 모습이었다. 그날은 눈도 서로 마주치며 인사도 나눌 수 있었다. 그들 모두에게 진심으로 드렸던 “힘내시라!”는 격려에 그들 모두는 감사의 뜻으로 하나같이 평소 그들 특유의 해맑은 미소와 아름다운 눈웃음으로 응답했다. 거의 모든 공항직원들의 밝은 모습과 간간히 들리는 웃음소리, 말소리, 바삐 일하는 모습들은 평양을 떠나는 필자의 발걸음을 몹시도 가볍게 했다. 필시 이런 체험은 필자 혼자만의 경험이 아니었을 것 같다. 함께 떠난 재일동포들을 포함 백여 명 가까운 해외동포들의 경험 또한 비슷했을 것 같다.

12월 29일 전국추도대회를 끝으로 모든 공식추모행사를 마친 북녘동포들은 모두 조금씩 더 기운을 차리기 시작했다. 변화는 열흘 내내 보았던 고려호텔의 종업원들 모습에서부터 먼저 감지되기 시작했다. 필자가 열흘 머물렀던 21층 26호실을 청소하셨던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성도 빠르게 기운을 회복해갔다. 도착했던 22일 첫날 뵙고 조심스럽게 “힘내십시오!”라고 격려했던 말 한마디에 복도로 급히 뛰어나가며 오열을 터트렸던 바로 그 여성이다. 기운을 차리기 시작한 그를 보고 떠나게 된 것 또한 필자에게 적지 않은 위로가 됐다.

평양시내를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과 그들의 발걸음에서도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했던 것 같다. 특히 평양시내 명물로 자리잡은 꽃다운 처녀 교통경찰들의 고운 팔 놀림에서도 조금씩 기운들이 되살아나 보였던 것 같다. 떠나기 전 날 12월 30일 저녁 고려호텔 1층 냉면집에서 체류 전기간 필자를 도와 취재를 함께한 “4인조”가 처음으로 술자리를 함께 했다.

그들 모두에게서 경험한 것이다. 북녘동포들 모두가 조금씩 다시 살아나고 있는 경험이었다. 그들 자신도 그리고 평양을 방문하고 있는 우리(해외동포)들도 그들과 함께 모두 조금씩 그러나 빠르게 기운을 회복하는 것을 경험했다. 서로서로 기운을 내라며 격려했다. 아름다웠다. 그들의 그런 모든 모습은 눈물겹도록 아름다웠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이란 말은 기쁨, 슬픔, 아픔 등등을 이웃과 진심으로 함께 나누는 우리 민족의 아름다운 공동체 심성을 잘 표현하고 대변해주는 말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바로 그 이심전심의 기운은 12월 29일을 고비로 평양으로부터 시작해 북녘 전국으로 삽시간에 퍼져나간 듯싶었다. 북녘동포들 모두가 슬픔을 딛고 빠르게 서로서로 격려하고 붙들어주며 기운을 회복해간 것 같았다. 필자의 허리를 치료했던 수기치료사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하루 이틀 전만해도 눈이 퉁퉁 부어 보기만해도 마음이 아플 정도였다. 앳된 간호원 얼굴모습도 마찬가지였다. 29일 저녁 밤 12시 공식추모행사를 끝으로 전국의 모든 보건일군들은 열흘 만에 처음으로 옹근 잠을 잤다고 한다. 헤어지기 전 날 12월 30일 만난 수기치료사와 간호원의 얼굴에선 이미 밝은 기운이 빠르게 회복되고 있었다.

“핵무기보다 강위력하다”는 북녘동포들의 “일심단결”은 이미 하나의 구체적인 역사현실이다

   
▲ 영결식에서 오열하는 북측 인민들. [사진-정기열]

거의 70년에 이르는 기나긴 “북미대결사”를 “인류사에 아직은 전무한 계속되는 기적의 역사”라고 정의할 수 있다면 그 기적을 가능케 해온 힘의 원천은 한마디로 무엇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아마도 기쁨도 슬픔도 아픔도 온갖 시련과 어려움과 고난과 배고픔도 아니 가진 모든 것을 흔쾌히 기꺼이 진심으로 나눌 줄 아는 우리민족 고유의 “이심전심”의 마음가짐으로 더불어 함께 나누는 북녘동포들의 아름다운 심성이 가능케 한 “일심단결”의 정치사상, 조직생활, 공동체문화가 아닐까 싶다.

남녘과 해외에서 흔히 “대동단결”이라 부르는 북녘의 “일심단결”이란 한 마디 말과 뜻에 압축된 대부분 북녘동포들의 아름다운 정치사상, 심성, 품성, 문화, 구체적인 생활현실이 한 줌도 안될 한국, 일본의 친미사대매판세력들은 물론 그런 류의 허수아비들을 앞세운 채 군사침략 시도를 멈추지 않는 온갖 제국주의연합세력들을 끝없이 좌절시키고 무력하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정신적, 정치사상적 배경이 아닐까 싶다.

“북미대결사”란 관점에서 볼 때 북녘동포들이 이루어내고 있는 지난 6-70년의 역사를 “인류사적 의의를 갖는 위대한 기적의 역사”라고 정의하게 되는 이유다.

북녘동포들의 “일심단결”은 그러나 말은 말이되 말이 아닌 구체적인 하나의 역사현실이라고 정의해야 옳을 것 같다. 일심단결은 그 무슨 대단한 구호는 더더욱 아닌 것 같다. 어디 먼데 있는 목표 또한 아닌 것 같다. 어떤 신기루 같은 것은 물론 아닌 것 같다. 그 무슨 환상이 아님은 말할 것도 없다.

“일심단결”이라 그들이 말하는 그 어떤 것은 북녘동포들의 의식 속에, 심장 속에, 그들의 생활 속에, 그들의 웃음과 울음 속에, 그들의 꿈과 미래, 이상 속에, 그 모든 곳에 늘 함께 있는 그래서 그들 모두의 숨결과 웃음 속에서 서로서로 맞잡은 손들에서 서로의 눈이 마주치는 그 순간들 속에서 매일매일 구체적으로 느껴지고 경험되는 북녘동포들의 존재 그 자체라고 정의해야 옳을 것 같다.

북녘동포들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일심단결”은 이미 그들 생활 곳곳에 깊숙이 체현되어 있는 북녘사회와 그들 삶의 아주 구체적인 현실인 것 같다. “일심단결”은 미래 언젠가 현실화되어야 할 꿈이 아니라 어제 오늘 그들의 삶과 일 속에서 그들의 구체적인 생활현장에서 매일 매시간 체현되고 있는 하나의 구체적인 역사현실인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역으로 이렇게도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일심단결이라는 것이 만약 그들 삶의 구체적 역사현실이며 그들의 존재자체가 아니었다면 지난 수십 년의 그 오랜 고난의 행군시기, 특히는1990년대 후반 아예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져 더욱 철저히 고립되고 포위된 채 먹고 입고 덮고 데울 것조차 말 그대로 모든 것이 부족하고 없던 때에 그들은 이미 수십 번도 더 무너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제는 물론 오늘도 그들이 건재할 뿐만 아니라 그 어떤 도전과 시련도 당당히 맞받아쳐가며 이젠 “경제적으로까지 해를 더할수록 부강해지겠다”는 뜻과 취지의 “강성국가건설’을 향해 “구체적인 중장기경제발전계획”에 따라 성큼성큼 큰 걸음을 내딛고 있다는 어제 오늘의 구체적인 역사현실이 그들 사회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조직화된 하여 이 세상 그 어디서도 그와 같은 역사적 사례를 찾기 어려운 “일심단결의 사회”란 것을 구체적으로 웅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북녘동포들의 일심단결의 구체적 역사현실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1920년대 후반 십대의 어린 나이부터 향후 이십여 성상에 걸쳐 계속된 김 주석이 이끈 항일무장투쟁역사 전 기간 모두가 더불어 함께 체험하고 경험한 “일심단결의 구체적인 역사현실”이 이미 존재했기 때문이다.

항일무장투쟁사 전기간 그들이 집단으로 함께 경험한 “일심단결”의 구체적인 역사경험은 1950년대 초 미국과의 전쟁에서 온 나라가 잿더미가 되고 수백 만 인민이 희생되었을 때 하여 그들이 또 다시 최악의 조건, 환경, 처지에서 나라를 새롭게 세우지 않으면 안되었던 때 북녘동포들 절대다수가 또 다시 구체적으로 함께 공동으로 체험한 역사경험 또한 이전에 존재했었기 때문이다.

그때도 그들은 온 세상이 보란 듯 또 다시 일어섰다. 온갖 고난과 시련, 도전을 딛고 넘고 또 넘어 우뚝 일어선 경험이 있는 것이다. 그 모든 과정을 넘어 70년 가까이 지난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들 역사 전기간엔 오늘 그들이 말하는 “일심단결”의 정치사상과 문화, 심성, 조직생활이 늘 근본에 함께 했던 것 같다.

그들 역사를 날이 가고 해를 더할수록 오히려 핵무장국가를 기본배경으로 더욱 “부강하게” 만들어가고 있는 근본배경에는, 하여 그들이 오늘 그들 스스로를 “정치사상강국, 군사과학강국, 문화강국”이라 부르며 이젠 나아가 “경제적으로도 부강해지겠다”는 의지가 하늘을 치솟듯 하는 그 모든 배경에는, 또한 그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근본배경에는 북녘동포들의 존재 그 자체인 “일심단결”이라 불리는 정치사상의식과 조직생활, 문화가 있었던 것 같다.

취재 후기

   
▲ 영결식에서 두 여성이 슬픔에 잠겨있다. [사진-정기열]

<제4언론> 취재를 위해 북녘당국은 재미동포가 기증했다는 취재차량(van) 한 대, 익히 잘 아는 안내(여성지도원) 선생, 필자 또래로 “태일 아바이”라 불리는 운전수 선생, <우리 민족끼리> 소속의 사진기자 한 분 등 모두 세 분을 배려해주었다. 우리는 열흘 내내 고려호텔에서 숙식을 거의 같이 하다시피 생활했다. 특히 50대 초반의 사진기자 천금철 선생은 1989년 7월 <조국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국제평화대행진> 당시 임수경 대표를 두 달 가까이 밀착, 취재했던 8명 사진기자들 가운데 한 명이었다.

당시 북녘동포들 누구나 만나고 싶어한 “통일의 꽃 수경”이를 밀착, 취재하기 위해 수경이가 북에 체류한 전기간 그와 거의 같이 살다시피 했다는 젊은 “8인조 영상제작진”은 당시 북녘동포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때 인연으로 그는 이미 필자를 익히 잘 알고 있다며 자신을 소개했다. 그는 오늘 북녘의 최고 동영상 및 사진기자들 가운데 한 명으로 성장한 것 같다. 그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했던 그날 저녁자리는 이별의 술자리이기도 했다.

열흘 내내 함께 일한 북녘동포들과 이별의 시간을 나누었던 30일 저녁 그들 모두에게서도 북녘을 방문하게 될 때마다 거의 모든 북녘동포들에게서 일관되게 체험하게 되는 일심단결의 조직생활, 집단문화, 그들의 심성, 그들의 품성을 또 다시 확인하게 된다. (계속) 

출처 : 바른몸짓 바른생각
글쓴이 : 높이나는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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