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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박 전 대통령의 둘째 딸 박근령(55)씨의 고소장ㅎㅎㅎ

감효전(甘曉典) 2012. 2. 9. 20:07

대법원3부(주심 안대희 대법관)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항일무장투쟁부대 토벌에 참여했었다”는 내용이 담긴 책을 출판한 혐의(사자의 명예훼손)로 기소된 출판사 아이필드 대표 유연식(49)씨에게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고 8일 밝혔다.

 

유씨는 2004년 “박정희는 간도 조선인 특설부대에 자원입대해 동북항일연군 토벌에 나섰으며 그 공으로 신경육군군관학교 2기생으로 입학했다”는 내용이 담긴 조선족 작가 류연산씨의 책 <일송정 푸른 솔에 선구자는 없었다>를 출간했다.

 

박 전 대통령의 둘째 딸 박근령(55)씨는 만주에서 활동한 친일파들의 행적을 담은 이 책 때문에 아버지의 명예가 훼손됐다며 유씨를 고소했다.

 

-박정희는 일본 육사교장 나규모 쥬이치(南蕓忠一)로부터

"다카키(박정희) 생도는 태생은 조선일지 몰라도 천왕폐하에 바치는

충성심이라는 점에서 보통 일본인보다 훨씬 일본인다운 데가 있다"고 칭찬을 받다.

-박정희는 일본육사를 졸업 후 완전 일본인으로 개조되어,

만주지역으로 발령받아 독립군 토벌에 나선다. 박정희는

하루종일 말없이 가만히 있다가도 "조 센징(조선인) 토벌 나간다"라는

명령만 떨어지면 "요오시(좋다)! 토벌이다!"하고 벽력같은 고함을

지르곤 했다고 합니다.

 

육사란 곳은 가장 충성심이 투철한 자만이 가는 곳입니다.

 

특히 조선인이 일본육사에 받아들여 졌다는 말은 개인으로서는

조선인의 혼을 팔았다는 말이고, 일본으로서는 철두철미 일본인이란

판단을 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군관학교에 들어가서 관동군 장교로 활약하다가 창씨개명했죠 마카끼 마사오로! 그런데 여기서 마카끼 마사오는 한국인 냄새가 난다고 한국인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서 오카모토 미노루라고 다시 창시개명을 하고 한창 조선인 사냥을 하다가 일본이 패망하자마자 바로 광복군에 쥐새끼 처럼 줄을 대서 광복군으로 자신을 위장하고 그리고 해방이되자 당시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사람이 공산주의자였고 공산주의가 앞으로 대세가 될거라고 생각해서 공산주의자로 변신 그러다가 여수순천 반란 사건에 연관되어서

사형직전에 자기 동료들 명단 다 넘겨주고 자신을 다시 정보장교로 변신하고! 기회주의 자도 이런 넘이 없을 듯!!

 

△ 간도특설대. 조선과 중국의 항일활동을 진압하기 위해 만든 비밀부대란 설명이 뒤따르고 있다.

 

간도특설대는 동북지역의 항일유격활동을 저지하기 위해 일본인 지휘관 일부를 제외하곤 모두 조선인들로만 구성된 악명 높은 특수부대였다. 이런 행적 때문에 백선엽은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로 선정된 상태이다. 지금도 원로 중국동포 사이에선 간도특설대의 활동에 대해 치를 떠는 분들이 많다고 한다. 실제로 간도특설대원들은 항일부대원을 잡으면 순순히 사살하지 않고 가장 잔혹한 수단을 동원했다. 간도특설대원들의 잔혹한 행위는 항일부대들의 사기를 저하시키는 효과와 더불어 일본인 상관 앞에서 자신들의 충성심을 증명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때문에 이들에게 조선인 포로들은 더 없이 좋은 사냥감이었던 것이다.

 

연변 작가 류연산씨가 쓴 ‘일송정 푸른 솔에 선구자는 없다’에 언급된 특설부대원들의 만행을 일부 인용한다.

 

- 1939년 5월 야간 토벌 작전 중 산나물을 뜯는 사람들을 잡아다가 불태워 죽였다.

 

- 1939년 7월 자신들의 충혼비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전사한 항일부대원의 배를 갈라 내장을 꺼내 빈 통조림통에 넣었다.

 

- 1941년 겨울 포로로 잡힌 항일부대원의 머리를 군도로 자르고 잘린 머리채를 들고 기념촬영을 했다.

 

- 1941년 1월 포로로 잡힌 여성 항일부대원 4명을 강간하려다 실패하자 살해했다.

 

- 1944년 4월 팔로군을 숨겨준 마을 원로를 죽인 후 그의 머리를 잘라 솥에 삶은 후 두개골을 장식품을 만들었다.

 

1937년 11월 만주국 간도성장에 임명된 이범익(1883-?, 일제하에서 충남도지사, 중추원참의, 동양척식주식회사 감사 등 역임)은 일본의 환심을 사려고 자발적으로 조선총독부에 간도특설대 설립을 제안해 이듬해인 1938년 12월 15일 1기 입대식을 열린다. 설립당시 명칭은 조선인특설부대였고 후에 간도특설부대로 바뀌었다.

 

특설대는 해방되는 순간까지 모두 108번, 한 달에 한 번꼴로 항일부대와 전투를 싸워 170명의 항일부대원을 사살하고 139명을 체포했다. 이러한 전과로 조선인 특설부대원 167명이 훈장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들이 즐겨 불렀을 ‘특설부대가’를 보면 그들의 당시 내면을 짐작할 수 있을 법하다.

 

시대의 자랑, 만주의 번영 위한 / 징병제의 선구자 조선의 건아들아 / 선구자의 사명을 안고 / 우리는 나섰다 나도 나섰다 / 건군은 짧아도 / 전투에서 용맹 떨쳐 / 대화혼은 우리를 고무한다 / 천황의 뜻을 받든 특설부대 / 천황은 특설부대를 사랑한다

 

‘천황의 뜻을 받든 특설부대’는 해방 후인 1945년 8월 29일까지도 팔로군과의 전투를 계속벌이다가 뒤늦게야 일본의 패망 소식을 듣고 투항한다. 백선엽은 소련군에 의해 무장해제 당한 후 소련군을 따라온 한인 통역에게서 “조선은 곧 독립된다. 당신은 여기 있으면 붙잡혀 시베리아로 유배된다. 빨리 고향으로 가라”는 말을 듣고 9월 말 고향인 평양에 숨어 있다가 12월 말 38선을 넘어 월남한다.

 

간신히 목숨을 건진 간도특설대원 백선엽에게 38선 이남은 기회의 땅이었다. 백선엽을 비롯해 특설대원 대부분은 한국군의 전신인 국방경비대에 들어가 일본군 경력을 인정받아 단번에 군의 요직을 차지했으며 후에 5ㆍ16쿠데타의 주역이 되었다. 대표적인 사람들 꼽자면 정일권(국무총리), 김일환(내부장관), 이한림(육사교장, 건설부장관), 원용덕(헌병사령관), 이주일(감사원장), 김석범(해병대사령관) 등이다.

 

이들 중에서 박정희와 정일권을 제외하면 백선엽의 승승장구가 가장 눈에 띈다. 어쩌면 부하의 손에 비명횡사한 박정희나 정인숙 스캔들로 불명예를 안은 정일권에 비하면 백선엽은 조용한 가운데 실리와 명예를 동시에 챙겼다고도 볼 수 있다. 실제로 백선엽은 ‘6ㆍ25전쟁의 영웅’으로 불리며 한국군 최초의 4성 장군으로 전역한 뒤 대만,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캐나다 대사, 교통부장관, 한국종합화학(현 한화) 사장 등을 지내는가 하면 친동생인 백인엽과 함께 인천대학을 설립하는 등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관운을 과시한다.

 

△ 간도특설대를 설명하고 있는 일본판 위키백과. 주요인물 란에 백선엽과 더불어 박정희의 이름이 또렷하다. 물론, 한국판 위키백과에는 이 같은 내용이 없다.

 

다시말해 .박정희 같은 친일파 득세로 일본 식민지 지배기간이 길어 지면서. 자주적이고 적극적인 투자와 발전의 순환 경제개발을 할수 없어 경제개발이 늦어 졌다는 겁니다. (박정희 같은 친일파 때문에 수탈해간 지하자원, 문화재, 목재 말도 못합니다. 일본은 한국식민지수탈한 돈을 seed money(종자돈)로해서 경제개발해서 지금 잘살게 된것입니다.)

 

즉 박정희 같은 친일파만 없었더라도,, 한국은 적어도 1-20년 먼저 독립해 경제개발해. 이미 국민소득이 3-4만불의 선진국 대열에 진입해 지금 더 잘 살고 있었을 거란 겁니다.~ 원래 독재자들은 자신의 독재 정권유지를 위해서 경제개발 같은 것을 많이 했습니다.. 독일도 히틀러가 독재할때..유럽에선 제일 잘나갔죠.

 

혹시 이 글 보신 분들 복사해서 아는 게시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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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는 박정희 경제 개발 성공작 실패작

자세히 알려 줄께요

출처 : 바른몸짓 바른생각
글쓴이 : 높이나는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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