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가 노론 벽파의 영수 심환지에게 보낸 비밀편지가 9일 공개돼 학계와 일반인들에게 놀라움을 안겨주고 있다. 정조가 정치적으로 갈등관계에 있었던 벽파의 영수에게 비밀편지를 보낸 것 자체가 이색적인 데다 비속어를 거침없이 사용하는 정조의 문장 어투도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정조는 비밀편지를 매개로 심환지와 강한 인간적 유대관계를 맺고 이를 기초로 벽파 내부의 동향을 파악하거나 벽파의 움직임을 제어하려 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번 편지로 정조 이산은 유교적 성군보다 노회한 현실 정치가의 면모를 보여준 것이다.
정조 이산의 이 같은 면모를 보여주는 또 다른 일화가 있다. 1793년 8월 12일 정조는 당상선전관이었던 노상추(1746~1829)에게 밀명을 내린다. 당상선전관은 국왕의 고급 전령 겸 호위무사 기능을 겸하는 무겸선전관 중에서도 정3품 이상의 고위급 선전관을 의미한다.
이런 중대한 직책을 맡고 있는 노상추에게 맡겨진 임무는 어이없게도 왕실 제사를 비밀리에 감시하는 것이었다. 정조는 노상추에게 세종과 효종의 왕릉 앞에서 시행되는 제사에 사용되는 음식은 깨끗한지, 행사는 엄숙하게 진행되는지를 몰래 감시할 것을 지시했다.
명령에 따라 노상추는 8월 14일 영릉에 도착, 사복 차림으로 제사 음식 등을 살펴본 후 마치 암행어사처럼 “출도야”를 외친 후 공식적으로 제사 현황을 검열한다. 심지어 정조의 밀명에 따라 제사 음식 중 일부를 궁궐로 가지고 돌아오기도 했다. 권력자로서 정조의 면모가 잘 드러나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이런 비화는 노상추가 18세부터 84세까지 70년 넘게 쓴 노상추일기(盧尙樞日記)에 기록돼 있다. 경북 선산의 명문 집안에서 태어난 노상추는 1차 시험인 초시 네 번, 2차 시험인 복시에서 한 번 떨어지는 등 무려 10년에 걸친 도전 끝에 1780년 무과시험에 합격한다. 이후 노상추는 국왕 경호대인 금군, 궁궐 수비 책임자인 오위장 등으로 오랜 무관생활을 이어 간다.
이후 삭주부사 등 지방관을 거쳐 66세이던 1811년 가덕첨사까지 역임한다. 노상추의 기나긴 일기 중 절반이 이 같은 그의 군생활을 기록한 것이다. 그의 일기에는 거의 30년에 가까운 군생활의 나날들이 꼼꼼히 기록돼 있다. 금군 때는 국왕 경호를 위해 몇 시부터 몇 시까지 경계근무를 섰는지를 설명할 정도다.
장교들의 능력 평가를 위해 정기적으로 실시되는 활쏘기의 성적이나 발령이 잘 나지 않았을 때 인사 부탁을 하는 과정까지 솔직히 기록돼 있다. 너무나도 방대한 기록을 담고 있는 노상추일기는 지금까지 양반들의 사회생활을 연구하는 자료로 주로 이용돼 왔다. 하지만 노상추가 무관이라는 점에서 그의 일기는 조선시대 군대연구에도 큰 가치가 있는 사료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정해은 박사는 지금까지 사학계에서 문신들을 중점적으로 연구해 왔지만 앞으로는 무신들의 중앙관료 생활도 연구할 필요가 있다며 노상추일기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노상추일기의 원본은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소장하고 있으며 2005년 현대 인쇄본(사진)으로 재간행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