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는 살아있다: 역사학자 이병도와 특무대장 김창룡 이야기 |
정지환(시민의신문 취재부장) |
여기 두 사람이 있다. 김창룡과 이병도. 한 사람은 일제시대에 관동군 헌병으로 항일 독립군 사냥에 나섰던 악명 높은 친일파였고, 또 한 사람은 일제가 한국사를 왜곡하기 위해 급조한 조선사편수회에서 부역한 역사학자였다. 그러나 그런 치명적인 전력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해방된 나라에서 각각 군부와 사학계의 태두(泰斗)로 변신했다. 1956년 1월 30일 오전 7시 30분. 짙은 안개에 뒤덮인 원효로 1가는 고요했다. 잠시 후 다섯 발의 총성이 고요한 아침의 적막을 깨고 울려 퍼졌다. 그것은 이승만 대통령의 총애를 받으며 절대 권력을 휘두르던 육군 특무부대장 김창룡의 최후를 알리는 소리였다. 당시 그의 나이 36세. 김창룡의 유해가 옥인동 특무부대장실에 안치된 것은 오전 9시였다. 이승만 대통령이 제일 먼저 들이닥쳐 애도를 표했고, 나흘 뒤인 2월 3일 대한민국 최초의 국군장(國軍葬)이 성대하게 치러졌다. 그날 안양 석수동 관악산 기슭에 묻힌 김창룡의 묘지 옆에는 가로 77cm, 세로 2백cm 크기의 묘비가 세워졌다. 비명(碑銘)을 지은 장본인은 당대 최고의 역사학자로 군림하던 이병도였다. 당시 그의 나이 60세. 김창룡과 이병도의 인연은 이렇게 맺어졌다. 그로부터 47년이 흐른 뒤인 2003년 4월 나는 사라진 비명을 찾아 역사기행을 떠났다. 47년만의 역사기행 출발지는 관악산 안양사(安養寺) "관악산 안양사(安養寺) 입구에 묘지 터가 있을 겁니다." 안양시청 문화재 담당 직원이 알려준 대로 관악역에서 택시를 타고 현장에 도착한 것은 지난 2003년 4월 14일 오후 2시 30분. 그러나 벚꽃이 활짝 핀 산길을 오르면서 만난 등산복 차림의 행인들에게 "김창룡 장군의 묘지가 있었던 곳을 아느냐"고 물었지만 모두들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약 30분을 헤맨 끝에야 안양사 입구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한 주민으로부터 정확한 위치를 전해들을 수 있었다. "안양사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난 작은 쇠다리를 건너세요. 그 다리를 건넌 뒤 오솔길을 따라서 오르다가 다시 철문 하나를 지나면 묘지 터가 보일 겁니다. 그런데 이미 이장을 해서 지금은 아무 것도 없을 텐데…. 이제 와서 이곳을 찾아온 이유는 뭐요?" 이곳에 들어와서 생활한 지 30년이 넘었다는 장복규 씨는 친절하게 설명을 해준 뒤 답변 말미에 질문까지 던지며 궁금증을 표시했다. 물론 내가 이곳을 찾은 데는 이유가 있었다. 약 보름 전인 3월 31일 노무현 대통령은 신임 국립중앙박물관장에 이건무 씨를 임명했다. 유력 후보로 거론되던 인사들에 대한 온갖 루머와 투서가 난무하는 가운데 두 달이나 끌던 인사 논란에 종지부를 찍는 순간이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학예연구실장으로 오랫동안 근무해온 이 씨가 차관급으로 승격된 박물관장에 임명된 것에 대한 언론의 평가는 긍정적이었다. 실제로 그는 지난 30여 년 동안 박물관을 고집스럽게 지켜온 이 분야의 최고 전문가였다. 더욱이 그는 한국 사학계의 태두로 불리는 두계 이병도 박사의 손자이기도 했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다음날 발생했다. 이건무 신임 박물관장이 4월 1일자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할아버지인 이병도의 친일행적 논란과 관련하여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 것이다. 이 자리에서 그는 할아버지가 친일을 하지 않았다는 취지의 주장을 펼쳤는데, 문제의 발언을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손자가) 박물관장 자리 때문에 할아버지를 욕보이는 것 같아 가슴이 아팠습니다. 할아버지는 창씨개명도 안 하신 분입니다. 자식들에게도 (창씨개명을) 시키지 않았습니다. 확인도 안한 내용을 인터넷에 올리고…. 할아버지의 실증사학 얘기는 역사를 올바르게 보자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인터뷰 기사를 쓴 경향신문 기자도 이 박물관장의 해명에 동조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그는 "이병도 박사의 실증사학이 식민사학과 연결되고, (이병도 박사의 주장이) 정설이 되어 우리 역사를 왜곡시키는 데 큰 책임이 있다는 지적도 있는 건 사실"이라고 전제하면서도 "두계(이병도의 호)가 뚜렷한 친일행적을 펼치지 않았다는 것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도 있다"고 강조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는 이병도 박사의 친일행적 논란과 관련해선 "가문까지 매도되는 상황에 이르렀다"고도 표현했으며 "일부 인터넷 신문 게시판에서는 이건무 관장의 친할아버지에 대한 필설로 다할 수 없는 공격이 가해지기도 했다"고 지적했다.
물론 손자가 자신의 할아버지를 옹호할 수는 있다. 그러나 옹호에도 어느 정도의 논리는 있어야 한다. 아무리 할아버지를 옹호하려 한다고 해도 한국 현대사의 정체성까지 훼손돼서는 곤란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박물관장의 주장을 냉정한 평가의 도마에 올리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의 발언에 대해 어느 누구도 문제제기를 하지 않고 그대로 넘어갔다는 점에서 그 필요성은 더욱 커진다. 이건무 박물관장의 주장에서 짚어봐야 할 논점은 두 가지로 정리된다. (1)창씨개명과 (2)실증사학에 대한 평가가 바로 그것이다. 후자에 대한 논쟁은 잠시 뒤로 미뤄두기로 하고, 먼저 첫 번째 논점인 창씨개명과 친일행적의 연관성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몇 년 전 기자들이 잔뜩 몰려온 적 있다" 이병도 박사가 일제시대에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물론 사실이다. 따라서 그가 적극적으로 창씨개명을 했던 다른 사람들보다 긍정적 평가를 받아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창씨개명 여부만으로 친일행적을 판단하는 것은 무리라는 지적도 있다. 실제로 진짜 친일파의 경우에는 도리어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경우도 많았다. 조선총독부는 창씨개명을 강제로 실시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일부 인사에게 예외를 허용했던 것이다. 해방 이후 반민특위에 제일 먼저 연행된 '친일파 1호' 박흥식 화신백화점 사장(조선비행기주식회사 대표)이 대표적인 경우에 속한다. 방응모 조선일보 사장도 10여 개의 친일단체 간부로 활동했지만 창씨개명은 하지 않았다. 따라서 "할아버지는 창씨개명도 안 하신 분"이라는 이건무 박물관장의 해명도 바로 이러한 전후맥락 속에서 읽혀져야 할 것이다. 더욱이 그는 대한민국의 역사적 정체성을 상징하는 국립중앙박물관의 수장이 아닌가. 이건무 박물관장의 해명을 낯부끄럽게 만드는 '결정적 증거'는 또 있다. 이병도 박사가 김창룡 특무대장의 비명(碑銘)을 썼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일본 관동군 헌병으로 항일 독립군을 사냥했던 죄업 때문에 해방이 되자 한때 지하로 숨기도 했던 천하의 친일파를 위해 써주었던 비명을 놔두고 창씨개명 운운하며 친일행적과 할아버지의 무관을 강조하는 것은 역사학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궁색한 변명이 아닐 수 없다. 당시 쓰여진 비명을 본 적이 있다는 한 역사학자는 "김창룡 장군이 흘린 피는 고귀한 피였고 그 혼은 호국의 신이 될 것이다"라거나 "아! 이런 변이 있을까. 나라의 큰 손실이구나"라는 대목까지 있었다고 증언해 주었다. 김창룡이 암살된 이후 지난 30년 동안 누워있던 묘지 터를 내가 뒤늦게 찾은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거니와, 이병도 박사가 쓴 비명의 전문을 읽어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김창룡의 묘지는 5년 전 대전 국립현충원 장군 묘역으로 이장되고, 비명의 행방도 묘연한 상태였다. 다음은 현장에서 만난 주민 장복규 씨와 나눈 대화다. ―그동안 묘지는 누가 관리했나? "가족들은 거의 오지 않았던 걸로 기억된다. 김창룡 장군의 운전병이었다는 사람이 가끔씩 찾아와서 묘지를 관리했을 뿐이다. 보안사(특무대의 후신이자 기무사의 전신)에서 성묘를 오기도 했지만 지난 30년 동안 그 회수는 2∼3회에 불과했다. 보안사에서 높은 사람이 온다고 해서 시청 공무원들을 동원해 도로를 청소하고 식당 간판을 정리하는 등 야단법석을 떨었다." ―언론에서 이곳에 관심을 보인 적이 있나. "몇 년 전엔가 기자들이 이곳에 잔뜩 몰려온 적이 있다. 아마도 김창룡 장군이 백범 김구 선생 암살의 배후로 지목됐을 때였을 것이다. 하루는 어느 신문사 기자가 밤 9시가 돼서야 찾아와 비문에 기록된 내용을 모두 적어가기도 했다. 그때 글씨가 보이지 않는다고 우리 식당에 와서 후래쉬(손전등)를 빌려가기도 했다." ―대전 국립현충원으로 이장될 때 묘비는 어떻게 됐나. "한 4, 5년쯤 된 것 같다. 묘지를 이장해 갈 때 장군석은 땅속에 묻어버렸고, 묘비는 중장비를 이용해 산 아래로 옮긴 뒤 화물차로 실어갔다. 그때 묘비를 대전으로 가져간다는 얘기를 들었다. 묘비는 거의 어른 키만 했는데, 최소한 1.5미터는 넘었던 걸로 기억한다. 김창룡 장군의 출생에서 사망에 이르기까지의 일대기를 자세하게 기록해 놓았다." 사실 나는 김창룡의 유골이 안양에서 대전의 현충원으로 이장됐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양의 구 묘역을 찾은 데는 이유가 있다. 설사 이장을 했더라도 무게가 몇 톤이나 되는 묘비는 그대로 남아 있을 수도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묘비가 유골과 함께 옮겨졌다는 사실을 안 이상 발길을 대전으로 돌려야 했다. 나는 대전 현충원으로 전화를 걸어 묘비의 행방부터 물었다. 김창룡의 비명을 찾아서 떠나는 역사기행은 이렇게 시작됐다. 그렇다면 여기서 잠시 김창룡이 어떤 인물인지 짚어보고 넘어가기로 하자. 충청남도 금산군 추부면으로 달려간 까닭 김창룡(1920∼1956)은 함남 영흥에서 태어났다.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장춘 신경역 역원으로 일하다가 일본군 헌병부대 군속이 되어 정보원으로 활동됐다. 정식으로 헌병이 되기 위해 3년간 고생하며 충성한 덕분에 1940년 관동군 헌병 보조원을 거쳐 꿈에도 그리던 헌병이 될 수 있었다. 그후 대공사찰을 담당하며 2년 동안 50여 건의 항일조직을 적발하고 독립군 체포와 고문에 앞장선 공을 인정받아 헌병대 오장으로 진급했다. 해방 직후 친일행적이 두려워 지하로 숨기도 했던 그는 소련군에 체포됐으나 탈출에 성공한 뒤 월남해 군부에 투신했다. 조선경비대 3기생 출신으로 육군 특무대장이 되어 '멸공'이란 명분을 내세워 백범 김구 암살 등 수많은 정치공작을 자행한 장본인으로 지목 받았으며, 한국전쟁 당시에는 부역자를 가리는 군검경합동수사본부장으로 활동하며 수많은 양민을 학살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뒤에서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김창룡은 '총풍의 원조'이기도 하다. 1952년 5월 24일 가짜 무장공비가 피난 수도 부산의 근교에 있는 범어산에 출현한 사건을 조작해낸 것이다. 그 직후 이승만은 계엄령을 선포했으며 부산정치파동을 일으켜 직선제로 개헌한 뒤 재집권에 성공했다. 그러나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권세를 누리던 김창룡은 1956년 1월 30일 출근길에 옛 부하들에게 살해당하고 만다. 대전 현충원의 김창룡 묘.[정지환 제공] 지난 2003년 4월 14일 대전 현충원으로 전화를 걸어 묘비의 행방을 물었을 때, 선양과 직원은 이렇게 답했다. "김창룡 장군의 유골을 현충원의 장군묘역으로 이장하면서 사설묘지에 있던 묘비까지 이곳으로 옮겨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장군묘역에는 규격화된 둘레석과 묘비만 설치하도록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안양에서 가져온 묘비는 현충원 내의 다른 곳에 설치했다." ―어느 곳에 설치했나. "장군묘역 입구에 연못이 하나 있는데, 묘비는 바로 그 옆 빈터에 세웠다. 김창룡 장군의 묘역과는 약 3∼4백미터쯤 떨어진 곳이다." ―묘비의 크기나 특징을 설명해 달라. "크기가 약 2미터는 됐다. 묘비 전면에 '육군중장 김창룡지묘'라는 큰 글씨가 음각돼 있었는데, 이승만 대통령의 친필 휘호라고 들었다." ―비명을 이병도 박사가 썼다고 하던데…. "그것은 잘 모르겠다." ―지금 가면 볼 수 있나. "아, 그게… 지금은 없다." ―지금은 없다고? 그렇다면 어디로 갔단 말인가. "김창룡 장군의 현충원 이장을 반대하는 세력이 있었기 때문에 다시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누가 어디로 옮겨갔나. "충남 금산에 산다는 따님이 중장비를 이용해 가져갔다고 들었다." ―금산 어디인가. "추부라고만 들었다. 더 이상은 말해 줄 수 없다."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무작정 금산군 추부면으로 떠나기로 했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김창룡의 묘비가 추부로 간 것이 확실하다면 지역 사정에 밝은 사람은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설사 자세히 아는 사람이 없더라도 인구가 1만 전후 정도밖에 되지 않는 좁은 지역이기에 샅샅이 뒤지기만 하면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미궁에서 헤매다 찾아낸 한 가닥 실마리 4월 17일. 금산군 추부면 옆 동네에 사는 옥천신문사 오한흥 사장을 안내인 삼아 추부면 마전리에 도착한 것은 오후 2시경. 우리는 제일 먼저 면사무소부터 찾았는데, 그때만 해도 의기양양했다. 누구나 묘비의 행방을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김창룡 묘비가 추부로 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커녕 그런 소문을 들어봤다는 사람도 없었다. 면사무소 직원들은 여기저기 수소문까지 하며 열성껏 도와주려 했지만 단서를 찾을 수 없는 데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새로운 정보가 들어오면 알려 달라면서 연락처를 남겨준 뒤 면사무소를 나와 부동산, 화원, 석재, 화물 등 묘비의 이동이나 설치와 관련된 업종 관련자들을 모두 찾아다녔다. "시방 자유당 시절에 특무대장인지 뭔지 했던 김창룡이 말하는 거 아녀? 아, 그렇게 유명한 사람의 묘비가 추부에 들어왔다면 우리가 모를 리 없제. 근디 전혀 들어보질 못했어. 금시초문이야. 뭘 잘못 알고 온 거 아녀?" 화원을 운영하는 60대 초반의 노인이 화분에 물을 뿌리며 기자에게 던진 말이다. 다른 사람들의 답변도 마찬가지였다. 대전현충원에 다시 전화를 걸어 묘비를 가져간 김창룡 장군의 딸 이름을 알아내 면사무소에 문의했지만, 추부면에 그런 이름을 가진 사람은 살지 않는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추부면 26개 이장 명단을 입수해 전화를 걸어보기도 했지만 이번에도 금시초문이라는 답변만 돌아왔다. 역사기행은 첫날부터 미궁에 빠지고 말았다. 석양이 드리워진 서대산(금산에서 가장 높은 산)을 뒤로 한 채 우리는 허탈한 기분으로 추부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4월 18일. 길을 잃으면 첫 자리로 돌아가야 하고, 엉킨 실타래를 풀기 위해서는 실마리를 찾아야 하는 법이다. 다음날 오후 기자는 직접 대전 현충원을 찾아가기로 했다. 이번에는 대전지역 사정에 밝은 심규상 오마이뉴스 기자와 동행했다. 쏟아지는 빗줄기를 뚫고 김창룡이 안장돼 있는 장군묘역을 둘러본 뒤 현충원 청사를 방문해 실무자들을 만났다. 우리는 이곳에서 김창룡 묘비의 이동과 관련된 몇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취재 결과 김창룡의 유골과 묘비가 대전 현충원으로 옮겨진 것은 1998년 2월 13일이었고, 현충원에 설치돼 있던 묘비가 유족에게 넘겨진 것은 2001년 3월 10일이었다. 담당 직원들이 철제 캐비닛에서 꺼내온 김창룡 관련 서류는 적지 않은 분량이었다. 관련 서류를 복사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그들은 정중히 거절했다. 어쩔 수 없이 그들이 휘리릭 넘기는 서류를 어깨 너머로 쳐다보며 중요한 대목을 확인해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우리는 취재 과정에서 우여곡절 끝에 의미 있는 한 장의 문서를 입수했다. 김창룡의 유족에게 묘비가 반환되던 당시 현장에 동행했던 실무자가 작성한 「출장 결과 보고서」가 바로 그것이다. 거기에는 이런 기록이 적혀 있었다(일부 내용은 익명 처리). □출장 목적: 고(故) 김창룡 장군 개인 비석 반환 □출장 일시: 01.3.10(토) 09:00∼15:00 □출장자: 행정주사 ○○○ 외 3명 □출장지: 금산군 추부면 ○○리 뒷산 마침내 '보물지도'를 찾아낸 것이다. 한편 직원이 빠르게 넘기는 서류 중간에는 묘비의 상태와 이동 경로를 알 수 있는 대목들도 보였다. 우리는 '가로 77cm×세로 2백cm', '사적(私的) 비석 문제 발생', '01년 3월 2일 심사위원회 개최, 3월 10일 반환', '○○리(추부터널 경유)', '미망인 감사전화 수신 01.4.9 14:20' 등의 기록을 취재수첩에 적어 넣을 수 있었다. 단서를 입수한 뒤 우리는 현장에 동행했던 ○○○ 씨를 찾았지만 그는 마침 휴가중이었다. 대신에 그와 동행했던 나머지 3명은 기술직 근무자였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누워있는 묘비'가 역사의 무서움을 증언하다 4월 19일. 다음날 오한흥 사장과 함께 다시 추부면을 찾았다. 묘비가 옮겨진 마을 이름까지 알고 있었기에 일은 모두 끝난 셈이었다. 그러나 막상 현장에 도착해 마을 이장과 주민들을 만나면서 꿈은 다시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김창룡 묘비를 봤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도리어 그들은 우리를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참으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난관에 봉착한 우리는 다시 현충원에 전화를 걸어 2001년 3월에 출장 업무를 수행했던 ○○○ 씨를 찾았다. 그러나 그는 오래 전의 일이라 '○○리 뒷산'의 위치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기억을 떠올려 보라는 나의 간곡한 부탁을 받고 "마을 입구에 연못이 있었던 것 같고…. 작은 마을을 지난 뒤 고개를 넘은 것도 같고…. 주변에 인삼밭이 많았던 것도 같고…"라면서 떠듬떠듬 말하던 그가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아, 그때 김창룡 장군의 둘째 사위가 동행했어요. ○○대 건축학과 교수였는데, 그 사람이 말을 타던 승마장에 묘비를 가져다 준 것 같습니다. 이게 정확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나 그의 기억은 정확했고, 그것은 굳게 닫혔던 '비밀의 문'을 열어주는 '마법의 열쇠'가 되어 주었다. 동시에 그것은 2박3일간 진행된 '맨땅에 헤딩하기'식 추적이 이제 막바지에 도달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실제로 마을 주민들에게 '○○대 건축학과 교수가 말 타던 곳'을 묻자 거의 모든 사람이 "잘 안다"고 답하는 것이 아닌가. 주민들이 알려준 대로 산길을 올라 헤맨 지 30분. 우리는 마침내 골짜기 안쪽에 쑥 들어가 있는, 잡초가 무성한 버려진 승마장을 발견했다. 폐타이어가 타원형을 이룬 승마장 옆에는 컨테이너 한 채가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마굿간으로 쓰였던 것으로 보이는 공간도 보였다. 우리는 우선 승마장 주변을 둘러보기로 했다. 어딘가에 묘비가 세워져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변을 아무리 찾아봐도 묘비는 보이지 않았다. 다시 승마장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마굿간 바닥에 초록색 포장으로 덮여 있는 장방형의 물체가 보이는 것이 아닌가. 오한흥 사장이 "혹시"라고 중얼거리며 포장을 들추고 안쪽을 들여다봤다. "찾았다!" 오 사장의 단말마 같은 외침이 싸리꽃 만발한 작은 골짜기에 울려 퍼졌다. 시계를 보니 정오가 조금 지난 12시 51분이었다. 먼지가 잔뜩 쌓여 있는 포장 밑 부분을 살짝 젖히자 묘비로 보이는 바윗덩이가 일단의 모습을 드러냈다. (왼쪽 사진 설명: 충남 금산군 추부면의 야산에서 발견된 김창룡 묘비에는 '이병도'라는 이름이 선명하다) 그러나 포장을 벗겨내는 일이 그렇게 만만치 않았다. 장방형 물체의 사방이 굵은 밧줄로 꽁꽁 묶여져 있었기 때문이다. 단단하게 묶여 있는 밧줄의 매듭을 풀고 비닐 포장을 벗겨내자 묘비의 전모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우리는 잊을 수 없는 장면을 목격했다. 포장을 벗겨내는 순간 족제비 한 마리가 뛰쳐나와 숲 속으로 쏜살같이 달려간 것이다. 실제로 전모가 드러난 묘비 옆에는 족제비 배설물이 한 무더기 쌓여 있었다. 더욱이 묘비는 몸체, 머릿돌, 안내표석이 각각 분해된 상태로 나뒹굴어 있었다. 그 모든 것이 '죽어서도 편치 못한' 친일파의 비극적 말로를 증언하는 듯했다. 오 사장도 그런 느낌이 들었던 것일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비명(碑銘)을 한번 읽어보세요. 여기 마지막 부분에 '단기 4289년 2월 3일 입'이라고 써 있군요. 이게 '설 입(立)' 자 아닙니까? 말 그대로 비석은 서 있어야 하는 건데, 쓰러져 있는 비석이라니…. 정 기자, 기사 제목 벌써 나왔네요. '누워있는 묘비가 역사의 무서움을 증언하다'로 하면 어떨까요? '김창룡 묘비는 왜 숨어서 누워 있나요?'도 괜찮을 것 같고…." '죽은 김창룡'이 지금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오한흥 사장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상념에 젖지 않을 수 없었다. 실제로 야생동물의 배설물과 흙덩이와 뒤엉킨 채 쓰러져 있는 비석을 바라보며, '사람은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생각해 봤다. 생전의 부귀영화와 절대권력이란 얼마나 무상한 것인가. 한 사람의 생애를 평가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결국 한 사람의 생애를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사후의 평가까지 살펴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가해자' 김창룡의 삶은 '피해자' 백범 김구 선생의 그것과 대조적이다. 조국의 해방을 위해 젊은 시절을 풍찬노숙으로 보냈음에도 비극적 최후를 맞아야 했던 백범 김구. 그러나 그는 사후에 온 겨레의 스승으로 추앙 받고 있지 않은가. 이와 관련 나는 추적 과정에서 입수한 「출장 결과 보고서」가 떠올랐다. 이 보고서에는 '유가족의 요구사항 청취'라는 항목이 있었는데, "아래의 시기에는 묘지의 안전 관리에 각별한 관심 요청"이라는 대목 아래 이런 내용이 적시돼 있었다. ○.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 방문시 ○. 6·26 백범 김구 선생 추모일 ○. 8·15 광복절 전후 이것들은 결국 김창룡 유족이, 아니 '죽은 김창룡'이 지금 과연 무엇을 가장 두려워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그들은 남북의 화해와 협력이 이뤄지는 것을, 그래서 더 이상 반공이라는 '전가의 보도'가 힘을 쓰지 못하고 '녹슨 칼'이 되는 것을 무서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그들은 대한민국 대다수 국민이 경축하는 광복절이 두렵고, 대다수 국민이 슬퍼하고 분노하는 김구 선생 추모일이 무서운 것이다. 이 무슨 역사의 아이러니란 말인가. 충청도의 어느 마을 뒷산에서 느꼈던 역사의 아이러니는 또 있었다. 김창룡의 비명을 쓴 장본인이 역사학자 이병도 박사였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이병도 박사가 누군가. 그는 '한국 사학계의 태두'이자 '실증사학의 대부'로 불렸던 인물이다. 그러나 그가 작성한 김창룡의 비명에는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과 다른 내용으로 가득 차 있었다. 우선 「고 김창룡 중장 묘갈」이라는 제목의 비명 전문을 읽어보면 다음과 같다. 조국 치안의 중책을 띠고 반역분자 적발에 귀재의 영명을 날리던 고 육군특무부대장 김창룡 중장은 4289년(1956년―저자주) 1월 30일 출근 도중에 돌연 괴한의 저격을 입어 불행히도 순직하였다. 이 참변을 듣고 뉘 아니 놀래고 슲어 하랴. 아! 이런 변이 있을가. 나라의 큰 손실이구나 함이 이구동성의 외침이었다. 그는 본시 영흥 출생으로 80년(1947년)에 육사를 마치고 그후 육군본부 정보국 방첩과장에 취임하여 이래 누차 숙군을 단행하여 군의 육성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특히 동난 중에는 군검경합동수사본부장으로 맹활동을 개시하여 간첩오렬 부역자 기타를 검거 처단함이 근 2만5천명 전시 방첩의 특수 임무를 달성하였다. 84년(1951년) 육군특무부대장에 부임하여서는 더욱 헌신적 노력과 탁월한 지휘로써 국가 및 군사 안전 보장에 기여하였다. 그 중요한 적발만으로도 85년(1952년) 대통령 암살 음모의 김시현 사건 87년(1954년) 남도부 등의 대남 유격대 사건 88년(1955년) 대통령 암살 음모자 김재호 일당을 미연에 일망타진한 그것이다. 그는 이렇듯 나라에 유공하였다. 그 사람됨이 총명하고 부지런하고 또 불타는 조국애와 책임감은 공사를 엄별하여 직무에 진수하더니 급기야 그 직무에 죽고 말았다. 아- 그는 죽었으나 그 흘린 피는 전투에 흘린 그 이상의 고귀한 피였고 그 혼은 기리 호국의 신이 될 것이다. 그의 생년은 단기 4253년(1920년) 11월 23일. 형년은 37세. 순직과 동시에 육군 중장에 승진되었다. 단기 4289년 2월 3일 입. 문학박사 이병도 지음. 육군참모총장 육군 대장 정일권. 1952년 5월 24일 발생한 총풍 사건의 원조 나는 비명의 마지막에 선명하게 음각된 '문학박사 이병도 지음'이라는 문구를 바라보며, 자신의 이름을 걸고 기록을 남긴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를 절감할 수 있었다. 실제로 이병도가 지은 김창룡의 비명에는 "(군검경합동수사본부장 시절) 간첩 부역자 2만5천명을 검거 처단하는 임무를 달성했다"라거나 "(특무부대장 시절) 대통령 암살 음모자 김재호 일당을 미연에 일망타진했다"는 등의 대목이 나온다. 그러나 한국전쟁 당시 부역자 처리 과정에서 무고한 민간인 희생자가 양산됐으며, 방첩활동 과정에서도 수많은 정치공작이 자행됐다는 사실이 하나둘 밝혀지고 있다. 이와 관련 한국전쟁 당시 육군본부 정보2과에서 근무했던 김종필 자민련 명예총재의 증언은 매우 시사적이다. 그는 2000년 1월, 대전형무소 학살사건을 공론화시킨 재미동포 이도영 박사와의 면담 과정에서 "(전쟁 당시 양민학살은) 전부 김창룡이 한 것"이라고 증언한 바 있다. 김창룡은 '총풍(銃風)의 원조(元祖)'이기도 하다. 이와 관련 오제도 씨와 함께 왕년의 반공검사로 불렸던 선우종원 씨가 자신의 회고록 『격랑 80년』에서 생생하게 증언한 비사는 매우 흥미롭다. 1952년 5월 24일 피난 수도 부산에서 이른바 '범일동 무장공비 총격사건'이 발생했다. 신문은 "백주에 인민군 게릴라들이 부산 범일동 뒷산에 나타나 병참기지에 총격을 가해 미군과 몇몇 한국인 인부가 목숨을 잃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선우종원은 그 신문 기사를 보고 코웃음을 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장면 국무총리의 비서실장으로 재직하고 있던 그는 부산·경남지역의 치안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채널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의 정보와 판단을 기준으로 볼 때 무장공비 침투는 한마디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그건 조작이었으며, 조만간 계엄으로 몰고 간 뒤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선거를 치르려는 음모"라고 결론지었다. 그리고 그 예상은 적중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바로 다음날인 5월 25일 0시를 기해 부산지역에 비상계엄을 선포한 것이다(그날은 마침 일요일이었다). 월요일인 5월 26일 국회의원 수십 명을 태운 국회통근버스가 헌병사령부로 견인돼 가는 전대미문의 사태가 발행했다. 이승만의 재집권을 위해 헌법과 국회를 유린한 부산정치파동은 이렇게 시작됐다. 그런데 이 사건이 일어나기 며칠 전에도 비슷한 성격의 '공작사건'이 있었다는 것이 선우종원의 증언이다. 그는 자신이 목격했던, 이 사건을 다뤘던 국무회의 분위기를 자신의 회고록에서 생생하게 전하고 있거니와, 그날 유난히 기분이 좋아 보였던 이 대통령은 총리와 장관들을 둘러보며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고 한다. "여러분, 김창룡 대령 알잖소. 여러분들, 김 대령을 자식처럼 사랑해 주세요. 그는 정말 애국자요. 그는 어제 지리산 공비들이 부산에 들어와 무기를 사 가지고 관에다 넣고는 상복까지 입고 상여처럼 메고 위장한 채 지리산으로 가는 걸 붙잡았소. 이 얼마나 애국자요." 곧이어 이 대통령은 조병옥 내무부 장관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국무회의장으로 김창룡을 불러들였다. 선우종원은 회고록에서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들어온 무리들은 한 술 더 떠 국무회의실 바닥에 뭔가를 쭉 늘어놓았다. 그러나 그것을 본 나는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빨갱이한테서 압수했다는 무기라는데 개머리판도 없고 낡아 저게 살상용으로 제대로 쓰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그런 물건을 보는 이 박사의 입가에는 흐뭇한 웃음이 배어 있는 것을 어쩌랴." 그런데 1년 후에 이 '범어산 무장공비 침투사건'의 진상이 밝혀졌다. 군법회의에 회부됐던 민간인들이 검찰청으로 넘어오면서 이 사건이 김창룡에 의해 조작된 연극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선우종원은 당시 조진만 법무부 장관이 총리에게 보고하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봤는데, 조 장관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지난 계엄령 하에서 있었던 상여를 위장한 빨갱이 사건 말입니다. 그게 순 조작이었습니다. 사건이 검찰로 넘어와 다시 조사를 해보니, 김창룡 대령이 각하께 충성 경쟁을 하느라 일부러 꾸민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죄 없는 민간인들을 모두 풀어주었습니다." '실증사학의 대부'가 '실증사학'을 배신하다니 이 '원조 총풍사건'의 진상을 밝혀줄 수 있는 증언은 다른 곳에서도 이미 나왔다. 1951년 서창선 대위 살해 사건으로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4·19 직후에야 석방된 서민호 전 의원(국회 부의장 역임)은 다음과 같은 충격적인 증언을 한 바 있다. "나는 대구형무소에 있을 때 중형수들과 같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그들 중 몇몇이 밖으로 불리어 나갔다가 오더니 몹시 기뻐했습니다. 그들은 내게 말하기를 자기들은 곧 부산에 가서 큰 일을 하게 되는데 그 일만 끝나면 석방이 될 것이라면서 의기양양한 태도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전시라 하더라도 사형수와 무기수들을 그렇게 석방해 줄 수 있는가 하고 많은 의문을 가졌습니다. 얼마 후 그들은 과연 군용차에 태워져서 어디론가 가버렸습니다. 그리고 내가 대구형무소에서 나올 때까지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형수와 무기수들은 어디로 갔던 것일까. 그리고 그들은 왜 돌아오지 않은 것일까. 지금은 고인이 된 서민호 전 의원이 남겨놓은 증언을 다시 들어보자. "그들은 대구형무소에서 부산 금정산으로 끌려갔던 것입니다. 거기서 그들은 공비로 위장하고 있다가 모조리 사살된 것이 분명합니다. 그때 내 변호사와 친지들이 대구형무소를 찾아와서 부산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정부가 계엄령을 선포한 이유는 부산에 공비가 나타났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승만 정권은 부산정치파동을 일으키면서 계엄령 선포의 구실을 그렇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서민호 전 의원은 그러한 공작을 꾸민 장본인으로 김창룡을 지목했다. 당시 대구형무소를 열심히 들락거리던 김창룡을 여러 번 목격했다는 증언과 함께. 김창룡의 정치공작 중에서도 가장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은 백범 김구 선생 암살 사건이다. 암살범 안두희는 세상을 뜨기 전인 1992년 "조선호텔 앞 대륙상사로 위장된 특무대 사무실에서 김창룡을 만나 백범 암살을 지시 받았다"고 증언해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은 바 있다. 물론 안두희의 자백이 있기 훨씬 전부터 김창룡의 개입 가능성을 보여주는 정황은 많았다. 실제로 백범이 저격당한 6월 26일 저녁 안두희를 특무대 영창으로 이감시켜 쉬게 한 것도, 종신형에서 15년으로 감형시키는 데 결정적 영향을 준 것도 김창룡이었던 것이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반세기가 지난 뒤 또다시 발생했다. 김구 선생의 어머니인 곽낙원 여사(1858∼1939)와 장남인 김인 선생(1918∼1945)이 아들과 부친의 암살 배후로 지목된 김창룡과 같은 묘지인 대전 현충원에 묻혀 있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독립운동에 앞장섰지만 끝내 해방을 보지 못하고 머나먼 이역에서 눈을 감은 두 사람이 묻혀 있는 애국지사 제2묘역과 김창룡이 묻혀 있는 장군묘역은 야산을 사이에 두고 불과 5백여 미터 떨어져 있다. 그런 김창룡을 위하여 당대 최고의 역사학자 이병도가 비명을 지어준 것이다. 그리고 이병도가 지은 비명을 중심으로 김창룡과 관련된 현대사를 살펴보면 십중팔구 오류와 왜곡으로 점철돼 있음을 확인할 수 있거니와, '실증사학의 대부'가 지어준 '반공투사의 업적'은 '민족정기'는 물론이고 '실증사학'마저 배신했던 것이다. 매국노 이완용의 관 뚜껑은 어디로 사라졌나 ▲ 친일학자 이병도가 비문을 쓴 김창룡 묘갈이 부러진 채 나뒹굴고 있다.[정지환 제공] 이병도와 김창룡 이야기를 『시민의신문』에 4회에 걸쳐 연재하고 있던 2003년 5월 나는 잇따라 두 건의 제보를 받았다. 그것은 질곡의 현대사와 영욕을 함께 했던 이병도와 김창룡이라는 두 인물의 '반면교사로서의 진면목'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증언과 사료였다. 익명의 제보자가 아무런 설명도 없이 보내온 「육군 소장 김창룡에 대한 태극 무공훈장 수여의 건 품의」(1955년 작성된 정부 문서)에 대한 소개는 다음 기회에 하기로 하고 이번에는 이병도와 관련된 이야기만 하기로 한다. 나에게 제보를 한 주인공은 한 원로급 대학 교수였다. 내가 연재하고 있던 기사를 흥미롭게 보다가 전화를 걸었다는 그는 "실증사학의 대부로 알려진 이병도 박사가 친일 매국노의 대명사인 이완용의 조카 손자라는 사실을 아느냐"고 물은 뒤 다음과 같은 사연을 알려 주었다. "해방 직후 전북 익산 백성들이 이완용의 묘지를 파헤치고 관을 끄집어내 불태웠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불에 타다만 이완용 관 뚜껑을 보관하고 있던 한 주민이 이것을 원광대 박물관에 기증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이병도 박사가 원광대를 찾아가 그 관 뚜껑을 역사 연구에 쓰겠다고 설득해서 가져간 뒤 개인적으로 없애버렸다고 한다. 믿을만한 역사학계 인사로부터 들었던 이야기인데, 사실 여부를 확인해 보기 바란다." 충격적인 내용의 제보였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할아버지의 실증사학 얘기는 역사를 올바르게 보자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이건무 박물관장의 해명은 설자리를 잃게 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앞에서 몇 번이나 강조한 대로 이병도는 실증사학의 대부로 알려진 역사학자다. 실증(實證)할 수 없다면 정사(正史)로 기록하지 말라는 사관(史觀)에 입각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BC 8세기 전 기록은 믿을 수 없다는 학설을 주창했다. 물론 그런 주장은 일제시대 식민사관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으면서 수립된 측면이 강하다. 그런데 그렇게도 실증사학을 강조했던 그가 정작 '가문의 수치'를 우려해 공사(公私)도 구분하지 못한 채 할아버지 뻘인 이완용의 관 뚜껑이라는 역사 유물을 태워버렸다는 것이 아닌가. 나는 이 제보의 사실 여부를 추적하던 중 누군가로부터 10여 년 전 『시사저널』에서 그런 기록을 본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며칠 후 마침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는 『시사저널』 1992년 8월 27일자 기사(정희상 기자)를 찾아낼 수 있었다. 이완용의 후손들은 잃어버린 과거의 권세와 민족의 손가락질을 견디기 어려웠는지 모른다. 지난 1979년 이완용의 증손 이석형 씨는 전북 익산군 낭산면 낭산리 뒷산에 묻혀 있던 이완용과 이항구 부부의 묘를 직접 파헤쳐 화장시켜 버렸다. 이완용의 관 뚜껑에는 붉은 페인트로 일본 정부가 부여한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 이위대훈위 우봉이공지구(朝鮮總督府 中樞院 副議長 二位大勳位 牛峯李公之柩)'라 씌어 있었다. 이완용 부부의 관 뚜껑은 주민이 가져갔다가 원광대 박물관에 기증했다고 한다. 그러나 원광대에는 이 관 뚜껑이 남아 있지 않다. 당시 원광대 박물관장이었던 박순호 교수는 "소장 직후 이완용의 친척 되는 역사학자 이병도 박사가 내려와 총장님을 설득해 관 뚜껑을 가져가 태워버렸다"고 밝혔다. 애초의 제보 내용과는 약간 차이가 있긴 했지만, 그것은 역사학자 이병도가 쓰고 있던 위선의 가면을 벗겨내는 결정타가 되기에 조금의 부족함도 없었다. '가문의 수치' 숨기느라 역사 유물 불태운 실증사학자 한편 이완용과 관련된 역사 자료를 추적하던 중 나는 또 하나의 의미심장한 기록을 발견했다. 우봉 이씨 시조(始祖)인 이공정(李公靖)의 23대손인 이완용이 일제로부터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의 직책과 후작 작위를 받으면서 '잘 나가던' 시절에 '가문의 영광'을 위해 시조의 묘지를 찾아내 대대적으로 개축한 사실이 있었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그 내용은 경향신문 기자를 거쳐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을 지낸 윤덕한의 역작 『이완용 평전』(중심)에 다음과 같이 자세히 기록돼 있다. 『일당기사』(이완용 사망 다음 해인 1927년 그의 조카이자 비서인 김명수가 엮은 책, 일당은 이완용의 호)에 의하면 이공정의 분묘는 언제 없어졌는지도 모를 만큼 오래 전에 없어져 우봉 이씨 가문에서 그 정확한 위치를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이완용이 죽기 1년 전인 1925년 5월경 황해도 장단군 소남면 지금리 서원동에 사는 문창업이라는 사람이 장단군 소남면 유덕리 마답동에서 이공정 묘의 지석을 발견해 이완용에게 들고 왔다. 이완용은 사실 우봉 이씨가 생긴 이래 그 집안에서 배출된 수많은 인재 가운데서도 가장 출세한 인물이었다. 비록 매국노라는 손가락질은 받고 있었지만 대한제국의 총리대신을 3년 이상 지냈고 당시에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으로서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그런 만큼 그 시조의 묘 지석을 우연히 발견한 시골 촌부가 그것을 들고 이완용을 찾아온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로 보인다. 지석은 죽은 사람의 이름과 출생 및 사망 일자, 행적, 무덤의 모양과 방향 등을 기록해 무덤 앞에 묻어둔 판석을 말한다. 이완용은 이 지석의 진위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6월 5일 우봉 이씨 종친 몇 명을 데리고 현장에 가서 직접 조사를 했다. 그 결과 이 지석이 이공정 분묘에서 나온 것임을 확신하고 이 사실을 전국의 모든 우봉 이씨 종친에게 통보한다. 이어 6월 28일 자신의 옥인동 저택에서 종친회의를 열어 이공정의 분묘를 개축하고 석물을 설치하기로 최종 결정한다. ……결국 잃어버렸던 우봉 이씨 시조의 묘를 23대손인 매국노 이완용이 찾아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역사의 아이러니를 목도하게 된다. 할아버지(이완용)는 '가문의 영광'을 널리 알리기 위하여 나라를 팔아먹은 대가로 쌓은 재물과 권력을 동원해 조상의 분묘를 화려하게 개축했지만, 손자(이병도)는 '가문의 수치'가 널리 알려지는 것이 두려워 부끄러운 조상의 분묘에서 나온 관 뚜껑을 없애버렸다. 그뿐만이 아니다. 할아버지(이병도)는 일제가 역사왜곡을 위해 급조한 조선사편수회에서 부역한 전력을 가지고 있건만, 손자(이건무)는 할아버지가 창씨개명을 안 했으니 친일 논쟁은 부당하다고 강변하고 있다. 정녕 오욕과 왜곡의 역사는 반복되는 것인가. |
출처 : 유유자적 낙산도령
글쓴이 : 베아트리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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