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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영

감효전(甘曉典) 2012. 2. 10. 21:50

[ [이회영 선생 일가] 독립운동을 위해 한평생을 바쳤던 그들의 최후|      

 

친일 합병후 일본은 조선귀족령을 내렸다.

 

 

한마디로 귀족들에게 돈을 나눠주고 충성을 맹세받는것..

 

 

 

 

부부동반 일본여행도 보내주고 그들의 기득권을 보호해주었다.

그러나 저 돈과 기득권을 지켜주겠다는 일제의 달콤한 제안을 거절한 귀족들은 80명중 6명..

 

그 중 이회영 선생일가도 있다.

 

이회영의 집안은 경주이씨 상서공파로 백사 이항복 (우리가 잘 아는 오성과 한음의 오성) 이래 열명의 정승을 배출한 명문가다.

 

 

 

이 집안에는 '상신록' 이라는 문집이 있는데

상신록은 재상을 지낸 선조들의 명단을 모은 책으로써

상신록은 한 가문에서 정승이 열명 이상 나와야 만들 수 있다.

 

당시에 사대부라는 것은 많지만 이렇게 상신록을 만들 수 있었던 가문은 조선에서 열손가락에 꼽힌다. 

 

 

이회영의 아버지 이유승은 고종 초기 이조판서를 지냈고

9촌종숙 이유원은 영의정을 지내기도 하였다.

 

 

당시 이회영 일가의 재산은..

 

 

 

당시 이씨 일가의 총 재산을 지금돈으로 환산해보면 최소 600억원 ~ 최대 900억원 이라고 한다.

저 돈도 급하게 만주로 떠나야 했기때문에 대부분 헐값에 팔아넘긴 재산들이어서

제대로 이씨일가의 재산을 측정할수가 없다고 한다.

이씨 일가는 당시 조선에서 세손가락 안에 꼽히는 거부였다.

 

 

 

 

 

 

이씨 일가는 그많던 재산을 모조리 독립운동에 쏟아부었다.

친일 합병이 되자마자 노비들은 보내주고 만주로 일가를 망명을 하는데

노비들은 자유를 얻었음에도 알아서 이회영 선생 일가의 만주행에 동참했다고 한다.

 

이렇게 만주로 떠난 이들은 그곳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웠다.

 

 

 특히 신흥무관학교에서는 역사와 한글교육을 중시하여 민족성을 고취시켰는데

신흥무관학교에서 사용되었던 교재들은 대부분 일제에 의해 금서목록에 올라간 교재들 이었다.

 

 

 

 

 

 

1920년 부터 ~ 독립이 되기 전 1940년 대까지 일어난 모든 무장투쟁들의 주역은 바로

이씨 일가가 세운 신흥 무관학교 생도들이었다.

신흥 무관학교는 그야말로 한국 독립운동의 뿌리와 같은 곳 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독립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오지 않았고

학교를 세우고 무장투쟁을 지원하고 학생들을 무료로 먹여살려야 했던 이씨일가의 재산도 바닥이 났고 

 

그렇게 독립을 위해 자신들의 기득권을 버리고 만주로 가서

한 평생을 나라를 위해 살아간 이회영 일가의 마지막은 이랬다..

 

 

 

첫째 이건영선생은 선산을 관리하러 국내로 들어왔다가 해방을 보지 못하고 병을 얻어 돌아가셨다.

 

만석꾼의 재산을 내 놓았던 둘째 이석영선생은 상해에서 홀로 배를곯다가 돌아가시고 결국 유해조차 찾지 못하였다.

 

셋째 이철영은 신흥무관학교 교장으로 끝까지 의용군을 지휘하다가 병을얻어 사망

 

넷째 우당 이회영선생은 마지막까지 독립운동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기려다 일제에 발각되어 뤼순감옥에서

잔인한 고문에 시달리다 돌아가셨다.

 

막내 이호영은 북만주지역에서 의열활동을 벌이다 전 가족이 한꺼번에 몰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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