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관동군 출신 간수들
(서프라이즈 / 미미 / 2009-11-28 10:16)
전 인민군 종군기자 수기
이인모
(주) 월간 말
일본 관동군 출신 간수들
7년형을 선고받은 나는 광주형무소를 거쳐 대전형무소로 갔다가 대구의 육군형무소로 옮겨졌다. 대구육군형무소는 대구 동촌에 있었는데 일본인 소유였던 과수원을 개조한 것이었다. 과수원에 있던 큰 주택을 감방으로 고쳐 일반수들을 수용했다. 그중 사과를 저장하던 지하실은 '특호감방'이라 하여 정치범과 일반수 중 중범자들 만을 가두었다.
나도 이 특호감방에 던져졌다. 들어가보니 한 50여 명이 갇혀 있는데 매질로 해가 뜨고 매질로 해가 지는 곳이었다. 당시 형무소의 간수들은 일제 관동군 출신들이 대단히 많았다. 일제 때 독립투사들을 때려잡던 사람들이 해방된 조국에서 또 우리 동지들을 가둬놓고 지키고 있는 꼴이 바로 조국의 현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간수들은 관동군 노릇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기는커녕 일본군대에서 배운 잔인한 폭력성을 자랑스럽게 과시하였다. 이 바람에 특호감방의 규율은 병영보다 더 혹독했다.
죄수들은 감히 간수들을 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간수가 "000번" 하고 부르면 굶주리고 병들어 죽어가던 사람도 마치 일본병정처럼 벌떡 일어나 부동자세로 힘껏 "옛!"하고 외쳐야 했다. 또한 일종의 대리통치자로 일반수 중범자 가운데 아주 포악한 자를 골라 감방장을 시켜놓았다. 물론 그는 간수의 지시를 받아 움직이지만 성질이 워낙 포악하다보니 지시보다 한술 더 뜨는 것이 다반사요, 간수들도 이것이 해롭지 않음으로 그냥 방치했다.
우선 감방장은 우리들 50여 명을 몇 줄로 앉힌 후 각 열마다 '열장'을 하나씩 배치했다. 물론 그도 일반수 중 중범자였는데 그의 횡포 또한 대단했다. 가령 어디가 가려워도 그의 허락 없이는 긁지도 못하는 것이다. 긁으려면 "열장님 어디가 가려우니 긁겠습니다"하고 보고를 한 후 "긁어!" 소리를 듣고서야 움직여야지 마음대로 움직였다가는 불려나가서 죽도록 얻어맞곤 했다. 그러니 온종일 꼼짝도 못하고 앉아 있어야만 했고 벽에 기대앉는다는 건 엄두도 낼 수 없었다.
감방이 비좁아 자는 것도 큰 문제였다. 서로 한 사람씩 발과 머리를 엇갈리게 두고 모로 누워 자는데 옆 사람의 발이 입에 닿는 것쯤은 문제도 아니었다. 어찌나 비좁은지 왼쪽 옆으로 누웠다가 옆구리가 결려 오른쪽 옆으로 돌아누우려면 혼자서는 도저히 몸을 뺄 수가 없고 전원이 일어나 일제히 돌아누워야만 겨우 돌아누울 수 있을 정도였다.
밥은 어린애들 주먹만하게 뭉친 것을 한 덩어리씩 주는데 받기 바쁘게 한입에 삼켜버리면 그만이었다. 육군형무소 의무과 의사조차 "그 밥만 계속 먹으면 영양실조로 3개월을 못 넘길 것"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과연 3개월이 지나자 모두들 살은 다 빠지고 백골들이 되었다. 매일 자고 나면 한둘씩은 죽어나가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이 무렵 어떤 동지가 꾀를 하나 냈다. 어차피 얼어 죽어나 맞아죽거나 굶어죽을 게 뻔한데 배나 채워보고 죽자는 얘기였다. 즉 7~8명이 한 조가 되어 끼니 때 어린애 주먹만한 밥을 받으면 눈 딱 감고 반을 덜어 한 사람에게 몰아주자고 하였다. 그러면 일곱 끼니는 배가 고파도 한 끼니는 배를 채울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열장의 눈을 피해가며 이른바 '밥계'를 하게 되었는데 한 끼 배 부르자고 사흘을 굶는 일도 할 짓이 못 되었다.
간혹 가족들이 찾아와 음식물을 차입해주는 동지들도 있었다. 하지만 차입된 음식물이라는 것도 층층시하의 간수들이 다 뜯어먹고 감방장, 열장 몫까지 뺀 후에야 쥐꼬리만큼 본인에게 돌아오는데 다른 사람들과 절대 나누어 먹지 못하게 했다. 굶주린 동지들을 두고 도저히 혼자 먹을 수가 없어 열장의 눈을 피해 음식을 나눠 먹다 걸리기라도 하는 날엔 불려나가 똥물이 올라올 때까지 두들겨 맞는 판이었다.
굶주린 산자들 때문에 더욱 비참해지는 것은 죽은 동지들의 시신이었다. 감방장은 사람이 죽어도 그 몫의 밥을 더 받아먹으려고 그 사실을 즉시 신고하지 않았다. 그냥 아프다 하고는 시체를 2~3일씩 감방 한쪽 구석에 놔두는 게 보통이었다. 죽은 동지의 몸이 싸늘하게 식어감에 따라 몸속에 있던 이들이 일제히 기어 나와 동지들의 얼굴 위에 와글와글 대곤 했다. 맘대로 제 몸도 긁지 못하는 우리가 부릅뜬 채 숨을 거둔 그들의 눈을 감겨줄 수나 있었겠는가. 그러한 고통 속에서 2년을 지냈다. 내가 어찌하여 죽지 않았는지 지금 생각해도 꿈만 같다. 그 후 7년형이 확정됨에 따라 나는 대구형무소로 넘겨졌다가 54년 서울 마포형무소로 이감 가게 되었다.
'역사 > 보도연맹,형무소재소자 학살사건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한국전쟁 당시 보도연맹 처형집행자의 양심고백 (0) | 2012.02.07 |
---|---|
[스크랩] 현대사 공부를 하게된이유. (0) | 2012.02.07 |
[스크랩] 10/27 진화위 국제 심포지엄 (0) | 2012.02.07 |
[스크랩] 민간인학살 문제 왜, 어떻게 해결되어야 하나 (0) | 2012.02.07 |
[스크랩] 민간인학살 문제 왜, 어떻게 해결되어야 하나 (0) | 2012.02.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