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한국전쟁사 (1)
-도둑 같이 온 해방, 그러나 해방은 16일 하루뿐이었다-
그러나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이 아신다. 그 때가 언제 올는지 모르니 조심해서 항상 깨어 있어라 (중략) 늘 깨어 있으라,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또한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마르코 복음 13장 32절~37절-
1.8월 15일... 누구도 준비하지 않았고, 아무 것도 준비 된 게 없었다. 한국전쟁의 가장 가까운 근원 물줄기는 바로 8.15해방에서부터 시작된다. 함 석헌은 ‘해방이 도둑 같이 왔다’고 했고, 박 헌영의 어투를 빌면 ‘아닌 밤중에 찰시루떡 받은 격’이었다. 당시 조선반도에 있었던 대부분의 지식층들은 일제가 패망의 기로에 서있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육당과 춘원의 변절은 당시 조선 지식층이 얼마나 세계정세에 눈이 어두웠는가를 상징한다.
아울러 우리의 힘이 아닌 일의 갑작스러운(?) 몰락에 기인한 정말로 도둑같이 온 해방은 결국 민족의 분열로 이어졌고 분열은 다시 국토의 분단으로, 분단은 결국 동족상잔의 한국전쟁으로 이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난 반세기동안 해방공간에서 어떤 세력들이 어떠한 분포로 생성, 발전, 소멸 되었는지를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90년대 중반까지 한국현대사의 서술비율은 전체 중 고등 국사교과서의 10%도 되지 않았으며 특히 한국전쟁부분은 2-3페이지에 불과한 실정이다. 더구나 그 한국전쟁의 기술조차도 매우 피상적 서술에 그치고 있다.
이는 대부분의 서구 선진 국가들의 현대사 서술과는 매우 판이한 양상이다. 그러나 이러한 양상은 다분히 정치적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지난 수십 년간 이 땅의 주류지배세력으로부터 강요 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주류세력들은 최근 10년간 급격하게 세를 잃었다.
이제 역사는 지배하는 자의 기록만이 아닌 때론 진실이 숨쉬는 공간으로도 존재하기 시작했다. 이제 우리는 다분히 단선적이고 특정 세력이 독점해온 한국전쟁사의 해석에서 벗어나 좀 더 사실에 근거한 한국 전쟁사의 영역을 탐구하려 한다.
그 첫 단계로 해방이후 이 땅에는 어떠한 정치세력들이 존재하고 있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해방 이후 한국전쟁에 이르는 기간동안 한반도에 존재했던 무수한 정치세력들의 스펙트럼을 살펴보지 않고는 한국전쟁의 기원을 캐기란 사실상 불가능 하다.
당시 해방공간을 대표하는 대표적인 정치세력들을 살펴보자.
1-1. 임시정부 일제 식민시기, 우리는 자치권조차 없었기 때문에 이시기의 정치활동은 독립운동이나 민족해방운동의 이름으로 이뤄질 수밖에 없었다. 그 첫 산물인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말 그대로 ‘임시’정부였다. 이 동휘 등 좌파에서부터 이 회영, 김 규식, 여 운형 등의 중도파와 김 구, 안 창호, 이 승만 등의 우파세력이 총망라된 다양한 정치세력의 집합체였지만, 22년 국민대표자 회의이후, 분열에 분열을 거듭하여 일개 우파 정파로 전락한다. 이후 백범을 중심으로 우파를 대변하는 정치세력으로 연명하다가 이후 중국국민당의 지원으로 중도좌파인 민족혁명당 계열이 임시정부에 합류하여 중국 내에서는 우파와 중도 좌 우파를 합친 거대정치세력이 되었으나, 국내 우파와 미주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세력을 포괄하는 조직이 되지는 못했다.
당시 CIA의 전신인 OSS의 보고서에는 임정의 분열상과 그 지도층의 수권능력에 대한 회의와 불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임시정부는 장 개석의 강력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끝내 미국정부로부터 인정받지 못했는데, 이러한 원인에는 미국이건 중국이건 독립운동을 하겠다고 모여든 인사들이 실질적인 독립운동보다는 내부의 노선갈등에 더 치중했었다는 뼈아픈 지적을 가능케 한다.
임시정부는 도둑같이 찾아온 해방에 대해서 아무것도 제대로 준비한 게 없었다. 중국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연합국국가로부터 제대로 된 국가대접을 받지 못했다는 냉엄한 사실은 임정정부 30년의 초라한 외교 성적표를 그대로 보여준다. 임정이 국제적으로 대표성을 인정받았다면, 우리의 해방전후사는 분명 다르게 전개되었을 것이다. 불행히도 한국 독립운동사는 그 장대한 투쟁과 엄청난 피를 흘렸음에도 불구하고, 좌우를 불문하고 자주 내부갈등과 서로간의 대립이 일제에 대한 투쟁보다 우선했던 적이 많았으며, 이러한 양상들은 한반도의 운명을 좌우했던 강대국으로부터 그 투쟁만큼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고 해방이후에도 내내 약점으로 작용했다.
독립투쟁세력간의 대립과 갈등과 분열양상이 후일 해방후의 분단과정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실증적 연구가 꼭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패전국 오스트리아의 현명한 전후 처신사례를 생각하면 우리의 독립투쟁사는 좌우모두가 이 부분에서 대해서 혹독한 비판을 받아 마땅한 책임이 있다. 1-2. 이승만 우파의 또 다른 축인 이승만은 30년대 후반까지 독립운동보다는 기독교선교에 더 치중하고 있었으며, 그가 임시정부의 대통령이 되었던 것은 윌슨대통령이 프린스턴 총장시절 이승만이 박사학위를 받았다는 점이 작용했다. 당시 임정은 외교활동을 통해 독립을 달성 하고자 했고, 그 주된 목표는 민족자결주의를 선포한 미국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자주 독단적인 행동으로 임정과 마찰을 빚었고, 특히 미국에 위임통치를 청원하면서임정의 탄핵을 받고 결별한다. 이후 그는 미국에서 계속 활동하지만, 도산 안 창호와 심각하게 대립했으며, 이 때문에 미국교포사회는 분열되어 있었다. 이러한 극심한 분열상은 미국이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는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한다. 미국에서 이승만은 독립운동보다는 자신의 영향력 강화에 더 치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1-3.한국민주당 식민지 우익 정치세력을 대표하는 또 다른 세력은 국내파의 김 성수 계열이다. 식민지 시절, 지주, 상공인등 자본가를 대표하는 이들은 김 성수를 후견인으로 송 진우 ,장 덕수 , 백 관수 등이 주축이 되어 국내에서 세력을 형성해왔고, 해방이후 한국 민주당을 창당한다. 그러나, 김 성수는 정치전면에 나서지 않고 배후에서 주로 활동하면서 특정 종교 세력과 결탁하지 않았지만, 이들은 국내에서 기반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 일제와 결탁하여 친일행위를 하지 않은 자들이 없었고, 일제와 물적 토대를 공유했던 관계로 그 한계가 매우 뚜렷했다.
1-4.국내 공산주의자들 흔히 박 헌영으로 대표되는 국내파 공산주의자들 역시 매우 복잡한 파벌을 형성하고 있었다. 박 헌영은 25년 조선공산당이 처음 창립될 때에는 여러 파벌중 하나인 화요회의 일원이었으며, 25년 제1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모스크바로 탈출하여 그곳에서 공산청년대학을 수료했고, 이후 상해에서 공산주의 활동을 전개한다. 그는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기 위해 국내로 돌아왔다가 33년 다시 체포되었고 39년 출옥하여 경성콤그룹을 형성하여 지속적으로 지하투쟁을 계속 하다가 해방직후 조선공산당을 재건하여 책임자가 된다. 박 헌영은 공산당 초기부터 활동한 인물이었고, 30년대 후반이후 일제의 탄압이 극심해지면서 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훼절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끝까지 전향하지 않고 공산주의 운동을 계속했다. 30년대 후반이후 조선에서의 독립투쟁이 오직 좌익에 의해서 이어졌다는 해석이 나오는 이유는 이러한데서 기인한다. 동시에 대한민국 국정교과서의 독립운동 기술이 30년대 후반이후 굉장히 허술해지는 이유 또한 거기에 있다. 그러나 그는 오랜 지하활동과 투옥생활로 인해 정치활동 경험이 부족 했을 뿐 아니라, 다른 정치세력과의 연계가 부족했다. 후일 해방공간에서의 이러한 미숙한 점들은 그대로 남로당의 실책과 연결된다.
1-5.항일 무장세력 김일성으로 대표되는 항일 무장세력 역시 혹독한 일제의 탄압을 받았기 때문에 국내파 공산주의 계열과 마찬가지의 약점을 가지고 있었으나, 김 일성 계열은 코민테른에서 민족해방운동을 위해서는 공산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의 연합이 필요하다는 정책을 내놓은 후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기 때문에 국내파공산주의자들보다는 다소 더 유연한 자세를 구사했다. 김일성은 그의 가계를 살펴봐도 알 수 있듯이 다분히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했던 독립운동단체에서 활동을 시작했고, 이후 민족주의는 그의 공산주의 사상의 바탕이 된다.
현재 북한의 통치이념이 공산주의 라기보다는 다분히 ‘주체사상’과 ‘반미이데올로기’라는 강한 민족주의적 경향을 갖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이외에도 모 택동의 중국공산당과 궤를 같이하던 연안계파가 있었다. 이 들 대부분이 항일전선의 최전선에서 싸웠으며 사실상 우익에 의한 무장 독립투쟁이 사라진 30년대 후반의 대부분의 항일 무장투쟁은 이들 만주 지역 내 공산당 항일 무장 세력에 의해서 주도되었다.
1-6. 여 운형으로 대표되는 중도파 위와 같은 좌우익 세력 외에도 중도좌파로 구분되는 여 운형은 식민 시기부터 주목받는 정치가였다. 청년시절 공산주의 운동에 참여했지만 30년대 이후부터 중도 노선을 걸었고, 국내에서는 사실상 유일하게 일제의 패망을 예감하고 독립을 실질적으로 준비하고 있었다. 44년 그는 조선건국동맹을 결성했고, 이들 세력 대부분이 해방이후 조선 건국 준비위원회의 주축이 된다. 건준은 좌우익을 총망라한 조직이었으며, 여 운형은 완전한 독립과 자주국가 건설이 이뤄지기 전까지는 정치적 이해관계를 뒤로하고 모든 좌우익 세력이 연합할 것을 주장한다. 그의 주장은 사실상 해방공간에서 가장 합리적이며 이성적인 논리였다. 그는 해방공간 내내 한번도 좌우에 치우치지 않고 정도를 걸었지만, 그의 개인적인 명성에 비해서 조직적인 힘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그의 암살 이후 해방공간의 중도파들은 급속히 세를 잃었고, 끝내 분단과 한국전쟁의 비극으로 치닫고 만다. 동시에 이들 중도파의 존재는 남 과 북 모두에게 매우 껄끄러운 존재가 되고 말았고, 그 후 남과 북의 권력은 이들을 사실상 역사에서 삭제하고 만다. 한국전쟁의 가장 큰 비극중 하나는 남과 북 그 어느 쪽에서도 이들 중도파들이 숨 쉴 공간을 만들어주지 못했다는 점이 아닐까?
2. 극좌와 극우는 통한다? 해방공간 정치스펙트럼의 다양성 당시 한반도의 조선민족에게서 순수한 계급적 이해만을 대변하는 좌익이나 우익은 존재하지 않았다. 당시 해방공간을 대표하는 좌우익 세력 모두가 강력한 민족주의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특질이 후일 좌에서 우로,그 반대의 경우로 쉽게 전향하는 양태를 양산했다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년대 조선공산당 책임비서로 활동하다 전향한 인물이 50년대 죽산 조 봉암을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하면서 차라리 이승만을 지지했던 것이나, 대표적인 일제의 극우교육을 받았던 박 정희가 극좌 남로당에 입당했던 것들 역시도 당시의 이념적 스펙트럼이 오늘날의 기준으로 봐서는 쉽게 오류를 범하기 쉬운 요소들을 내포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위에 언급한 대표적인 정치세력들 외에도 당시 해방공간에는 무수한 정치스펙트럼이 존재하고 있었다. 임정과 이승만 사이를 오가다 49년 이후 한국 민주당에 합류한 신 익희, 광복군을 주도하다가 해방직후 민족청년단을 조직한 이 범석, 대표적 우익인사지만, 이승만과 함께 할 수 없다며 북한에서 활동한 이 극로, 납북된 뒤, 북한에서 활동한 조 소앙이 있었다. 좌익에서도 김 일성과 박 헌영 모두를 비판하면서 남한에서 조용히 여생을 마친 제2차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김 철수와 박 헌영을 비판하면서 전향하여 초대 대한민국 내각의 장관과 진보당 당수를 역임했던 조 봉암의 경우를 보더라도 당시의 좌우익 스펙트럼의 변화무쌍함과 그 다양함은 절대로 지금의 획일적인 시각으로는 해석과 분석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 우리는 해방공간을 들여다봐야 할 것이다. 우리가 해방공간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사람들의 모습과 생각이 지금의 우리와는 다분히 달랐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서 접근해야 한다.
여기에는 자세히 언급하지 않았지만, 이외에도 무정부주의 그룹과 극우계열까지 포함하면 해방공간은 그야말로 이념의 뷔페(?)식당이었던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이들 모두를 획일적인 기준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빨갱이 혹은 반동분자라고 불러야만 했었다. 과연 그런 편협한 시각으로 해방이후의 저 다양했던 양상들을 제대로 볼 수 있을까?
그런데, 이들 모두가 해방공간에서 일시에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한반도에는 불행한 기운이 돌기 시작한다. 아무도 제대로 준비하지 않았고, 무엇 하나 제대로 준비된 게 없는 상황에서 모두가 손만 뻗으면 권력을 쥘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 결과는 예전 일제의 식민지배가 도리어 그리워질 만큼의 격심한 혼란과 대립의 시작이었고, 오죽하면 중도파의 안 재홍이 진정한 해방은 8월16일 딱 하루뿐이었다라고 푸념을 하고 말았을까?
정말 우리 민족 전체가 해방을 순수하게 즐겼던 날은 8월 16일 딱 하루뿐이었다. (서프라이즈에 게재한 이정환의 한국전쟁사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