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자유주의자
김 동 춘(성공회대, 사회학)
1.
1950년대 후반 전쟁의 폐허더미 위에서 소설가 박종화는 다음과 같이 북한군이 남한을 점령하였던 공산치하의 ‘지옥’을 벗어나 ‘다시 찾은’ 자유의 기쁨을 노래하였다.
.......
자유대한의 푸른 하늘엔
학두루미가 펄펄 나르네
춤을 추네
얼마나 그리웠던 자유였더냐
우리 지금 자유 찾았네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자유를 갖었네
.......
이 시가 쓰여진 50년대는 전쟁 자체를 직접적으로 체험할 수 없는 신체 허약자, 병역 기피자들만이 살아남았서 도시를 방황하였고, 살아남은 사람들도 전사자들 이상으로 전쟁의 상처로 신음하던 때이다. 정치적으로는 “입으로는 미사여구를 늘어 놓으면서도 행동면에서는 폭력단의 보스로서 몽둥이를 휘두르며 동포들을 폭력으로 억누르던” 이승만 독재정치의 말기적 증상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던 시기였다. 인구의 70%에 달하던 농민들이 고리채에 시달리고, 30만명의 절량농가가 보리고개로 신음하며, 수 많은 고학생들이 피를 팔아 힘겨운 생계와 학업을 이어가고 있던 때이다. 도시의 청년들 사이에는 전쟁의 잿더미 위에서 실존주의에 탐닉하여 극단적일 절망, 허무주의에 빠졌거나 구미문화의 쓰레기를 주어 섬기는 넋나간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경향신문이 강제로 페간되고 국민의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국가보안법의 개악안이 통과되었다. 이러한 조건에서 민주주의 혹은 자유라는 말은 정치가의 레토릭이거나 책 속의 현실과 실제 현실을 착각하면서 살아가는 몽상자의 잠고대와 같은 것이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처참한 가난과 고통의 시대, 우익이 아니면 좌익으로 지목되는 단세포적 사회심리의 상황, 영어 몇 마디를 할 줄 아는 것이 자랑거리가 되는 사회, ‘우리의 맹서’와 같은 전체주의적 국민구호가 암송되는 사회에서 도대체 ‘자유’의 기쁨을 노래하며 그러한 상황을 학두루미가 펄펄나른다고 해석한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어떻게 절망과 허무의 땅, 실향의 고통을 삭힐 수 없는 낮선 땅이 유토피아가 될 수 있겠는가?
만약 그러한 상황을 ‘자유’라고 한다면 그것은 사회 혹은 타인으로부터 분리되고, 가족과 고향에서 분리된 자의 슬프도록 고독한 비극적인 ‘자유’였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바로 박종화가 외치고 있듯이 지옥과 같은 “공산치하에서 벗어나” 자유 대한민국에 살아남게 되었다는 생존자의 안도의 한숨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 그것은 자유에 대한 본체론적 가치, 즉 인간의 정신과 활동의 기초인 자유를 지키고 그것을 억압하는 모든 형태의 국가권력, 관습, 편견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의지 혹은 신념과는 거리가 멀고, 스스로가 물질적 욕망, 맹목적인 반공주의, 정신나간 친미 사대주의의 노예가 되어버린 추한 모습을 포장하기 위한 수사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승만 정권 말기의 이승만 숭배나 4.19 혁명 당시에 이들이 보여주었던 모습을 통해 우리는 이러한 ‘자유’의 이념은 자유를 억압하는 세력과의 투쟁을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를 억압하고 가부장적 권위로 내리누르는 가짜 자유주의 세력의 편을 들고, 국가로부터 ‘개인’을 분리시키자고 주장하기 보다는 개인은 국가의 일부라고 강조하는 논리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실제 지금까지 한국에서의 자유주의는 국가의 공식 지도 이념인 획일주의적인 반공주의의 다른 말이었다. 즉 현대 한국에서 자유주의(liberalism)는 절대주의 억압과 봉건적 미망에 대한 투쟁과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개인의 해방(liberation)의 이념이었다기 보다는 공산주의와 집산주의로부터의 ‘국가’의 ‘해방’의 이념, 국가대 국가간의 대립 질서 속에서 적대국가에 대한 투쟁과 증오의 이념이었다. 반공 획일주의와 자유주의는 그 자체로서 형용 모순인 셈이다.
그런데 한국의 반공주의는 ‘자유’를 지키자는 이념이 아니라 친일경력을 은폐하기 위한 자기정당화의 논리였다. 해방 직후 남북한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전개된 친일파 처단의 움직임과 그들이 일제에 협력하여 모은 재산을 환수하자는 분위기는 이들의 위기의식과 공포심을 가중시켰다. 이들에게 자유는 곧 재산권의 보호, 그리고 자신의 재산권을 보호해 줄 수 있는 체제에 대한 무조건적인 옹호를 의미하였다. 국가주의로서의 반공주의는 곧 일제 하에서의 군국주의에 투항하였던 지식인들의 정신구조를 연장한 것이다. 일제하에서 개량주의적인 민족운동에 종사하다 급기야는 황국신민으로서의 여성계몽에 앞장선 ‘자유주의자’ 모윤숙이 6.25가 터지자 “국군은 죽어서도 말한다”라는 애국 시를 쓰면서 대한민국 건국과 수호의 일등 공로자가 된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50년대 ‘자유’ 개념의 허구성은 바로 ‘반공’ 개념의 불구성에서 기인한다. 송건호는 한국 반공주의를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우리나라 반공은 가짭니다. 친일파들은 대세에 쫓은 거예요. 원래 친일파와 반공은 다른 개념이지만, 실제로 이들은 똑같은 사람들이에요. 친일파들이 반공을 한 겁니다. 대체로 일체시대에는 친 미국, 친 이승만으로 반공투사가 되었죠. 지나친 말인지는 몰라도 한국의 반공은 진짜 반공은 아니에요.
그가 말하는 진짜 반공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아마 그것은 긍정적인 이념으로서의 자유주의를 말하는 것일 게다. 그러나 가짜 반공은 이념이 아니라 편의의 논리, 처세의 논리, 상황의 논리, 사대주의의 논리라는 말일 것이다. 즉 현대 한국에서 ‘자유’의 논리는 것은 자유를 제약하는 정치, 경제, 사회 상황에 대한 비판과 저항의 논리가 아니라 친일의 경력을 은폐하고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동기 위에서 그러한 자신의 태도를 가장 강력하게 비판하였던 좌파들에게 대항하기 위한 논리라는 말이다. 따라서 반드시 한 몸을 이룰 필요가 없는 자유와 반공, 자유와 친미가 언제나 한국에서는 한 몸으로 존재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조건 때문일 것이다. 서구에서 근대의 여명기에 피로서 쟁취되었던 자유의 개념은 냉전의 소용돌이 중심에 서 있던 1950년대 한반도에서는 이처럼 누더기의 몰골로 나타났다. 고은이 말하는 것처럼 일종의 독재체제인 전쟁의 상황에서 자유라는 것을 그 얼마나 사치스러운 개념이었는가? 그것은 라스키가 말한 바 자유의 비결인 ‘저항하는 용기’와는 거리가 멀었으며, 아마 살아남은 자들의 수치심과 공포가 뒤섞인 신음소리였는지도 모른다.
2.
물론 서구의 역사에서도 자유가 언제나 절대권력과 봉건적 족쇄로부터의 해방을 지향하는 전복적인 이데올로기로 기능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독일의 자유주의자들은 파시즘에 투항하였으며, 정치적 자유를 포기하고 ‘경제의 자유’만을 구가하였다. 미국의 자유주의자들은 귀족세력이나 봉건세력과 심각한 투쟁해 본 역사가 없다. 특히 냉전질서가 정착되는 50년대 미국에서의 자유주의도 한국과 동일한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밀스(Mills)는 “전후의 자유주의는 정치철학을 지칭하는 것이었다기 보다는 마르크스주의를 공격하는 무기로서 사용되었으며, 하나의 레토릭이었다”고 말한바 있다. 결국 냉전 하에서 미국의 자유주의란 프리드만(Friedman)이 주장하는 바 곧 재산권과 자유무역을 옹호하고, 평등주의나 국가개입주의를 배격하는 사상이었다. 재산권의 배타적인 옹호가 곧 무산자에 대한 지배를 정당화하는 논리라고 본다면, 이러한 자유주의는 곧 “갖는 수사를 통해 자신의 비판자로부터 가진 자의 편중된 권력을 보호하는” 이데올로기일 것이다. 이 경우 자유란 곧 공산주의 및 그들과 동조하고 있다고 간주되는 사람들에 대한 인권의 제약, 자유의 제약을 정당화하는 논리가 된다. 자유주의는 독재와 결합한다. 이것은 자유주의의 가장 타락한 형태이다.
마르크스주의가 그러하듯이 자유주의에 있어서도 하나의 자유주의는 존재하지 않으며 홉하우스(Hobbhouse)식의 노동자의 권리를 인정하자는 사회민주주의적인 자유주의에서 자유로운 기업활동 자본주의적 생산이 곧 자유라는 현존사회주의 붕괴 이후 동구에서 사용된 자유주의, 그리고 냉전하 한국과 미국에서처럼 공산주의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자본의 독재, 군사통치도 필요하다는 ‘냉전 자유주의’도 존재한다. 자유의 이념, 혹은 자유의 이념을 견지한 자유주의자들이 어떻게 처신하고, 어떠한 사고를 견지하는가 하는 문제는 그들이 처한 역사적 조건, 경제적 기반, 정치적 역학관계에 따라 상이해질 것이다. 대체로 자유의 이념은 언제나 보수의 이념, 혹은 전통주의와 대립항 속에서 존재하며, 동시에 자유의 이념을 부정한 진보의 이념 즉 사회주의 논리와의 대결의 양상과 대결의 시점에 따라 ‘자유’와 자유주의는 다양한 내용을 지니게 될 것이다. 즉 자유주의는 가족, 국가라는 공동체의 가치와의 대면의 과정, 그리고 특정한 경제제도의 운영의 과정, 그리고 국제정치적으로는 사회주의라는 새로운 정치체의 등장 및 그것과의 긴장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구체화해내게 된다.
그래서 자유주의자들은 때로는 군주제, 민주주의, 자유무역, 노동조합 조직, 국가의 경제개입, 복지국가 등에 대해 찬성하기도 했고, 또 반대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공동체를 인정하지 않는 점에 있어서는 공통성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사적(私的)인 것을 공적(公的)인 것과 분리하여, 자신과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상과의 담을 치고서 자신의 내면의 영역을 지키려 하였다. 양심의 자유, 생각의 자유와 그것에 기초한 개인의 자발적인 선택은 자유주의자들이 양보할 수 없는 최후의 성역이었다.
조선조의 붕괴 이후 한국에서 자유주의를 말할 때, 식민지 지배, 가족과 국가라는 이중의 억압으로부터 자유주의자들이 어떻게 벗어나려 하였는가가 가장 큰 쟁점이 된다. 한국의 자유주의자들은 출발부터 식민지 권력, 가족과 국가라는 집합체로부터 스스로를 분리시키지 않고서는 자유의 가치를 확보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일제 식민지 지배체제는 자유주의가 안고 있는 이중의 과제를 분열시켰다. 즉 식민지 국가는 유교적인 가족, 친족, 농촌 공동체를 해체시킴으로써 ‘자유’의 기반을 열어주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권리, 그것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권리 등의 자유주의적인 가치는 철처하게 억압하였기 때문이다. 일제는 아직 물질적 정신적 기반을 갖추지 못한 부르주와를 대신하여 조선의 봉건세력인 양반 관료들을 굴복시키는데 성공하였다. 결국 한국의 전통적인 왕조질서나 양반질서는 일제에 의해 무참하게 뭉개졌는데, 그것은 그들이 의도한 것은 아니었으나 우리의 근대화와 민주화에 매우 긍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동시에 자유주의의 적을 가시권에서 제거하는 효과를 가져왔고, 막 태생하는 자유주의의 균형추를 상실하도록 만드는 역할을 하였다. 즉 일제는 사상과 양심의 자유, 정치적 자유, 결사의 자유는 엄하게 제한하였으나, 양반 지주세력의 물적 기반은 약화시킴으로써 경제적 자유의 길을 활짝 열어 놓았다. 국가에 순응하는 범위에서 기업활동은 허용한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것은 ‘욕망’의 자유였으며, 벙어리 상태에서의 자유였다.
분단과 냉전질서 하에서 ‘자유’에 대한 최대의 적은 국가주의, 반공주의였다. 그것은 일제 식민지 지배의 흔적을 강하게 갖고 있는 국시라는 최고, 최상의 지배 이데올로기로 자리잡았으며, 국가보안법으로 법제화된 강제력이었다. 반공주의와 그 물리적인 실체인 국가보안법은 자유의 가장 일차적인 조건인 양심의 자유, 사상의 자유를 근본적으로 제약하였다. 대중들의 일상의 경험들은 자유롭게 표현되지 못했고, 특정한 해석만이 정신, 문화의 세계를 독점하였다. 자유로운 선거에 의해 국민의 대표를 선출할 수 있다는 자유민주주의의 이념은 실제로는 좌익은 피선거권을 가질 수 없다는 근본적인 테두리 내에서만 적용되었다. 이어령에 말한 것처럼 “한국의 작가들은 옛날이나 오늘이나 원고지의 백지를 대할 때 마다 총검을 든 검열자의 어두운 그림자를 느껴야 했다”. 사회과학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회과학자들은 한국전쟁이 끝난 후 10년 이상 한국사회를 본격적인 분석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다. 그후에도 오랫동안 허구를 말하는 자유를 가진 소설가들의 은유와 비유가 사회과학자들의 현실분석을 대신하였다. 80년대에 와서도 대다수의 사회과학자들은 국가 대신에 ‘정부’를, 계급 대신에 ‘서민’, ‘국민’ 그리고 ‘민중’이라는 개념을 사용했다.
자유주의는 국가의 사상통제에 의해서만 제약된 것은 아니었다. 경제성장을 향한 국민적인 동원체제는 자유가 숨쉴 수 있는 공간을 허용해 주지 않았다. 지난날 자본주의 진영에서 ‘반자유주의’로서 국가주의는 언제나 경제성장주의와 궤도를 같이한 예가 많다. 우리나라의 경우 박정희가 “자립경제의 과업을 달성하지 못하고서는 우리가 부르짖는 민족의 자주, 자립과 국가의 독립, 개인의 자유, 자유민주주라고 하는 것은 전부 공염불에 지나지 않는다”고 단언한 바 있는데, 그것은 바로 군사 독재의 철학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유주의’가 설 수 있는 기반은 극히 협소하였다. “나라가 망했는데, 자유는 무슨 자유인가” 하는 일제시대의 저항운동가들의 논리는 “나라가 빈곤에 허덕이고 있는데 자유는 무슨 자유인가” 하는 국가주도 성장주의와 일맥 상통하는 점이 있다. 민족공동체와 국가공동체가 개인의 운명을 좌우하는 상황 속에서 개인, 개성, 양심, 자율의 가치가 설 자리는 거의 없었으며, 이 경우 ‘자유’는 차라리 사치였다.
그러나 분단된 국가는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였고, ‘정치적 자유’를 억제하는 대신 과거 일제 하에서 그러했듯이 경제, 종교, 문화의 영역에서 자유를 허용하였다. 따라서 경제적 자유와 종교의 자유는 무한대로 확장되었다. 돈버는 일이라면 무슨 짓이든지 허용되었으며, 교회를 건설하고 선교활동을 하는 것은 완전한 자유의 영역에 속했다. 경제의 자유와 종교의 자유가 투쟁에 의해서가 아니라 저거 주어진 것이었던 만큼, 기업가와 기독교인들이 자유의 가치와 의미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해 볼 겨를이 없었다. “한국의 많은 시민들이 자유주의가 그렇게 우월한 까닭을 잘 아는 것은 아니다. ..... 스스로를 자유주의자로 여기는 시민들의 의견을 살펴보면 자유주의적 빛깔보다 전체주의의 빛깔이 오히려 짙은 경우도 흔하다”는 복거일의 한탄은 바로 경제활동의 자유와 종교의 자유가 한국 부르주아의 투쟁의 산물이 아니었다는 우리 근대사의 시원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치경제 상황이 한국 자유주의의 기반을 이루었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자유주의를 지지할 수 있는 주체의 결여, 중간층의 결여, 도시 문화의 결여에 기인하는 것이다. 도시는 원래 억압과 권위와 관습, 미신등으로 미만된 봉건의 유습(遺習)과 농촌 공동체의 질곡으로부터 개인을 해방시켜주는 문명과 진보의 공간이지만 동시에 자신의 욕망과 생각을 주위의 눈치를 보지 않고 마음껏 표출할 수 있는 해방구이기도 하다. 도시의 세련됨은 바로 문명과 진보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도시는 자유의 산실로서보다는 통치의 중심, 쓰레기 적하장으로서의 역할을 더 많이 해 왔다. 한국의 근대 도시는 식민통치의 중심이었으며 그에 기생하였던 계층의 물적인 근거지였다. 해방과 전쟁 이후 도시는 피난자, 범죄자들의 해방의 공간이었고, 도시는 전쟁으로 가족을 잃은 상처받은 사람들의 허무와 방황의 공간이었지, 자유를 향한 건설의 공간으로서는 별로 기능하지 못하였다. 도피자들, 가족을 잃은 자들로 구성된 50년대 한국의 도시인들은 가부장주의와 권위주의로부터는 점점 벗어나기 시작했으나 그것에 용감하게 맞서서 새로운 윤리나 규범을 세울 수 있는 한국의 도시문화를 건설할 수 있는 정신적 여유를 갖지 못했다. 오히려 도시의 청년들이 친족 가족의 어른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마음껏 거리를 방황할 수 있는 ‘자유’를 가졌다는 점에서, 그리고 미군들이 남기고 간 영어 몇 마디를 중얼거리면서,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을 읊조릴 수 있었던 공간이었다는 한도 내에서만 진보의 편에 서 있었다.
즉 한국의 도시에서는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갖지 못한 신민(臣民)으로서의 개인, 경제와 종교의 영역에서는 마치 국가나 공동체가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는 ‘이기적이고 무도덕적인 개인’이 공존하였다. 자유에 대한 참된 애착은 그것이 가져다 줄 개인적이고 물질적인 이득에 대한 전망에서 유래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에게 자유는 바로 적나라한 이기심의 발동, 욕망의 추구와 동일시 되었다. 여기서 자유와 굴종은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것이고, 자유는 무책임성과 공존하였다. 정비석(鄭飛石)의 ‘자유부인’은 봉건적인 가정주부의 굴레에서 ‘자유’를 추구하는데는 성공하였지만, 그러한 자유를 지킬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새로운 인간형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50년대 한국에서 나타났던 실존주의와 허무주의, 친미 사대주의는 바로 ‘원자론적인 자유’의 추구, 혹은 신민(臣民)의 윤리와 공존하는 한국식 자유주의의 모습이었다.
반면에 한국에서 도시가 진정한 자유의 산실, 시민이 숨쉴 수 있는 공간으로서 역할을 하였다면 50년대 말 자유당에 반대하는 ‘정치적 공중의 형성’과 4.19에서 터져나온 저항의 물결이었을 것이다. 4.19 혁명은 ‘거짓 자유’를 ‘진정한 자유’로, ‘욕망의 추구’로서의 자유를 ‘민주주의에 대한 책임’으로, ‘반공자유주의’를 ‘자유민주주의로’ 변화시키려는 최초의 시도였다. 4.19 혁명은 억압을 자유라고 강변해온 기성세대와 한국의 지배층에 대항하여 ‘경험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청년들의 외침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한국에서는 과거와는 모습을 달리하는 진정한 자유주의자들이 탄생하게 된다. 5.16 군사 구테타와 지방자치제도의 폐지, 국가주도의 성장주의 전략으로 자유의 공간은 또 다시 축소되었지만, ‘자유’를 외쳤던 학생들은 이후 새로운 자유주의의 집단으로 살아남게 된다.
3.
물론 근현대 한국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존재해왔던 반공자유주의자, 민족 허무주의자, 얼치기 근대화론자들을 자유주의자가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은 집단이나 공동체보다는 개인을 중시하였으며,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반대하면서 시장경제와 자본주의를 구세주처렴 여겼고, 일당독재 체제에 회의하면서 의회 민주주의를 지지했다는 점에서는 자유주의자이다. 그러나 그들은 언론, 출판, 사상과 양심의 자유가 ‘반공’을 위해서라면 포기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으며, 시장경제를 옹호하지만 독점 자본의 지배에 문제제기 하지 않았으며, 자본과 권력이 유착하여 어떻게 다수의 ‘선택의 자유’를 제약하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전혀 고민하지도 않았다는 점에서 ‘현존 자본주의 사회’에서 존재할 수 있는 자유주의자의 유형 중에서 가장 타락한 자유주의자들에 속할 것이다. 그것은 한국의 자유주의가 ‘자유’의 정신으로 충만된 자유주의가 아니라 ‘상처받은 자유주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 근현대 한국에서는 이러한 타락한 자유주의자들만이 존재하였는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이들 기득권을 누린 자유주의자들 이면에는 진실로 자유를 추구하다가 신산(辛酸)을 맛본 존경할만한 자유주의자들이 존재한다. 김우창이 말한 것처럼 “가장 소극적이면서도 가장 많은 사람들이 쉽게 동의할 수 있는 것은 가장 직접적인 의미에서의 정치적 자유”라고 본다면 정치적 자유를 위한 투쟁은 곧 봉건적인 권력, 제국주의 지배체제, 반공주의를 내세운 군사통치와의 투쟁을 요구하였고, 우리는 한국 근현대사의 궤적에서 인간의 정치적 자유를 억압하는 권력에 대항해온 상당수의 자유주의자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일제 식민통치에 맞서서 자주독립을 주창하였던 서재필 등 독립협회의 계몽적 지식인들, 3.1 운동과 이후의 항일학생운동에 가담하였던 청년학생들, 교육 문화운동을 통해 일제에 저항하였던 우파 지식인들이 그에 속한다. 해방 이후에는 이승만 독재나 박정희 군사독재에 맞섰던 개신교 목회자들과 일부 기성 정치가들, 초기 반공주의 필봉에서 점차 반독재의 선봉장으로 나선 [사상계]의 지식인들이 그러한 부류에 속할 것이다.
그리하여 언론, 사상탄압과 전향공작이 기세를 부리던 70년대까지 한국에서는 서구에서라면 자유주의자로 지목될 사람들을 반체제, 반정부 심지어는 용공적인 인사로 만들었고, 무이념, 무사상(無思想)의 자신의 이익만을 쫒아서 행동하는 기회주의자, 출세주의자들을 자유민주주의자로 탈바꿈 시켰다. 함석헌, 장준하 등 남한이 좋아서라기 보다 북한이 싫어서 월남한 일부 기독교 인사들이 바로 반체제인사가 된 자유주의자들이었다. 자유주의자들이 숨쉴 공간을 열어주지 않았던 70년대 남한의 지배질서를 향하여 그들은 가장 용감하게 투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용감하게 투쟁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단순히 철저한 자유주의자였기 때문은 아니었다. 사실 일제 말기 이후 자유주의의 천국인 미국의 문화를 흡수한 지식인이나 기독교 인사 들 중에서 군사통치에 저항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미국에서 배운 자유의 이념은 일제시대에 윤치호가 그러했듯이 유교문화나 봉건질서를 반대하는 논리로서는 역할을 하였으나 우리의 조건에서, 자유를 적극적으로 찾아나가는 이념으로 기능하지는 못했다. 즉 자신이 처한 민족적, 사회적 현실에서부터 출발하지 않는 자유의 이념이 곧 자유의 억압에 대한 투쟁의 무기로 변하지는 않았다. 사상이라는 것은 바로 자신에 대한 성찰이라고 본다면, 배워온 이념이 곧 사상으로 발전되기는 어려웠던 것이다.
70년대 반체제인사가 된 자유주의자들은 기실은 식민지 시기 이래로 민족적 현실에 이미 눈을 떴던 사람들이고, 자유의 실현을 민족의 독립과 견주어 생각해본 경력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즉 일제하에서 민족의 독립을 찾지 않고서 자유를 찾을 수 없는 것이고, 개인이 품위를 지키면서 살기 위해서는 바로 일제의 폭정을 물리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체험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이승만의 거짓 자유주의와 박정희의 유신통치에 저항할 수 있는 내적인 에너지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반면에 민족의 문제를 회피하고 ‘개인’의 자유를 찾으려 했던 사람들은 군사주의와 엄혹한 유신통치에 저항하지 않았다. 즉 이론적으로 자유주의는 공동체 혹은 집단을 우선시하는 민족주의와 양립할 수 없지만, 개인의 운명이 민족과 일체화된 조건에서는 민족을 무시한 자유는 존립할 수 있는 근거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초기 자유주의자였던 김규식이 어떻게 민족주의자로 변하는가하는 사실을 통해서도 바로 한국에서의 자유주의가 어떤 방식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정치적 자유’를 위해 투쟁하지는 않았지만 자유주의의 가장 근본적인 원리인 개별자로서 인간의 개성의 자유와 인격의 자유를 추구하면서 유교적인 가부장적인 문화, 명분과 체면의 도덕률, 가족주의 질서를 근저에서 부정했던 사람들 역시 지나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 해방은 정조의 해방부터 할 것이니 좀더 정조가 문란해지고 다시 정조를 고수하는 자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여성에게 들 씌어진 유교적 규범을 근본적으로 비판한 나혜석과 같은 선각자나 물려받은 재산을 탕진하고 처자를 남보듯이 하면서 오직 시인으로서의 자유로운 삶을 추구했던 김수영 같은 사람들에게서도 이러한 자유주의적 실천의 편린들을 읽을 수 있다. 이들은 정치적 자유를 위해 투쟁하지는 않았지만, 개성과 자유를 제약하는 문화적 굴레를 벗어버리기 위해 투쟁하였으며, 그러한 투쟁은 정치적 투쟁 못지 않게 그들에게 고통을 가져다주었다. 나혜석을 비롯한 일제시기 신여성들의 파란만장한 삶은 바로 한국에서 자유주의자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험난한 것인가를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물론 자신의 양심을 지키는 것도 버거운 상황에서 내면의 울림을 소중하게 여기고, 양심의 자유를 추구한 사람도 있었다. 이들은 평등의 이념으로 개인의 판단의 자유를 제약하는 사회주의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가졌지만, 동시에 자유의 이름으로 반공을 강요하는 거짓 자유민주주의와도 화해할 수 없었다. 우리는 김성칠의 일기에서 이러한 자유주의자의 고뇌를 읽을 수 있다. 그는 자신이 본디 “대한민국의 그리 충성된 백성이 아니었다‘고 고백하면서 ”내 기회주의는 한번도 어느 한편이 승세인가 하고 기웃거리지 아니하였고, 어느 편이 올바른가 하고 마음속으로 따져보기는 하였으나 어느 편에 좇아서도 보다 더 출세하려는 생각은 털 끝만큼도 품어본 일이 없으므로 내 양심에 물어보아도 부끄럽지 아니하였다“고 양심의 판단을 가장 중요시하였다. 즉 남북한이 서로 교차하는 난리통에 양 측에 대해 “애국자임을 억지로 증명해야 하는” 질서에 거부감을 가진 진정한 자유주의자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남북한은 그러한 사람조차도 생존할 수 있는 공간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한국전쟁이 끝났을 때, 북한에서는 물론 남한에서도 자신의 양심과 자기 개인의 판단을 가장 앞세울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살아남지 못했고, 이승만의 폭력을 ’자유대한‘이라고 찬양하는 사람들만이 자유민주주의자로 행세하였다.
그러나 우리의 비극은 타락한 자유주의자들에 비해 내면의 판단을 중시하면서, ‘정치적인 행동’으로 그것을 표현한 양심적 자유주의자들의 수가 너무나 적었다는 사실이며, 초기에 ‘비정치성’을 강조하면서 양심적 자유주의자로 출발한 사람들 중 상당수는 결국 친일, 친미, 친군사독재, 대세추종주의, 인격적 파탄 등으로 특징지워지는 타락한 자유주의자로 변질되었다는 점에 있다. 일제 하 조선의 천재요 선각자였던 춘원 이광수의 말년의 친일행각은 가장 전형적인 예에 속할 것이다. 안창호를 가장 존경하였던 이광수는 안창호를 따라 자치, 실력양성, 민족개조를 표방하는 문화운동을 전개하였고, 그의 문학은 문화운동의 한 수단이었다. 그가 모든 소설에서 자유연애를 주창한 것은 혼인을 가족간의 결합으로 정의하였던 유교적 도덕률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반발이자, 개인을 가족 위에 두는 자유주의의 기본적인 원칙을 중시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탈정치적’ 문화운동은 결국 한국인에게 조그마한 ‘정치적 자유’의 공간도 허용하지 않았던 일제가 표방했던 통치 정책과 합치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정치적 자유를 포기하고 문화적 자유를 추구하였고, 문명인, 개화인을 추구하였으나, 그들은 결국 문화적 자유조차 누리지 못하는 인격파탄자가 되었다.
이들 문화적 자유주의자들이 갖고 있는 공통적인 특징은 50년대의 어떤 외국인이 지적한 것처럼 한국 문화나 역사에 대한 경멸이었다. 한국의 문화에 대한 경멸의 뿌리는 윤치호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조선말기에 고위관리의 아들로 태어나 많은 재산을 물려받았던 조선의 제일가는 부자였다. 그는 일본의 제국주의가 부여한 허구적인 자기의식을 체현한 사람으로서 민족적 아이덴티티가 어떻게 붕괴하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는 미국의 부강한 물질문명을 접하고서 미국이나 서구를 모든 문명이 추구해야할 전형이라고 파악하였으며 강자 중심의 세계관을 갖게 되었다. 그는 결국 힘의 논리에서 우위에 서 있는 일본의 지배 하에서 ‘조선 독립불가능’의 사고를 갖게 되었으며 일본의 내선일체(內鮮一體) 시책에 적극 협력하였다가, 계속 발전하리라고 믿었던 일본이 패망하는 것을 바라보면서 자결을 하게 된다.
윤치호의 일생은 바로 근대 한국의 자유주의자의 비극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근대화 과정에서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의 처지에서 서구와 일본의 보편주의는 곧 자기부정과 자기해체를 강요하게 되고, 그것은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정신적 기둥의 결여를 의미한다. 여기서는 역사적 경험, 문화적 정체성이라는 것이 들어설 자리가 없기 때문에 우월문명의 약소문명에 대한 지배만이 정당화되기에 이른다. 초기 미국의 물질문명에 감복을 하고 그것을 배우기 위해 노력하였던 선각자들이 대체로 이러한 정신적 자기분열의 과정을 겪게 된 것도 ‘보편주의’의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바로 보지 못한 데 기인하고 있다. 자유주의 지향을 가진 선각자들이 사회주의의 이념을 견지한 사람들에 비해 일제 말에 더욱 더 친일화의 길로 나아가게 된 것도 여기에 연유한다고 하겠다. 해방 후 한국사회를 지배한 친미적 지식인의 행로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이점에서 한국의 자유주의자들은 불행한 코스모폴리탄이었다.
결국 경제, 사회, 문화, 사상과 양심의 자유의 존립을 위해 가장 일차적으로 요구되는 ‘정치적 자유’를 위해 투쟁한 자유주의자가 극히 희소하였다는 것이 한국 자유주의자의 비극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일제하에서 자유주의는 민족의 문제와 씨름해야 했고, 분단 이후에는 반공주의 국시(國是)와 씨름해야 했다. 즉 일제하에서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가장 심각하게 제약하는 정치적인 조건은 바로 일제의 파시즘적 지배체제에 있었고, 그것을 제거하지 않고서는 자유의 존립의 근거가 없었다. 한국에서 자유주의, 자유민주주의는 한태연이 주장한 것처럼 언제나 교양과 용기를 가진 지식계급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고, 지식계급의 비판과 반항에 의해서만 유지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제의 파시즘과 해방후의 이념대립과 분단에 지치고 지친 한국의 지식인들에게 이러한 교양과 용기를 기대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자유는 오직 레토릭으로만 남거나 그냥 정치와 절연된 영역에서의 극히 고립된 개인의 정신적 자유로만 남게 되었다. 그러나 여기서도 봉건의 속박으로부터의 문화적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공간이 존재하였는데, 일제하의 자유주의자들의 대부분은 정치적 자유를 향해서 투쟁하기보다는 신앙의 자유, 전통적 속박으로부터의 해방, 자유주의 신문화의 향유 등 문화적 자유를 주창하면서 정치적으로는 결국 일제의 황민화 정책, 억압정책을 용인하는 친일의 길을 걷게 된다.
4.
한국 자유주의의 역사는 바로 한국의 사상적 불구성의 역사이다. 앞서도 살펴본 것처럼 한국전쟁 후에 살아남은 한국의 자유주의자들은 사실상 정신적 불구자들이었다. 전쟁이 터지나 미군이 올 것을 학수고대하면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미국의 아버지시오, 이승만의 아버지시오, 트루먼의 아버지시오, 인류의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미국사람과 한국사람은 한 아버지의 아들이시오 한 형제인 고로 형제가 난을 당할 때 형제가 와서 구원합니다”라고 보았던 남한 지식인의 정신 상황은 이러한 불구성을 잘 드러내 보여준다. 자유라는 보편이념은 한국과 미국을 한 몸으로 하는 ‘자유 세계’의 지도이념이었으며, 그것은 곧 공산주의로부터 자신과 가족을 보호해 주는 ‘방공호’요 안식처였다. 그들은 자유를 위해서 투쟁하거나, 자유를 가치를 지키기 위해 최소한 자신의 양심과 생각, 그리고 자신의 경험을 정직하게 표현하지 못해왔다. 즉 스스로 자유주의의 원칙을 위배하는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그들의 모순적인 존재조건이 이들을 정신적인 불구자로 만들었다.
물론 인간은 그렇게 용감한 존재가 아니다. 문제는 겁많고 소심한 보통의 인간들을 정신적 불구자로 만든 것은 일차적으로는 분단이라는 폭력체제, 그것에 의해 조장된 보수의 완강함에 있을지 모른다. 한국에서 원칙 그대로의 자유주의자로 살기는 대단히 어렵다. 군사통치 하에서는 정치적인 박해를 받을 수밖에 없었고, 고루하고 보수적인 사회분위기 하에서 자유를 내세우고 실천하는 것은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한다. 따라서 자유주의자가 권력에 참여하게 되면 파시스트가 되거나 무이념, 무사상의 존재가 된다. 일찍이 송건호가 말하였듯이 “지식인에게 경제적인 기반이 없고, 무엇인가 외부의 힘에 의해 의지해서 생활을 유지해 나갈 수밖에 없는 사회에서 지식인의 권력참여는 반드시 권력에 대한 지식인의 예속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되면 지식인은 더욱 더 비굴해 진다. 그나마 한국에서 약간의 자유주의자가 존재한다면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불필요하게 굴종적인 자세를 취하지 않아도 되는 대학 교수들에게서나 가능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상당수의 자유주의자들은 엄혹한 군사독재를 거치는 동안 냉소적인 인간이 되었다. 즉 권력에 적극적으로 편승하기에는 자유에 대한 그의 평소의 생각이나 소신이 용납을 하지 않고, 저항을 하기에는 용기에 부족하기 때문이다. 냉소적인 인간은 중립적인 인간은 아니다. 그의 침묵 자체가 부정의하고, 부도덕한 현실을 용납하는 행위이며 동시에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에게 박수를 보내지 않음으로써 그들의 노력을 외롭고 약화시키는데 일조한다. 냉소는 무기력과 좌절의 표현이고, 이러한 무기력과 좌절은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탐욕을 추구하도록 만들 수도 있다. 결국 냉소주의는 끝까지 냉소주의로 남아있을 수 없으며, 다른 방식으로 현실영합적 권력추구욕으로 발현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냉소의 철학은 이기의 철학이며, 생존의 합리성을 모든 사회적 가치의 우위에 놓는 태도이다. 원인이 어떠하건 이러한 냉소주의자 정신적 불구자들에게서 고상한 생각이나 남을 감동시키는 이야기들이 나올 수 없는 것은 자명하다. 그리하여 ‘자유를 지키기 위한 용기’를 발휘할 수 없었던 한국의 문화나 사상, 지식과 학문은 이렇듯 왜소화되고 황폐화되었다.
그렇다. 한국의 자유주의자를 정신적 불구자로 만든 바로 그 원인은 생존의 논리를 주의(主義)의 논리 앞에 둘 수밖에 없었던 사정에 기인한다. 일찍이 한용운은 “조선의 주의자로는 그 태도가 너무나 행운유수적(行雲流水的)이어서 금일에 갑주의자인 듯 하다가, 명일에는 을주의자가 되고, 남에서 병주의자인 듯하다가 북에서 정주의자가 되어 주의에서 주의로보다도혹은 반역자가 된다”고 질타한 바 있다. 그렇게 된 법칙은 바로 생존의 법칙인 것이다. 생존의 법칙에만 따르는 사람은 생활인은 될 수 있어도 남을 이끄는 사람은 될 수 없다. 이들은 철저한 자유민주주의의 투사인 것 같으나 기실은 가장 자유민주주의를 빨리 버릴 수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의 지지를 받는 정권은 가장 안정되고 튼튼한 것처럽 보이나, 따지고 보면 그처럼 허약한 정권이 없는 것이다. 정치는 상업의 논리에 지배되고 상업은 정치화되어, 정치에도 상업 어느 편에도 일관된 원칙은 존재하지 않는다. 양심적 자유주의자의 부재는 양심적 사회주의자의 부재와 일맥 상통하는 점이 있는데, 중요한 역할을 맡아서는 안될 이러한 인간들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게되었다는 사실이야말로 남북한을 관통하는 우리현대사의 비극이라고 할 것이다.
반공주의의 참피언인 나라에서 힘있는 반공을 찾기 어려운 이유, 자유의 천국에서 진짜 자유주의가 없는 이유도 자명하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을 기회주의자로 만들어온 저 엄혹한 정치 권력을 생각해 보기만 하면 된다. 자유는 선택의 기회 속에서만 존재한다. 그러나 ‘국시’라는 엄한 통제체제에 눌려온 우리는 그러한 선택의 기회를 누려보지 못했다. 남과 북의 분단, 남북한 국민, 인민으로서의 존재 역시 진정으로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는 아니었다. 빈곤에서 탈출하기 위한 경제성장 지상주의 역시 충분한 동의를 거친 것은 아니었다. 자신의 자유의지로서 상황을 선택할 수 없는 조건에서 사람들은 자유의 가치를 공개적으로 주장하면서 그것을 실천에 옮기기 어렵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유를 지킬 수 있는 길, 전체 혹은 패거리 문화에 가담하지 않으면서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나’를 절대화시키면서 ‘나’의 세계에 침잠하는 방법밖에 없을 지도 모른다. 정운영이 말한 바 “차가운 이기주의만이 나를 지탱하게 한다”는 정신적인 태도는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의 멘탈리티라기 보다는 자유주의자의 그것에 훨씬 가깝다.
그러한 자기 영역의 고수, 조직 혹은 집단과의 거리두기는 타락한 자유주의자, 타락한 지식인이 되지 않기 위한 가능한 방법이었다고 이해할 수 있지만, 현실 정치의 억압에 대해 자유스럽고 저돌적으로 대항하였던 김수영의 자유주의보다는 못한 것이다. 자유주의자 설 수 있는 입지가 그렇게 좁았다는 것은 인정하더라도, 왜 그리 수 많은 자유주의자들이 냉전 자유주의를 비판하지 못하였으며, 그러한 질서 속에서 기회주의자로서 살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점은 우리의 숙제로 남는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었다고 하더라도 자유주의자들이 좀더 ‘자유’에 충실했더라면, 우리의 문화 사상의 지평은 훨씬 건강해졌을 것이고 정치 사회적 무질서도 상당히 극복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5
이제 수 많은 자유주의자들을 기회주의자, 정신파탄자로 만들었던 그 험악한 시대가 지 나가고 있다. 수 많은 지식인들의 영혼을 유린했던 정치적 억압과 처참한 빈곤은 낡은 것이 되고 있다. 국가보안법 개정 논의가 제기되고 있으며, 30년 이상 감옥생활을 한 장기수들도 준법서약서 없이 출소하였다. 사회적으로는 가족이나 친족 조직과 집단에 충성을 강요하는 분위기도 점점 어색해지고 있다.
90년대에 들어서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자유’, 즉 상처받지 않은 자유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나는 나다”라고 과감히 선포하는 Y 세대을 주목해 보자.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살겠다”, “내가 좋을 일 한다”, “결혼도 선택이다”라고 과감히 주장하는 이들은 “여성도 인간이다”, “감정에 충실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선포하였던 일제 시대 신여성의 후예 자유주의자들이다. Y세대는 전쟁과 독재의 강요 속에서, 가족을 잃고서 도시의 이방인이 되어 자유로워진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처지에 놓이게 되어 자유롭기 때문에 선각자 자유주의자들에 처럼 고난의 길을 걷지 않아도 될지 모른다. 그렇다면 이들이야 말로 개인의 자유와 개성을 지키기 위해서 정신병적인 상황으로 자신을 몰아가지 않아도 되는 우리 현대사에서 나타난 최초의 자유주의자일지도 모른다. 더 이상 남의 눈치 보이 않고 자신의 개성과 관심과 욕구를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세대의 출현, 그것이야말로 구세대 자유주의자들의 얼굴에 드리운 그들을 거두어낼 21 세기의 희망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의 담론과 90년대의 문화적 지향, 성 담론과 동성애론 자들의 주장들도 사실은 일제 이후 전통적인 한국 자유주의의 연장선에 있다. 그들의 말과 행동들은 가족주의 가치, 권위주의로 포장된 민주주의의 허구성과 이중성을 폭로하는데 있어서 가장 전복 적이었고 진보적이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나, 그들의 ‘해방적 실천’은 일제 시기 신여성 들이 그러하였듯이 주저하는 다수의 사람들을 감동시키지 못하였고, 더욱이 그들이 비판하는 질서를 가장 최종적으로 지탱하고 있는 정치적 지배질서를 위협하지 못했다. 예를 들어 마광수 교수의 외로운 투쟁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고 볼 수도 있으나 그것은 복직은 대학사회의 보수성과 기득권 구조, 문화에서의 권위주의를 침해하는데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것은 바로 한국의 자유주의가 가진 전통적인 한계, 즉 가족가치를 파괴하는데는 진보적이었으나, 국가의 개인의 자유에 대한 억압에 대항하는데는 거의 무기력하였으며, ‘주체’를 세우기 위한 투쟁, 정치 사상의 자유를 위한 투쟁 과정에서 어떠한 역할을 수행하지 않음으로서 파괴된 가족가치를 다른 형태의 가치로 대체하거나 자유주의적인 사회윤리를 확산시키는데는 실패한 점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조건에서 보자면 정치가 모든 사회적 영역의 결절 점으로 남아있는한 정치를 회피하는 자유주의는 언제나 자유의 정신을 발양시킬 수가 없다는 점을 또 한번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의 시점에서 더 심각한 것은 범지구적인 자본주의의 물결이다. 앞에서 말한 바 신세대의 자유는 ‘자본’의 울타리 속에서의 길들여진 자유인지도 모른다. 그들이 자신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이들이 원하는 바 “자신의 일과 관심에 충실하도록” 경제적, 정치적 조건이 허용된다는 전제하에서 가능한 일일 것인데, 불행히도 시장경제는 돈 있는 사람들에게만 자유를 허용하는 속성이 있다. 이렇게 본다면 전쟁과 독재 치하에서 살아남은 소수의 한국의 양심적 자유주의자들이 그렇게 원했던 바 권력과 돈으로부터 자기 개인을 지킬 수 있는 공간이 확보된 것처럼 보이는 오늘날 우리는 과연 자유로운가? 자유롭다면 과연 얼마나 자유로운가? 해고의 위험과 실직의 고통이 모든 생활인들을 옥죄고 있는 이 시대에 자유주의자자 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오늘날 보이는 검열자나 보이지 않는 검열자가 사라진 대신 ‘상품’이라는 검열자가 우리를 둘러싸고서, 우리가 자유롭다는 느낌까지도 만들어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 어쩌면 한국에서 자유주의자가 최초로 탄생하는 오늘의 시점은 이제 더 이상 자유주의자가 존재할 수 없는 시점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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