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제삿날이면 아버지가 향나무를 연필 깎듯 얇게 깎아 살짝 물에 담구는 것을 보면서 그 이유를 물은 적은 있다. 아버지의 대답은 향을 피울 때 빨리 타버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러나 제사 때는 왜 향을 피우는지 물은 적은 없었다. 그때는 제삿날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조부모님께서 돌아가셨을 때 깎은 향을 담근 물로 염(殮)을 하는 것을 보면서 일종의 소독효과라는 생각만 했지 다른 의미를 따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주변의 관심사만으로도 머리가 복잡했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내가 제사를 물러 받은 뒤에야 제사를 모시기 전에 향을 피우는 이유가 궁금하여 찾은 적이 있다. 그러면서 향의 사용이 불교에서 부처님께 드리는 여섯 가지 공양물(향, 차, 등, 꽃, 과일, 쌀)에 향이 포함된 점이나, 향은 해탈향으로 깨달음을 의미한다고 했던 점으로 불교에 연원을 둔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향을 피우는 목적은 주변의 부정한 것과 잡냄새를 제거하여 정신을 맑게 하기 위해서 임을 알 수 있었다.
일반 가정의 제사에서 향을 피우는 일은 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지만 언제부터 향을 피우기 시작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제사에서 분향(焚香)의식이 주변과 사람을 청정하게 한다는 불교적인 차원을 넘어, 향을 사르면 악귀를 물리칠 수 있다는 기원(祈願)을 담은 주술적인 의미까지 더해진 사실만은 분명한 것 같다.
향이 종교적인 의례와 주술적인 기원이 결합하면서 나타난 사례가 좋은 향을 얻기 위해 매향(埋香)의식을 행했다는 기록으로 알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좋은 향을 얻고자 향나무를 묻으며 천년 후에 발굴하겠다고 세운 매향비가 우리나라 곳곳에 남아 있는 사실도 향에 대한 선조들의 염원을 알 수 있는 자료가 될 것이다(매향비가 있는 곳에서 침향을 발견했다는 소식은 없다. 아마 천 년 후에 나타날 지형의 변화를 예측하지 못했던 탓이 아닌가 한다).
좋은 향이 있으면 향을 피울 향로가 있어야 했다. 그래서 선조들은 좋은 향로를 만들기 위해 많은 공을 들였던 것으로 보인다. 국보로 지정된 고려시대의 청자향로도 그렇지만 십 오륙년 전에 우연히 찾아낸 백제시대의 금동대향로를 보면 선조들이 향로를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향합은 향로보다는 장식이 덜하고 귀하게 여기지 않았으나 향로에 부수적인 필수품이었다. 지금이야 공장에서 만들어진 향이 만들어져 나오지만 그런 향이 없는 옛날에는 좋은 향나무를 구해 얇게 깎아 향로에 태우기 전까지 보관했는데 그런 향을 담아두는 그릇이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향합은 사원에서는 물론 유교적인 전통 사회에서 제사를 모시는 집안에서 향로와 함께 갖추어야 할 제기(祭器)로 자리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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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합 가장 큰 것과 작은 향합을 비교하였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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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합은 재질에 따라 청동, 백동, 자기, 목기, 칠기 등이 있는데 청동 향합이 가장 많다고 한다. 간혹 화려한 은입사 작품도 찾을 수 있으나 거의 드물다고 한다. 관찰한 바로 크기는 지름이 8cm를 넘지 않으며, 높이는 다리가 없을 경우 5cm 정도이고 모양은 뚜껑이 있는 원형이 대부분이었다. 형태는 다리가 없는 앉은뱅이가 대부분이지만 귀하게는 다리가 있는 것, 뚜껑에 꼭지가 달린 것들이 있는데, 다리가 있거나 꼭지가 있을 것일수록 지체 있는 집에서 사용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향합을 관찰하고 옛 문헌을 찾아보면 향합은 향을 담아두는 일반적인 제기 용도를 넘어 절집에서는 고승의 사리를 담는 그릇으로도 쓰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서적이나 박물관의 향합을 소개하는 사진과 설명하는 글을 보면 탑이나 부도전에서 혹은 절집에서 발견된 사리함에서 나온 합들도 향을 담아두는 합과 같은 모양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부피가 작은 것은 여인들의 화장품을 담아두는 분합으로 사용되었지 않았나 하는 추정도 해본다. 제사용 향을 담아두기에는 너무 작다고 여겨지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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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합 뚜겅에 꼭지가 달린 향합은 흔하지 않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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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인 향합에는 만들어진 시대, 소유했던 가문을 알려주는 명문이 거의 남아 있지 않는 것 같다. 내 소장품에도 명문을 찾을 수 있는 것은 한 개뿐이다. 동계(東溪)라는 명문인데 소유자의 호인지는 알 수 없고 그 밖에 제작 연대도 찾을 수 없다. 다만 손때가 묻은 흔적 청동 혹은 백동이냐에 따라 연대를 추정할 뿐이다.
내가 모은 향합은 40여 개인데 먼 것은 조선말엽, 그렇지 않으면 대부분 일제강점기 때 물건들이고, 그 중에는 일반적인 유기 제품의 거래가 끊어진 것이 60년대 중반 이후임을 감안할 때 60년대 초반의 작품도 있는 것 같다.
골동품상들의 말에 의하면 그나마 요즘은 그런 물건도 구경하기 어렵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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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합 東溪라는 명문이 남은 백동 향합. 동계의 의미는 알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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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제삿날에는 왜 피우는지 의미를 새기지 않고 쌀을 담은 향로에 향을 피워 꽂는다. 집안의 전통을 지켜온 향로가 아니다. 잘 말린 향나무를 깎은 향도 아니다. 일설에는 공장에서 만들어진 모기향과 다르지 않다고 한다. 그러니 청동으로 만든 향합은 당연히 없다. 공장에서 만든 향을 담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 향합을 찾는 사람은 없다. 향합이 무엇인지 아는 젊은이도 적다. 물론 만드는 사람도 없다고 한다. 사라지고 잊히는 물건이 된 셈이다.
작고 투박한 향합을 본다.
향로에 비해 크기도 작고 특별히 화려한 장식도 없는 물건.
향을 담고 있으면서도 향로의 그늘에 가려 주목 받지 못했던 물건.
향로가 귀족 혹은 지체 높은 양반이라면 향합은 짐을 진 서민의 모습처럼 보인다.
향을 담는 용도 외에는 활용가치를 찾기 어려운 소박한 향합.
역사의 뒤안길에 밀려난 것이 어디 향합뿐이랴 만 그 처지가 조금은 쓸쓸하다.
차례 상에서 멀어진 향합을 꺼내 오랜만에 먼지를 닦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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