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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마을 양조장에서 생산되는 '쌀막걸리'. 막걸리에는 꼬막 안주가 최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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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걸리~이 막걸리~이 우리~나라 술, 삼천리 강~산에 우리~나라 술"
동요 <우리나라 꽃>을 개사한 노랫말이다. '무궁화'는 '막걸리'로, '꽃'은 '술'로 바꿨다. 1960년대 초에 배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여자아이들은 고무줄놀이할 때 불렀고, 어른들은 술자리에서 막걸리 얘기가 나오면 잔을 권하며 흥얼거렸다.
나는 어려서부터 막걸리를 막연하게나마 한국의 전통 곡주(穀酒)로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동요를 개사해서 '우리 술'이라고 강조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전통 술도 마음대로 마시지 못하는 세태를 풍자적으로 꼬집으며, 한탄하는 '한탄가'로 받아들여졌던 기억이다.
조선시대 주조(酒造) 수준은 술을 담글 수 있는 재료와 도구를 집에 갖춰놓고, 필요할 때 담가 먹는 자급자족 형태였다고 한다. 그러나 일제의 한일합병(韓日合倂) 공작이 노골화되던 1909년, '주세법' 시행은 조선 백성에게 태풍과 함께 몰려온 '회오리 바람'이었다.
조선시대에는 700여 종류의 술이 각 지방의 전통과 특성에 맞게 주조됐다고 한다. 나그네가 쉬어가는 주막집과 동네 모줏집에서도 다양한 술을 빚어 팔았을 터. 그런데 관에서 허가받은 사람만 술을 만들 수 있게 되자 양조장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주막집과 모줏집은 문을 닫거나 양조장에서 사다가 팔아야 했다. 애꿎은 서민만 죽어났던 것.
1960년대 박정희는 식량 부족을 이유로 쌀 대신 밀가루를 사용하게 했다. 일례로 군산에서는 양조장들을 하나(합동주)로 만들고 가정에서 제사 때 사용할 술도 빚지 못하게 했다. 단속을 강력하게 펼쳤다. 저승사자보다 더 무섭다는 주세법은 1980년대까지 이어졌다.
가슴을 바늘로 찌르는 것 같았던 어머니 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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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날에 집에서 떡이나 술밥을 찌던 시루(좌)와 술 됫박(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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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머니는 일제강점기에 집에서 술을 빚어 생계를 유지했다. 어쩌다 가게에 세무서 직원이 다녀가면 "내가 젊었을 때 저승사자보다 무서워했던 사람이 바로 동네를 샅샅이 뒤지고 다녔던 세무서 '밀주조사원'이었다"라며 옛날을 떠올렸다.
"느 큰 누님(1933년생)이 어렸을 적에 밖에서 놀다가 고샅을 뒤지고 다니는 조사원들에게 '우리 집에서도 술을 만들어요'라고 알려줬지 뭐냐…. 나 그때 기절할 정도로 놀랐는데, 그때부터 심장병이 생긴 것 같혀."
어머니 얘기는 바늘로 가슴을 찌르는 것 같았다.
집에서 술 빚는 사람이 나라를 망치는 역적으로 취급되면서 고발을 부추기는 '성적 올리기 단속'이 횡행했다. 때문에 이웃 간에 신뢰가 깨지고, 불신이 싹트기 시작했다고 한다. 모두 일제가 만든 '주세법'과 해방(1945) 이후 이승만 박정희 정권을 거치면서 더욱 강화된 주조(酒造) 정책의 후유증이었다.
그 옛날 '각설이'들도 좋아했던 '막걸리'
막걸리는 색깔이 흐리다고 해서 '탁주(濁酒)', 옹기로 만든 잔에 가득 따라 마신다고 해서 '탁배기', 농사지을 때 마신다고 해서 '농주(農酒)', 색깔이 하얀색이어서 '백주(白酒)'로도 불렸다. 그러나 언제부터 막걸리로 불리게 됐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발효 음식을 으뜸으로 여기는 민족답게 의견이 분분한데, '쌀과 누룩으로 빚어 그대로 막 걸러서, 막(바로) 마신다고 해 막걸리라고 한다'는 주장이 가장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다음은 철부지 시절 동네 형들에게 귀동냥으로 배운 <각설이타령>의 한 토막.
"어~얼씨구씨구 들어간다, 저~얼 씨구씨구 들어간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가 죽지도 않고 또 왔네. 밥은 바빠서 못 먹고, 죽은 죽어서 못 먹고, 떡은 떨려서 못 먹고, 막걸리는 마구마구 잘 넘어간다. 어~허 한 잔 줍쇼!"
잔칫집이나 상가(喪家)를 찾아간 거지(각설이)들이 과방과 붙어 있는 부엌을 힐끗힐끗 쳐다보며 부르던 노래로 해학이 넘쳐난다. <농가월령가> '정월령'처럼 정겹고 서민적으로 느껴지는데, 거지들이 막걸리가 생각날 때 주인에게 인사를 곁들여 불렀다고 한다.
친구들과 '술은 술술 잘 넘어간다'는 대목을 붙여 부르면서 거지 흉내를 내던 시절이 시나브로 떠오른다. 재미있는 것은 상가든 잔칫집이든 대사를 치르는 집이면 맥주도 있고, 약주도 있고, 고기도 있을 터인데도 꼭 막걸리를 찾았다는 것. 옛날 거지들도 막걸리를 가장 좋아했던 모양이다.
지금 생각해도 끔찍한 '모주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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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년 전부터 군산양조공사에서 출하하고 있는 '흰찰쌀보리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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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을 거르기 전에 용수를 박아 떠내면 맑은 술(약주)이고, 물을 더 넣어 걸쭉하게 걸러내면 텁텁한 탁주(막걸리)가 된다. 이때 찹쌀을 원료로 하면 '찹쌀 막걸리'란 이름이 붙고, 밥풀이 떠 있는 상태의 술은 '동동주', 혹은 '호랑이술', '젖내기'로 통했다. 그리고 모주(母酒)는 '술찌개미'로 만들었다.
내가 어렸을 때는 동네에 '대폿집'과 '모줏집'이 많았다. 대폿집은 대부분 혼자 사는 아주머니가, 모줏집은 할머니가 운영했다. 가난해서 셋집을 구하지 못하는 할머니들은 재래시장 입구나 째보선창가에 쭈그리고 앉아 모주를 한 대접에 1원씩 팔았다.
대폿집 숫자만큼이나 안타까운 소식도 자주 들려왔다. 친구끼리 술 마시다 일어난 싸움 소식에서 누구 신랑이 어느 대폿집을 자주 드나들면서 주인과 눈이 맞았고, 각시가 참다 참다가 쫓아가 술집 주인 '머리 끄댕이'를 잡고 대판 싸움을 벌였다는 소식까지 다양했다.
할머니의 모주가게 단골은 대부분 지게꾼이나 구루마꾼 아저씨들이었다. 시골에서 장 보러 나온 아저씨 아주머니들도 한 대접씩 사 먹었다. 할머니 앞으로 지나가려면 달콤하고 구수한 모주 냄새가 침을 꼴깍 넘어가게 했으나 감히 사 먹을 수 없었다. 당시 1원은 큰돈이었고, 모주는 어른들이나 사 먹는 것으로 알았기 때문이었다.
술을 빚고 남은 술찌개미에 물을 부어 끓이면 모주가 되는데 별미였다. 꽁보리밥도 못 먹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식량이 되기도 했다. 집에서도 가끔 만들어 먹었는데, 당원이나 사카린을 넣고 끓이면 입에서 자꾸 당겼다.
하루는 모주를 얼마나 마셨는지 하늘이 돌고, 땅도 돌고, 길도 돌고, 온 세상이 돌았다. 마루로 올라가면 마당이 돌아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방으로 들어가 누우니까 천정이 돌면서 더 어지러워 눈을 감으니까 이번에는 별이 보이면서 귀에서 이명이 들렸다. 그 후유증으로 술을 늦게 배웠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끔찍하다.
동네 양조장에서 술밥(고두밥)을 훔쳐 먹던 추억도 새롭다. 술밥을 찔 때 판자 울타리 사이를 뚫고 나오는 고소한 냄새는 술밥 서리의 신호탄이나 다름 없었다. 양조장 담 사이로 들어가 시커먼 손으로 건조장에서 한 줌씩 훔쳐 먹는 술밥 맛은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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