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걱정 일 없습네다" | |||||||
동행취재 - 김성옥(김형직사범대 4)씨가 말하는 '북의 대학, 대학생' | |||||||
기사입력: 2003/10/01 [11:44] 최종편집: ⓒ 자주민보 | |||||||
4박 5일간 북녘 유적답사단과 함께 한 북측의 안내원들. 그 가운데 유독 낯이 익은 사람이 있었다. 그녀는 다름 아닌 지난 8월 대구 u대회 북측 응원단으로 많은 이목을 끌었던 '김성옥'이라는 이름의 북녘 여대생.
남녘의 친구들이 보고 싶어서 안내를 자원했다는 그녀는 '남남북녀'라는 말이 빈말이 아님을 느끼게 했다. 흰 저고리에 무릎아래까지 내려오는 검은 주름치마를 입은 그녀는 단아하면서도 참 당찬 인상이었다. 행운이었을까? 그녀와 같은 버스, 그것도 옆자리에 앉게 된 연유로 그녀에게 북녘 대학생들의 생활에 대해서 들어볼 수 있었다.
"취업걱정, 일 없습네다'
김형직 사범대 4학년인 그녀는 평양에서 나고 자란 평양 토박이였다. 김형직 사범대 체육학부에서 수영을 전공한다는 그녀. "대부분의 김형직 사범대생들은 대학졸업 후 교원이 됩네다. 사범대 학생들은 교원에 뜻이 있는 학생들이 오는 곳이란 말입네다. 때문에 훌륭한 선생님이 되어 조국에 보답하는 것은 당연합네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모든 대학생들은 무상으로 대학교육을 받은 후 자신의 전공분야에 맞는 직업을 가질 수 있다고 한다. 새내기때부터 취업걱정을 하며 영어공부에 매달리는 우리의 현실을 떠올리며 문득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우리와 모든 일정을 함께 했다. 다행히도 방학이란다. "여름방학은 보름이고 겨울방학은 한 달입네다. 너무 길지 않습네까?" 그녀의 질문은 나를 당황스럽게 했다. 남녘의 방학이 두 달 정도라고 말해주니 그녀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방학이면 농촌으로 가서 일손을 돕곤 합네다. 그 뿐 아니라 공장으로 생산실습을 나가기도 합네다." 북녘 대학생들은 짧은 방학중에도 여가를 즐기기보다 나라를 위해 조금이나마 힘을 보태고 있었다. "평양에서 남포의 서해갑문으로 가는 도로인 청년영웅도로는 제가 중학교때 학생들이 모여 만든 도로입네다"라는 그녀의 말은 방학기간 동안 조국을 위해 큰 일을 했다는 자부심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럼 여가시간에는 도대체 뭘 하세요?" "무슨 공부를 그렇게 많이 해요? 사실 남녘에서는 학점을 따기 위해서 시험기간에만 열심히 공부하는데…."
북녘의 대학생들도 미팅을 할까? 그녀는 미팅의 개념을 바로 알아듣지 못했지만 "남성 동무들과 만나서 함께 어울려 노래도 부르고 이야기도 하고"하는 그런 만남이 가끔씩 있다고 한다.
그녀에게 남자친구가 있는지 내심 궁금했다. "없습네다!" 대답하는 그녀의 얼굴은 부끄러운 홍조를 띄고 있었다. "대동강변이 연인들이 제일 많이 찾는 데이트 코스라면서요? 성옥씨도 남자친구 생기면 여기서 데이트 하겠네요?"라는 장난 어린 나의 질문에 "동무들과 와서 산책해도 참 재밌습니다"라며 미소를 지었다.
"장한 일 한 남측 학생들을 왜 잡아 가둡네까?"
"학생들이 장한 일을 했는데 칭찬은 못해줄 망정 왜 잡아 가둡네까?" 대화 내내 한번도 미소를 잃은 적이 없는 그녀가 심각한 표정으로 따지듯 물었다.
얼마 전 있었던 한총련 학생들의 '스트라이커 부대' 투쟁 이후 학생들이 겪는 고초는 그녀에게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남녘 학생들의 투쟁을 잘 알고 있다"고 말한 그는 미군의 장갑차에 운명을 달리한 미선이, 효순이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분노합네다. 미선이, 효순이 두 여중생의 억울한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서 우리 평양에서도 광장에 모여 촛불시위를 했었습네다"라는 그녀는 자신도 여동생이 있다며 억울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우리가 합치면 더 큰 하나 아닙네까?"라는 그녀는 "조국통일은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애국"이라고 강조했다.
유대회 때 남측을 방문한 소감을 묻자, 그녀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때 문득, 반북시위로 논란이 되었던 일들이 떠올랐다. "남측 대학생들도 보수단체들의 그런 행동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라고 전하자, 그녀는 생긋 웃으며, "남측 동포들이 뜨겁게 환대해주어 너무 고마웠다"며, 특히 "우리는! 하나다!"라는 응원구호를 주거니 받거니 하며 파도타기로 공동응원을 펼쳤던 감동'들을 회상하며 즐겁게 이야기해주었다.
"대구에서 남측 사람들이 우리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어 주던 것이 가장 기억에 남았다"는 그녀. 나 역시 그랬다.
내가 비행기 안에 들어갈 때까지 손을 흔들어주며 "꼭 다시 만나자"는 말을 해주던 그녀의 모습은 쉽게 잊혀지지 않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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