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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다시 쓰는 한국전쟁사(3)

감효전(甘曉典) 2012. 1. 31. 21:48

다시 쓰는 한국전쟁사 (3)
-조선이 오스트리아가 되지 못했던 이유 -

빛이 어둠을 비추었으되, 어둠이 미처 깨닫지 못하더라
                                                    -요한 복음 1장 5절-




1.모스크바 3상회의는 신탁통치만을 결정한 것일까?


조선에 관한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서

1. 조선을 독립국가로 재건설하며 조선을 민주주의적 원칙 하에 발전시키는 조건을 조성하고
 가급적 속히 장구한 일본의 조선 통치의 참담한 결과를 청산하기 위하여 조선의 공업 교통 농업과
 조선인민의 민족 문화 발전에 필요한 모든 시설을 취할  임시 조선 민주주의 정부
 (a provisional Korean democratic government)를 수립할 것이다.

2. 조선 임시 정부 구성을 원조할 목적으로 (In order to assist the ation of a provisional
 Korean democratic government) 먼저 그 적절한 방안을 연구 조성하기 위하여
남조선 미합중국 점령군과 북조선 소연방 점령군의 대표자들로 구성된 공동위원회가 설치될 것이다.
공동위원회는 그 제안을 작성함에 있어서 한국의 민주적인 정당 및 사회단체들과 협의해야 한다(shall consult).
공동위원회 에 의해서 작성된 제안은 공동위원회를 대표하는  두 정부의 최종 결정에 앞서
소련, 중국, 영국 그리고 미국정부의 고려를 위하여 제출해야 한다.

3. 조선 인민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진보와 민주주의적 자치발전과 독립국가의 수립을
원조 협력할 방안을 작성함에는 또한 조선 임시 정부와 민주주의 단체의 참여하에서
공동위원회가 수행하되, 공동위원회의 제안은 최고 5년 기한으로
4개국 신탁통치(Trusteeship)의 협약을 작성하기 위하여
미,영,소,중 4국 정부가 공동 참작할 수 있도록 조선 임시정부와 협의한 후
(following consultation with the provisional Korean democratic government) 제출되어야한다.

4. 남, 북 조선에 관련된 긴급한 무제를 고려하기 위하여 또한 남조선 미합중국 관구와
북조선 소연방국 관구의 행정 경제면의 항구적인 균형을 수립하기 위하여
2주일 이내에 조선에 주둔하는 미, 소 양군사령부 대표로써 회의를 소집할 것이다.

이상이 우리가 신탁 통치 안이라고만 알고 있는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서 전문 이다.
분명 3항에 신탁통치가 언급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1항과 2항의 조항을 먼저 음미했어야 하지 않을까?

모스크바3 상회의는 분명 남북한 전체를 아우르는 임시정부의 구성을 최우선으로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뒤에서 지원하고 보증하기 위한 조처로서 미소 공동위원회와
 2차대전 전승국이 참여하는 후견인격의 신탁통치를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했어야 할 신탁통치가
과거 일본의 식민지배의 연장이라도 되는 양 호들갑을 떨었던 이유는 뭘까?
왜 나라 전체가 찬탁이냐 반탁이냐를 놓고 흑백 이분법적이며
소모적인 정쟁의 소용돌이로 휘말리게 되었을까? 

이 대목에서 당시 이러한 왜곡을 누가 주도 했는지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45년 12월 27일자 동아일보를 인용해보자.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독립 주장, 소련의 구실은 38선 분할점령]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3국 외상회담을 계기로 조선독립문제가 표면화되지 않는가 하는 관측이 농후해 가고 있다.
즉 번즈 미국무장관은 출발당시에 소련의 신탁통치안에  반대하여 즉시 독립을 주장하도록 훈령을 받았다고
하는 데 삼국간에 어떠한 협정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불분명하나
미국의 태도는 ‘카이로 선언’에 의하여 조선은 국민투표로써
그 정부의 형태를 결정 할 것을 약속한 점에 있는데 소련은 남북양지역을 일괄할 일국 신탁통치를 주장하여
38선에 의한 분할이 계속되는 한 국민투표는 불가능하다고 하고 있다. 워싱턴 25일발 합동지급보도- 

동아 일보의 보도와 3상 회의 공식 결정문을 자세하게 비교해보시기 바란다.

미국이 언제 즉시 독립을 주장했던가?
미국이야말로 2차대전 말기에 전후처리과정에서 한반도에서 필리핀식의 50년짜리 신탁통치를 꺼냈던 나라였다.
과연 동아가 무슨 생각으로 이랬는지 정말 궁금하다.
초보적인 독해력만 가지고 있어도 3상회의의 결정은 우리에게 임시 정부수립과 그것을 후견인격으로
지원할 방안을 모색한 공히 미소 양 강대국이 모두 합의한 내용을 이렇게 심하게 비틀어버려서
전 국민에게 일제식의 식민통치가 연장 될 거라는 악의에 찬 오보를 했던 그 저의가 무엇이었을까?

그 이후 동아와 조선의 보도 행태는 오버와 과장의 한계를 넘어 가증스럽기까지 하다.

12월 29일자 조선일보 팔면봉은 ‘독립전쟁을 시작하자’고 선동하고 있다.(어쩜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는지 원...)
왜 우리는 그토록 흥분해서 3상회의 결정문의 진실을 외면했던 걸까?

물론 당시 모든 우익 정치세력들이 3상회의의 결정에 반대한 것은 아니다.
우사 김규식등 일부 중도 우파는 곧바로 반탁 운동대열에서 이탈하지만,
임정계열 특히 백범이 이승만과 손잡고 맹목적 반탁운동을 전개했다는 점은 아무리
백범을 좋게 봐주려고 해도 비판 맞아 마땅한 백범의 실책이었다.
'미소 양국이 한반도를 분할점령하여 군정을 실시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 두나라의 공식적인 합의안을 무시해버리고서  통일된 국가 수립은
사실상 불가능했다'는 고정휴의 지적은 그래서 매우 타당하다.

백범은 어째서 이 단순한 사실조차 무시하고 말았던 걸까?
분단극복을 위해서 신명을 다했던 그가 45년 겨울에 저지른 돌이킬 수 없는 실책은
어떻게 이해해야만 하는 걸까?

한민당 계열 언론인 동아일보의 악의적인 왜곡보도로 우리는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가게 된다.
민주적 임시정부를 통해서 자연스러운 한반도 통합의 길을 갈수 있는 절호의 기회,
그 첫 단추는 이렇게 어이 없이 잘못 꿰어지고 있었다.



2. 우리는 스스로를 승전국으로 착각한 것일까?

 이 대목에서 우리는 우리의 주제파악과 우리를 둘러싼 강대국들의 현실을 얼마나
당시 한반도의 우리민족과 주요 정치지도자들이 얼마나 제대로 인식 하고 있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냉정하게 말해서 우리는 승전국 연합국의 파트너 대우조차 못 받았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당시 그들의 눈에 우리는 그저 패전국 식민지의 주민들이고 이제 과거의 굴레를 벗고
새로운 나라를 건설해야 하는 매우 어설픈 위상을 가진 민족이었을 뿐이다. 

드골의 자유프랑스는 파리가 해방 되자마자 즉각적으로 전 프랑스의 행정권을 장악했지만,
이미 전편에서 전술했듯이 우리는 연합국의 적대국 일본의 식민지이자 점령지에 불과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우리의 독립운동세력(레지스탕스?)들은 저들 승전국의 파트너대우조차 받지못했다.
(일부 중국의 경우는 좀 달랐으나, 당시 한반도의 실세 미소의 입장에선)
이 것은 미소 모두가 같은 인식을 하고 있었다. 다만 소련군이 조금 더 세련되었다는 점 외에는 차이가 없었다.

그들은 모두 이 땅에 점령군으로 들어왔다는 것이고
우리의 처지는 냉정하게 말해서 패전국 오스트리아와 크게 다를 게 없었다.
그렇다면 민족을 이끄는 각 정파 리더들이 정치투쟁과 자신의 권력 쟁취보다는
냉정한 현실인식하에서 우선 주권국가건설에 모든 역량을 집중시켰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승전국의 일원인 프랑스가 아니었는데도, 마치 프랑스처럼 독일에게 해방되자마자
극심한 정쟁만을 일삼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왜 우리는 오스트리아처럼 냉정하게 현실을 인식하고 가장 중요한 목표를 위해서 단결하지 못했을까?
이 부분에 대해서 당시 정치세력 모두가 엄중한 역사의 질책과 민족의 비판을 받아야 한다.
당시 좌익은 민중의 지지를 받는다고 지나치게 교만하고 독선적이었고 배타적이었다.
상대적 열세에 있었던 우익은 단순하다 못해 과격하고 무식했으며 때때로 파렴치 했다.
이들 사이에 있었던 중도파들은 정치가이기전에 학자나 지사에 가까웠고 현실적 영향력이 약했다.

그리고 이들이 모두 금방이라도 손에 잡힐 듯한 권력을잡기 위해 정쟁으로 치닫으면서
좌우 모두가 민족사에서 통탄할 만한 중대한 실책을 범하고 만다. 정국이 혼란에 빠지자,
해방 직후 쥐 죽은 듯이 납작 엎드려 있던 친일 반민족세력들이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빛이 어둠을 비추었으되, 어둠은 끝내 깨닫지 못했고,
그러자 다시 악마가 고개를 들고 어둠의 뒤통수를 잡아채고 말았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출처 : 다시보는 한국전쟁
글쓴이 : 전국유족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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