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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다시 쓰는 한국전쟁사(2)

감효전(甘曉典) 2012. 1. 31. 21:49

다시 쓰는 한국전쟁사 2

다시 쓰는 한국전쟁사 (2)
-한국전쟁의 복잡다단한 기원, 그러나 분단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조선인민들에게
조선인민들이여! 붉은 군대와 연합국 군대들은 조선에서 일본 약탈자들을 구축했다.
조선은 자유국이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오직 신조선 역사의 첫 페이지가 될 뿐이다.
화려한 과수원은 사람의 땀과 노력의 결과다...

조선 사람들이여!
기억하라!
행복은 당신들의 수중에 있다. 당신들은 자유와 독립을 찾았다.
이제는 모든 것이 죄다 당신들에게 달렸다.
                     

-소련 제25군 사령관 치스차코프 장군의 포고문중에서-



1. 한국전쟁의 대표적인 기원 학설들

역사상 모든 전쟁에 대한 이해의 첫걸음은 언제나 그 전쟁의 원인이 무엇인가에서부터 시작된다.
전쟁의 원인을 제대로 짚어낸다면 그것은 곧 전쟁의 성격을 인식하는 가장 중요한 핵심 열쇠가 된다.

한국전쟁의 원인에 대해서는 그동안 다양한 논의가 진행되어 왔다.
공식적인 역사 교육 공간과 특정세력의 강요에 의해 사실상 화석화된
도식적인 한국전쟁의 기원에 대한 일반의 인식과는 달리
이 부분의 학술적 연구 성과는 매우 주목 할 만하며,
아래에 언급할 몇 가지 기원학설은 한국전쟁의 이해를 돕는데 매우 유용한 수단이 될 수 있다.
해방공간과 더 나아가 식민시절부터의 좌우갈등과 정치적 대립을
중요한 요인으로 본 서 중석의 내적 기원론과 소련과 북한의 적극적인 역할을 강조한 박 명림의 연구,
미국의 공세적인 극동대외정책에 초점을 둔 브루스 커밍스의 분석은
국제적 냉전차원에서 한국전쟁의 기원을 찾고자 한 우리시대의 대표적인 한국전쟁 기원설들이다.
 
그러나 이들 각각의 학설만으로는 복잡다단한 한국전쟁의 기원을 모두 설명할 수 없다.
각각 학설의 장점과 허점 그리고 상호보완적 측면을 고찰함과 동시에
우리와 비슷한 분단의 상황 혹은 분단의 위기를 겪었던 나라들의 경우를
분석비교 하는 방법을 통해서 우리가 분단에서 전쟁까지의 과정으로 치닫게 되는 따라가고자 한다.


1-1 내적 기원론, 그 한계와 가능성

내적 기원론은 1편에서 언급한 엄청나게 다양한 정치적 스펙트럼들이 일시에
해방공간에 쏟아져 들어오면서 좌우익 모두가 손만 내밀면 간단하게 권력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이 상황에서 협력과 타협은 무의미한 것으로 판단했다는 데서 출발한다.
해방 다음해인 46년부터 좌익과 우익은 3.1절 기념식을 따로 거행했고,
그 다음해 3.1절에는 유혈충돌마저 마다하지 않았다.

결국 38선 이남의 권력은 우익을 대표하는 이승만과 지주와 친일경력의 한국민주당이 장악하고,
이북의 권력은 항일 무장세력의 대표인 김일성과 국내좌익의 수장인 박헌영이 장악했다는 사실에 근거,
한국전쟁은 좌와 우의 전쟁이며,
그 기원은 식민 시기부터 해방공간까지 이어온 정치적 갈등과 대립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적기원론에는 몇 가지 한계가 있다.

어느 사회나 시대에도 정치적 갈등과 대립은 늘 존재했으며
그러한 대립과 갈등이 정치사회발전을 촉진하는 긍정적 역할을 부인할 수 없다.
갈등은 단기적으로는 혼란을 야기하기도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사회발전에 긍정적으로 기여한다.
해방 전의 국가 조선 역시 극심한 정치적 당쟁갈등으로 그 수명의 대부분을 장식했지만,
그렇다고 전쟁으로까지 비화되지는 않았다. 해방공간의 좌우대립은 46년 9월의 총파업과
10월 대구항쟁(박정희의 형 박상희가 주도했으며, 형의 죽음으로 극우친일장교출신 박정희는
극좌남로당으로 극적인 변신을 한다)으로 비화되면서 매우 심각해졌지만,
그 와중에도 몽양 여 운형을 중심으로 좌우합작위원회가 추진되고 있었으며,
중도 좌우합작은 끊임없이 시도되고 있었다.

따라서 좌우 갈등이 곧 전쟁을 의미한다고 볼 수 는 없다.
좌우갈등이 전쟁을 의미했다면 사실 전쟁은 47년이나 48년에 일어났어야 했다.
그런데 정?한국전쟁은 좌우의 통치 경계선이 분명해지고
남북한 양사회가 안정을 찾아가던 시점에서 일어났다는 점이
내적기원론을 다소간 당황스럽게 한다. 

또한 당시 그 다양한 정치 스펙트럼과 치열한 권력투쟁 속에서도
이 모두에게는 서로의 갈등의 골을 메울 수 있는 공통분모가 존재 했었다는 것이 경이롭다.
그 흔적을 대표적 우익세력인 한국 민주당의  정강정책에서 찾아보자.

45년 9월에 발표된 정강정책5,6,7항에는
5.중공주의 경제정책 수립
6.주요산업의 국영 또는 통제관리
7.토지제도의 합리적 재편성

지금 우리의 시선으로 보면 이게 공산당 정책이지, 어디 우익 정당의 정책인가?
그것도 지주와 유산자들의 정당인 한민당의 정책정강이...^^;
너무도 사회주의적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은 특기할만하다.
더구나 이와 비슷한 내용이 임정의  정강정책에도 보인다는 점을 감안하면 우익세력들
역시도 좌익의 정치노선에는 모두 공감하지 않더라도 뭔가 노선을 넘어서는 공통분모가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는 점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이것은 오랜 세월을 통해서 형성된 우리민족의 관습적인 토지국유와
유사한 공 개념의 발호일수도 있고(조소앙의 해석),우연의 일치일수도 있다.
그러나 당시 좌와 우는 대립하면서도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지금의 우리는 분명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는 이들이 분열과 대립이 아니라 연합의 가능성도 있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며,
 한국전쟁은 피할 수 있었다는 역설까지 상상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실제로 그러한 일들은 역사상으로도 실존한다. 조 소앙, 이 극로가  해방이후
북한에서 활동한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또 상당수의 우익 납북인사들이 북한에서 정치활동을 했던 것을
그저 그들이 모두 공산주의자로 전향했기 때문이라고만 설명 할 수 있을까?
여생을 대한민국에서 살았던 조선 사회주의의 거두이자 제2차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김 철수는
우익로 전향했기 때문에 여기에 남았다라고 말할 수 없듯이
우리는 해방공간의 좌우대립에서 극심한 분열의 양상과 함께
이들에게 분명 존재했던 통합과 연합의 가능성을 동시에 살펴봐야 하는 점이
내적기원론의 또 다른 한계다.

 
1-2외적 기원론-미국과 소련의 책임

한국전쟁의 기원에 대한 가장 전통적인 해석은 공산주의자들의 팽창주의적 정책에서 기원을 찾는다.
 트로츠키의 세계혁명론에 근거한 이러한 자유주의적인 해석은 사실 이미 스탈린에 의해서
사실상 부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해석주의자들은 공산주의를 끊임없이
세계혁명을 추구하는 세력으로 이해한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전쟁은 스탈린의 지시로 모택동과 김일성이 치밀하게 모의하여 일으킨 전쟁이고
이것은 동북아의 자유민주주의체제를 위협하는 일이며 유엔군의 기치아래 자본주의 질서와
자유민주수호를 위해서 군대를 파견했다는 것이 한국전쟁에 파병한 국가들의 전통적인 논리였다.
이 논리는 한국전쟁의 기원뿐 아니라 분단의 기원을 논의하는 데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며칠 전에서야 소련은 태평양전쟁에 참전했고
이것이 분단의 가장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즉, 스탈린의 야심 찬 동북아 공산화 정책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 해석은 70년대 이후 수정주의가 등장하면서 점차로 설득력을 잃는다.
수정주의의 등장원인은 미국의 베트남 전 패전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전통적  해석처럼 미국은 소련과 공산주의국가의 세계혁명론에 맞서서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고자 한 것인가?

아니면 자유민주주의 수호라는 명분 하에 제3세계에 미국의 이해관계를
관철시키려고 한 것이 아닌가라는 새로운 문제의식에서 수정주의는 출발한다.

이 과정에서 정보공개법에 따라 45년 전후의 미군정 문서들이 공개되기 시작했고,
브루스 커밍스로 대표되는 일련의 학자들이 당시의 미군정자료들을 꼼꼼하게
검토 분석하기 시작하면서부터 한국현대사 연구 특히 한국전쟁사 연구는 한 단계 상승하게 된다.
70년대와 80년대를 거쳐서 혹독한 군사독재정권의 통제 하에서 전통적 해석 외에는
생각할 자유조차 없었던 우리를 대신하여 한국전쟁의 연구는 커밍스의 수정주의 학파에 의해서 주도되었다.
이들의 연구 성과는 기존의 전통적 해석의 근간을 허무는 성과를 거두는데,

첫째 소련의 참전은 미국의 끈질긴 태평양전선 참전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는 점이지,
기실 스탈린의 이념적 야망과는 거리가 멀었다.
미국은 태평양전선에서의 희생자를 줄이고 전쟁을 신속하게 종료하고자 했다.
그러기위해서는 소련의 참전이 필수적이었다.

이는 태평양전쟁 내내 0.15%의 포로 생포비율을 보인 일본군의 격렬한 저항과 카미카제 전술로 인해
미군은 곤혹스러워 하고 있었으며 특히 일본 육군을 과대평가했다.
거기에 이오지마와 오키나와에서의 극심한 출혈은 만약 미군이 일본 본토에 상륙할 경우
2차대전 내내 감수한 전사자 모두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전사자를 낼 거라는 합참의 보고서는
미행정부로 하여금 소련참전유도를 중지할 수 없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 했다.

일본 본토 상륙작전인 올림픽 작전의 예상 전사자는 약 100만이었다.
미군의 2차대전시 총  전사자수가 약 39만임을 감안할 때,
미국이 소련의 참전을 요청했던 것은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두 번째로 소련은 2차대전 당시 가장 극심한 인명피해와 물적 손실을 입었던 당사자다.

그 피해의 정도가 너무도 커서 사실 동북아시아 지역에 신경을 쓸 처지가 아니었다.
이 부분 2차 대전사를 조금만이라도 음미하신 분이라면 소련이 얼마나 큰 피해를 입었는지에
대해서는 굳이 설명이 필요 없으리라 본다.

그런데 이 와중에서 미묘한 상황 변화가 전개 되면서 한반도에 비극의 기운이 싹트기 시작한다.
유럽전선의 종결 후 미국은 여러 가지 조건을 제시하며 결국 소련의 참전을 이끌어 냈고
소련군은 유럽에서 시베리아를 거쳐서 동북아시아까지 서서히 만주 침공을 위해서 이동하기 시작한다.
여기에 소요된 시간은 약 3개월이 걸리면서 8월에야 개전한 것이지.
전통적 해석처럼 8월 종전시점이 다 되어서야 동북아시아의패권이 탐나서 전쟁에 개입했다고 보긴 어렵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미국이 가공할 원자탄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고
미국의 원자탄 투하가 항복할 명분과 구실을 찾던 일본과
또 극우파시스트에게 가혹하기로 정평이 난 소련군에게 점령되어 극심한 고통을 당하느니,
미국에게 항복하는 게 낫겠다는 일본 수뇌부의 판단(독일의 경우와 흡사한)을 이끌어내어
다소 급작스럽게 2차 세계대전이 끝이 나버렸다는 것이다.

당시 소련군의 진격속도로 보아 일본 본토에서 천 킬로나 멀리 오키나와에 머물고 있던
미국이 한반도의 38선을 점령 분할 선으로 제시하면서 소련군을 정지시키지 않았다면
일본본토는 9월중으로 소련의 수중에 넘어 가고 말았을 것이다.
만주에서 소련군의 급격한 진격에 놀란 미군이 다급하게 완충 선을 찾은 것이
바로 한반도의 38도선이었다.

고작 두 명의 미군 대령에 의해서 그야말로 대충 그려진 경계선이
후일 한국전쟁의 시발점이 된 것은 아이러니 하다 못해 입맛이 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더 웃기는 것은 미소 양쪽 모두 38선 제안이 서로에게 쉽게 받아들여진 점에 대해서 놀랐다는 점이다.
미군은 소련이 너무도 선선히 이 제안을 수락했다는 점이 의외였고
소련의 입장에서는 미군의 분할점령선이 너무도 후하게 아래로 내려갔다는 점이 충격이었다고 하니...
민족의 운명이 강대국의 손아귀에서 마치 노리개가 된 느낌을 받은 것이 비단 나 혼자만일까?

그러나 정작 분할의 주역 미국은 한반도와 조선민족에 대해서 한심할 만큼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다. 그 무지와 문화적 차이는 심각한 대립과 갈등을 양산하고
해방공간에서의 충돌과 대립, 분단 끝내 비극의 한국전쟁으로 이어졌다는 점을
 수정주의학파는 통렬하게 지적했다. 

한반도 분단과 한국전쟁의 기원에 있어서 미국의 책임부분은
수정주의자들의 위와 같은 충분한 사실고증을 바탕으로 분석되었으며
당시 상황을 어느 정도 정확하게 짚어내는 데 성공했다.

만약 미국이 적극적인 분할 정책을 시도하지 않았다면 분단은 없었을 것이다.
미국의 정책 덕에 한반도 전체가 공산화 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현재의 결과에서 추론하는 것 일 뿐,
분단이 되지 않았다면 한반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 아무도 알 수 없다.

이 대목에서부터 소련의 책임부분을 짚어 봐야 할 필요가 있다.
유럽전선에서 악명 높은 약탈과 강간과 무질서한 행위로 맹위를 떨쳤던 소련군은
만주와 한반도에서라고 달라질리 없었다.
이러한 이들의 행동은 여론의 극심한 비판을 불러왔고, 45년 9월20일 급기야 스탈린은
이 지역에서의 급격한 소비에트 화를 자제하고 유연한 정치대응을 요구하는 지시를 내린다.

이러한 지시는 당시 38도선 이북의 상황을 면밀히 검토하여 내려진 지시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한반도와 조선에 무지했던 미국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당시 한반도는 식민지시절
독립운동에 더 적극적이었고 해방 후 사회개혁을 주도했던 좌익이 우익에 비해서
더 많은 대중적 지지를 받았지만, 38선 이북지역 특히 평안도지역의 특수성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평안도지역은 19세기부터 보수성향의 기독교세력의 주요 근거지였고
식민지시절에는 상업이 번창하여 상업자본가들이 상당수 존재하고 있었다.
이들을 무시하고 섣부른 공산화를 추진할 경우 커다란 반발을 살 수 있었다.
따라서 한반도 전체가 소련의 점령 하에 들어갔다 하더라도 곧 공산화가 되었을 거라는 결론은
현재의 상황에 비추어 추론하는 것에 불과하다.

물론 소련이 자신의 이해관계와 충돌하는 정치세력에게 정치적 주도권을
내 줄 리는 결코 없다고 봐야한다.
45년 당시의 소련 외무성 극동과의 한반도 관련정책 자료는 소련에 적대적인 기지가
되지 않도록 한반도에 적극적인 정책을 실행해야 한다고 적고 있는데,
이는 한반도 그 자체보다는 일본을 견제하려는 목적이었다.

 그러나 전술했듯이 막대한 서부지역의 피해를 복구하기에도 벅찼던 소련이
미국보다 한반도에서 적극적일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북한지역의 급속한 사회주의화는 소련의 적극적인 정책보다는 분할 점령이후
지주와 자본가 그리고 보수적 기독교세력의 급격한 남하로 인한 공백상태가
북한지역 사회주의화 여건을 조성했던 때문으로 봐야 할까?

그러나 최근 김 성보와 박 명림등의 연구는
소련이 38선 이북에서 어느 만큼은 사회주의 개혁에 적극적으로 개입했음을 보여준다.
분명 해방직후 38선 이북에서 실질적 힘을 가졌던 것은 소련군이었다.

 다만 여러 정황으로 보아 그들은 미국보다는 훨씬 더 세련되고 유연하게
자기 영역 하에 두는데 성공했으며, 일련의 개혁과 토지분배과정에서 38선 이북 지역의 민중에게서
이남의 미국과는 좀 다르게 지지를 받았다는 점도 확실해  보인다.

미국이 남한에서 실질적인 행정권을 남한정부에게 이양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던 반면,
소련은 건준의 후신인 인민위원회에게 점령 3개월 만에 행정권을 이양했다는 점은 그만큼
 그들의 한반도 점령통치가 성공적이었음을 증명한다.

물론 신의주등에서 저항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도
소련군과 김일성은 남한의 미군정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유연하고
친화적인 태도를 보여 민심을 안정시켰다.

그러나 구소련의 책임론연구는 아직 미완의 단계에 있다.
그중 박 명림의 연구는 매우 특기 할만하다. 이 부분에 대해서 좀 더 진지하게 연구되어야 한다.
이는 최근에 들어서야 소련의 문서들이 공개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며
아직 미국의 수정주의학파들처럼 그 오류와 한계를 다 노정하기에는
좀 더 많은 자료공개와 연구가 병행되어야 할 부분이다.
소련책임론이 등장하게 되면서 수정주의 학파들 역시 자신들의 일부 학설을
수정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소련책임론은 미국책임론과 더불어 상호보완적인
존재로서 그 가치를 더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동향이 신자유주의추세와 맞물려
수정주의가 마치 완전한 오류인 것처럼 주장할 때 소련책임론을 근거로 내세우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소련책임론이나 미국책임론은 모두 한국전쟁의 기원에서 유효한 부분이지,
어느 한쪽만을 정설로 주장하는 것은 결국 또 다른 전통적해석의 회귀에 지나지 않는다.
세상사 그렇게 단순무식하게 돌아가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소련 책임론 부분에 대한 연구가 수정주의 학파연구만큼의
성과를 거두게 되면 한국전쟁의 기원 중 외적 기원론에 대한 고찰이
완성단계에 접어들었다고 보고 싶다.
분명 매우 흥미로운 사실들이 남아 있을 것이라고 사료된다.
특히 조만식의 북한내 우파 민족주의세력들이 어떻게 북한에서 와해되었는가를
고찰하는 부분은 앞으로 북한사학계의 주요한 숙제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1-3. 사례를 통한 외적기원론 비판 

외적 기원론은 한국전쟁의 기원이 되는 한반도 분단이 외세에 의해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내부요인보다는 외부 요인이 결정적이라는 시각이다.
그것이 미국이건 소련이건 아니면 둘 다이건 간에.
분단과정을 음미해보면 내부 기원론보다 더 설득력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가 식민지시절부터 분단되었던 것은 분명 아니지 않는가?

그러나 이 대목에서 하나의 대안적 비판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당시 2차대전의 결과로 거의 같은 상황에 직면했던 두 나라의 경우는 우리와는 사뭇 결과가 달랐다는 점이다.
패전국 오스트리아는 우리와 같이 미소에 의해서 분할점령 되었지만
사회민주당의 칼 레너를 대통령으로 하여 기독교 사회당, 공산당이 모두 참여하는
임시 연합정부를 구성하는데 성공했고 그 구성이 자발적인 국민의 참여로 이루어졌다.

그들은 55년까지 승전국들의 신탁통치와 감시를 받기는 했으나,
좌우 모두를 아우르는 국민적 단결을 통해서 스스로의 주권을 회복했으며,
영세중립을 조건으로 한국전쟁으로 인한 촉발된 미소의 냉전이 극심한 상황에서도
결국 분단되지 않고 냉전의 완충지대로서 20세기 후반 내내 평화를 구가하는데 성공했다.
오스트리아의 현명한 처신과 선택이 그들의 나라를 관광과 예술의 국가로 번영을 누렸게 했던 반면,
한반도는 냉전체제에서 양극의 극단적인 시스템을 유지하면서 분단을 지속해왔다.

남과 북은 분단 이데올로기를 자국의 국민에게 강요하면서 유지될 수 있었다.
역설적으로 대한민국의 성공적인 경제개발과 도약에는
이러한 분단 이데올로기가 적당한 자극제로 작용한 것도 사실이지만,
그것이 분단으로 인한 엄청난 비용을 상쇄한다고 보긴 어렵다.

남과 북의 민중들은 전쟁 그자체로도
또 전쟁 후 형성된 정전체제에서 아직도 여전히 전쟁을 준비하고
의식해야 하는 고통을 오늘도 감수하고 있다.

동일한 환경에서 왜 이런 판이한 결과를 가져왔을까?
결국 그 원인은 우리 내부에서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번에는 베트남을 살펴보자. 그들은 우리와 더욱 비슷했다.
끊임없는 외세의 침략과 지배에 시달렸고, 프랑스와 일본의 식민통치를 경험했다.
우리는 국권을 상실했던 시간이 비교적  짧았지만, 그들은 수 백 년의 지배를 받았다.
어찌 보면 더 열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지금 분단을 극복했고 자주권을 획득했다.

물론 베트남의 통일이 결과적으로 더 좋았는지에 대해서는 내,외적인 고려를 통해서
다시 고찰해야 할 문제지만, 그들은 우리의 경우보다 더한 초강대국 미국의 개입을 극복하고
분단을 극복했다! 분명 뭔가 달랐다. 
그렇다면 우리와 베트남은 무엇이 달랐던 걸까? 
오스트리아, 베트남과 우리를 비교하면서 남는 문제는 결국 내적인 요인밖에는 없다.


2.전쟁과 분단의 필요 충분 조건

모두에서 전쟁의 내부 기원론을 비판하고서 다시 또다시 내적 요인을
들먹이는 모순에 직면하고 있지만, 우리는 이 부분을 변증법적으로 통합해야 한다. 

전쟁과 분단 과정에서 가장 결정적인 핵심은 외세에 의한 분할점령이었다.
이것은 곧 필요조건이었다.
외세에 의해서 분단국가가 형성되지 않았다면 한국전쟁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설사 갈등이 표출되었다 하더라도 국지적인 충돌이상으로 확대되기는 어려웠다.
일단 서로를 말살할 무기가 거의 없었을 테니깐.

한국전쟁에서 쓰인 무기들은 전부 강대국들이 우리에게 쥐어준 것임을 잊어선 안 된다.
이 걸로 같은 동포형제지만 나와 생각이 다른 놈은 가차 없이 말살하라고 말이다!

그러나 정작 가장 중요한 문제는
어떻게 한 나라와 민족을 외세가 분단 시킬 수 있었는가를 밝혀내는 일이다.
이는 외세의 힘만으로는 결코 가능하지 않다.
여기에는 분단을 하려는 외세의 힘에 부합하는 내부의 힘이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이미 진술했지만 해방이후 한반도는 다양한 정치적 스펙트럼들의 갈등과 대립이 있었다.

그런데, 그 갈등과 대립을 대화와 타협 그리고 통합으로 풀기 보다는
외세와 결탁하여 특정지역에서라도 주도권을 장악하려고 했던
정치적 이해관계가 바로 민족 분단과 한국전쟁의
충분조건이 되고만 것은 아닐까?

전술한 필요조건만으로는 결코 분단과 전쟁에 이르는 과정을 온전하게 분석해낼 수 없다.
거기에 외세와 결탁한 정치적 이해관계를 가진 세력이라는
충분조건이 결합 했을 때 비로소 분단과 전쟁이라는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외부세력이 아무리 분단을 강요하려고 하여도 내부에서 이에 호응하는 세력이
미약하거나 민족전체의 역량을 집결하여  이를 잘 극복했던
오스트리아와 베트남의 경우를 다시 상기해보자.
베트남의 경우는 외세에 호응했던 세력자체가 너무 역량이 부족하고
 부정부패한 탓에 민중의 지지를 전혀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고,
오스트리아는 좌우가 단결하여 민족의 생존권을
함께 지켜낸 매우 이상적이고 모범적인 사례를 보여준다.

다시 말해서 아무리 외세가 강요하더라도 이에 호응하는 세력이 없다면
분단은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단이 더 좋겠다고 판단하는 세력들이 남과 북에 분명 존재했고,
그 세력들은 일정한 힘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분단의 구조가 형성되었다고 봐야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지 않으면 지난 60년간 계속된 분단 구조를 절대로 설명 할 수 없다.
남과 북은 서로를 괴뢰라고 비난하며 살아왔지만,
분단을 유지시키는 내부적인 힘이 없었다면 60년씩이나 이 체제가 지탱 되었을 리 만무하다.
소련이 붕괴되고 중국은 사실상 자본주의로 돌아선 이 마당에도 여전히 한반도에서는
분단이 계속되고 있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수 있을까? 그저 김 일성,김 정일의 독재 때문이라고?
그런 시각으론 세상의 변화를 더 이상 수용하기 어렵지 않을까? 

결국 상대방이 여태까지 분단 구조를 유지할 수 있었던 원동력에 대해서
이제 남과 북 모두가 허심탄회하게 바라봐야 할 필요가 여기서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내부의 힘이 미약했던 베트남 군부정권은 막대한 미국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붕괴되었지만,
남과 북의 정권은 수 십년 간 유지되었고, 때로는 각각을 지원하는 외세와 갈등을 빚기도 했다.
이러한 현상은 남과 북 모두가 단순히 외세에 의해 유지되는 정권만은 아니라는 소리다.
이제 상대방을 인정하면서 지나간 과거와 미래를 봐야 하는 충분한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도둑같이 찾아온 해방이후 ,
한반도에는 내부적으로 남과 북이 통합 할 수도 있고
분열 할 수도 있는 구조와 여건이 공존했지만,
이 때 외세의 힘과 우리의 내부 역량은 불행히도 분열의 길로 작동하고 말았다.

마지막 질문이 남았다.
소련군 사령관 치스차코프가 실로 적절하게 지적했듯이,
왜 우리는 우리수중에 달렸던 행복의 필요충분조건들을
죄다 던져버리고 전쟁과 분단이라는 엄청난 쓴잔을 선택하고 말았던 걸까?

아니, 왜 우리는 여전히 그 쓴잔만이 유일한 선택이라고 아직도 믿고 있는 걸까?
여전히 치스차코프는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모든 선택은 아직도 우리에게 달려있다고.

출처 : 다시보는 한국전쟁
글쓴이 : 전국유족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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