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김보현(金輔鉉, 1871년 음력 8월 19일 ~ 1955년 양력 9월 2일)
평안남도 출신 농민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3,4대 주석 김일성의 할아버지이며 국방위원장 김정일의 증조부이다. 독립운동가 김형직, 김형권의 부이다. 자손들의 독립운동을 후원해 주었고, 일찍 부모를 여읜 주석 김일성을 양육하였다.
1) 생애
평안남도 대동군에서 만경대 산당지기인 김응우의 외아들로 태어났으며, 김응우가 일찍 사망하여 소작살이로 어려운 생활을 했다. 리보익과 결혼하여 김일성의 아버지인 장남 김형직 등 3남 3녀를 낳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나라와 인민을 사랑하는 애국심과 봉건관료배들과 외래침략자들을 반대하는 정신이 남달리 강했다고 한다. 봉건통치배들의 사대투항주의적 매국행위로 말미암아 일제에게 나라의 운명이 농락당하는 것을 통탄하며 자제분들에게 그런 답답한 심정을 기회 있을 때 마다 토로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아들과 손자 분들이 조국광복을 위해 투쟁하는 것을 대단히 대견스럽게 생각하며 쪼들리는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나라 일에 대해서는 그 어떤 어려움도 견뎌야 한다고 힘주어 말하면서 기어코 조국해방 위업을 이루고 돌아오기를 학수고대하였다고 한다. 장손인 김일성이 태어났을 때 본명인 ‘김성주’라는 이름을 지어준 사람으로 알려져 있고, 김형직, 김일성, 김정일에게 만경대의 집에서 각각 벼루와 먹을 주고 글을 써보라고 하여 김형직은 좌우명 ‘지원’을, 김일성은 ‘조선독립’을, 김정일은 ‘김일성장군 만세!’라는 글을 적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그는 일제 강점기에 민족적 절개를 지킨 지사이자 손자가 집권한 뒤에도 소박하게 농사를 지으며 산 애국자로 북조선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으며, 농업 간부 재교육을 위한 김보현대학은 1994년 그의 이름을 따서 개칭한 명칭이다. 해방이 되어 손자인 김일성 주석이 새 나라 건설에서 수상의 위치에 있어 좋은 곳에 모시려 하였으나, 애써 사양하고 고향에서 농업에 전념하며 편안한 생활을 거부했던 진정한 농부였다. 소박하고 겸손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1948년 4월 전조선 지도자 연석회의때 입북한 백범 김구는 만경대에 있던 그를 만나 대담하였다. 비슷한 연배였던 김보현 역시 명성황후를 시해한 시해범을 잡은 것과 동학군으로 활동하던 것을 접해듣고 알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소박한 농부생활을 하다가 84살에 세상을 떠났다. 만경대의 묘지에는 그의 반신상이 세워져 있다.
2) 평가
평양시 만경대 구역 만경대에서 탄생하여 이곳에서 소작살이로 농사를 지으며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자손들의 애국활동을 열렬하게 지원해 준 애국심이 강했다고 평가된다.[1] 백범 김구도 남북연석회의 참석차 평양에 갔을 때 김보현을 만나보고 그의 소박한 애국심에 탄복했다는 일화도 있다.
3) 가족사항
관계 |
성명 |
|
부 |
김응우(金膺禹) |
|
모 |
이(李)씨 |
? |
처 |
리보익(李寶益) |
1876년(음력) 5월 31일 ~ 1959년 10월 18일 |
장남 |
김형직(金亨稷) |
1894년(음력) 7월 10일 ~ 1926년 6월 5일 |
차남 |
김형록(金亨祿) |
|
삼남 |
김형권(金亨權) |
1905년 11월 4일 ~ 1936년 1월 12일 |
장녀 |
김구일녀(金九日女) |
|
차녀 |
김형실(金亨實) |
|
삼녀 |
김형복(金亨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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