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판 킬링필드’ 57년전 민간인 학살 현장을 가다 | |
[홍세화의 세상속으로] 충북 청원 분터골 700명 대전 골령골 수천명등 한국전 30만~100만 민간인 희생 특별법 시한 4년…인력·예산 부족해 규명 난항 | |
홍세화 기자 | |
때는 한여름이었다. 이곳에선 6·25 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3~4일께부터 열흘 동안 청주경찰서와 청주형무소 수감자 300여명과 청주·청원 지역 보도연맹원 700여명이 집단 학살됐다. 보름 뒤엔 인민군이 진주했다. 유가족들이 수습하러 왔을 때 주검들은 이미 부패해 있었다. 게다가 학살당한 주검 위에 또 다른 학살이 행해져 주검들은 마구 뒤엉켜 있었다. 얼굴 아닌 옷이나 허리띠 등으로 신원을 확인할 수 있었던 일부 주검은 수습됐지만, 다수는 가매장 상태로 버려졌다. 그 뒤 그들을 찾은 것은 유가족이나 제사상이 아닌 들짐승과 약제상들이었다. 인골이 몸에 좋다는 속설 때문이었다. 그리곤 버려졌고 잊혀졌다. 57년 동안. 인민군이 진주하고 세상이 바뀌자, 이번에는 우익과 경찰, 그 가족들에 대한 보복 살해 행위가 벌어졌다. 그 뒤 세상은 또 다시 바뀌었다. 증오는 증오를 불렀고, “너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는 강박감까지 결합된 잔혹행위들이 전국 곳곳에서 벌어졌다. 사상범과 보도연맹원 학살, 미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냉혈한 죽임이었다면, 부역자 학살은 뜨거운 증오심이 부른 잔인한 죽임이었다.
[홍세화의 세상속으로] 57년전 학살 현장을 가다
그렇게 한국전쟁 전후에 학살된 민간인은 얼마나 될까? 학자에 따라 30만명에서 100만명에 이른다. ‘킬링 필드’는 중국 난징이나 캄보디아, 루완다, 보스니아만의 일이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이 바로 집단학살의 땅이다. 그럼에도 우리 젊은 세대들은 유태인 학살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의 10분의 1만큼도 이 사실을 알고 있지 못하다. 성찰 이성에 눈뜨지 못한 인간에게 차이는 차별과 억압, 배제를 불러일으킨다. 특히 종교와 사상의 차이는 그 차이를 선과 악으로 구분해 더 무서운 결과를 낳는다. ‘악’은 차별이나 억압의 대상을 넘어 제거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차이를 빌미로 얼마나 잔인해 질 수 있는지, 집단 광기에 휩쓸릴 수 있는지에 대해 우리는 그동안 자신을 충분히 돌아보았을까. 아직 “빨갱이는 죽어도 싸다”와 “전쟁 상황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에 머물러 인간 생명의 소중함을 놓치고 있는 게 아닐까?
“제가 바로 이들의 상주”라고 말하는 김 회장의 바람대로 진상이 규명되고 우리 국민이 함께 상주가 돼 원혼들을 위무할 날은 올 수 있을까? 2005년 12월 1일 활동을 시작한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민간인 희생자로 신고 접수된 1만여건 가운데 7539건에 대해 조사개시 결정이 나 있는 상태다. 유형별로 1천건이 넘지만 지금까지 보고서가 나온 게 5건 뿐이다. 한나라당과 타협의 산물로 태어난 관련 특별법은 4년 한시법이다. 2년 연장은 가능하지만 지금의 인력과 예산으로 진실규명이 제대로 이뤄질 수 있을까? 박만순 위원장과 김종현 회장은 지자체의 무관심을 질타했다. 지원은커녕 위령제나 개토제에 도지사, 군수, 지방의원의 얼굴조차 보기 어렵다고 한다. 올해 유해 발굴을 위해 책정된 예산이 1억원이라는데, 부족한 것은 인력과 예산 이전에 인간에 대한 예의였다. 기획위원 hongs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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