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한국전쟁사 6
- 왜 1950년 6월 이었는가?/중편 -
다시 쓰는 한국전쟁사 6
- 왜 1950년 6월 이었는가?/중편 -
여기레 정통성 있는 놈들이 어데 이서? 전쟁은 원래 정통성 없는 놈들이 정통성 세울려고 하는 기야!~ -영화 [황산벌]에서 연개소문의 대사 중-
90년대 중반까지 한국전쟁의 개전을 알려주는 자료는 전쟁 직전 북한이 전군에 내린 정찰 명령 1호가 유일한 것이었다. 그러나 사학계 일부에서는 이 자료의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자료가 러시아어로 되어 있고 유엔군이 북진할 때 발견된 원본은 사라지고 복사본만 남아 있기 때문이다. 당시 북한군에는 러시아 고문단이 있었으나, 중국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이 훨씬 많았던 관계로 중국어가 통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 외 유엔 한국위원단의 전쟁 발생 1주전 한국군 지역 보고서가 있으나, 이 역시 결정적인 자료가 되진 못한다.
한국전쟁 개전과 관련하여 획기적인 진전을 안겨준 것은 소련이 붕괴된 후 공개된 구소련의 문서들이다. 이 문서들은 옐친의 92년 방한 때 우리에게 전달되어 현재 외교안보연구원에 번역되어 소장하고 있다. 1. 49년 봄, 김 일성과 스탈린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위의 구소련 문서 중 김일성과 스탈린의 대화록은 50년 6월 왜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결정적 단서가 된다. 먼저 49년 상황을 보자. 49년 3월 5일 스탈린과 북한 대표단(단장: 수상 김일성)의 회담 요지 소련측 배석자:비신스키 외상, 스티코프 주북한대사 북한측 배석자:부수상겸 외상 박헌영, 부수상 홍명희, 국가계획위원장 정준택 상업상 장시우, 교육상 백남운, 체신상 김정주, 주소대사 주영하 김일성: 남조선에는 아직 미군이 주둔해 있고, 그들은 우리를 위협하는 여러 책략을 도모하고 있다. 우리는 육군을 가지고 있으나 해상은 무방비상태다. 이에 대해 소련의 지원이 필요하다 스탈린: 남조선에는 미군이 얼마나 있는가? 김일성:2 만명 정도다 스탈린: 남조선에도 군대가 있는가? 김일성: 6만 명 규모의 군대가 있다. 스탈린: 이 숫자는 상비군에 한하는가? 아니면 경찰 포함인가? 김일성: 상비군만의 숫자다 스탈린:(조롱하듯)당신들은 그런 병력을 두려워 하는가? 김일성: 아니다.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해전에 대비한 부대가 있으면 좋겠다. 스탈린: 북조선과 남조선 중 어느 쪽 군대가 강한가? 박헌영: 북쪽이 훨씬 강하다. 스탈린: 북조선에는 일본이 남기고 간 조선소는 없는가? 가령 청진 같은데 말이다. 김일성: 없다 스티코프: 조선소가 있으나 규모가 작은 것이 흠이다. 스탈린: 남조선군에 북조선 공작원들이 침투되어 있는가? 박헌영: 침투해 있으나 아직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스탈린: 아직 모습을 드러낼 필요는 없다. 잘하는 것이다. 남 역시 스파이를 침투 시켰을지 모르니 철저한 감시가 필요하다는 걸 잊지 마라. 김일성: 스파이 활동에 대해서는 우리도 경계하고 있다. 스탈린: 38선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남이 침입해서 몇 개의 거점을 점거했으나 곧 탈환했다는데 사실인가? 김일성: 강원도 일대에서 소규모충돌이 몇 번 있었다. 적들은 충분한 무기를 소지 하지 않았고 우리 정규군이 출동하면 즉시 퇴각했다. 스탈린: 격퇴한 것인가? 아니면 그들 스스로 물러난 것인가? 김일성: 교전 끝에 격퇴시켰다. 그들은 국경선에서 퇴각했다. 3월 7일의 대화록 김 일성: 지금 상황으로 볼 때 우리가 한반도를 군사적 수단으로 해방시킬 필요가 있고 충분히 가능하다고 믿는다. 남조선 반동세력은 평화통일에 결코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북조선을 공격하기에 충분하다고 믿을 때 까지, 나라의 분단을 영구화 할 것이다. 지금은 우리가 주도권을 확실히 장악할 수 있는 최선의 기회다. 우리 군이 남조선보다 강하다. 게다가 우리는 남한내에서 강렬하게 일고 있는 게릴라 운동의 지지를 받고 있으며 남조선의 인민대중들은 친미정권을 증오하고 우리를 도울것이 확실하다. 스탈린: 북이 먼저 남침해서는 안된다. 세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북한 인민군은 남조선 군대에 비해 압도적으로 우월하지 못하다. 내가 알기론 수적으로도 뒤진다. 둘째 아직 남조선에는 미군이 있다. 적대관계가 되면 미군이 개입할 것이다. 셋째 38선에 관한 미소협정이 아직도 유효하다. 이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우리 측이 협정을 파기한다면, 그 것은 미국이 개입할 수 있는 이유가 된다. 김일성: 그렇다면 가까운 장래에 한반도를 통일할 기회가 없다는 뜻인가? 우리 인민들은 다시 하나가 되고 싶어하고, 반동정권과 미국 상전들의 멍에로부터 벗어나기를 열망하고 있다. 스탈린: 적이 침략의도를 가지고 있다면 조만간 침략해올 것이다. 그들이 공격해오면 반격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그때 반격하면 모든 사람들이 당신의 행동을 이해하고 지지할 것이다.
이 자료에서 우리는 북한지도부의 무력 통일 방침이 전쟁 발발 최소한 1년 3개월 전부터 계획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미 대화록에서 보았듯이 이에 대해 스탈린은 분명히 반대하고 있었다. 스탈린의 사주에 의한 괴뢰 김일성의 남침이라는 전통주의해석은 유효성을 상실한다. 스탈린은 한반도문제로 미국과의 전면전만은 극력 피하고 싶었다. 또한 이 대화록에서 보듯이 스탈린은 정말 한심하리만큼 한반도 상황에 관심이 없었다. 게다가 정확한 정보조차 공유하지 않고 있었다. 스탈린은 남북한의 군대규모조차 제대로 몰랐으니깐. 스탈린은 김일성의 말을 경청하지 않고 있었으며 그가 미국에 대해서 언급했던 부분이나 먼저 전쟁을 해서는 안 된다는 충고는 분명 대국적 견지에서 옳은 판단이었다.
그러나 이 회담 이후 국제정세는 3가지 중요한 반전이 일어난다. 1.그토록 염려되던 미군이 철수했다. 불감청 고소원이었을 것이다. 2.중국 공산혁명의 성공 이는 47년 북한에서 중국으로 파견된 병사들의 귀환과 더불어 팔로군소속의 노련한 전투경험을 가진 조선인 정예군의 북한군 편입을 의미했다. 약 3개 사단의 정예병들이 북한군에 새로 투입된다. 압도적 전력의 구축이었다. 그리고 중국의 성공이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을 크게 고무했음은 물론이다. 남조선의 정부는 국민당 정부 못지않게 민심의 지지가 없고 부패했으니, 통일혁명의 가능성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고 판단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3.소련의 원자탄 실험 성공 이는 미국의 절대적인 핵 우위 상실과 더불어 국제적인 힘의 균형이 다시 대등해졌음을 의미했다.
49년 봄과는 완전히 다른 상황이 전개된 것이다. 50년 초 김일성은 스티코프 대사에게 다시 한번 스탈린을 만나게 해달라고 조른다. 그러나 스티코프 대사는 북한의 남침계획 이 현실성이 없고 정세파악이 너무 낙관적이고 이상주의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 견해를 분명히 스탈린에게 전달했지만 면담은 성사되었다. 전쟁이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50년 3월과 4월에 있었던 김 일성과 스탈린의 최종 전쟁 준비 점검은 하편에서 자세히 언급하겠습니다. 2. 왜 김일성은 남침을 했는가? 김 일성은 한국전쟁 44년후 사망할 때까지 단 한번도 남침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공식적으로만 그랬을 뿐이다. 그는 비공식적으로 남침을 여러 차례 인정한바 있으며 사과의 의미까지 시사했다. 달변의 그가 왜 미국의 개입을 제대로 예측하지 못했는가라는 질문에는 대답을 끝내 하지 못했다 하니, 그 역시 평생 당시의 오판을 잊지 않았으리라고 짐작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평생 이중성을 보였다. 여기서 우리는 경직된 도그마에 빠진 사람들에게는 책임의식과 윤리의식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매우 합리적이며 정당한 김일성 비판을 가능하게 한다.
‘스탈린의 마키아벨리적 세계전략의 이해가 결여된 채 한국전쟁 직전 김일성이 보여준 낙관적이고 안이한 속전속결론은 막스베버의 책임윤리 부재의 전형을 보여준다. 김일성은 일단 전쟁이 시작되면 북한의 요구를 더 잘들어줄거라고 생각했지만 스탈린은 자신의 정치적 목적에 부합되지 않는다고 판단 될 때에는 김일성의 요구를 거절했다‘라는 김영호의 지적은 매우 타당하며 치명적인 김일성 비판이 된다. 여기서 우리는 2차대전당시 스탈린이 44년 여름 바르샤바에서 일어난 민중의 봉기를 철저히 외면했던 일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같은 공산주의자라도 자신의 이익에 배치되면 늘 발휘되는 스탈린의 마키아벨리스트적 기질을 김일성은 좀 더 확실하게 인지했어야 했다. 역사는 그래서 중요한 것이 아닐까? 과거를 모르면 또 같은 실수를 범하게 되니까.
각설하고 이 대목에서 우리는 왜 김일성이 저런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는지를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당시 북한사회는 놀라울 만큼 빠른 민주개혁을 통해서 국가체제를 확고히 하고 있었으며 대한민국 정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의 지지도를 확보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많은 부분을 소련과 중국에 의지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정권의 안위마저 모두 미국에 의존해 간신히 호흡을 이어가는 대한민국의 이승만 정권과는 차원이 달랐다. 한국전쟁에 대한 전통적해석주의자들은 결코 이 점에 동의하지 않겠지만, 그 것은 근거와 자료가 입증해주는 객관적 사실이다.
김 일성은 분명 자만에 빠질 여건이 충분했다. 거기에 남로당계의 결정적인 오판이 더해지자 일은 걷잡을 수 없는 지경으로 접어들고 만다. 그리고 여기에 결정적인 한 가지 요소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승만 행정부의 입버릇처럼 되뇌던 그 근거 없는 ‘북진통일론’ 이 승만의 공갈 때리기는 아무런 책임도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미 정부수립이후 자신을 비판하는 세력은 모두 빨갱이로 몰아서 잔혹하게 처단해버리는 이승만 정권을 보면서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이 어떤 생각을 하게 될지 역으로 톺아볼 필요는 없을까?
제주도 4.3항쟁과 여순항쟁을 지켜보며 그들은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아침은 해주에서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겠다고 큰소리를 치는 신성모와 채병덕을 보면서 북한이 ‘최선의 방어책’을 골몰하지 않았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일 아닐까?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이승만 행정부가 일관되게 평화통일론을 주창하고 있었다면 북한이 무슨 명분으로 전쟁을 준비할 수 있었을까? 전후에도 평화통일을 주창했다고 대선후보과 자신의 초대내각 장관까지 역임한 죽산 조봉암을 사형시켜버린 이승만정권의 경직성과 우매함은 전쟁발발책임의 분명한 한축을 이루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실패한 좌우합작과 민족분단이 결국 동족상잔의 전쟁으로 직결되리라고 본 몽양과 백범의 지적을 돌이켜 봐야 한다. 누가 먼저 전쟁을 일으켰느냐에 근거해서 한국전쟁의 모든 책임을 그쪽으로 몰아버리는 전통주의적 해석으로는 그렇기 때문에 한국전쟁의 지극히 단편적인 면밖에 볼 수 없다는 비판에 무력해지는 것이다.
세상사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결국 당시 남과 북의 모습 모두가 책임윤리가 완전히 실종된 모습이었을 뿐이다. 이승만의 근거 없는 공갈 때리기에 대해서 김일성은 대량살육이 필연인 전쟁으로 화답했으니, 정말 이 걸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참으로 난감할 뿐이다. 다만 몽양의 죽음이후, 그들 모두 대화와 타협으로 민족의 문제를 풀 생각보다는 약간의 성과에서 얻은 섣부른 자신감과 자신들만이 조선민족의 정통세력이라는 근거 없는 오만과 배타심에 빠져 전쟁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긴 이상주의적 배타편협 북한정권이나, 쥐뿔도 없으면서 걸핏하면 북한을 정복하겠다고 공갈포를 날려 상대방에게 차분하게 전쟁준비를 할 명분과 근거를 만들어 주면서도 자기들이 무슨짓을 하고 있었는지 조차 모르고 있었던 친일 반민족 세력들이 주축이 된 명분도 정통성도 제로에 가까웠던 외세 의존적 한심천만 남한정권이나,
정작 이 땅에 살고 있던 민중이 앞으로 겪게 될 고통과 희생에 대해서는 아무도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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