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의술 명의열전 ⑥ 세계 최고의 신의(神醫) 장병두
비나리 - 여는 마당
심연(深淵)이다.
물이 맑으면 깊어도 바닥이 보이지만, 너무 깊으면 물이 아무리 맑아도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법이다. 장병두 선생님을 뵈면 뵐수록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을 들여다보고 있는 느낌이다. 도대체 저 불가사의한 의술과 지혜는 어떻게 해서 터득된 것일까?
호칭부터 정리하자.
사람들은 할아버지라고 부른다. 백 살 하고도 두 살. 범인이 생각하기 어려운 연세이시니 할아버지라 해도 증조부, 고조부 뻘이시다. 그러니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졸자(拙者)의 느낌은 다르다. 가까이서 꽤 대화를 나누어본 감으로는 선생님은 ‘할아버지’가 아니다. 강기(剛氣)와 포부를 아직도 간직하고 계시다. 사람을 호령할 기개가 여전히 살아있다. 옳 그름이 분명하시고, 스스로 ‘기분파’라고 하실 정도로 감정도 상당히 분방하시다.
이런 분을 어떻게 할아버지라고 하겠는가! 당신의 생각도 그러실 것으로 짐작하지만, 졸자는 그 강기(剛氣) 앞에서 감히 할아버지라고 보호성 존칭을 사용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저 ‘선생님’, 무릎 꿇고 배울 것이 무궁무진하니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하고 무난할 것이다. 감사의 말씀을 먼저 올린다. 먼저 하늘에 감사드리고, 다음으로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우리 민중의술의 명의를 많이 찾아다녔지만, 정말로 그 표본 중의 표본, 대표자를 만났다. 우리 민중의술의 표상을 너무나도 그대로 지니신 분이다.
민중의술의 표상, 그것이 무엇인가?
자생적인 것, 학교에서 배운 것이 아니라 민중의 삶 속에서 저절로 터득된 것이 그 하나이다. 선생님은 서당을 몇 달 다닌 것 외에는 학교 문 앞에도 가보지 않으시고도 독보적인 의술의 경지를 여셨으니 여기에 꼭 맞다. 지식으로 따지고 까부는 것이 아니라 지혜로 통찰하여 단숨에 터득된 것이 그 둘이다. 그 지혜는 선천적인 생이지지(生而知之)가 아니면 반드시 정신수련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멀리 있지 않고, 생활 속에 있으며 간명한 것이 그 셋이다. 서양식 분석학으로 따지면야 복잡해질는지 몰라도 현상적으로 선생님이 펴시는 의술은 진단에서 처방까지 너무 간단하게 이루어진다. 탕약으로만 병을 고치시는데, 그 약 또한 먹기가 일반 한약과 달리 너무 자연스럽고 부담이 없다. 오로지 생명을 위한 것이고 돈을 위한 것이 아님이 그 넷이다. 약재가 들어가고, 그것도 비교적 좋은 약재만 쓰시기 때문에(좋은 약재가 아니면 안된다고 하신다) 기본적인 원가가 소요되고, 따라서 최소한의 돈을 받지 않을 수 없지만, 어려운 사람, 어린이, 노약자 등에게는 무료로 많이 해주시고, 치료의 효과가 확실한 데 비하면 그 약값은 전혀 비싼 것이 아니다.
하늘만 아는 기연
백 두 살이 되도록 소수의 아는 사람만 알고 있던 선생님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정말로 하늘만 아는 인연의 기묘함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병을 너무 잘고치다 보니 한의사협회에서 고발을 하게 되었고, 법정에 서게 된 것이 바로 그 인연의 출발이다. 졸자와의 인연도 그로 인함이고, 그 후에 전개된 선생님의 생명의술 살리기 운동과 단체의 결성, 그리하여 마침내 매스콤을 통하여 온 세상에 널리 퍼지게 된 것도 그러하다.
한의사들은 선생님의 의술을 매장하려고 손을 댄 일인데, 그것이 오히려 천하의 신의(神醫)를 세상에 드러내고 그 의술을 살리면서 이 땅의 민중의술을 세계만방에 펼칠 기회로 전개되었으니, 인연의 기묘함을 하늘이 아니면 어찌 알 수 있겠는가!
그 출발과 경위를 몇 가지 치료사례와 더불어 간략히 적는다.
치료, 수사, 재판
마곡사에 계신 성천 스님. 20대부터 병을 앓았다. 17년간 여러 가지로 노력했으나 점점 안 좋아져갔다. 소화불량, 변비에다 피부는 습진 같은 것이 있어 몇 년간 흰 장갑을 끼고 살았다. 황달, 흑달로 악화되면서 몸무게가 10kg이나 줄었다. 맥도 없고 의욕도 없어 하루종일 누워있어야 했다. 나중에는 심신이 분리되는 느낌이 왔다.
대전에 있는 노인 한의사에게서 암으로 진단받았다. 어머니가 위암으로 48세 때에 전주 우석대학병원에서 돌아가신 터였다. 약을 지어 인천 용화사에 갔더니 어느 스님이 ‘서울에 용한 할아버지가 있다’고 하였다. 한의사가 지어준 약은 팽개치고 그 길로 할아버지를 찾아가서 뵙고 할아버지가 지어주는 약을 먹었다. 지금부터 15년여 전의 일이다.
3개월을 먹고 나니 할아버지가 “됐어” 하였다. 차츰차츰 몸이 좋아졌다. 그 뒤로는 계절이 바뀌거나 할 때만 할아버지에게 몸을 점검받고 약을 지어 먹었다. 할아버지는 성천스님의 집안 내력으로 위가 특수구조로 되어 있어 병이 온 것인데, 다른 사람은 못 고친다고 하신다.
군산남중 한문교사 문계수 선생은 갑상선암(임파선암)을 15년 정도 앓았다. 마침내 병원에서는 한 달밖에 살지 못한다고 선언했다. 오빠인 성천스님을 통하여 할아버지를 찾아갔다. 그리고 완치되었다. 문선생 주변으로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문선생도 병고에 시달리는 환자들을 보면 할아버지를 찾아가보라고 알려주었다. 환자들이 서울로 몰려가기 시작하였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할아버지의 치료를 받기 위해 서울로 올라가게 되자 환자들의 불편을 걱정한 할아버지께서 한 달에 한 번씩 군산으로 내려와서 치료를 해주게 되었다. 그러자 할아버지가 오시기로 한 전날 저녁부터 사람들이 모여들어 기다렸다. 군산뿐만 아니라 전주, 익산, 광주, 순천, 여수, 목포, 대구, 서울 환자까지 해서 5백 명 내지 6백 명이 기다렸다. 할아버지는 그 많은 환자들을 5박6일 동안에 다 봐주셨다. 하루에 100여명을 보신 셈이다. 100살 넘은 나이에, 놀라운 일이 아닌가! 맥활법으로 1인당 2~3분이면 진단과 처방이 다 끝나므로 가능한 이야기다.
사람으로 하여금 병고에서 벗어나도록 치료의 인연을 맺게 해주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렇지만 좋은 일도 그 일에 너무 부대끼면 피곤한 일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문선생과 그 가족들은 그 인연을 오로지 ‘복을 짓는다’는 애틋한 정성으로 키워내었다.
군산과 전북의 한의사협회에서 고발을 했다. 2006년 6월의 일이다. 무면허의료행위를 했다는 이유이다. 많은 돈을 받았다고 하여 부정의료업자로 몰려 보건범죄단속에 관한 특별조치법 위반죄가 되었다. 문선생과 동생도 함께 입건되었다. 경찰의 조사를 거쳐 9월에 검찰에서 조사를 받았다. 문선생과 남동생은 구속이 되었다. 할아버지는 고령이라 구속을 면했다.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 사이에 할아버지의 치료는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암울한 일이다. 그러나 하늘의 인연은 기이하여 그 깊이를 헤아리기가 심히 어려운 법. 이 일이 앞으로 어떤 일을 연쇄적으로 몰고 올 것인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하였다. 치료받은 사람들과 치료를 받던 환자들이 들고 일어났다. 이미 경찰에서 조사하는 동안에도 할아버지는 환자들의 아우성 때문에 여관에서 진료를 해 줄 수밖에 없었던 터였다. 환자들의 말에 의하면 수사기관에서 조사를 받고 여관으로 돌아오시면 할아버지는 기다리고 있는 환자들을 보면서 이렇게 한탄하셨다고 한다.
“이 죽어가는 환자들은 어떻게 하라고 ...”
병원과 한의원을 전전해도 고치지 못하고 고생하던 병을 할아버지가 지어준 약을 먹고 고쳤거나 고치고 있는데, 이런 명의를 왜 처벌하느냐, 선처해달라는 등의 탄원서가 법원에 쇄도했다. 약이 중단된 환자들은 더 아우성이다. 그렇지 않겠는가!
1심 재판이 끝나고 문선생은 항소를 포기했다.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당한 수모의 고통과 그로 인해서 재발한 후두암이 그녀의 싸울 용기를 접어버린 것이다. 집행유예가 확정되면서 교직에서도 파면되었다. 나중에 재판을 받고 역시 집행유예와 벌금형을 병과받은 할아버지는 항소를 하였다.
분노한 환자들이 마침내 단체를 구성했다. 「장병두 할아버지 생명의술 살리기 모임」.
인터넷에 카페도 개설하였다. http://cafe.naver.com/lovelifejang 누리꾼들의 의견이 폭주했다. ‘장병두’라는 단어는 인터네 검색어 1위가 되었다. 신문도 관심을 표하며 보도를 하기 시작했다. 방송도 나섰다. 유례가 없는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 동안 민중의술을 애써 외면하며, 왜곡될 대로 왜곡되어 백성의 생명을 옥죄는 의료제도에 한마디 발언도 하지 않던 언론이 움직이는 역사적인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도대체 어떤 병들이 나았길래 이러는 것일까?
탄원서에 적혀 있는 치료사례들 중 몇 가지를 그 요지만 옮겨본다(선생님이 평생 치료해온 사례는 너무 방대하여 별도로 책으로 편찬되어야 할 일이고, 여기에서는 그 편린이나마 보여주는 정도에 그칠 수밖에 없다).
치료사례 - 그 편린들
① 본인은 2003년 여름 뇌경색으로 병원에 입원하여 3개월간 치료를 받은 후 퇴원하였으나 의사 선생님 처방이 본인이 살아있는 동안은 혈전용해제, 혈관확장제 등, 정확한 이름을 모르나 매일 3번씩 복용을 해야 한다고 하여 약 2개월간 복용을 했었으나 너무 많은 약으로 인해 위까지 아프고 식욕이 떨어져 삶의 의욕을 잃어갈 때 장병두 할아버지의 치료(약 2개월분의 탕약치료)로 인해 오늘날까지 병원약이 없이 건강하게 살아오고 있습니다. 다시 약을 먹어야 될 때가 된 것도 같은데 이제는 할아버지의 약을 구할 수 없다고 하니 본인으로써는 막막하기 그지없습니다.
② 본인은 고등학교 국어교사입니다. 아토피 피부병으로 심하게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피부과를 다니기 시작하여 유명하다는 한의원을 다 다녔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항상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의 약을 4개월가량 먹고 건강해졌습니다. 제 아들도 그 약을 먹고 아토피가 없어졌습니다. 제 아들은 지난겨울 감기에 걸린 후 비염이 되었는데, 할아버지가 무료로 석 달 동안 한약을 지어주시어 완치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제 어머니의 병(오줌소태, 소화불량, 중풍)까지도 다 낫게 해 주셔서 저희 집안에서는 항상 감사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저는 아토피만 나은 것이 아니라 그때까지 제 몸에서 좋지 않았던 간, 장염, 위염 등 모든 잡다한 것들이 다 나을 수 있었습니다. 한약을 먹으면 위가 안 좋아진다고 했습니다. 실제 다른 한의사의 한약을 먹을 때에는 위가 좋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달랐습니다. 몸 전체를 건강하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③ 저는 약사입니다. 1990년대에 충청북도 여약사회장을 맡은 바 있습니다. 남편과 사별한 후 선방에서 3년간 입선하였는데, 남편의 간병생활과 사별의 충격으로 피로가 누적된 탓인지 위염과 불면증으로 3년간 체중이 10kg 감소하여 40kg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아주대병원에서 종합 진단해보니 위염이 암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하였고 특별한 처방이 없었습니다. 그 무렵 할아버지를 알게 되어 진맥을 받고 약을 썼습니다. 할아버님은 마치 신선과 같은 비범한 모습이셨으며, 특이한 진맥법으로 맥진하셨고 아무 음식이나 먹어도 좋다 하시며 명년 4월쯤 46kg이 될거다 하시며 명년4월에 다시 오라 하셨습니다. 처음엔 효력이 있는지 없는지 몰랐으나 어느새 체중이 늘어 이듬해 4월에는 건강이 회복되었으므로 할아버님과의 약속도 잊은 채 지났습니다. 2005년 5월 자고 일어나니 양쪽 안구가 충혈 되어 있었습니다. 2,3일 기다려 보아도 낫지 않아 청주에 있는 안과에 가서 치료해 보았으나 효과가 없었고, 또한 위․소장․대장이 운동을 안하는 것처럼 소화도 안되고 먹먹하며 온 몸이 뻣뻣해지고, 표현하기 어렵게 몸의 상태가 몹시 불쾌하였습니다.
할아버님 생각이 떠올라 수소문 한 끝에 군산에 가끔 내려오심을 알게 되어 간청한 끝에 다시 뵙게 되었습니다. 할아버님은 맥진하시고 중풍 초기 증세라 하시며 약을 지어 주셨는데 그 약을 먹자마자 혈액순환이 됨을 느 꼈고 몸의 컨디션이 좋아졌습니다. 그제서야 생각해보니 가끔 씩 양쪽 손, 팔에 쥐가 나고 마비감이 왔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습니다. 사실 MRI 촬영이나 컴퓨터 촬영으로도 초기에 중풍을 발견하기란 어렵거든요. 그리고 눈에는 웅담으로 특수제조하신 안약을 주셨는데 그 약을 넣은 후 완전히 충혈이 가시고 나았습니다.
용화사에 다니는 신도중에 6년 전 자궁암으로 하혈을 많이 하며 실의에 빠져있었는데 할아버님 약을 먹고 완전히 나아서 건강한 모습으로 지내는 분을 알고 있습니다. 할아버지는 박정희 대통령도 치료해주고 선물로 대통령 휘호 액자를 받으셨고, 이병도 서울대 학장님 손자의 백혈병을 고쳐 주었고,경북대 병원장 아드님의 백혈병도 5년 전에 치료해주셨다고 들었습니다.
④ 본인의 어머니(87세)는 신태인읍에서 생활하시다가 2006. 5. 4. 갑자기 한쪽(우측 팔, 다리)에 마비가 와 일어서지도 앉지도 못하여 누운 채로 대소변을 받아내는 상태에서 우리병원에 입원하였습니다. 그런데 의사선생님께서 환자는 연세가 많을뿐더러 뇌경색에 중풍으로 우측에 마비가 와 팔다리를 못 쓴다고 하면서 치료가 어려우니 종합병원으로 옮기라고 하여 사실상 병원에서 포기한 상태였습니다. 저도 어머니 연세가 많아 고민하다가 병원에서 조차 포기한 상태이므로 결국 한방으로 치료하기로 결정하고 모친을 노인복지단체인 전주 원심원에 위탁하고 아주 절실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할아버지를 찾아가 진맥하고 한약을 복용한 결과 신기하게도 2주 만에 홀로서서 걸었습니다. 지금은 거의 정상으로 돌아와 집에서 평상시와 같이 아무런 문제없이 생활하고 있습니다만, 어머니는 지금도 할아버지 약을 한번만 더 먹었으면 원이 없겠다고 하시면서 왜 할아버지에게 데려가지 않느냐고 야단이십니다.
⑤ 태어난 지 10개월 된 아이가 홍역을 앓다 병원에 실려 간 건 2000년 12월. 심한 폐렴으로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어 가까운 병원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시작하였으나 별 차도가 없어 다른 지방병원을 전전하다가 서울대학교병원으로 옮긴 건 2001년 5월이었습니다. 그때 아이는 중환자실에서 인공호흡기를 달고 있었는데, 어렵게 병실생활을 하다가도 다시 나빠져 중환자실에 가기를 수차례 하였습니다. 2002년도에는 좀 좋아져서 집에 와 지내기도 했지만 감기만 걸려도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폐 때문에 다시 중환자실로 가곤했습니다.
2002년 월드컵으로 사람들이 광화문 광장에 모여 붉은 물결을 만들 때 우리는 중환자실에 연락 후 엠블런스를 타고 가며 차량 통제 때문에 발을 동동 구르면서 의식이 없는 아이 목의 캐뉼라에 숨이 멈추지 않도록 끝없이 앰브를 주물렀다 폈다 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그러다 2003년 말에 전주로 이사하여 병원 가는 횟수를 줄인 대신 집에서 가정용 인공호흡기를 하고 지냈습니다. 2000년 이후로 산소발생기는 아이의 생명줄로 언제나 인공산소를 대주어야 했습니다.
그러다 2005년 9월 언니 친구로부터 장병두 할아버님에 대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진료하시는 날에 찾아가보니 정말 많은 사람들이 치료를 받기위해 모여 있었다. 아침 10시쯤 갔더니 새벽부터 오셔서 기다리시는 분들도 많았는데 목에 호스를 하고 있는 아이를 보시고 문계수 선생님께서 “중환자니까 먼저 봐도 될까요?” 한마디에 그 많은 분들이 불평 한마디 없이 양보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아이의 주된 증상은 끝없는 덩어리 큰 노란 가래였습니다. ‘일곱 살 15kg 아이의 작은 몸 어디에서 저런 가래가 끝도 없이 나올까?’ 싶을 만큼 아이는 가래가 많아 숨쉬기를 힘들어하며 자주 파래지고 산책을 나갈 때도 몇 발짝 걷고 나면 안아줘야 할 만큼 체력이 약했습니다.
할아버님이 조제해 주신 약은 작은 한 봉지를 하루 세 번 나누어 먹었는데 이틀 6번을 먹고 나자 “그 많던 가래가 다 어디로 갔을까?” 의구심이 생길 만큼 급격히 줄었습니다. 그러던 두 달을 복용한 어느 날, 산책을 가던 아이가 오빠와 함께 잰 걸음으로 앞서 가더니 껑충껑충 뛰는 것이 아닙니까? “재미있다”하며 오빠와 달리기 경주를 하듯 달리는 모습을 보니 얼마나 기쁘고 감사하던지..... 그 후로 언제나 백짓장처럼 하얗기만 하던 얼굴에 분홍빛 혈색이 돌고 1km 떨어진 오빠학교에 천천히 걸어갔다 올만큼 회복이 되어 목에 뚫었던 구멍을 봉합하는 수술을 받고 관을 제거하였으며 24시간 하고 있던 산소도 거의 하지 않을 만큼 건강해졌습니다. 얼마 전 외래 진료로 서울대학병원을 갔을 때 전에 중환자실에서 아이를 돌봐 주셨던 간호사님이 “애가 정말 그 아이 맞아요?”하시며 이리 저리 자꾸 만져보고 몇 번이나 확인하시던 모습에서 또 한번 아이의 회복을 확인 할 수 있었다.
할아버님이 진맥을 하시며 “애는 폐가 문제가 아니라 장에 있는 뭔가가 자꾸 폐를 건드리며 치는 거야, 심장과 위도 좋지 않고” 하셨을 때는 폐가 좋지 않을 뿐인데 왜 다른 장기가 문제라 하실까 의아 했지만 지어주신 약이 신기할 정도로 들어맞는 걸 보며 인체의 모든 면을 꿰뚫어 보시고 근본적인 원인을 찾으신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⑥ 본인(고등학교 교감)의 장남(1982년생)은 2003년 4월경 조울증으로 인하여 전북대학병원, 김제 미래병원 등에서 6차례나 입원치료를 받고 투병 중이었던바, 우연히 주위에서 장병두 할아버지가 만성 및 불치병에 대하여 치료를 잘한다는 입소문을 듣고 2004년 10월경부터 약 4개월에 걸쳐서 한약을 구입하여 먹고 난후 완치되어 지금 현재는 학교생활(대학 3년)도 잘하고 있는바 전문 정신병원에서도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⑦ 저(금강대학교 불교복지학부 교수)는 1991년 1월 척추인대 파열의 부상을 당해 그 후유증으로 사지마비 등 여러 증세가 악화되어 1992년 1월 ~ 2월 영동세브란스병원 재활의학과에 입원치료를 받는 등 여러 병원과 의원 등에서 갖가지 치료를 받았으나 안타깝게도 점점 증세가 악화되어 심각한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1995년 우연히 장병두 선생님을 소개받아 그분의 치료를 받고 건강을 완전히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그분이 의술뿐만이 아니라 도학(道學) 분야 등에서도 그야말로 신이(神異)한 경지에 있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분을 만난 것을 항상 감사히 여기면서 가르침을 받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2005년 7월 종합건강진단을 받아본 결과 갑상선결절이 발견되어 2005년 9월 을지병원 내분비과에서 정밀진단을 받고 갑상선질환이 있음을 확인하였습니다. 바로 장병두 선생님의 진료를 받은 후 3개월 간 약을 복용하였는데, 금년 6월 건강검진을 받아본 결과 아무런 이상이 없었습니다.
⑧ 저는 초등학교 교사입니다. 2003년 첫아이를 출산하고 두 달 무렵이 지났을 때 말초성 안면신경마비가 좌측에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왼쪽의 머리가 깨질듯이 아팠고, 소리가 마치 귀 옆에 확성기를 켜둔 것처럼 여과 없이 들리고, 입이 점점 오른쪽으로 돌아가서 보기에도 흉측할 정도로 틀어졌습니다. 2003년 12월 초쯤 아이와 친정이 있는 전주로 내려가서 원광한방병원에 다니고 침과, 한약 물리치료 등 치료를 꾸준히 받았으나 증세는 그리 나아지지 않고 조금이라도 찬바람을 쐬거나 몸이 안좋을 때면 다시 안면마비의 증후군이 나타나곤 하였습니다. 개학이 임박하여 인천의 학익동에 위치하고 있는 감초당한의원에서 침치료를 받던 중 둘째아이가 2004년 4월에 생겨서 그나마 받던 치료마저 중단한 상태여서 심하지는 않았으나 다시 입이 틀어져 주변의 친척분들이나 직장에서도 한눈에 알아보시고 걱정하실 정도로 몸 상태가 좋지 않았습니다.
정말 너무 힘들어서 비관적인 생각만 하고 살았던 시기였습니다. 아이를 출산하고도 갑자기 머리가 아파서 드러눕거나 특히 좌측 머리 부분이 심하게 아프고 조금만 감기증세가 있어도 안면신경이 점점 굳어지는 듯한 증세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럴 때면 집 가까운 한의원에 가서 치료를 받아 임시방편으로 그 순간만 모면하면 또 며칠은 별다른 증세 없이 생활하고 하는 생활이 반복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이렇게 아픈 것을 남편이나 시댁에서도 걱정해 주셨지만 이유 없이 멀쩡히 있다가 갑자기 아프다고 하는 일이 빈번해지자 점차 남편도 시댁어른도 꾀병이라고 생각하시기에 이를 정도로 원인 모르게 아픈 나날이 계속되었다.
2005년 8월 말경 시댁 식구들과 제주도에 여행을 가기 위해 둘째 아이를 맡겨놓은 상태여서 아이를 찾기 위해 친정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그때도 몸이 좋지 않아 친정어머니께서 잘 아시는 한의원(김제 삼성한의원)을 찾게 되었습니다. 진맥을 해보신 그때의 한의사님의 표정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도대체 몸이 어디서부터 어떻게 치료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시며 한심하면서도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으셨습니다. 일단 약을 한제 짓고 오기는 했으나 내 마음도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찰나에 셋째 언니로부터 군산할아버지 소식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뵌 할아버지의 모습은 100세에 가까운 연세임에도 아이처럼 순수하고 해 맑아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같이 갔던 남편과 친정어머니까지 아무 말 없이 할아버지의 진단을 바라보고 누구 하나 병의 증세를 말하거나 하지 않았는데 그 다음 순간 정말 기가 막히게도 허허 하고 호탕하게 웃으시며 “누가 봐도 꾀병이지” 하고 그러시는 거였습니다. 그 순간 나와 남편은 눈이 동시에 마주치며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하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 당시 나의 병은 정말 누가 봐도 꾀병이라고 할 정도로 멀쩡하다가 아프고 했으니 항상 나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남편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터였습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둘째 아이를 낳고 더 몸이 좋지 않다고 하시며 그 자리에 데리고 가지 않은 아들아이의 증세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은 생후 한 달부터 아주 심하게 배앓이를 해서 병원을 자주 출입했었습니다. 그때 병원에서는 아토피 때문이라고 했었습니다. 몸이 많이 흐트러지고 산후풍도 있다고 하시며 약을 지어 주셨습니다. 배가 아픈 아들아이에게는 따로 약을 지어 주시지 않고 내 약을 하루에 아주 작은 티스푼으로 나누어주라고 하셨습니다. 한 달 동안 약을 먹는 동안 희한한 경험을 했습니다. 약을 먹는데도 침을 맞는 것처럼 안면신경마비가 왔던 왼쪽 얼굴이 찌릿찌릿하고 머리며 심지어 예전에 삔 다리까지 아픈 부위가 다 나타나는 명현반응이 나타났습니다. 1년 1개월 동안 그 후로 6번 정도 더 약을 먹고 나니 이제 더 이상 약은 먹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신기하게도 조금만 몸이 안 좋아도 나타났던 머리 아픈 증세며 안면이 경직되는 증세, 뒷목에서부터 어깨까지 바위 돌을 짊어지고 있었던 듯한 뭉특한 증세까지 모두 사라졌습니다. 또 전혀 미동도 않던 왼쪽 눈썹이 거의 85% 정도까지 움직인다는 사실이.... 지금은 표정을 지어서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알 수 있을 정도로 호전되어 주변의 어른들로부터 정말 많이 좋아지고 건강해진 것 같다는 말을 들을 때면 그때마다 할아버지에 대한 감사함과 또 더불어 병을 이길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워주셨던 문계수 선생님에 대한 감사함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은 전혀 아프지 않습니다. 얼굴의 표정을 과잉되게 지으면 약간 표가 나긴하지만 차차로 더 나아지는 것을 느끼고 지금은 아이를 하나 더 낳을 계획까지 세우고 있을 정도로 건강해졌습니다. 몇 년 동안 다닌 병원과 한의원까지 병을 낫기 위한 나의 노력과 시간과 돈이 얼마나 들었는지 모릅니다. 아마도 지금까지 할아버지와 문선생님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러한 노력은 계속 될 것이고 그때마다 나의 실망감도 더 커졌을 거라 생각합니다. 저의 시이모부님은 중한 병을 앓고 계시는데, 할아버지의 약을 두 번째 드시고 다리에 힘도 생기고 드시는 것도 나아지셨을 정도로 속이 편안해 지셨다고 합니다. 매번 나에게 질부의 은혜를 꼭 갚겠다고 말씀하시곤 하십니다.
⑨ 저(중학교 교사)는 2004년 9월 5일 교통사고를 크게 당해서 고관절 골절로 3개월을 입원했습니다. 전북대학병원, 전주21세기병원, 전주 송천동 정형외과 등에서 입원 치료를 했습니다. 물리치료, 약물치료, 방사선치료 다 받아보았고 원광대 한방병원에서 침술 치료도 받았습니다. X레이 상에 아무 이상이 없으니까 괜찮을 거라고 하는데도 여전히 아프고 다리를 절뚝거렸습니다. 참으로 어이가 없고 기가 막혔습니다. 꼭 꾀병을 부리는 줄로만 의사도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문계수 선생님을 통해서 장병두 할아버지를 알게 되어서 약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할아버지가 아직 뼈가 완전히 붙지 않았다고 하면서 한번 사진을 찍어보면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고관절 치료로 유명한 화순 전남병원 윤택림 교수한테 가서 CT와 핵의학 검사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6개월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사진 상에 완전히 뼈가 붙지 않아서 아픈 거라고 하였습니다. 정말로 미심쩍었던 할아버지의 말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 후 약을 할아버지에게서 더 먹고는 뼈가 완전히 붙었다는 말을 듣고서 편안하게 걸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100% 정상적이진 않지만 많이 호전되어서 쾌활하게 교단에서 학생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현대의학으로는 특효약이 없다고 하는 고관절 치료에 할아버지의 약을 통해서 많은 도움을 받고 생활하고 있어 항상 고맙고 감사한 마음 잊지 않고 있습니다.
⑩ 저는 1992년경 입안과 부인과 쪽이 헐서 염증이 심하고 다리에는 붉은 반점이 나고 근육이 심한 염증이 나오며 걷기조차 불편하고 식사도 제대로 못하는 질병을 지방병원에서 병명도 모르고 치료를 받았지만 차도가 없어서 신촌 세브란스병원으로 희망을 갖고 찾아가 여러 가지 검사를 거친 결과 베체트병이란 희귀한 병명을 받았습니다. 더 무서운 경과도 올 수 있다 하셨어요. 심하면 관절로 들어갈 수 있고 눈으로 들어가면 실명도 할 수 있다 했어요. 실명한 환자도 보았어요. 무서웠어요.
별 차도는 없고 희망도 없이 여러 해를 치료하니 몸은 더욱 기력이 약해져서 주기적으로 영양제 주사제를 투약하면서 종교단체에 봉사를 하던 중 어느 스님을 만나 알게 된 장병두 할아버님. 물에 빠지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할아버님의 치료를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우리 가족은 의지하며 투병생활을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세계적인 희귀병 베체트병을 할아버님은 ‘걱정하지마’ 하시며 제게 새 희망을 주시며 그 지겨웠던 10년의 양방치료과정을 단 1년에 떨쳐버리게 되었습니다. 증세가 없어져서 할아버님 몰래 병원에 가서 몇 차례 검사를 해봤는데 베체트증세가 없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지금은 8시간의 긴 설악산 등산과 철야기도를 하고서도 다음날 정상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장병두 할아버님이 국보급 명의 지정을 받으셔서 저같이 힘든 병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을 모두 낫게 해주실 수 있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⑪ 저(전북대학교 교수)는 2001년 7월 서울 현대중앙병원(현 현대아산병원)에서 위암 수술을 받고, 이후 6개월에 걸친 항암치료를 받았습니다. 위암 수술이후 암 치료에 좋다고 하는 수많은 약과 보조식품 등을 복용하며 많은 돈도 엄청나게 들어 많이 들 때는 한 달에 1,500만원 정도의 지출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년 가까이 된 2004년 5월부터 이상 징후를 느껴 동년 5월 13일 검사결과 소장과 대장 연결부위의 장암과 복막암이 발견 되었습니다. 5월 15일 친구 양형식 원장이 운영하는 전주 양지병원에 입원하였으나 현대의학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진통제를 주는 것 밖에 없다는 말을 들었고, 또 다른 친구 당시 전북의대학장 주찬웅 교수는 인간이 할 일은 다했으니 기도를 하자고 했었다는 말을 친구들을 통해 들었습니다.
당시 장폐색으로 엄청난 통증으로 고통을하였고 음식을 조금도 섭취할 수 없어서 아마도 며칠 이내에 세상을 떠나게 될 것으로 예상했었습니다. 저 자신도 얼마 살지 못할 것을 예감했습니다. 그런데 약초즙과 장병두 할아버지께서 주신 한약을 5개월 정도 복용한 후 병세가 급격히 호전되어 지금은 휴강 없이, 국내외 출장도 다녀오는 등 거의 정상인과 가까운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등창으로 시작한 인생
선생님은 1906년 병오년 생이다. 그러니 올해 102살 되신다.
전북 임실군 지산면 안하리(雁下里) 골뜸마을에서 태어나, 25세 무렵 서울로 올라왔다.
생후 두 달째에 등창이 났다. 창자가 보일 정도로 구멍이 뚫렸다. 등 근육이 사방으로 뻗치니 전신이 아팠다. 백약이 무효였다. 심지어는 옛날 처방에 나오는 인생(人生) 생골, 즉 살아있는 사람의 골을 등창에 넣으면 낫는다고 하여 구해보려고 하였으나 도저히 구할 수가 없어서 갓 죽은 아이의 골을 돈 주고 사서 써보기도 했다. 그러나 더 악화만 되었다. 사람들은 오늘 내일 죽겠다고 했다. 등창 때문에 누울 수가 없으니 어머니가 업고 키웠다. 그렇게 하기를 십 년을 했다. 십 년을 어머니의 등에서 자란 것이다. 십 년이 지나자 외조부가 연구를 해서 고쳐 주었다. 그때서야 어른들이 출생신고를 했다. 그래서 호적에는 1916년생으로, 실제 나이보다 열 살이나 적에 올라있다.
외조부는 왕실의 전의(典醫)였다. 성함이 진(陳)응양이었는데, 대명의 이셨다고 한다.
이렇게 등창으로 인생을 시작하여 십 년을 고생한 덕택에 등창의 명의가 되었다고 스스로 말씀하신다. 10년, 20년 된 등창도 1주일이면 치료하신단다. 열아홉인가 스무 살 때, 30년간 등창을 앓아 온 여자를 고치는데, 평생 잠을 못 잔 여자가 약을 붙여주고 세 시간이 지나니 쿨쿨 잠을 잤다.
“그런데 막상 등창의 명의가 되고 보니 등창 환자가 없어. 병원에서 다 죽여 버리니까.”
이것을 보면 의술을 할 수밖에 없었고, 명의가 될 수밖에 없었던 운명을 타고난 분이다. 하늘이 날 때부터 이분에게 의술을 가르친 것이다.
스스로 연구하고 터득한 의술
의술을 본격적으로 연구한 것은 열아홉 살부터였다.
‘먹고살기 위해서 의술을 배웠노라’고 하신다.
열일곱 살 때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그때까지는 외할아버지의 의술을 외양만 보고 배웠다. 혹시 외조부께 전수받은 비방이 있지 않았느냐고 여쭈니, 그런 것도 전혀 없었다고 한다. 스스로 연구해서 의술을 터득해가면서 동네 병을 다 고쳤다.
그 연구의 방법을 물었다.
책을 본 것은 전혀 없고, 우선 강남풍월로 듣기만 해도 공부가 되었다고 한다. 예컨대, 여섯 살 때 ‘치질이 있었는데 집 없는 달팽이를 구워서 먹으니 낫더라’는 말을 누구에게서 듣고는 잊어버리지 않고 그 방법을 사용해보니 낫더라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한번만 들으면 잊어버리지 않고 기억하는 공부를 했는데, 기억력이 특이하셨다고 한다.
개, 토끼, 쥐 등을 수백 마리 잡아가며 약을 연구했다. 대구, 대전 등의 약전 골목을 부자(附子)를 씹으면서 돌아다녔다. 지금도 끊임없이 연구하신단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어떻게 탁월한 의술을 터득할 수 있을까? 선생님은 스승도 없이 독학으로 수승한 의술을 터득한 비결을 묻는 졸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물리를 터득하면 되는 거야. 물리는 사물을 잘 관찰하면 터득할 수 있지. 나는 말이야, 어릴 때부터 관찰을 잘했던 것 같아. 내가 여섯 살 때 일이지. 어느 날 똥 싼 옷을 어머니가 빨래하는 동안 담장 밑에서 해바라기를 하고 있는데 고양이가 감나무 위를 올라갔다가 내려갔다가 하는 것이 보여. 가만히 보니 쥐구멍 입구를 노려보면서 그러고 있는 거야. 그런데 쥐란 놈이 머리를 구멍에서 살짝 내밀어 두리번거리며 살피다가 쏙 들어갔다가 조금 있으니 또 살짝 머리를 내밀고 살피는데, 부엌에서 문밖으로 부어버린 개숫물에 섞여 나온 밥알을 주워 먹으려고 눈치를 살피는 거야. 결국 쥐가 나오지 않으니까 고양이란 놈이 살금살금 다가가더니 쥐구멍에서 조금 떨어진 곳의 땅이 약간 솟은 곳을 앞발로 탁탁 치는 거야. 그쪽을 치면 쥐가 이쪽으로 도망오리라고 예상하고 유도하는 거지. 그때 고양이의 생태를 터득했지. 관찰을 해보니 그런 게 보이더라니까.”
이런 식으로 물리를 터득했다는 말씀이다.
“예를 들어 콩씨 있잖아. 그게 쌍을 짓지 않는가. 그 쌍으로 된 것에서 싹이 나고 대가 자라고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리지. 모든 ‘씨’는 다 똑같아. 두 쪽이지. 정자와 난자도 마찬가지고. 쌍으로 되어 있지. 그 중 하나가 없으면 안돼. 이것이 바로 상대성 원리를 표현한 게야. 음양이 짝을 이루는 이치지. 단순해.” 그래서 간에 독이 오면 그 상대독을 써야한단다.
“의사는 본래 이렇게 해서 형성된 거야. 면허는 무슨!” 자연의 이치를 통하여 터득한 선생님의 지혜는 끝이 없다.
“바다에도 의사가 있어. 이거 모르지? 바다의 의사가 뭐냐 하면 바로 거북이란 놈이야. 거북이가 왜 의사냐. 고래가 무엇에 부딪쳐서 어깻죽지를 다쳤어. 그런데 아무리 해도 낫질 않는 거야. 그것을 거북이가 고쳐주거든. 어떻게 고치느냐. 바다를 떠다니는 오래된 소나무 판자들이 있어. 뗏목 조각 같은 것이지. 거기에 붙어있는 송진을 거북이가 이빨로 뜯어서 고래 다친 곳에 발라주는 거야. 그러면 낫는 거야. 그래서 고래란 몸이 거북이는 잡아먹지 않아.”
“소가 말이야, 삼(대마)을 절대 먹지 않거든. 삼밭에 갔다 놔도 삼 잎은 한 잎도 뜯어먹지 않아. 그런데 소가 간이 안 좋아져서 병이 들면 쓸개에 단단한 것이 뭉쳐지는데, 이것이 우황이야. 이 우황이 생기면 소가 삼 잎부터 뜯어먹어. 그래서 스스로 고치는 거야. 그런데 요즈음 소보다 못한 것들이 의사라고 하고 있어. 참 내!”
지금 선생님의 의술은 필자가 보기에 거의 신의(神醫)의 수준이다.
암은 항암제 쓰고 수술한 사람도 고친다(물론 생사의 경계선을 이미 넘어버린 사람은 제외하고). 다만, 항암제의 독이 온 몸에 퍼진 사람은 약을 먹여봤자 항암독이 약을 잡아먹어 버려 치료가 안 될 수 있다고 한다.
중풍환자는 송장이 된 사람도 24시간 이내면 살릴 수 있다고 한다. 발병 6개월 이내면 침 한방 쓰지 않고 약만으로 완치할 수 있단다. 선생님의 집 인근에 있는 위생병원에서 중증의 중풍환자 10여명을 선생님에게 보냈는데, 모두 고쳐주었단다. 통풍은 3일만 약 먹어도 차도가 난다고 한다. 당뇨, 백내장, 실명방지, 치통 등은 쉽다. 당뇨는 합병증이 눈과 발끝으로 먼저 오는데, 한쪽 눈이 썩고 다른 한쪽마저 썩기 시작하는 것도 고쳤다. 일제 때부터 고쳤는데, 하도 잘 고치니 왜놈들이 “너 아편 쓰지” 하면서 추궁했다고 한다. 백내장과 치통은 바로 고쳐버린단다.
살찌게 하고 살 빠지게 하는 것도 마음대로 한다. 불임도 잘 고친다. 18년간 아이를 갖지 못하여 노심초사하던 어느 대갓집 며느리에게, “아, 한꺼번에 아들 둘 낳으면 되지 뭘 그래. 나이도 들었는데 한꺼번에 나아서 길러버리고 말지, 뭘 하나 낳고 또 낳고 하며 고생해? 걱정마!” 하고는 약을 지어 주셨는데, 아니나 다를까 덜컥 쌍둥이 아들을 낳아버렸다. 그 며느리가 이번 어버이날에 한복을 한 벌 지어왔다.
수술 시간을 받아 놓은 담석환자의 수술을 늦추고 약을 먹여 5,6시간만에 돌이 빠져나오게 해 버린다. 오래전에 이병도 서울대학교 총장의 외손자가 백혈병에 걸린 것을 서울대학교병원 의사들이 보는 앞에서 고쳐 주었더니 측근에 있는 사람들이 환자들을 데리고 와서 고쳐달라고 야단이었다. 결국 서울대 병원 의사들이 “이것 그대로 두면 서울대학교병원이 망한다”면서 반대하여 포기한 적이 있다고 하신다. 15,6년 전에 위생병원에 재직하던 어느 목사가 그 병원에서 간암으로 죽는다고 판정받았는데 선생님이 살려 냈다. 업보로 온 병, 영적(靈的)인 병도 약으로 치료하신다. 영적인 병은 신경이 죽어 있는데, 그 신경을 고치면 된단다. 하늘이 내려준 병이라 하여 천질(天疾)이라고 불리는 일명 지랄병도 다 고쳐내셨다. 타고난 수명을 연장하는 것도 가능하단다. 약을 써서 체질을 두 번 세 번 바꾸어주면 된단다.
환자에게 물어보지 않는다
선생님은 환자가 오면 문진을 전혀 하지 않는다. 물어보지 않는다는 말이다.
“어떻게 문진을 해? 못하게 되어 있어. 문진할 필요가 없어.”
찰진도 하지 않는다. 대신에 독특한 진단법을 쓰신다. 환자를 쳐다보고, 돌려 앉혀 놓고 손으로 등을 짚어 보신다. 심장과 위장을 만져보면 아신단다. 병이 왜 왔고, 어떻게 진행되어 왔으며, 그대로 두면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 다 알아버린다. 마음이 어떻고, 무슨 짓을 하다 왔는지도 안다. 도둑질했는지 강도질 했는지 다 안다. 병이 감기로 왔는지 어떻게 왔는지 까지도 안다. 심보, 성격, 버릇까지도 다 읽어 버린다. 그에 따라 약을 지어 줄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한다. 아무 환자나 약을 지어주지는 않는다.
선생님은 직심(直心)이 있어야 병을 고친다고 말씀하신다. 수진만으로 다 알아내고, 냄새만 맡아도 안다. 이 진단법을 맥활법(脈活法)이라고 하는데, 신라시대 또는 그 이전부터 내려온 방법이라고 한다. 그런데 사실은 이 진단법이란 것도 일부러 모습을 취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지, 선생님은 환자가 방에 들어오는 순간에 바로 알아버린다고 하신다. 직접 보지 않고 사진만 보아도 몸의 상태를, 몸 전체와 오장육부까지 다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불가피할 경우에는 사진 전송을 통한 원격 진단도 하신다. 하루에 백 명 이상의 환자를 볼 수 있는 것도 그렇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보는 것은 몸의 상태뿐만 아니라 부부간의 상처살(喪妻煞), 상부살(喪夫煞)까지 그냥 바로 봐 버리는데, 그런 살(煞)이 있으면 약을 써도 소용이 없다고 하신다. 5년, 10년 앞의 일도 내다보신다. 이 진단의 정확도는 천명에 한 명 정도 실패할 정도라고 한다. 오진율이 천분의 일, 즉 0.1%라는 말씀이시다. 다만 실제 치료되는 환자의 비율은 10에 8이고 2는 못 고친다고 하시면서, 그 2는 치료받다가 중단하고 안 오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결국 선생님 지시대로 따르면 거의 100% 고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한의는 10명 중 5명 고치면 보통이고 6명 고치면 초월한 의사라고 그래. 보통 그렇게 알아.”
이 말에 견주어 보면 선생님은 가히 신의(神醫)다.
독보적으로 터득한 약
선생님이 쓰는 약은 기존의 한의학에서 한의사들이 쓰는 약과 전혀 다르다.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있다고 하신다. 기존 기록과 처방에는 없는 것을 순전히 선생님이 연구해서 창안해 낸 것이다. 지금은 옛날 한약 가지고는 절대 고칠 수 없다고 하신다. 100명중 한 명도 못 고친다고 하신다. 그 이유로 선생님은 공해, 석유, 휘발유, 아스팔트, 시멘트, 가공식품, 항암제, 사람의 입냄새 등을 드신다. 이런 것들이 종합되어 약을 죽여 버린단다.
“석유, 휘발유 냄새는 세균 냄새와 똑같잖아. 사람 죽은 송장 냄새와 같은 거지. 생명이 썩은 것이기 때문에 생명과는 상극이야. 석유나 휘발유 냄새에 닿으면 풀이나 나무가 다 죽어 버리잖아.”
“제일 맛있는 비스켓에 양잿물 안 들어가면 안되. 맛이 없어 못 먹어.”
“병원에서 환자 치료하려면 항암제 써야 하는데, 항암제 쓴 환자들을 어떻게 고치나?”
“사람이 많으니 입에서 나오는 냄새도 병을 못 고치게 하는 요인이 돼!”
반면에 선생님의 약으로는 100명중 99명을 고친다고 하신다. 국내에 나지 않는 약재는 북경에 가서도 구하고 러시아에 가서도 구한단다. 동물에게서 나오는 약재는 요즘 동물을 못 잡게 하기 때문에 귀하고 비싸단다. 웅담 하나 사려면 5백만원 내지 6백만원을 가지고 가야 하는데, 그것 하나를 사오면 열 명을 고친다고 한다. 선생님은 당신의 약은 아마 앞으로 천년까지는 써먹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또 분명히 말씀하시는 것이 있다.
“좋은 약이라고 다 좋은 것은 아니야. 들을 때가 좋은 것이야. 이것이 상대성 원리야.”
“원리는 하나야. 죽을 것은 살리지 못해. 다만 약으로 ‘여기’까지는 살릴 수 있다고 하는 것이야.”
이치를 통찰하고 그 이치에 사는 분이 아니면 할 수 없는 바른 말씀이다. 이치도 모르고 병의 원인도 모르고 고칠 줄도 모르면서 헛된 자만심과 돈벌이 욕심에 함부로 약을 먹이고 수술을 해대는 오늘날의 수두룩한 사이비 의자(醫子)들이 새겨들어야 할 가르침이다. 비방 중 일부는 ‘납’의 법제에 있다고 한다. ‘납’을 써야 백발백중하고, 안 쓰면 백발백중이 안 된다고 하신다. 독물인 납이 어떻게 명약이 되는지 여쭸다.
“단지에 수은을 태워서 아홉 번이나 열 번을 찌면 납 성질은 다 날아가고 없어. 극은 극으로 때려야 돼. 그것 아니면 안 돼.”
특히 십이지창, 등창, 연두창 등의 창증에는 이것을 사용하지 않으면 병을 못 고친다고 한다. 그런데 요즘은 아홉 번을 쪄내는 구증(九蒸)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다 죽고 없다고 하신다. 선생님은 이런 이치들을 다 연구해 봤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었다고 한다.
“미국 놈들은 세계를 좌지우지해도 병은 못 고쳐”
지혜의술의 근원이 된 수행법
물리를 터득하면 된다고 하지만, 물리를 터득하는 것이 사물을 관찰한다고만 해서 되는 것인가? 보통 사람에게는 관찰하는 것조차도 쉬운 일이 아니다. 이렇게 독보적인 의술을 터득하려면 탁월한 정신능력이 없으면 불가능하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우리 민족의술은 깨달음에서 나온 지혜의 의술이 그 뿌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쭤보았다. 반드시 특별한 심신수련을 하셨을 텐데 그것이 무엇이냐고. 선생님은 말을 아끼시는 듯 조심스럽게 조금씩 말씀해주셨다.
경신(庚申) 수련을 많이 해야 한다고 하신다.
여기서 잠시 육경신(六庚申) 정신수련에 대하여 알아보고 가자.
육경신 수련은 이미 민중의술 명의열전에서 소개한 바 있는 천의선도 김영생 선생이 평생 해 온 수련으로, 육경신의 이치에 대한 설명은 그분의 글을 인용하기로 한다. 경신(庚申)이란 60갑자(甲子)에서 유래한 말이다. 일 년에 경신일이 여섯 번 있는데, 그때마다 잠을 한숨도 자지 않고 수련하는 것이 육경신 정신수련이다. 경신일 전날 밤 11시부터 경신일 밤 12시까지 25시간 잠을 자지 않는 다. 육경신 정신수련은 왜 하며, 어떤 성과가 있는가?
경신일은 천상 영계의 대행사라 할 수 있다. 상제님께서 주관하시는 천상 영계의 행사 중에 가장 큰 행사가 육경신이다. 이 날은 인간은 물론 동물들까지 행동은 물론이요 생각하는 마음까지 천상 영계에 전달되고 기록되는 날이며 벌신 잡영들에게도 자기 범주 내에서 활동의 자유를 주는 날이다. 이날 일백성계(一白星界)의 오방(五方) 신장들은 사람들에게 잠을 재우려 하고 사람들은 잠을 자지 않으려 하는데, 사람이 잠을 자면 신장의 승리요, 잠을 자지 않으면 인간의 승리다. 잠을 자지 않는 사람은 무엇을 하는가? 이 때에 사람의 마음은 오직 하늘을 공경해야 하며, 대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이 일순간에 조금만 흐트러져도 게임은 신장의 승리로 끝난다.
일 년 중 첫 번째 경신일에는 동방 청제신장과 겨루고, 두 번째 경신일에는 남방 염제신장과 겨루며, 세 번째 경신일에는 서방 백제신장과 겨루고, 네 번째 경신일에는 북방 흑제신장과 겨루며, 다섯 번째 경신일에는 중앙 황제신장과 겨루고, 여섯 번째 경신일에는 오방신장이 총동원해서 사람을 잠재우려 하는데, 잠을 재우지 못하면 신장들이 그 사람에 대한 관할권을 포기하기 때문에 육경신을 마친 사람은 신장의 간섭을 받지 않는다.
이렇게 여섯 차례 경신일에 한 번도 졸지 않고 지나면 1경신을 마쳤다고 하는데, 1년 경신을 마치면 오방신장들의 규제를 받지 않고, 4년 경신을 통과하면 일백성계의 규제를 받지 않으며, 8년 경신을 통과하면 이혹성계의 규제를 받지 않고, 12년 경신을 통과하면 삼벽성계, 즉 지신계의 어떤 신장한테도 규제를 받지 않는다. 16년 경신을 통과하면 사록성계의 규제를 벗어나고, 20년 경신을 통과하면 오황성계의 규제를 받지 않으며, 24년 경신을 통과하면 육백성계, 즉 수신계의 규제를 받지 않으며 지혜의 문이 열리고, 28년 경신을 통과하면 천신계의 초계인 칠적성계의 규제를 받지 않으며 우주 모든 현상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32년 경신일을 통과하면 팔백성계에 도달할 수 있고, 우주의 모든 현상을 직접 볼 수 있는 천안이 열린다. 36년 경신을 통과하면 천상 상제님을 접견할 수 있고, 상제님의 참뜻을 전달받고 조화의 능력을 얻어 초인간적인 진인(眞人)이 되며 인류를 평화로 이끌어줄 신인(神人)이 된다. 그래서 고래로 육경신을 통하면 무불통지한다는 말이 있다. 그러므로 육경신은 곧 구도의 길이다. 육경신을 한번 지킬 때마다 깨우침이 새로워진다. 혜안이 열리고 능력도 생긴다. 이것이 도통이다.
선생님은 17살 때부터 육경신(六庚申) 수련을 했단다. 고향에 홍참봉이라고, 천여석지기 부자가 있었는데, 그분의 아들이 선생님과 동갑내기였다. 홍참봉이 육경신을 하면서 선생님에게 “너는 꼭 하게 생겼는데...” 하면서 권유하였다. 산골짜기, 불도 없는 집 방안에서 5,6명이 앉아서 수련을 하는데, 경신 수련은 잠을 안자는 훈련이므로 깜빡 졸아도 안 되기 때문에, 오른손에 칼을 쥐고 앉아서 수련을 하다가 깜박 잠이 올라치면 사정없이 왼손을 찍어버리셨단다. 그렇게 해서 왼쪽 손에 남게 된 흉터 여러 개를 보여 주신다. 왼손 중지 끝마디는 힘줄이 끊어져 구부러지지도 않는 상태가 되어 있다. 실패하고, 또 실패하고... 하다가 나중에는 워낙 정도(正道)로 가니까 잠이 안 오더란다. 그리하여 귀신을 보지는 못해도 귀신이 오고가는 자취는 아는 정도가 되었단다.
참으로 대단한 강기를 지닌 분이셨구나 싶은데, 선생님은 당신이 통뼈라서 젊었을 때 ‘한방’ 날리던 주먹이었고 김두한도 자신에게 꼼짝 못했다고 자랑(?)하신다. 거기다 도술까지 지닌 산신령으로 대접받았단다. 육경신 수련은 물리를 터득해 버리면 되는데, 몇 번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해야 머리가 열린다고 하신다. 그렇게 한 3년 가면 얼쭉 알게 된다고 한다. 수련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말씀이어서 설득력 있게 들린다. 지금도 정신이 맑지 않을 때는 경신 수련을 하신단다.
“잡신에게 휘둘리지 않고 잡신을 제어할 정도는 되어야지”
사찰의 주지를 포함해서 스님들을 한 4천명쯤 고쳐주었다고 하시는 것으로 보아, 불교와도 인연을 제법 맺으셨던 것 같은데, 육경신 한 사람이 선생님밖에 없으니까 스님들이 제일 무서워했다고 한다. 선생님은 단호히 말씀하신다.
“육경신 안하면 안돼”
그 외에 또 어떤 공부를 하셨느냐고 여쭈었다.
열아홉 살 때부터 역학을 공부하셨는데, 연산역(連山易)을 배웠다고 한다. 스승을 만나 그 밑에서 6개월 정도 배웠단다. 역(易)의 이치는 하늘 이치와 똑같더란다. 건곤리정(乾坤理定), 하늘땅의 이치는 정해진 것이고, 그 이치를 보면 알게 된다는 말씀이다.
10대 때 아버지 집에 출입하던 도인을 따라 지리산에 들어가서 3,4개월 산공부를 하며 고행을 하시기도 했다. 아버지가 민족주의자시어 많은 명사들과 도인, 기인들이 집에 출입했는데, 그 중에는 임학(林學) 선생처럼 둔갑, 축지를 완전히 하는 분들도 있었다.
임학 선생은 방에 같이 앉아 있다가도 없어지고, ‘억’하면 그릇이 나오고 또 ‘억’하면 쌀이 생기고 했다고 한다. 나쁜 짓 하면 절대 둔갑 못한다는 말씀도 덧붙이셨다. 김일성에 대해서도, 진짜 김일성은 둔갑 ․ 축지를 다 했는데 죽었고, 가짜가 해먹었다고 하신다. 이런 심신수행을 통하여 열린 지혜의 눈을 가지셨기에, 사람의 몸을 보면 그냥 그 내부의 구조와 오장육부의 상태와 마음까지도 다 보아 버리고, 운명까지도 다 통찰해버리신다.
선생님의 혜안은 실로 놀라워서, 예컨대 절친한 친구였던 창랑 장택상이 해방 직후 몇 월 몇 일에 수도경찰청장이 될 것이라고 정확히 예언하였고, 창랑의 집에 기거하고 있던 23살의 청년 김영삼이 찾아와 “선생님, 제가 국회의원 선거에 나가려고 하는데 되겠습니까?”하는 물음에 “그래, 내년 후내년 선거에 나가봐. 돼! 그런데 어쩌면 36년 뒤에 대통령이 될 지도 몰라. 남의 돈은 한 푼도 먹으면 안돼. 공을 많이 쌓아야 돼.” 하고 미리 다 말해주셨다고 한다.
물려줄 사람이 없다
그런데 이 높은 의술을 전수해 주려하니 사람이 없단다.
육경신 수련을 사람들에게 지도해 보니 생명 거는 놈이 없단다. 130여명을 지도해봤는데, 모두 졸아버렸단다. 충남 논산에 있는 금강대학교의 권탄준 박사는 논산에 있는 집에서 육경신 수련을 하고 선생님은 서울 자택에서 앉아서 지켜보는데, 권박사가 졸면 선생님이 전화로 야단을 치셨다고 한다. 공간을 뛰어넘어 혜안으로 보고 앉아 계신 것이다.
배우려고 찾아오는 사람도 없었단다. 아드님이 한의사지만, 선생님의 의술이 어려우니 이어받으려고 하지 않는단다. 102살의 연세인데도 아직 물려줄 사람을 못 만나셨다는 선생님의 말씀에 약간의 쓸쓸함이 배어든다. 이 땅의 민중의술을 뿌리째 말살하려 시도해 온 제국주의자(일본, 서양)들과 그 앞잡이들(양의사, 한의사, 보건의료관료, 정치인)의 노력이 얼마나 성공해 왔는지, 증명되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우리 민족의술은 본래 이렇게 심신수련을 통하여 우주자연의 이치를 깨친 고답적인 지혜의 경지에서 탄생한 것인데, 그것을 서양식 지식교육 위주로 하는 학교에서 가르치려고 드니 제대로 될 턱이 없다. 그런데 세상은 이를 모르고 서양식이 좋은 줄 알고 한의과대학 교육도 모조리 서양식으로 한다. 그 결과 이 나라 민족의술의 정맥은 거의 끊어지고 말았다.
서양의 의료제국주의자들이 노린 것이 바로 이것이다. ‘한국의 무서운 토착의술을 죽여라, 그것을 살려두면 전 세계를 제패할 것이니...’ 천지도 모르는 무지랭이들이 이 나라 의료제도를 주물럭거리면서 다 죽여 놓았다. 우리 의술의 명맥을 겨우 잇고 있는 것이 선생님처럼 초야에 묻혀 있는 어른들이다. 그나마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른다.
만약 앞으로라도 제자가 되겠다고 찾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받아들이실 거냐고 여쭸더니, 뜻밖의 말씀을 하신다. “대단히 총명해야 돼” 하는 말씀은 고답적인 의술이므로 당연한 자격요건이라고 할 것이지만, 그 다음 말씀이 신기하다.
“엄지손가락을 힘껏 치켜세웠을 때 손가락 끝마디 모양이 뱀대가리처럼 삼각형이 되어야 하고 뒤로 제껴지는 사람이라야 해.”
어째서 그러냐고 다시 여쭈었다.
“뱀대가리의 속성이 뭐야. 씹지 않고도 모든 것을 삼켜서 소화시켜버리잖아. 이런 손가락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안 돼. 그래야 의술을 할 수 있어.”
이 말씀에 들은 비의(秘義)는 무엇일까? 모든 것을 단번에 삼킬 수 있는 넓은 마음과 통찰력과 정신을 의미하는 것일까? 곰삭여 볼 일이다.
또 하나 조건이 있다.
몸이 바른 사람이어야 한단다. 허리를 세우고 서너 시간은 꼿꼿하게 앉아있을 수 있어야 한다. 허리가 아프다거나, 다리가 아프다거나 하면서 몸을 뒤트는 사람은 자격이 없다고 한다. 먼저 자기 몸이 발라야 한다는 말씀이라면서 바를 정(正) 자를 강조하신다. 그런데 물려주더라도 천기누설을 하면 안 되는 것이 있다고 하신다. 그런 것은 절대로 가르쳐 줄 수 없고, 자식에게도 물려줄 수 없다고 한다. 하늘은 궁극의 문은 스스로 깨달으려고 애쓰는 자에게만 열어준다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면서 선생님은 병이 생긴 이유와 ‘반대로 하면’ 8할의 병은 치료된다고 간단한 원리 하나를 알려주신다. 예컨대, 밥 먹고 체했으면 밥을 태워서 그 가루를 먹으면 되고, 돼지고기 먹고 체했으면 돼지고기를 태워서 먹는 식이다.
“걔들은 의사가 아니야”
의술의 경지가 이 정도에 이르렀으니, 선생님의 눈에 지식나부랭이 장난이나 하면서 병도 못 고치는 제도권 의술이 셈에 찰리가 없다. 비판은 냉혹하다. 지금의 양의, 한의들은 아무것도 모른단다.
“지금 학교에서 배우는 그 놈들이 무슨 의술이냐? 협잡꾼, 도둑놈이지. 환자를 연구대상으로 삼잖아. 환자들은 ‘죽어도 괜찮다’고 서약하라는 데다 몸 대어주고...”
지금 제도권에 있는 의사, 한의사 중에는 천명에 한명, 제대로 된 의사가 있을 둥 말 둥 이라고 하신다.
“자유당 시절에 한의사 면허 받으라고 했는데, 그거 다 엉터리 면허, 그것 받아서 뭐하나.”
인산 김일훈 선생님이 자유당 시절에 한의사 국가고시 시험위원을 하시면서도 한의사면허 하나 받아두라고 하는 주위의 권고를 무시하면서 “병 잘 고치면 되지 그까짓 면허가 무슨 소용이야” 했다가 5.16.후에 의료법이 바뀌면서 면허가 없다는 이유로 돌아가실 때까지 10여회 처벌을 받으셨는데, 그 꼴을 결국 선생님도 당하신다. ‘면허’라는 형식보다도 병을 잘 고치는 실질을 더 소중히 여기신 당당하고 지당한 자세인데도, 세상은 형식에 치우쳐 실질을 탄압하니, 바른 뜻 가지고 올곧게 사는 분들은 버티기 힘든 패악의 세상이다.
“일본놈들도 나를 손대지 못했는데...”
2003년도에 집행유예를 한번 받았다. 약을 지어준 곳도 아니고, 물어보길래 이렇게 하라고 가르쳐주었는데 공갈협박을 당했다는 것이다.
“그 동안 순사놈들에게 별짓 다 당했어. 돈 주고 무마하고... 일제치하에서 일본놈들도 나를 어쩌지 못했는데...”
그 상황, 그 심정, 더 듣지 않아도 백번 상상이 간다. 이 나라 의료제도의 터무니없는 역천(逆天) 때문에, 병고로 죽어가는 사람 살려주고도 처벌의 고통을 당해온 민족 민중의술의 한 맺힌 사연이 선생님이라고 피해가지 않았던 것이다. 울분이 다시 치솟는다.
이번에 수사 받을 때는 환자마다 돈을 50만원씩 받았다고 기소되었는데, 이는 ‘검찰이 만든 것’이라고 하신다. 100명의 환자를 보면 30명 내지 40명은 공짜로 치료해 주셨고, 어린아이들은 무료로 해주었단다. 외국인들도 많이 고쳐주었다.
이런 신의(神醫)를 처벌하는 나라는 이 우주에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밖에 없다.
“북경에 가면 나를 하느님 같이 위해. 중국 놈들 똑똑해.”
그럼에도 이런 못난 조국에 대한 사랑은 버리지 못하신다.
“살 빼는 약, 살 찌는 약, 일본과 미국에서 제의가 왔으나 거절했어.”
그러면서 “앞으로 살만 찌면 당뇨로 몰살할 것”이라고 경고하신다.
50~60년 내에 지구가 확 바뀌는데, 물이 오염되면서 물과 관계된 당뇨병이 제일 먼저 오고 당뇨로 사람들이 몰살할 것이라는 경고다. 당뇨로 인한 사망률이 OECD 국가 중에서 한국이 제일 높다는 최근의 신문보도가 떠오른다.
선생님은 당신에게 의료면허를 주어 병자 고치고 외국에 약 수출하여 돈 벌어서 중국 땅 사자고 한다. 약 재료를 전부 산에다 몇 십년간 몰래 재배해야 한다는 말씀도 하신다. 황사 다음에는 적사가 중국에서 날아올 것이라는 경고도 하신다. 깊은 지혜와 안타까움이 들어있는 말씀이어서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 선생님은 그 연세에도 대단한 포부를 가지고 계시다. 어떻게 하면 이 나라가 잘 될 수 있을 것인지 여쭤보았더니 이렇게 대답하신다.
“인재를 모아야 해. 세계를 좌우할만한 사람 3천명 내지 5천명을 양성해야 돼.”
그러면서 사람을 양성하는 그 일을 꼭 하려고 계획하신다.
정부에 하시고 싶은 말씀이 없느냐고 여쭸더니, “전부 무식한 놈들!”하고 일축하신다.
언론과 인터넷을 통하여 많이 알려졌는데, 언론의 인터뷰 요청에 시달리시지 않느냐고 물었다.
“지금은 내자랑하는 것 같아서 인터뷰 안해. 조실부모하고 빌어먹고 자란 놈이 무슨 내자랑을 해!”
조그만 재주만 있어도 서로 튀려고 아우성인 세태에 경종을 울리는 어른의 말씀으로 받아들인다.
선생님은 100여 세대 사는 고향마을에서 어릴 때 “저 놈이 덕재산 정기를 타고 났는데, 여기를 떠서 세상에 나가면 크게 잘 될 것이다”는 어른들의 말을 듣고 자랐다고 한다. ‘크게 잘 되는 날’, 그것은 선생님의 의술이 세계 만방에 떨치는 날이 아닐까. 그 날이 바로 이 땅의 민중의술이 광복되는 날이고.
글을 맺으며
이 정도 긴 글로 정리해도 겨우 장님이 코끼리 다리 하나 만지고 나온 기분이다. 그런 점에서 이 글은 선생님의 의술과 정신세계를 정리하는 글이 아니라 서론에 불과하다. 그만큼 선생님의 지혜와 의술의 깊이는 무궁무진하여 앞으로 세상이 이 분을 귀감과 스승으로 삼아 받들어 모시고 가르침을 청하여 그 지혜를 받아 내려야 하리라고 본다.
민족 민중의술의 살아계신 표본을 만난 것은 커다란 기쁨이고, 반면 이런 세계적인 보배를 증손자뻘밖에 되지 않는 검사, 판사들이 법정에 세워 재판을 하는 이 나라의 꼴이 너무 비감하다. 공자는 나이 칠십이면 ‘아무리 욕심대로 해도 법도를 넘지 않는다’고 했는데, 백 살이 넘도록 세상을 살았으면 무슨 짓을 해도 처벌하지 않는 그런 멋을 이 나라에서 기대하는 것은 정녕 환상일까.
대통령도 정치인들도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아귀다툼하면서 물건 수출해서 몇 푼 남기느라고 애쓰는 것보다 이런 어른 한 분의 능력을 살려서 활용하는 것이 몇 만 배 국가에 도움되는 일이다. 이참에 이 나라의 의료제도라는 것이, 또 그런 제도를 만들어내어 옳다고 우기며 운용하고 있는 지적 풍토가 얼마나 경직되어 있고 어리석은지 되돌아보고, 이런 분이 존재할 수 있는 이 나라의 유전적, 생래적 풍토와 기운에도 관심을 가져 보아야 할 것이다.
세상이 온통 눈에 보이는 물질만으로 미쳐 뒤집어진 판에 이 나라라도 정신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나라로 가야 살 것이니, 부디 지금이라도 소홀히 하지 말기를 차제에 신신당부한다. 민중의술은 이런 어른이 계시니 더욱 힘을 내자. 환자들과 국민들이 선생님의 사건을 계기로 엉터리 의료제도에 눈을 뜨면서 여론이 비등하고 있는 이 기회를 민족 민중의술을 살릴 수 있는 좋은 기회로 발판삼아 의료제도 대개혁을 위하여 단결하고 협동하여 큰 발전의 계기로 삼자. 그리고 우리 민중의술이 얼마나 깊고 무궁무진한지 자부심을 가지고 이를 제대로 배우고 발전시키도록 다짐하자.
하늘은 말없이 그런 기회를 제공해주고 계신 것이다.
- 황종국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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