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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약초꾼 최진규

감효전(甘曉典) 2012. 1. 23. 14:05

 

마니아.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 어느 한 가지 일에 평생을 미치면 적어도 자기 분야에서 만큼은 최고가 될 수 있다는 것은 빈말이 아니었다. 약초꾼으로 평생을 살아온 최진규(44)씨가 바로 그것을 증명한다.

약초에 미쳐 평생을 산으로 돌다보니 약초에 관해서는 가장 잘 아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는 아직도 부족한 점이 많다고 겸손해 한다. 약초가 인생의 전부인 그를 만나러 종로구 부암동 석파정으로 갔다.  

원래 조선조 말기의 세도가 김흥근의 별장이었는데 흥선대원군이 집권후 자신의 별장으로 사용하였다는 석파정에 들어서자 수백년 된 소나무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가 머물러 있는 방이 바로 대원군이 거처하면서 차를 마시고 그 유명한 석화란을 치던 곳이라고 한다.

석파정은 역사적으로 한 시대를 움직이는 사람들이 거쳐 갔다고 한다. 그러다가 현재 소유주인 오 모씨가 사들였다. 그는 오씨와의 인연으로 3개월째 이곳에서 지내고 있다.

자격증 없는 민간의사. 그는 암, 에이즈 등 여러 종류의 난치병 환자 수천명을 살려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이 집에 들어온 것도 그런 호의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약초를 채취, 연구하고, 자연을 살리고 사람 살리는 일을 해왔습니다. 그리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고 그렇게 지내고 있습니다.”

전문 약초꾼이면서 전문 글쟁이. 그는 지금까지 10여권의 책을 썼다. 그가 쓴 책을 보면 ‘발로 찾은 향토명의’, ‘산삼보다 나은 약도라지 요법’ 등이 있다. 또 ‘토종의학 암 다스리기’, ‘약이 되는 우리 풀 꽃나무’, ‘약초산행’ 을 펴냈다.

위에서 알 수 있듯이 건강관련 서적이 주류를 이루고 풍경을 좋아하다 보니 감추어진 ‘우리비경 답사기’도 썼다. 

어려서 문학과 그림을 좋아한 그는 뭘 할까 갈등 하다가 소설가, 시인이 되겠다며 신춘문예 도전도 해봤다. 그러다가 지금은 없어진 ‘시사춘추’ 전문기자로 4년간 활동하기도 했다.

정규직 학력이 전혀 없는 사람. 어려운 집안에서 태어나 약초를 채취하고 산에 다니기를 좋아한 그는 어쩐지 사람과 어울리는 자체가 싫었다. 그러면서 책을 좋아하다 보니까 장서가 2만권을 넘는다. 살아오면서 밥 먹고 숨쉬듯 책을 읽었다.   

책을 좋아하고 그림을 좋아하고 미술에 관심이 많다 보니까 외국에 나갈 때마다 책만 사가지고 왔다. 어려서 위대한 화가가 되고 싶었는데 집안 사정으로 꿈을 접어야 했다.

“우리집안은 끔찍한 질병의 희생자였어요. 아버지, 할아버지가 약초꾼이면서 이름을 날리신 분이었는데 아버지가 정신병을 앓으면서 풍비박산이 났지요. 아버지가 5대독자로 손이 몹시 귀한 집안인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마저 돌아가셨거든요.”

어려서부터 그는 사람과 있으면 싫증이 나는데 산이나 풀을 보면 몇날 며칠을 봐도 싫증이 안 났다. 선천적으로 산을 좋아하다보니 자연과 통하는 법을 스스로 터득했다.

“저도 책을 즐겨 있지만 책을 통해서 하는 공부는 제대로 된 공부가 아니고 사물과 사물을 직관으로 벼락 치듯 깨쳐서 아는 것이 참된 공부라고 생각합니다.”

약초 공부는 말처럼 쉽지가 않다. 국내 식물만 해도 5,000종이 넘고 세계적으로는 100만종이 넘는다. 그 모든 것을 알아야 하고, 그 많은 식물을 보면서 식물의 마음속까지 읽을 수 있어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그는 일생의 반을 우리나라 산만 다녔다. 중국에 가면 중국인도 잘 모르는 오지로만 찾아다니며 약초를 캤다. 아마존 정글을 헤매기도 했고, 유럽, 아프리카, 북미, 히말라야, 러시아, 티벳도 다녔다. 약초를 찾아서 세계를 다녔다.

아마존에서 낡은 비행기를 전세 내어 외지인이 한번도 찾지 않은 오지를 탐험하여 암을 고친다는 약초를 찾아냈다. 찾고 보니까 원주민들 마당에 수북하게 자라나는 풀이었다.

그 풀을 가지고 오다가 마약 꾼으로 오인 받아 심한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효과가 좋은 그 풀을 알고 보니까 그가 옛날부터 알았던 흔한 풀이었다.

아마존 정글 탐험을 통해 그는 ‘진리는 눈앞에 있고 명약은 발밑에 있다’는 것을 몸소 체험했다. 발밑에 있는 명약을 모르고 아마존까지 지구를 반 바퀴 돌았던 것이다.  

96년 일간신문에 약초에 대해 연재를 했다. 당시 하루 2000통씩 문의전화를 받을 정도로 폭발적인 반응 속에 9개월간 연재하였다. 그런가 하면 월간 산 등 잡지에도 연재를 많이 했다. 그러다가 작년 말에 모든 연재를 끊어버렸다. 이유는 쉬고 싶어서.

불교 방송에 강의하면서 온갖 죽어가는 난치병 환자 2만여명을 보았다. 그 대부분이 의료기관에서 포기한 중환자들이었다. 그 많은 환자를 상담하면서 반응이 좋았다. 그러다가 작년 7월 이후로 사람들을 안 만나고 있다. 그는 사람 살리는 의술을 지니고 있으면서 죽어가는 환자를 두고도 도와주지 못하는 현실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그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병도 고칠 수 없는 것이 없고, 산삼 녹용 등 값 비싼 것이 좋은 약이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가장 흔한 풀이 가장 좋은 약초라고 말한다. 병이 흔하면 흔할수록 고칠 수 있는 약도 흔하게 널려 있다는 것이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당뇨병환자가 국내 500만 명이 넘는데 그 병을 고칠 수 있는 약도 가장 흔하게 널려 있다. 다만 사람들이 그 약을 찾지 못할 뿐이다.

자연의학은 풀에서 나온다. 풀과 나무들 속에 모든 약이 들어있다고 그는 말한다. 그런데 현대의학이 그것을 찾으려는 노력은 하지 않고 항생제와 항암제에 의존하고 방사선 수술을 선호하는데 그것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죽이는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는 집필활동도 꾸준히 해오고 있다. 그가 낸 책들은 모두 발로 뛰어서 쓴 책이다. 그는 이황, 율곡, 최남선 선생님 등이 쓴 기행문에 이어 선조들이 남긴 전통을 이어가고 싶어 한다. 글도 쓰고 사진도 찍은 풍경 기행문을 월간 잡지에 연재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자연의 풍경을 광적으로 좋아하다 보니 밥 먹고 잠자는 것도 잊고 사람들의 손이 타지 않은, 감추어진 아름다운 자연이 있는 곳이면 어디라도 간다.

20대에 무전여행으로 2년을 보냈다. 2년 동안 오직 걸어서만 남쪽끝에서 북쪽끝까지 전국의 산야를 샅샅이 답사했다. 주머니에 한 푼도 없이 오직 도보로만 대략 3만리를 걸었다.

31살 때 결혼. 가족으로는 식품영양학을 전공한 아내와 2남 1녀가 있다. 그만 서울에 있고 가족들은 모두 시골에 살고 있다.

젊은 시절 대부분을 절망과 좌절 속에서 지냈다. 문학을 하다 보니까 허무, 염세주의에 빠져 이 세상에 의지할 만 한 것이 없었다. 학력이 전무한 그가 학벌사회에서 살아갈 길이 깜깜하다 보니 자기에게 오려는 여자가 없을 것 같아서 혼자 살 작정을 했다. 그런데 운명의 여신이 그를 찾아왔다.

91년 7월17일 제헌절에 아내를 처음 만나 “내 형편이 이런데, 그래도 같이 살겠소?” 하니까 좋다고 해서 만난지 한 달 만인 8월15일 광복절에 결혼을 했다. 국졸 남편에 대졸 여자. 아내는 조건을 택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보고 한 결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모든 산을 약초밭으로 만드는 것이 그의 꿈이다. 우선 춘천시 동면에 확보해 놓은 160만평의 임야를 약초밭으로 만들 계획이다.

토종약초연구학회 회장. 의사, 한의사, 일반인, 주부 등 우리약초에 관심 있는 1천여명이 회원으로 있다. 그는 자연과 똑같은 상태에서 약초밭을 만들어 회원들에게 분할해서 그들이 관리하게 하고 수익을 낼 수 있도록 약초문화 공동체를 만들고 싶어 한다.

이미 도움이 안 되는 일부 나무들을 베어내고 그 환경에 맞는 약초를 심고 있는 중이다. 앞으로 약초 표본실을 만들고, 집과 약초문화 박물관, 약초 차, 음식점이 있어야 하고, 약초를 직접 채취해보고 약초식품, 약초약품을 만들 수 있는 시설을 갖추고 싶어 한다.

그곳이 그가 꿈꾸는 약초 문화 공동체의 본거지가 될 것이고 전국에 그런 약초원을 5군데 이상 둘 계획이다. 여러 지자체로부터 약초원을 만들어달라는 제의를 이미 받아 놓았다. 

그 지역에 맞는 약초를 심어 이 나라 전체를 약초밭으로 만들고 싶다는 그는 우리나라 약초가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약효가 뛰어나다고 말한다. 은행나무도 그렇고 주목도 그렇다.

어려서부터 지독한 약골. 선천성 심장병을 앓았던 그가 지나가면 동네 어른들이 뒤에서 ‘저 애는 일찍 죽을 것’ 이라고 쑤곤 거리곤 했다.

그런가 하면 지독한 두통을 20년이나 앓았다. 길을 가거나 화장실에 가다가 쓰러져 사경을 헤맨 적도 여러 차례나 된다. 몸이 너무 안 좋아 한시라도 빨리 죽는 게 당시 소원이었다.

20살이 되어 신체검사 받으러 갔을 때 군의관이 그의 혈압을 재보더니 깜짝 놀라 아직까지 살아있는 것이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면서 괜찮으냐고 물었다. 고혈압이 200을 넘은 탓에 현역은 커녕 방위도 못하고 쫓겨났으니 나라에서도 버림받은 몸이 된 것이다.

본태성 고혈압으로 중풍을 5번이나 맞았다. 30살이 되기 전까지 전신마비, 반신마비를 수차례 맞는 등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겼다. 얼마나 고통이 심했으면 죽는 것이 소원이었을까.

23살쯤 허무, 염세주의에서 빠져나와 긍정적으로 살아보자고 마음을 바꿔 우선 엉망이 된 내 몸부터 치료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약초를 찾아 자신의 몸을 고쳐보기로 결심했다.

그는 약초를 찾아내어 끈질기게 자신을 괴롭혀온 선천성 고혈압과 심장병 그리고 중풍과 극심한 두통을 스스로 완치시켰다. 약초(천마) 한가지로 20년 두통을 한 달 만에 고친 이후로는 앓아본 적이 없다. 태어나서 단 한번도 병원에 가본 일이 없고 한약이나 양약이나 어떤 약도 먹어본 적이 없다고 한다.

30대 초반에 앓았던 직장암 등 보통사람이 걸리면 죽을 수 있는 병을 그는 5~6 차례나 앓았고 모두 스스로 고쳤다. 그러면서 약초와 질병에 관한 지식을 얻었다.

채식주의자. 고기와 달걀은 안 먹고 화학조미료, 식용유, 등푸른 생선, 버섯도 입에 대지 않는다. 고기를 안 먹는 이유는 짐승들을 키우는 과정에서 문제가 많기 때문이란다. 그는 누구라도 자기처럼 먹고 입고 생활하면 건강해지고, 모든 질병도 다 낫는다고 자신한다.

그는 약초음식점 ‘디미방’을 인사동에 차려 운영하고 있다. 또 하나 ‘정죽’이라는 약초 죽전문점도 신문로에 열어 운영하고 있다. 그의 음식점은 화학조미료 안 쓰고, 멸치와 명태 외에는 고기를 절대로 안 쓴다고 설명한다.

사람이 환경운동 하는데, 자연을 깨끗하게 하기 이전에 먼저 내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게 가장 기본적인 환경운동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그는 질병을 다스리려면 우선 긍정적인 마음을 가져야 하고 두 번째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도록 생활 습관을 바꿔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세 번째는 먹지 말 것은 먹지 말도록 음식습관을 바꿔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병을 치유하기에 너무 늦었을 때 약을 쓰되 반드시 천연물질로 된 약초를 쓰라고 권한다. 사람이 인공적으로 합성한 것은 그 구조가 불안정하기 때문에 인간에 치명적인 독소가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가공한 경우는 유전자 구조를 파괴하거나 변형시키는 경우가 많은데 천연물은 그렇지 않다.

한 가지 일에 오래 몰두 하다보면 남들이 볼 수 없는 눈이 생기고, 긴 안목으로 전체를 꿰뚫어 볼 수 있는 통찰력이 생긴다는 약초꾼 최진규.

무학에서 출발하여 한눈팔지 않고 평생을 약초에 미쳐 살아온 그를 보면서 이 세상에 노력으로 안 되는 것이 없다는 진리를 다시 한번 깨달았다.

몸이 아파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면서도 오히려 그것을 전화위복으로 삼아 자타가 알아주는 약초전문가가 되었듯이 그는 앞으로도 전국의 산을 약초밭으로 만들고 사람을 살리고 자연을 살리는 자신의 꿈을 이루어 나가기 위해 자신의 남은 인생을 몽땅 걸 작정이다.

다른 내용은 책에서 찾아 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