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BC-TV 인기드라마 '아씨'의 여배우 김희준
1970년 공전의 히트를 한 TBC 일일드라마 ‘아씨’. 극중 아씨(김희준)는 남편(김세윤)이 신여성과 공공연히 외도를 일삼는데도 여필종부 삼종지덕의 가르침을 굳게 따른다. 시어머니와 시누이의 구박을 참아내며 남편이 밖에서 낳아온 아들까지 친자식처럼 사랑하며 키워냈다. 당시 ‘아씨’가 방송되는 시간엔 전국의 수돗물 사용량이 줄었다는데. 이렇게 ‘속 터지는’스토리에 열광한 게 불과 한 세대 전의 우리 정서였다.
'아씨' 이미자
(1970년 TBC-TV 일일연속극, 1971년 영화 Ost )
옛날에 이 길은 꽃가마 타고
말 탄님 따라서 시집가던 길
여기던가 저기던가
복사꽃 곱게 피여 있던 길
한 세상 다하여 돌아가는 길
저무는 하늘가엔 노을이 섧구나
옛날에 이 길은 새색시적에
서방님 따라서 나들이 가던 길
어디선가 저만치서
뻐꾹새 구슬피 울어 대던길
한세상 다하여 돌아가는길
저무는 하늘가에 노을이 섧구나
1970년 TBC-TV 일일연속극으로 방영되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드라마 '아씨'를 동명의 제목으로 영화화하였으며, 드라마 '아씨'가 종영되기 직전인 1971년 신년벽두에 개봉되었다. 영화 빨간마후라, 두 나그네, 로맨스 마마 등 1960년대 많은 영화에서 단역배우로 활동한 경력이 있는 여배우 '김희준'이 여주인공을 맡아, 당대 최고의 스타로 발돋움하였으며, 그녀는 '아씨' 이후, 그 분이 아빠라면, 서방님 따라서, 팔도식모 등의 작품에 여주인공으로 캐스팅되는 행운을 맞기도 하였다.
복혜숙, 주선태, 황정순 등 한 시대를 풍미했던 배우들이 조연으로 나왔고, 바람둥이 남편역을 맡아 당시 많은 시청자들에게 미움을 받았던 김창세(이 드라마 이후 “김세윤”으로 개명)가 영화에서도 남편으로 나온다. 이 드라마에서 아들 봉구 역을 맡아 스타덤에 오른 노운영(이후 노주현으로 개명)도 이 작품 이후 풋사랑, 아무도 모르게, 말썽난 총각 등 다수의 영화에 주인공으로 등장하였다.
그 외에도 사미자, 방수일, 지윤성, 김신재, 여운계 등 호화 배역들이 열연하였는데, 드라마가 1910년대부터 70년대까지 이어지는 방대한 내용이라 영화는 1부 '아씨'(최인현 감독), 2부 '서방님 따라서'(진천 감독)로 나누어 제작하였고, 2부에서는 '최무룡'이 남자 주인공을 맡았다. 그러나 영화로 만들어진 '아씨'는 1, 2부 모두 드라마만큼 인기를 얻지 못했으며, 서울에서는 2편 모두 흥행에 참패했고, 서울보다 먼저 1971년 신정프로로 개봉된 부산(대영극장)에서는 당시 손익분기점이었던 기본관객 3만명 이상을 동원하는 호조를 보였다. '아씨'의 주제가는 드라마, 영화 1,2부 모두 '이미자'가 불렀던 동명의 '아씨'로 “한 많은 여자의 일생”을 담은 그야말로 심금을 울리는 노래다.
(세상살이 엿보기)
안방극장의 '히로인' 김희준 양, TV 2편 · 영화 3편 너무나 시간이 없어
"어느 결엔가 성큼 여름이 다가왔군요. 별로 대단한 일도 없으면서 웬지 시간에 쫓기다 보니 꽃과 신록도 까맣게 잊고 있었나봐요." 특유의 약간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하는 안방극장의 히로인 김희준(金喜俊) 양은 그대로 '아씨' 처럼 다소곳한 모습이다. 집이 바로 앞(서울 종로구 관훈동)에 있으면서도 좀처럼 시간을 얻을수 없어서 비원(秘苑)이 멀리 느껴지는게 몹시 안타깝다는 그녀.
-지금 하고있는 작품은?
"아씨, 옥녀(玉女). 이건 TV 쪽이구요, 그 밖에 영화에 세 편쯤 나가고 있어요."
무슨 영화에 나가느냐는 물음에는 한사코 밝히기를 꺼린다.
"조그만 역일 뿐이에요. 정말 하나도 자랑할 만한 것이 못 되는 거죠."
그 조그만 역이 시간을 너무나 많이 빼앗아 간다는 얘기.
"TV와 영화는 그 성격이 좀 다르죠. TV가 훨씬 마음 편해요. 영화보다 몇배나 어렵고 힘들기는 하지만 그래도 한결 TV 쪽에 정이 가요. 영화에 한번 출연하려면 그 어수선함이란..."
김희준양은 원래 영화계 출신. 64년 신(申)필름을 통하여 '님은 가시고 노래만 남아(가수 이난영의 일대기)'로 데뷔 이래 몇편의 영화에 선을 보이다가 TV와 인연 맺은 것은 TBC-TV의 탤런트 2기로 발을 들여놓으면서부터다.
"지금까지 작품 중에서 그래도 제일 인상에 남는 것은 '기러기 가족' (김희창 작 · 허규 연출)이에요. TV 출연 첫 작품이었기 때문에 아주 열심히 했고 또 그 만큼 발돋움할 수 있는 계기가 된 작품이기도 하죠."
-스캔들이 없기로 유명하던데?
"저의 생활신조 제1조가 정숙한 몸가짐이에요. 이른바 인기직업을 가진 사람을 볼때 누구나 색안경으로 보려고 드는 경향이 있잖아요? 색안경에 비칠 틈을 주지 않는거죠. 그래서 일(녹화, 촬영)이 끝나면 바로 집에 돌아가요. 잠시 쉬는 것도 반드시 집에 들어가서 쉰다는 원칙을 세우고 있죠."
그렇게 철저하게 자기를 보안조치(?)하는 데도 얼마전 엉뚱한 소문이 나돌았다고.
"너무 너무 분했어요.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하지만 억지로 해명하려고 하지는 않았어요. 저절로 사실이 알려지게 마련이 아니겠어요? 변명을 한다고 해서 그대로 해명되는 것도 아니고, 어쩌면 더 우스워지기 십상이거든요."
-가족은?
"할머니, 엄마, 그리고 동생 둘이 함께 살고 있어요. 아버지는 6·25 때 돌아가시고…"
바로 밑 여동생 희선(喜善)양이 지난 4월에 새치기 결혼.
"그 날 마침 「아씨」의 녹화가 있어서 결혼식에도 못갔어요. 얼마나 언짢았는지 몰라요." 그러면서 동생이 불쌍한 생각이 들어서 울었다고. 여자는 시집을 가게 되면 남의 집 사람이 되는게 아니냐는 것이 울어버린 이유란다.
-결혼 할 생각은?
"그런거 생각해 본 적 없어요." 화닥닥 놀라면서 잘라 말한다.
바쁜 중에도 틈틈이 이방자(李方子)여사가 주재하는 칠보 만들기를 배우러 다니는 것이 유일한 취미. 집에서 쉬는 날이면 수를 놓으며 「아씨」의 몸가짐을 다져가는 것이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라고.(선데이서울 70년 5월 31일)
김희준에게 중매가 줄을 잇기 시작한 것은 올 봄부터. 주로 집안을 통해서 은밀히 청혼이 들어오고 있는데 대부분 연예계와 관계가 없는 인사들. 김양의 어머니와 언니가 주동이 되어 청혼을 맡아 처리(?)하고 있는데 평소 연예계통의 사람에게는 절대로 시집을 가지 않겠다고 공언해 온 김양이기 때문에 어머니나 언니가 김양에게 권하는 '신랑후보' 씨들은 한결같이 비연예인뿐이라는 것.
중매가 들어오면 어머니와 언니가 1차로 심사(?)를 해서 거기에 패스된 사람이라야 김양에게 넘어간다는 것인데 지금까지 김양에게 어머니와 언니가 추천한 후보는 5명 정도. 현재 정계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소장 정치가, 현직 유명 검사, 의사, 모 방송국 상무의 동생 그리고 얼마전 미국에서 돌아온 사람등. 이들 중에서 모방송국 상무 동생의 경우는 꽤 구체적인 데까지 진전이 있었다는데 신랑쪽 집안에서는 이미 결정된 혼사나 다름 없다고 자신만만하게 나와 한동안 김양이 궁지에 몰린 적도 있었다는 이야기. 그때까지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던 김양이 직접 중간에 나섰던 상무를 만나서 아직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정중히 거절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쟁쟁한 신랑후보들의 청혼을 받은 김양은 한창 고민 중. 누가 보아도 침을 삼킬만한 탐나는 신랑감들인데 그들의 집안이 한결같이 너무 부자들이고 보면 별로 유복하지 못하게 자라온 자신과 비교해서 걸맞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철없는 아가씨라면 부잣집에 시집가는게 어디냐고 생각하겠지만 차분한 '아씨'인 김양의 생각으로는 그게 아니라는 말씀.
"사람에겐 각기 자기 분수라는 것이 있는게 아니겠어요? 고급 승용차를 타고 몇사람의 하인을 두고 대궐같은 집에서 호화롭게 사는 사람에게는 그나름의 생활신조랄까 주의가 있는 것이고, 저 같이 소시민적인 사람에게는 또 그 나름대로의 생활방식이 있는 거죠. 어쩐지 부잣집에 시집을 간다 생각하면 마음이 편하지 않을 것 같아요."
미국서 돌아온 신랑감과 맞선까지 보았다는 소문
이런 '아씨'적인 사고방식으로 보아 청혼이 들어온 후보들 중에서 가장 '아씨'의 마음에 편함을 주는 사람이 미국에서 갓 귀국했다는 남자. 들리는 소문으로는 양쪽 집안 어른들이 함께 한 자리에서 맞선까지 보았고 또 서로 '싫지않은 마음'이라는 것인데 김양이나 그 사람이나 모두 몹시 수줍어 하는 타입이라서 결정적인 대화는 나누지 못했다는 것.
그런데 7월 초에 갑자기 단행된 TBC-TV 탤런트 출연료 인상 때 김양은 자기의 대우가 너무 소홀하다는 이유를 들어 탤런트를 그만두겠다는 뜻을 비친 적이 있었다. 즉 자기가 받는 출연료가 C급 대우 밖에 안된다는 것. 기별(期別)로 정해진 급수에 따라서 그만한 대우를 하는 것은 타당하다고 할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그런 원칙이 절대적일 수는 없지 않느냐는 것이 김양의 주장이었다. 열심히 하면 그만한 보답을 해주는 것이 마땅하다는 이야기. 김양의 탤런트 은퇴 의사는 그뒤 TBC의 모 중역이 직접 김양을 불러 장래를 약속한 모종의 타협을 해서 무마되었지만 그때 김양이 다른 방송국으로 가지 않고 그만두겠다고 한 말속에는 결혼을 할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냐고 추리할 수도 있다.
이와같은 추리를 뒷받침할 만한 것으로 평소 김양이 다른 연예인들의 경우와는 달리 결혼과 동시에 탤런트계를 떠나겠다는 결심을 단단히 하고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예 이번 기회에 TV를 떠나 그 '마음에 드는 분'과 결혼을 할까하는 생각을 갖지 않았느냐는 것.
김양은 6·25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지금 살고 있는 집(서울 종로구 관훈동 141)에서 운동구점을 하고 있던 아버지가 파편에 맞아 직공 5명과 함께 그 자리에서 숨지고 말았다. 아버지를 잃은 집안은 그 때부터 기울기 시작했고 김양이 고등학교(명성여고)를 졸업할 때 쯤에는 오빠 김희경씨(경제학박사 · 현재 미국 휴스턴에서 대학교수)가 미국 유학을 갔기 때문에 대학에도 진학하지 못한 형편. 성격이 워낙 온순한데다 집안 형편마저 어려운 처지라서 순순히 형편을 따라 집안살림에 앞장을 서게된 것.
또한 김양의 어머니는 전통적인 한국여인으로 예의와 범절이 바르고 곧은 부인. 김양이 '아씨'에서 보여주는 몸가짐이 깍듯하고 전통적 예의범절 그대로라는 것도 이와같은 어머니의 가르침 덕분이라는 공론이다.
결혼 · 공부 · 탤런트 생활 중 어느 것 하나 버릴수 없고 고등학교 밖에 나오지 못했기 때문에 김양은 배움에 대한 미련 또한 결혼만큼이나 비중을 두고 있다.
김양이 공부하겠다는 전공은 아직 구체적으로 정하지는 않았지만 가정주부로서 도움이 될만한 것을 택하겠다고.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갖추어야 할 소양을 공부하겠다는 어디까지나 '아씨'적인 소견이다. 그러고 보면 김양은 지금 세갈래 갈림길에 서 있는 셈. 결혼, 공부 그리고 탤런트 생활. 김양으로서는 이 세가지 중 하나라도 소홀히 할 수 없는 행복하게 딱한 입장에 놓여 있는 것이다.
"무슨 일이든 한가지만 전념을 해야 승부를 가릴 수 있는게 아니겠어요? 두가지를 한꺼번에 이루려고 욕심을 냈다가는 모두를 그르치고 만다는 것을 전 잘 알고 있어요. 지금 내 생각으로는 이왕 탤런트 생활을 하고 있으니 그것에만 전념하려고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반드시 그 생각이 결정적이 아닐 수도 있다는 여운이 있다. 조용한 말씨라든가 착한 마음씨 그리고 다소곳한 몸가짐 등 바로 드라머속의 '아씨' 모습 그대로인 김희준의 현실은, 마음은 그러나….(선데이서울 70년 7월 19일)
TV드라머 '아씨' 김희준(金喜俊)양이 서울에 있는 외국 대사의 주선으로 머지 않아 미국 나들이를 하게 된다는 소문이다.과거 김희갑, 김진규, 유현목씨등 한국 영화 예술인들이 미국무성의 초청으로 미국에 다녀온 바 있다. 이 소문에 대한 방송국 주변의 반응은 한마디로 충격적이다. 동료 탤런트들은 부럽다 못해 입을 다물지 못하고 아씨의 담당 PD 고성원씨는 '그럴리가' 라고 전혀 이 소문을 믿으려조차 하지 않았다. 1백50회를 넘기는 동안 거의 절대적인 인기를 모은 이 연속극은 인기가 유지하는한 연말까지 끌고갈 계산이고 단 1회라도 김희준이 빠질 수 없다는 주장이다. 더구나 드라머의 세 기둥 중 하나인 시아버지 주선태를 죽은 것으로 처리했고 그러지 않아도 극이 처지는 느낌인 현재 김희준을 다른 탤런트로 바꿔치울수는 도저히 없다는 것. 김희준의 탈락은 곧 '아씨'의 종결과 동일하다는 얘기다.
"야! 저기 아씨 간다."
김희준이 거리를 거닐면 어린아이들까지도 아씨를 알아본다. 탤런트 로서의 김희준이란 이름은 몰라도 누구나 아씨는 안다. 한국적인 고즈넉한 이미지때문이다. 한국적이라는 것. 한국적인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향수어린 그리움을 갖게한다. 고요속의 미덕, 고전적 한국의 여성미는 더욱 외국인들에게 어필한다. 그 실례가 있다.
"아씨를 보시는 시간입니다."
서울의 어느 외국 대사관 직원들 사이에 간혹 이런말이 오고가는 것을 들을 수 있다. 대사관 고위층이 그 시간을 보기 때문에 급한 용무가 아니면 되도록 그 사람과의 그 시간 업무를 사양하자는, 이것도 한국적인 미덕이랄까….
한글학자인 한갑수씨는 「아씨」란 말을 현대에도 적용시켜 쓰자고 주장한다. 어쩐지 '아씨'하면 옛날 여성을 연상케하지만 오늘날에도 그 말을 자꾸 쓰면 습관에 따라 조금도 이상한 느낌이 들지 않을 것이란 얘기. 그런데 이미 한글학회에서는 그말을 쓰고 있다. 한글학회에 전화를 걸어보면 '저 미스 김 이에요' 하지 않고 '저 김(金)아씨에요'한다.
김(金)아씨, 이(李)아씨, 박(朴)아씨, 유(柳)아씨… 나쁘지 않다.
한갑수씨는 심지어 마담을 '마님' 이라고 부르자고 까지 제의한다. 흔히 다방에서 '가오마담'이라고 하는 것을 '허울마님'이라고 부르자는 것. '가오'는 일본말 '얼굴'이란 뜻이지만 얼굴보다는 허울로 해서 그렇게 부르자는 의견. 이런 얘기도 김희준의 '아씨'에 연유해서 나올 정도다. 한글학자의 어휘연구에까지 '아씨'가 등장하는데 고위층 외국관리나 또 국내의 저명인사들이 한국적인 이미지인 '아씨'를 좋아하고 본대서 흉될 것은 없다. 오히려 자랑거리다. 바꾸어 말하면 김희준이란 탤런트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전형적 한국의 여성상을 좋아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전제로해서 얘기를 꺼내보자.
우리 정부의 고위층 한분도 '아씨'의 이미지를 좋아한다는 것. 어느날 모 외국대사와 만난 자리에서 이야기가 나누어졌다. 한국적인 아름다움. 고미술품이라든가, 한국무용이라든가, 건축미라든가, 정원이라든가, 교양인이 만나 얘기할 수 있는 자연스런 대화속에 TV 드라머에 대한 얘기도 나왔다는 것. 그때 외국대사는 자신이 본 한국영화나 TV 드라머 가운데 가장 한국적인… 더구나 여성의 미덕을 통해 그것을 나타낸 '아씨'란 작품에 대해 퍽 호감을 갖고 있다는 말을 했다는 것.
대부분의 한국영화나 TV 드라머가 국적불명, 이를테면 한국말 대사가 없으면 어느나라 얘기인지 알수 없을 정도로 주체성이 없는 것들인데 반해 '이것이 뚜렷하게 한국만이 가질수 있는 얘기'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다방 아니면 당구장… 그렇잖으면 '고고 하우스'…. 일반 가정에서 보기드문 훌륭한 응접실이 아니면 영화나 TV 드라머의 배경이 될 수 없는가 싶을이 만큼 알쏭달쏭한 것들이 판을 치는 속에서 '아씨'가 지적되었다고해서 이상할 것 없다. 자랑스러운 것…. 너도 나도 자랑스러운 것은 더욱 자랑하고 싶어지는 것. 자랑스런 이미지를 풍겨주는 김희준을 미국에 소개하면 어떨까. 그래서 김희준을 미국에 보내자는 얘기는 자연스럽게 나왔을 법하다.
아씨의 미국 나들이…
김희준은 '그렇게 된다면 오죽 좋겠어요'라고 말했다. 그녀 자신은 이에 관한 소문의 사실여부를 '아직 알 수없다'면서 '공식적인 통지는 전혀 받지않았다'고 밝혔다. 대개의 경우 초청 도미는 5~6개월의 수속기간이 걸리는 것으로 알려있다. 그러니까 김희준의 도미수속이 실제로 진척된다해도 연속극 '아씨'에는 별 지장을 주지 않으리라는게 다른 관측자의 얘기다. 70년말까지 끌고 나갈 예정인 '아씨'도 경우에 따라서는 2백회로 종료할거라는 또 하나의 관측이 이 김희준 도미설과 묘하게 관련되어있다.
TV 탤런트로는 처음으로 김희준이 이 자랑스러운 나들이를 하게될는지 그것은 아직 확정사실은 아니다. 다만 주선에 나선 외국대사를 비롯한 외국사절이 '아씨'의 팬이었고 그것이 이 김희준 도미라는 열매를 맺는다면 김희준은 훌륭한 민간 외교사절의 임무를 맡게된다는 것은 명백하다. TV 시대의 전개와 함께 행운을 잡고 TV의 여왕이 된 김희준은 지금 한창 미국나들이의 꿈에 가슴 설레고 있는 것이다.(선데이서울 70년 9월 13일)
70년대 장안의 화제가 된 드라마 '아씨'를 집필한 이철향 작가가 2006년 7월 20일 밤 교통사고로 별세했다. 향년 67세. 최근 백제 왕인박사를 주인공으로 한 뮤지컬을 준비하던 그는 전남 영암을 다녀오다가 변을 당했다. 오후 10시께 충남 보령IC 인근에서 타고 있던 차량이 빗길에 미끄러지면서 가드레일을 들이받는 사고를 당한 것. 이 작가는 곧바로 인근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숨을 거뒀다. 유족으로는 부인 탤런트 권미혜 씨(66)와 현구(40ㆍ사업), 승구 씨(38ㆍ사업) 등 두 아들이 있다. 빈소는 서울 강남성모병원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24일 오전. | 2007/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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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렸을 적, 텔레비젼이 처음 우리집의 방 한 구석을 차지했던 것은 내가 초등학교를 입학할 무렵이었다. 학교를 들어 가기 전, 9월에 마포의 새집으로 이사하고부터 어머니는 한 두가지씩 살림을 새로 장만하시기 시작했고 그 중에 거의 첫 번 째가 텔레비젼이 아니었나 생각이 든다. 그 때는 금성사에서 국산 텔레비젼을 생산한지 얼마 되지 않던 시기라 주로 청계천에서 일제 텔레비젼를 구입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기술적인 문제로 아예 처음 부터 일제 텔레비를 찾는 경우도 충분히 있음직했다.
어느날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다리가 네 개 달려 좀 위태롭게 보이는 14 인치 일제 샤프 텔레비가 머리에 나비 날개를 한 실내 안테나를 얹고 안방의 한 면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날 부터 나는 아마도 동네 친구들, 같이 놀던 서너살 위의 형들을 불러 텔레비를 보자며 은근히 자랑을 했지 않았나 싶다.
물론 그 당시에는 텔레비가 있는 집이 진짜 그리 흔하지 않아 프로 레슬링 경기가 있을 때면 집의 대청 마루와 마당은 거의 동네 극장이 되곤 할 정도였다. 그래서 경기가 시작될 시간이면 어머니는 화분을 얹는 선반을 의자로 사용해 사람들이 앉아서 구경할 수 있도록 하시곤 했었다. 이 무렵, 김일 선수가 등장하기 이전의 레슬링 선수로는 동양 챔피온 장영철, 당수 5단(?)의 타이스 차림을 한 천규덕, 두 거인 박성남과 박성모, 그리고 백곰을 별명으로 하는 우기완 등이 주로 나와 일본 선수들과 싸우곤 했는데 가히 털복숭이 장영철 선수는 아이들에게 최고 인기였었다. 또, 복싱은 어떤가? 이탈리아의 벤베누티를 누르고 세계 미들급 챔피온이 선언되기 까지 김기수의 선전을 매 회 박수로 환호하며 텔레비젼 앞에서 끈적한 여름밤의 지리함을 후련히 날려 보낸 적도 있었다.
이런 특집 프로가 아니라면 유일한 국영 방송, 채널 9의 KBS에서 방영하는 연속극과 화요일과 토요일 밤에 방영하는 장동휘, 허장강, 신영균, 최무룡, 이향, 이예춘,복혜숙, 도금봉, 황정순 등이 출연한 국산 영화와 - 참고로, 더빙 처리된 외국 영화는 68년도 MBC TV 방송국이 개국했을 때 부터 시작되었다 - 초저녁에 방송하는 어린이 프로로는 어린이인형극과 천재 소녀로 불리운 안인숙 진행의 '누가 누가 잘하나' 등이 있었고,
외화로는 리차드 킴블의 도망자, 카트라이트 형제의 서부극 '보난자', 프랑스 외인 부대의 부대원 간 내부 갈등을 주로 소재로 한 '외인부대', 서부 기병대에서 함께 생활하는 소년과 린티라는 이름의 쉐파트개의 얘기를 그린 '용감한 린티', 일요일 저녁 8시 빅 모로우와 릭 제이슨 주연의 '전투', 또, 전투를 시작하기 바로 전의 '개구장이 데니스'와 화요일 저녁에 했던 서부극 '추격'이 있었다.
또, 연속극으로 대표적이었던 것은 김희준 출연의 '아씨'와 '짚세기 신고 왔네'가 있었다. 짚세기 신고 왔네는 이 때도 김세레나가 타이틀 곡을 불렀는지는 확실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최근 위암으로 투병 중이어도 영화 촬영에 임하고 있는 오현경과 나옥주가 - 안방극장 첫번째 히로인으로 65년도에 은퇴할 때 그녀의 장충체육관 은퇴식은 텔레비에서 중계까지 되었을 정도의 인기 탤런트- 부부로 메뚜기표 쇠주 공장을 운영하고, 강부자와 김순철이 각각 처형과 동생으로 같은 집에 함께 살면서 웃음과 울음을 자아냈던 유호 극본의 주말극이었다.
그 이후, 안은숙의 사슴아가씨와 장욱제(본명, 장시권)와 태현실의 '여로' 등이 있기 전 까지, 실화극장의 '250조'- 영화 배우 신영균과 남궁원이 출연한 처음이자 마지막 텔레비 연속극, 송 재호의 데뷰작으로 생각되는 조선인 학도병 이야기 '아로운', 그리고, 정혜선의 전 남편, 박병호와 영화 배우 김승호와 복혜숙이 열연한 십 년 원한의 복수극 '원십년'이라는 것이 그 당시 황금 시간대에 전파를 탔던 60년 대 중 후반 연속극들이었다. 한편, 60년 대 활동했던 탤런트로는 허스키 보이스의 원로 탤런트 최정훈과 대원군 역을 했던 김성옥, 그리고 반효정과 김민자 등이 한 시대를 활동했던 이들이었다.
쑈 프로로는 후라이보이 곽규석이 하던'쑈쑈쑈'라는 것이 있었는데 그 때 까지 있었던 국영 방송의 단조로운 오락 프로를 앞서는 민영 방송 TBC의 프로였고 그 이전에 서영춘이 진행하던 '아베크 노래자랑'이라는 프로는 청춘 남녀가 출연해서 경연하는 노래 자랑이었다. 또 '장수만세'라는 것도 있어 60세 이상의 노인과 가족들 출연의 무대와 프로 이름은 잊었지만 김동건이 진행하고 송해와 박시명이 보조하는, 70년대 MBC 변웅전의 '유쾌한 청백전'의 모델이 되었음직한 오락 게임프로가 있었는가 하면 장소팔과 고춘자의 만담이 애시청자의 단골 메뉴였다.
(2) 당시 텔레비의 쑈 프로는 인기 가수 중심으로 꾸며졌었고 라디오로만 듣던 유명 가수들은 거의가 별로 움직임이 없는 자세로 노래를 하곤 했었던 거 같았다.
여자 가수로는 '맹꽁이 타령'의 박재란, '눈이 나리는데'의 한명숙, 현미, 송춘희, 그리고 '삼다도 소식'의 최숙자와 이미자 등이 쑈프로에 단골이었으며 이들은 화사한 한복이 아니면 한결같이 대개는 팔꿈치까지 오는 까만(흑백 화면 때문에) 장갑에 허리선이 약간은 깊게 패인 드레스를 입고 출연했는데 아마 그런 인어공주 패션은 'I went to your wedding'을 불렀던 미국의 페티 페이지 풍의 유행을 따른 것이 아니었나 생각이 된다.
또 남자 가수로는 '바닷가에서'를 부른 감미로운 목소리의 안다성과 구수한 최희준, '마도로스 사랑'의 남일해 등이 여성들의 인기 가수 리스트에 올라와 있었다. 이들은 힘찬 트위스트를 곁드려 노래하던 이금희와 짧은 미니 스커트의 윤복희, 엘비스 프레슬리를 닮으려 했던 남진 등의 가수들에 의해 점차 무대 출연의 횟수가 줄어들 때 까지 텔레비에서 자주 보아 오던 얼굴들이었다. 가끔 손이나 팔을 움직여 약간의 제스춰를 만들거나 손가락을 퉁기며 박자를 맞추곤 했던 밋밋한 공연 매너는 이들의 뒤에서 노래에 어울리는 춤과 화려한 의상, 그리고 가끔 백코러스를 하기도 했던 방송국 전속 무용단에 의해 보충되었다. 아직 미니스커트가 국내에 들어와 일반화가 되기 전에 이들 무용수들의 무대 복장은 어린 나에게도 굉장한 관심 거리였음에 틀림없었다.
내가 맨처음 심취한 TV드라마는
70년 대쯤 흑백 드라마 "아씨"였었는데
김희준라는 미모의 여주인공
김동훈등이 출연하였으며
'옛날에 이 길은 꽃가마 타고 말 탄님 따라 시집 오던길~'
으로 시작하는 이미자의 고운 주제곡이
처음부터 분위기를 사로잡아 빠져들게 했었다
(모셔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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