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와같이 들었다.
할아버지 감영생이 와세다에 공부한 시기는 해방직전후로 그 정확한 년도를 알지 못한다.
왜냐면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 고모 둘도 당시 너무 어렸기 때문이고 할머니와 증조모는 무학이라 그렇다.
집을 위주로 사방 30리가 모두 우리집 땅이라 어른들 말씀으로 평생 남의 땅을 밟고 살지 않았다고 늘 말씀하셨는데
나는 어릴때 그 말씀을 들을 때마다 내가 커서 그 땅들을 반드시 다 도로 찾고 말겠다는 생각을 하곤 하였으며
와세다에 들어가 할아버지의 후배가 되어 교정을 걸으며 할아버지의 발자취를 찾고 싶었다.
그 때 내 나이 11살때의 일이며 그때부터 나는 일본어를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상남면 구배기, 은산 종남산 일대 군부대 있는 곳 20만평이 등기를 토지정비시 미등기했다는 이유로
(당시 해방전후, 한국전쟁등, 혼란기이기도 했고 그런 중에 또 할아버지가 그런 일을 당해
도무지 정신이 하나도 없을 때 땅이 너무 많아)정부가 뺏아갔으며
아버지가 생전에 이 땅을 찾으려했으나 공소시효가 1년인가 지났다며 찾지못했고
창원 39사단 금싸라기 땅도 할아버지 거였는데(싯가 수조원) 그것도 그런 식으로 정부가 뺏아가서
39사단을 세운 거였으며 3년전인가 정부에서 팔았다느니 하는 억장이 무너지고 기막힌 소문을 매스컴에서 들은 바 있다.
39사단안에 감가 시조할아버지 묘가 있고 해마다 거기서 시제를 지낸다 하였으며 몇 해전
<KBS 6시 내 고향 >에 나온걸 생방송으로 우연히 자세히 보았다.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 말씀으로 39사단을 아무도 못건드리게 할아버지가 명의를 할아버지 감영생과
문중명의로 걸어두었더라고 하였다.
시조 할아버지묘가 거기에 있어 그랬는가 추정만 하였다.
종남산 아래가 거의 우리집 땅이라 들었다
할아버지는 창씨개명은 하지 않았다 들었으며 백산 수산을 바라보고 펼쳐진 평야가 전체 할아버지거였다.
할아버지의 빛바랜, 마치 전생같은 희미한 발자취를 추적,찾으면서 어떤 조그만 건덕지라도 기록하고자 한다.
창원 유족회에서 책자를 내는데 할아버지에 대해서 책에 올린단다.
이상하게 할아버지건으로 글을 쓰면서 자꾸 화제가 되면서 여기저기 주목이 되곤 한다.
할아버지와 윗대 할아버지께서 김종직 선생을 매우 흠모하였다하며 증조부 고조부께서 예림서원 중창할 때
많은 돈을 내어 중창했다는 말씀을 들었다.예림서원은 너희 몇 대 조부님들이 중창하신거라 하셨고
거기서 찍은 증조부 독사진을 본 적 있다
당시 할아버지가 사진을 아주 잘 찍으셔서 덕분에 고조모 사진까지 본 적 있고 그 사진이 내게 있다.
아버지가 노름으로 재산을 다 날리고 비록 집이 망가가 되어 엉망이 되었지만 어린 나의 두 손을 잡고
증조할머니와 할머니는
" 부디 용기를 내거라. 무조건 용기백배하거라.
너는 왕대나무 집안의 훌륭한 혈통임을 잊지 말거라, 왕대나무밭에서 왕대나무가 나느니라,
너는 왕대나무 자손임을 절대 잊지말거라"하셨다.
이렇게 늘 머리를 쓰다듬고 각인시키며 자긍심을 갖게 했으며 반드시 커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라고 하셨다.
나는 자랑스런 할아버지의 손녀가 되고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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