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잖아도 와세다에 찾아가서 알아보고 싶었다.
일본에 가게 되면 그 학교 찾아가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그 학교에 들어가려고 11살때부터 일본어를 공부한 것이다.
와세다 대학교 홈페이지에 들어간 적 있었고 글을 남긴 적이 있었다. 트윗으로 와세다에 들어가 할아버지 사진과 내가 꼭 알고싶다는 글을 영문으로 남겼으나 답이 없었다.
내가 직접 가서 확인하는 수밖에 없다.
내가 건강만 허락하면 바로 어떻게 해보겠는데 여의치않다.트윗을 하면서 할아버지를 아는 분을 수소문, 몇 만났는데 모두 아버지가 와세다 출신이었고 그 아버지로부터 할아버지의 말씀을 들어 안다는 거였다.
그 분들의 존경의 대상이고 멘토였다고 했다.
25년전 어느 신문에<민족주의자 감영생>역사의 재조명이라고 특필된 적이 있었으며 그 기자를 수소문하니 미국에 살고 있었다.
내가 한국전쟁전후 민간인 학살 유족회, 창원유족회 회원인데 회장.총무도 다 아버지가 와세다 출신이며 같은 날 학살 당하셨고 결정문 받아 나와 함께 국가소송중이다.
아는게 요까지며 계속 발자취를 쫒고 자료 수집중이다.
누구를 시켜서도 그렇겠고 일본에 가게 되면 그 학교에 가서 학적부 사본이든 뭐든 떼오려고 벼르고 있다.
오랫동안 투병, 죽기전에 문집이나 뭐나 만들고 싶었다.내가 19살에 출가, 33년동안 인연을 다 끊고 살고 있고 이쪽으른 아예 생각을 접고 살았다.
할아버지는 외동이라 조혼을 14살에 하셨다고하며 여러개의 가명과 변장을 하여 의열단 활동을 하셨는데
당시 김원봉 장군처럼 월북을 했다해도 그 분처럼 되었을거라고 하였다.
나는 건강도 그러하고 주지를 맡고 있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다.나보고 신경을 과하게 쓰는 일을 더 이상 하지말라고 의사 선생과 주변에서 걱정들을 한다.내가 덜 아프고 여건만 되었다면 여기저기 발품하며 자료 모으고 그랬을 것이다.
아버지 형제들이 큰고모 빼고 다 돌아가셨는데 큰고모가 치매가 와서 기억이 오락가락한 상태다.내가 할아버지건에 대해 이만저만 말씀드렸더니 통곡해 우시면서 정말 고맙다고 하셨다.
65년간 실종처리 되었는데 돌아가신 장소와 날짜 .어떤 식으로 학살되었는지에 대해 자세하게 알게되어 큰고모님께 말씀드렸고 그 나머지일은 내가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다.
이런 거 저런 거 아니면 내 성질에 벌써 일본 건너갔고 여기저기 수소문했을 것이다.마산 형무소에 당시 비밀문서가 있을 것이고 그것만 찾으면 신상정보가 나올 것이고 학력도 기재되어 있을거라 본다.
마음이 어지러워 할아버지가 계신 마산바다에 와서 비를 맞으며 걸었다.한바퀴 돌고 차안에 와서 기어이 울음이 터져 소리내어 통곡하고 울었다.
비가 오거나 달빛이 좋은 밤이면 바다에 자주 온다.
언젠가 종남산이나 지리산, 내원사에 들어가려했는데 그냥 이 바다에서 가까운 곳에서 살려한다.
나마저 멀리 가고나면 할아버지가 너무 외로우실 것 같아서. 많이 아파선지 마음이 급할 때가 있는데 어떻든간에 마음을 조절하려고 애쓰고 있다
자손중에 할아버지에 대해 신경쓰는 이가 나밖에 없다는 사실이 슬프다.많이 아파 정신이 아마득할 때도 할아버지를 생각하면 없던 힘도 생기고 용기도 생긴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므로 후회는 없다.훗날 할아버지를 만나면 고맙다소리 듣고싶다.붓의 힘을 빌려서 반드시 해내고 말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내가 참 모질게도 살아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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