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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강성대국 꿈` 못이룬 김정일

감효전(甘曉典) 2011. 12. 29. 11:26

①김정일 급사..안갯속 한반도 정세

평양 금수산기념궁전에 안치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시신의 모습을 20일 오후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했다.(자료사진)

 

 

 

남북대화ㆍ6자회담 재개 중단..동북아질서 영향 주목

내년 미중러-한국 리더십 교체 맞물려 불확실성 증폭

 

<※편집자주= 연합뉴스는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2011년 한해를 마감하며 국민들 뇌리를 사로잡았던 대형 이슈들을 분야별로 총정리한다>

 

 

(서울=연합뉴스) 강병철 기자 = 2011년의 한반도는 '대격동' 그 자체였다.

 

연평도 사건 이후 남북 군사적 긴장의 짙은 포연속에서 출발한 한반도 정세는 어렵사리 대화국면으로 전환하는 듯했으나 막판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망이라는 중대변수로 다시금 극도의 혼돈에 빠져드는 거친 굴곡의 과정이었다.

 

올 상반기는 대결과 대화의 흐름이 혼재된 기상도였다. 천안함ㆍ연평도 사건을 거치며 형성된 한.미.일 대(對) 북.중.러의 신(新) 냉전식 대결구도가 이어지는 한편으로 북핵 6자회담과 남북관계를 고리로 대화국면으로 추동하려는 물밑 외교적 노력이 이어진 시기였다.

 

그러나 대화재개 흐름은 천안함ㆍ연평도 사건 처리에 번번이 발목이 잡혔다. 정부가 천안함ㆍ연평도 사과를 남북관계 개선과 6자회담 재개와 연계해왔기 때문이다. 지난 5월초 남북 3차 정상회담을 겨냥한 당국간 비밀접촉도 그 연장선에서 무산됐다.

 

여기에다 북한이 공개한 우라늄 농축프로그램(UEP)도 관련국들의 외교적 대치구도를 심화시키며 6자회담 재개 흐름을 어렵게 만들었다.

 

그러나 하반기로 접어들며 기류가 바뀌기 시작했다. 한반도 주변질서를 좌우하는 미ㆍ중이 한반도 상황의 안정을 명분으로 대화국면을 향한 전략적 협력 흐름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미국이 '전략적 인내'로 대변되는 대북 강경기조에서 '관리적 개입'으로 선회하기 시작했고 우리 정부도 비핵화와 천안함ㆍ연평도 문제를 분리하며 전략적으로 유연한 태도를 보였다. 내년 강성대국 건설을 앞두고 경제지원과 후계구도 안착이 시급한 북한도 대외적으로 유화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6자회담 재개를 겨냥한 남북미 3자간의 새로운 움직임이 태동했다. 6자회담의 점진적 재개를 목표로 '남북대화 → 북미대화 → 6자회담'이라는 단계적 재개 프로세스가 가동된 것이다.

 

지난 7월말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열린 남북 첫 비핵화 회담은 그 서막이었다.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을 계기로 이뤄진 '비공식 접촉'이었지만 남북 외교장관이 2008년 7월 이후 3년 만에 만났다는 점에서 상징성이 적지 않았다는 평가다.

 

곧이어 일주일 뒤 뉴욕 북미 1차 고위급 대화가 열리면서 남북ㆍ북미간 '1라운드' 대화가 마무리됐다. 이는 엄밀한 의미의 협상이라기보다는 북미가 서로의 입장을 확인해보는 일종의 '탐색적 대화'였다.

 

이는 다시 9월 베이징 2차 남북대화 → 10월 제네바 2차 북미대화로 이어지면서 북미 양측의 쟁점을 압축시켰다. 한미 양측은 UEP를 중단하고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을 허용하는 방안을 비핵화 사전조치의 핵심으로 요구했고 북한은 이를 수용할 수 없다고 버텼다.

 

이후 북미는 뉴욕채널을 통한 물밑 접촉을 전개하면서 간극을 좁혀나갔다. 결국 북한이 비핵화 사전조치를 수용하고 미국은 영양지원의 형태로 대북 식량지원에 나서는 것으로 '빅딜'이 타결된 것이다.

 

이에 따라 북미 양측은 22일로 예상됐던 베이징 북미 3차대화에서 비핵화 사전조치를 합의타결하고 6자회담 재개 수순에 돌입할 예정이었다. 류우익 통일장관 취임이후 남북관계도 이에 발맞춰 조심스런 전환을 준비 중이었다.

 

그러나 북미 3차대화를 불과 5일 앞두고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다.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망이라는 예기치 못한 중대상황이 발생하면서 세밑 한반도 정세는 어디로 향할지 모르는 시계 제로의 형국이 됐다.

 

이는 한반도 주변질서를 좌우하는 주요 열강과 남북한의 정치적 지배구조가 일거에 교체기를 맞는 내년의 '정치적 빅뱅'을 목전에 두고 발생함으로써 가일층 격렬한 대혼돈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분위기다.

 

탄력을 받던 6자회담 재개와 남북관계 개선 흐름이 '전면 스톱'되고 북한 내부체제의 향방을 둘러싼 극도의 불확실성과 불안정성이 전반적인 정세 흐름을 지배하게 됐다.

 

특히 '포스트 김정일' 체제의 불확실성이 동북아 정세의 뇌관으로 떠올랐다. 김정일 체제를 대신할 김정은 후계체제가 제대로 안착되지 않은 상황에서 최고 실권자가 사망함에 따라 북한 내부는 당분간 '권력 공백기'를 거치며 극도의 혼란에 휩싸인 양상이다.

 

여기에 주변 4강이 북한 내부의 상황전개와 전략적 이해에 따라 서로 입장을 달리하며 치열한 이해각축을 벌일 개연성이 있어 정세를 한층 복잡하게 만들 것으로 전망된다.

 

한반도 정세 흐름은 김 위원장의 사망으로 완전히 새로운 국면으로 탈바꿈한 채 미ㆍ중을 중심으로 역내 협력과 갈등이 동북아 질서재편으로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soleco@yna.co.kr

 

 

 

평양체육관 광장에 모인 北주민들
(평양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망 소식이 전해진 지 하루가 지난 20일 평양체육관 광장에 모인 북한 주민들의 모습이라고 21일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했다. 2011.12.21 photo@yna.co.kr

 

'강성대국 꿈' 못이룬 김정일

평양체육관 광장에 모인 北주민들

(평양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망 소식이 전해진 지 하루가 지난 20일 평양체육관 광장에 모인 북한 주민들의 모습이라고 21일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했다. 2011.12.21 photo@yna.co.kr

 

 

연초부터 경제행보...중·러 잇따라 방문

막판까지 현지지도 강행군 이어가다 급사

 

(서울=연합뉴스) 노재현 기자 = "인민들을 강성대국에서 살게 해 주시려고 자신의 몸은 조금도 돌보지 않으시고 어떻게 그렇게 가실 수 있습니까"

북한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망 소식을 발표한 다음날인 20일 북한의 민간외교를 담당하는 대외문화연락위원회의 한 간부가 조선중앙TV에 나와서 한 발언이다.

 

아닌게아니라 2011년은 김 위원장과 북한에게 강성대국이라는 꿈을 향해 전력질주했던 한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북한은 1998년 김 위원장의 국방위원장에 공식 취임을 계기로 `강성대국'이라는 정치적 구호를 내세우고 2012년을 강성대국 달성의 해로 목표를 설정했다.

 

강성대국 원년을 1년 앞둔 올해는 북한으로서는 `D-데이'를 코앞에 둔 상황이라 마음이 다급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건강문제로 20대의 아들 김정은을 후계자로 내세운 김 위원장 입장에서는 자신을 뒷받침할 후계체제를 다지는 데 강성대국 건설만큼 중요한 과제는 없었다고 볼 수 있다.

북한의 강성대국 행보는 지난 1월 신년공동사설에서 경공업과 농업을 강조한 것을 시작으로 경제분야에 집중됐다.

 

북한은 올해 초부터 다른 국가의 정부는 물론이고 민간단체에도 쌀 지원을 적극 호소하는 등 식량 확보에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식량은 강성대국 시대에 외화와 함께 민심을 다독일 수 있는 `실탄'으로 활용할 수 있어 북한에게 더욱 절실했다.

 

또 김일성 주석의 100회 생일을 맞는 `강성대국 원년'을 축제 분위기로 맞이하기 위해 평양을 비롯한 북한 전역에서 건설공사를 대대적으로 벌였다.

 

대규모 주택이나 도로, 대형 발전소 등을 새로 건설하면 주민들에게 `강성대국 진입'이라는 시각적 효과를 낼 수 있다는 점을 노린 것으로 분석된다.

 

이를 위해 북한 당국은 군대는 물론 대학들을 이례적으로 집단 휴교조치하고 대학생까지 건설현장에 대거 동원했다.

평양에서는 10만 가구 살림집(주택) 건설과 105층 규모의 류경호텔 공사 재개 등이 추진됐고, 보도블록과 도로변 펜스 설치 등 도시미화 작업도 대대적으로 벌어졌다.

 

평안도, 양강도 등 지방 곳곳에서도 건물 신축은 물론 도로 확포장 공사와 자강도 희천발전소 등 사회간접자본(SOC) 확충 공사에 매달렸다.

 

하지만 가장 인상적인 것은 마치 자신의 `건강이상설'을 불식시키려는 듯한 김 위원장의 유별난 `광폭행보'였다.

 

김 위원장은 지난 5월 말 일주일 동안 중국을 방문해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을 한 데 이어 8월 말에는 러시아를 찾아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대통령과 회담하고 귀환길에 다시 중국을 방문하는 강행군을 펼쳤다.

 

김 위원장이 전통적 맹방으로 꼽히는 중국과 러시아를 불과 몇개월 시차를 두고 잇따라 찾은 것은 이례적이어서 국제사회의 주목을 끌었다.

 

당시 전문가들은 김 위원장의 이 같은 강행군에 중국과 러시아로부터 강성대국 준비를 위한 인도적 지원을 끌어내고 경제협력을 강화하려는 목적이 담긴 것으로 분석했다.

실제로 북한과 중국은 공동개발을 추진하는 나선특구 및 황금평을 중심으로 경제분야에서 밀착관계를 강화했다. 북한은 남북한과 러시아 3개국을 잇는 가스관 연결 협의도 활발히 진행하고 있다.

 

대내적으로는 김 위원장 특유의 통치방식인 현지지도가 공장, 기업소 등 경제 분야에 집중됐다.

 

통일부에 따르면 올 상반기 김 위원장의 공개활동 63차례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28차례가 경제분야였고, 하반기 들어서도 개보수 시설을 중심으로 경제현장 방문이 현지지도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생전 마지막 1주일간에도 그는 대형마트, 군부대 등을 찾아다니며 분주한 시간을 보냈다.

 

그는 그러나 강성대국 원년을 불과 14일 앞두고 급성심근경색과 심장쇼크로 급사하면서 37년 철권통치의 막을 내렸다.

김 위원장이 숨진 장소도 현지지도 와중에 타고 있던 야전열차 내부였다고 한다.

 

nojae@yna.co.kr

 

출처 : 아차반
글쓴이 : 나물거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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