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발 ‘대지진’
25일 오전 한 언론사 LA발로 기사 하나가 큼지막하게 떠올랐다. 기사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했다.
‘베일에 가려져 있는 명성황후로 추정되는 사진이 발견돼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민비’로도 친숙한 명성황후는 우리 근대사의 한(恨)을 대변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사진 한 장 제대로 남지 않았다. 한 때 잘 차려 입은 어느 여인의 사진을 놓고 ‘명성황후 진위 논쟁’이 일기도 했다. 많은 학자들이 “명성황후는 아닐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여전히 결판은 나지 않았다. 한데 명성황후 사진이라니.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이 언론사가 ‘발견됐다’고 주장한 ‘명성황후 추정 사진’은 1997년 삼성언론재단에서 간행한 ‘서양인이 본 코레아’(박영숙 편저) 265쪽에도 이미 실려 있는 사진이다. 사진 주인공을 ‘고종시대 궁녀, 또는 여염집 여성’이라고 설명한 이 사진에는 다음과 같은 해설이 덧붙여 있다.
“아름답고 무겁게 땋아 올리고 떨잠을 꽂은 큰머리로 성장(盛裝)한 품위 있는 한국 여성. 나중에 일본인들에 의해 시해된 명성황후가 시녀의 옷을 입고 궁에서 빠져 나와 시골로 도망을 갔는데, 이 시녀 또한 궁녀가 아니고 단순히 궁녀처럼 위장한 것은 아닐까라는 설명으로 외국인들은 상상력을 동원했다.”
이 사진을 한국에 처음 소개한 셈인 박영숙씨(당시 주한 영국대사관 공보관. 현재는 주한 호주대사관 문화공보실장)는 25일 “조선 말기, 한국을 방문했던 외교관 커존(Curzon)경이 영국도서관(British Library)에 기증한 문서가 ‘커존 파일’로 영국도서관에 보관돼 있는데 그 파일에 있던 어느 잡지에 이 사진이 실렸던 것으로 기억한다”며 “사진 설명은 잡지 내용을 번역한 것”이라고 했다.(그에게 잡지를 확인해 볼 수 있겠느냐고 했더니 그는 “외국으로 출장가는 비행기 안인데 곧 비행을 앞두고 있기 때문에 길게 통화할 수도 없다”며 양해해 달라고 했다.)
어쨌든 이 사진은 처음 ‘발견된’ 것이 아니었다. 또한 이 사진을 ‘처음으로 소개한’ 박영숙씨의 책을 기준으로 한다면 명성황후로 보기에도 여러가지 문제점이 있다.
하지만 이같은 사실을 처음에는 알지 못했던 필자는 국내 내로라하는 근대사·복식전문가 6명, 그리고 근현대사 자료 수집가 1명에게 잇따라 연락해 ‘사실 여부 확인’을 했다. 일부는 “명성황후로 봐야 하는 것 아니겠느냐”고 했고, 일부는 “황후로 보기에는 어렵지 않느냐”고 했다. 의견은 정말 팽팽하게 갈렸다. 필자가 연락한 7명 중 6명은 “이 사진은 처음 본다”고 했다. 이은주 안동대 박물관장(복식사)만이 “어디서 본 듯한 사진”이라고 했다가 몇 시간 뒤 ‘서양인이 본 코레아’라는 책에 실려 있음을 알려 주었다. 이 관장이 아니었다면 필자는 지금도 이 사진이 ‘발견’됐다는 데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있을 것이다.
이제부터 필자는 25일 한나절의 ‘명성황후 사진 취재기’를 시간순으로 상세하게 적고자 한다. 굳이 이 작업을 하는 이유는 25일 이후 신문과 방송 등에 크게 보도된 ‘기사거리’를 조선일보가 지면으로 보도하지 않은 것에 대한 해명임을 밝힌다.
명성황후 추정 사진 ‘발견’
우선 ‘명성황후 추정 사진 발견’을 첫 보도한 어느 언론사의 기사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1984년부터 20여년간 한국과 일본, 중국 등 동아시아 3국의 19세기 사진을 수집해 오던 영국인 테리 베닛(56)씨가 명성황후로 추정되는 인물의 사진이 담긴 어느 독일인의 사진첩을 25일(한국시간) 공개했다.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독일 출신 사진작가가 을미사변이 일어나기 직전인 1894년부터 1895년까지 한반도에 들어와 모두 33장의 사진을 기록으로 남겼으며 이중에 명성황후로 추정되는 사진이 포함돼 있다. 베닛씨는 3년전 런던의 고서적상으로부터 이 사진첩을 확보했다. 사진첩의 한 페이지에는 4장의 사진이 배열돼 있다. 윗쪽 왼편에는 고종과 순종의 사진이, 오른편에 명성황후 추정 사진이 있으며 아랫쪽에는 대원군의 사진 2장이 배치됐다. 이중 명성황후 추정 사진 설명문에는 필기체로 ‘Die Ermodete Konigin’이라고 적혀 있다. ‘시해된 왕비’라는 뜻이다. 또 이 사진의 바로 아래쪽에 있는 대원군 사진은 명성황후 추정 사진의 배경과 정확히 일치, 같은 장소에서 촬영된 것임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어 눈길을 끈다.’
전문가들의 엇갈린 견해들
필자는 25일 낮 12시 무렵, 조선일보 편집국 국제부로부터 이 기사에 대한 ‘사실 확인 지원 요청’을 받았다. 막막했다. ‘내가 사진첩을 직접 본 것도 아닌데 무슨 수로 사실을 밝히나. 그저 전문가들에게 전화 몇 통 걸어 전문가 멘트를 받아주면 그만이겠지.’
우선 전화한 것은 근대사 전문가 A선생님이었다.(이 기사에서 전문가들 대부분은 익명 처리할 것이다. 필자에게 평소 많은 조언을 주시는 고마운 선생님들에게 누를 끼치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A선생님은 ‘이 사진을 처음 보는데, 명성황후로 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입장이었다. 그의 이야기를 최대한 가감없이 전달해 본다.
“흥선대원군 촬영 배경과 이 여인의 촬영 배경이 완전히 같다. 또한 사진 설명에도 ‘살해된 왕비’로 돼 있지 않은가. 왕실의 한 자리에서 사진사를 불러다가 찍은 것으로 보인다. 사진 속 여인은 젊어 보이는데 이는 명성황후 시해 현장에 있던 일본 낭인들이 ‘황후가 20대 여성처럼 보였다’는 증언과도 일치한다.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가 견원지간이었다고 하지만 같은 장소에서 사진을 찍은 것으로 봐서는 꼭 그렇게 볼 필요가 있는가 싶다. 고종과 황후는 대원군에게 문안을 꼬박꼬박 드렸다고 했다.”
필자는 A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이 사진을 명성황후로 봐도 크게 문제는 없겠다’고 느꼈고, 데스크에도 그렇게 보고했다.
다음은 복식사 전문가 B선생님. 그 역시 이 사진을 처음 본다고 했다.
“저도 인터넷에서 이 사진 보고 있었다. 평상복을 입고 있지만 머리 장식을 보면 양 옆에 떨잠을 하는 등 일반 양반가는 아닌 것 같다. 저고리도 참 특이하다. 궁중 여인임은 확실해 보인다.”
단언할 수는 없지만, 명성황후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었다.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가 한 자리에서 사진을?
세번째로 연락 드린 분이 이은주 안동대 박물관장이었다. 그는 필자와의 첫 통화(오후 2시 무렵)에서 “뭔가 의심이 간다”며 “사진도 어디선가 본 듯 하다”고 했다. 그는 “조금 더 시간을 주면 알아보겠다”며 “흥선대원군이 청나라 복장을 하고 있는 것이 보이느냐”고 되물었다. 흥선대원군이 청나라 복장을 하고 있다면, 임오군란(1882) 뒤 청나라에 압송됐다가 돌아온 1885년 이후인데, 그 때 명성황후와 흥선대원군이 같은 장소에서 촬영을 할 수 있겠느냐는 게 그의 의문이었다.(흥선대원군은 임오군란 당시 명성황후가 죽었다고 거짓 포고하고 황후의 옷을 관속에 넣어 장례식을 치르기까지 했다. 임오군란 때 명성황후는 홍계훈이라는 군인의 등에 업혀 가까스로 궁을 빠져 나와 충주 산속으로 피신해 겨우 살아 남았을 정도다. 그러나 청나라가 개입하면서 임오군란이 실패로 돌아가자 흥선대원군은 청나라로 압송됐고 1885년 귀국해 운현궁에 반감금 상태로 있었다.)
“화장 한 모습, 명성황후 인상 같네요”
복식사 전문가 C선생님. 그 역시 “이 사진을 처음 본다”며 “명성황후로 생각된다”고 했다. 그러나 복식이나 머리 장식 때문은 아니었다. 그는 “눈썹 등 화장 스타일을 주목하라”고 했다.
“이사벨라 비숍 여사가 쓴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원제 Korea and Her Neighbours)에 보면 명성황후를 알현한 뒤 그에 대한 인상 등을 적어 놓았다. 비숍은 ‘황후는 40세가 넘어 보이는데, 진주분으로 화장을 하는지 창백해 보였으며 눈은 날카롭고 매섭고 기민한 인상이었다’고 적고 있다. 한데 이 사진을 보면 눈썹 가운데를 날카롭게 치켜 올려 놓은 뒤 꼬리를 흐릿하게 처리했다. 먼 산을 그리듯 치키면서 그린 눈썹 화장 기법을 원산대(遠山黛)라고 하는데, 사진 주인공이 꼭 그렇다. 냉정하고 날카롭게 보인다. 또한 진주분은 진주 가루에 납과 주석, 아연 등을 섞어 만드는데 납 성분이 축적되면서 얼굴은 약간 푸른 느낌이 들게 된다. 사진 속 여성은 비숍 여사가 묘사했던 명성황후에 대한 인상과 잘 부합된다.”
그는 복식만으로 본다면 황후의 복장으로 보기에는 뭔가 미흡한 느낌을 준다고 했다. 그러나 왕비가 혼자 있을 때는 사진처럼 저고리와 치마만 입고 있을 수 있으며, 그럼에도 단아한 느낌은 여전히 든다고 지적했다. 또한 평상복을 입고도 이렇게 화려한 떨잠(머리 옆에 붙은 장식)을 사용한 것 역시 이 여인의 높은 신분을 알려준다고 했다. 상궁 정도면 이 정도 수준의 떨잠을 쓸 수 없다는 것이다.
황후가 설마 이런 옷차림일까?
조선왕실의 후예로 조선 왕실 박물관격인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연구자문위원으로 일하는 이혜원선생. 그는 “아무래도 명성황후는 아닌 것 같다”며 “흥선대원군과 같은 배경에서 사진을 찍었다는 점에서 흥선대원군의 ‘첩실’로 전해지는 ‘초선’으로 보인다”고 했다. 그는 “저고리가 고급스럽기는 하지만 사진을 찍는 데 황후가 이런 복장으로 찍었으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다”고 했다. 그는 “흥선대원군이 청나라 복장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는 1885년 이후 운현궁에서 소실과 같은 배경을 두고 찍은 사진이 아니겠느냐”고 했다. 이선생은 “왕실에서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흥선대원군의 정부인(부대부인·府大夫人)은 초선이 사랑채에서 살 수 있도록 허락했다”고 덧붙였다.
황후의 복장이 아니다
근대사 전문가 D선생님은 필자의 확인 요청에 “두 시간 정도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다. 오후 4시 무렵, 전화 드렸을 때 그는 “명성황후로 보기는 어렵다는 게 내 생각”이라고 했다. 그 역시 “이 사진은 처음 본다”고 했다.
“여인의 복장을 보면 가슴이 거의 보일 정도이고 소매도 좁다. 기생 옷이라면 모르겠지만, 황후가 이렇게 입겠는가? 평상복을 입고 어떻게 머리를 이렇게 꾸미나? 복장도 황후의 복장이 아니다. 명성황후는 사진을 찍지 않은 분이다. 일본 낭인들이 황후를 시해할 때도 사진을 구하지 못했다. 당시 일본인들은 겨우 구한 황후 스케치 그림을 바탕으로 경복궁에 침입했는데, 어느 시신이 황후 것인지도 모르고 있을 정도였다. 낭인들은 황후를 서로 자기가 죽였다고 공치사하고 있었다. 황후 앞에서 통곡하는 세자를 보고서야 황후의 시신을 확인했다고 한다. 이같은 상황을 종합한다면 이 사진 주인공이 명성황후인지 의심스럽다.”
”이미 책에서도 소개됐던 사진이네요”
오후 4시 30분 무렵, 이은주 안동대 박물관장이 필자에게 다시 전화를 했다. 그는 “청나라 복장을 한 흥선대원군을 기준으로 한다면 1885년 이후 사진”이라며 “그렇다면 명성황후가 35세 이후라는 이야기인데, 너무 어려 보인다”고 했다. 그는 “머리는 궁중의 헤어스타일이 맞지만 황후가 이 사진에서처럼 속치마도 훤히 들여다 보이는 옷을 입고 사진을 찍었을 리는 없다고 본다”고 했다. 그러면서 해 준 이야기가 1997년 ‘서양인이 본 코레아’에 ‘궁녀, 또는 여염집 여성’으로 이 사진이 265쪽에 이미 실려 있다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필자는 맥이 풀렸다. “선생님, 다시 한 번만 확인해 주세요. 똑같은 사진입니까?”
그는 “똑같다”며 책에 실린 사진을 이메일로 보내주겠다고 했다. 같은 사진이었다.
필자는 삼성언론재단에도 전화를 걸어 사실 확인을 요청했다. 재단측에서도 “그 책에 실려 있다”며 자세한 내용을 설명해 주었다.
‘한 여름날, 한 나절의 취재가 결국은 호들갑이었던가.’
주인공은 과연 누구였을까?
이제 원점으로 돌아가자. 이 사진을 소장하고 있는 테리 베닛은 명성황후 추정 사진 설명문에 필기체로 ‘Die Ermodete Konigin(시해된 왕비)’이라고 적혀 있다고 언론을 통해 밝혔다. 과연 이 글씨는 누가 썼을까? 19세기 이 사진을 촬영한 독일인이 적은 것일까? 만약 독일인이 이 사진을 직접 찍고 기록했다면 이 사진의 주인공을 명성황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한데 이 장면에서 의문이 제기된다. 우선 이름을 알 수 없는 이 독일인이 조선에 체류한 것은 베닛의 설명대로라면 1894~1895년이다. 그러나 당시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의 관계는 최악의 상태나 다름없었다.
갑신정변(1884년) 이후 배일(排日)로 돌아선 고종과 명성황후를 제어하기 위해, 그리고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청나라 군대를 견제하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일본은 1885년 7월 일본군을 투입해 경복궁을 점령한 뒤 대원군을 내세웠다. 물론 대원군은 한달만에 물러나고 김홍집내각을 세웠지만(갑오경장) 이 와중에서 민씨 일파는 모두 유배당하고 만다. 그러나 러시아와 독일, 프랑스의 소위 ‘삼국간섭’으로 한반도에서 일본의 지위가 흔들리고, 고종과 황후 세력이 약화된 틈을 타 흥선대원군은 1895년 자신의 장손인 이준용을 왕위에 앉히려는 ‘이준용 모반 사건’을 꾀한다. 그러나 음모는 발각되고 대원군은 1895년 마포 공덕리 별장(我笑亭)에 유폐되는 신세가 된다.(한영우 지음 ‘명성황후와 대한제국’)
명성황후와의 대립각이 최고조에 달하던 1894~1895년, 명성황후가 평상복을 입고 흥선대원군과 같은 배경에서 ‘한가하게’ 사진을 찍을 수 있었을까?
이 사진을 ‘이름 모를 독일인’이 촬영한 것이 아니라는 결정적인 증거는 이 사진과 동일한 사진이 명지대 LG연암문고가 소장하고 있는 독일과 영국 잡지에도 실려 있는데, 두 잡지는 각각 1893년과 1894년 발행됐다는 점이다. 사진 소장자 베닛의 지적대로라면 1894년에야 조선에 도착한 이 독일인이 1893년에 명성황후 사진을 찍을 수는 없는 것이다. 두 잡지 모두 사진 주인공을 명성황후가 아니라 ‘궁녀’로 소개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결국 이 사진은 독일인이 촬영한 것이 아니라, 이미 촬영한 사진을 ‘이름 모를 독일인’이 나중에 얻은 것으로 봐야 한다. 박영숙씨가 ‘서양인이 본 코레아’에서 이미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외국인들이 상상력을 동원해 만든 명성황후’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그렇다면 주인공은 과연 누구였을까?
궁녀, 혹은 여염집 여인네 식으로 넘어가면 지적 자극은 더 이상 없는 셈이다. 이혜원 국립고궁박물관 연구자문위원이 지적한 ‘흥선대원군의 측실인 초선’일 가능성은 없는 것일까? 현재로서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어야 한다. 초선일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이 가정은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당시 흥선대원군의 정부인이 살아 있는 상태였는데, 정부인도 놓아 두고 측실이 버젓하게 흥선대원군과 같은 배경에서 ‘모델’이 될 수 있었을까? 물론 정부인의 사진도 찍었는데 정부인의 사진은 없어지고 측실 사진만 남은 것일 수도 있지 않느냐고 한다면, 할 말은 없다.
명성황후는 우리 근대사의 한(恨)이다. 사진 한 장 제대로 남기지 못한 채 ‘외국 깡패들’의 칼에 숨져갔다는 사실부터 그렇다. 그의 사진은 어디에 있을까? 아니, 사진 찍기를 피했다는 그는 사진을 한 번이라도 찍어 본 적이 있었을까?
이같은 의문에 답할 수 없는 이상, 필자는 언젠가 또다시 ‘명성황후 사진 논란’ 때문에 한바탕 홍역을 치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