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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국전쟁의 아픈 사진들 -비목-

감효전(甘曉典) 2012. 7. 19. 21:05

한국전쟁의 아픈 사진들

▲ 주객전도, 이 땅의 주인인 갓을 쓴 노인들은 전차를 피해 갓길로 가고 있다.


▲ 1950. 7. 27. 맨발의 한 소년이 지게에다 피난봇짐을 잔뜩 지고 있지만 표정이 매우 맑다.


▲ 1950. 7. 29. 안동군민들의 피난 행렬.


▲ 1951. 1. 9. 강릉, 1. 4 후퇴로 눈길에 다시 피난을 떠나고 있다.


▲ 1951. 4. 23. 중공군 춘계대공세로 다시 피난길에 오른 사람들.


▲ 1951. 6. 27. 다리 부상으로 소를 타고 피난길에 나서다.


▲ 1951. 7. 4. 철원, 군 트럭에 실려 피난을 떠나고 있다.


▲ 1951. 7. 19. 강원도 화천, 감자를 캐는 화전민 사람들을 수용소로 데려가고 있다.


▲ 1951. 9. 11. 경기도 동두천, 군인들의 통제 아래 피난민들이 이동하고 있다.


▲ 1951. 8. 20. 마곡리, 한 소년이 소를 몰고 피난길을 가고 있다.


▲ 1950. 10. 12. 원산. 학살된 시신들.


▲ 1950. 12. 11. 고단한 피난길.


▲ 1950. 12. 16. 폭격에 엿가락처럼 휘어진 철교.


▲ 1950. 12. 17. 보급품을 실은 화물 열차가 폭격에 불타고 있다.


▲ 1950. 12. 18. 대구. 훈련소에서 교육을 마친 신병들이 전선으로 가고자 대구역전 광장에 집결해 있다.


▲ 1950. 12. 18. 전방으로 떠나는 신병들.


▲ 1950. 12. 18. 대구역. "총알을 요리조리 잘 피해서 어예든동 살아오이라." '어무이 걱정 꽉 붙들어 매이소. 어무이 아들 아잉기요. 내는 꼭 살아돌아올 깁니다."


▲ 1950. 12. 21. 경북 왜관. 낙동강 철교 어귀에 부서진 북한군 소련제 탱크.


▲ 1951. 1. 20. 아버지와 아들의 피난길, 다른 가족은 전란에 모두 죽었다.






▲ 1950. 8. 12. 북한군 포로.



▲ 1950. 8. 10. 폭격으로 불타는 마을



▲ 1950. 8. 10. 핫바지들을 인솔하는 미 해병대.



▲ 1950. 7. 29. 경북 영덕, 포화에 쫓기는 피난민.



▲ 1950. 7. 29. 경북 영덕, 남자는 등에 지고 여자는 머리에 이고 지향없이 떠나는 피난민 행렬.



▲ 1950. 7. 29. 경북 영덕, 논두렁에 머리를 처박고 죽은 북한군 병사



▲ 1950. 7. 29. "뜨거운 전우애" 한 병사가 부상당한 전우를 업어가고 있다



▲ 1950. 7. 29. 마을 소년들이 주먹밥을 만들어 군인들에게 나눠주고 있다



▲ 1950. 7. 29. 야간 전투 후 주간 취침.



▲ 1950. 7. 29. 취침 후 병기 손질



▲ 1950. 8. 4. 피난민들의 보금자리 산동네 판자촌



▲ 1950. 8. 8. 누가 이 아이를 버리게 했을까?



▲ 1950. 8. 8. 다리 아래 피난민 움막



▲ 1950. 8. 9. 임시 포로수용소



▲ 1950. 8. 2. 금강철교



▲ 1950. 8. 3. 뙤약볕 속에 전선으로 가는 국군 행렬



▲ 1950. 8. 3. 한국전쟁 무렵의 부산항, 멀리 영도가 환히 보인다.



▲ 1950. 7. 29. 경남 진주 부근에서 생포한 빨치산(?). 미국 문서원문엔 포로로 되어 있다.



▲ 1950. 12. 16. 흥남부두. 후퇴하려고 수송선을 기다리는 병사들



▲ 1950. 12. 18. 흥남에서 묵호(동해)로 후퇴한 후 수송선에서 내리는 병사들



▲ 1950. 12. 24. 유엔군 후퇴 후 텅 빈 흥남부두



▲ 1950. 12. 24. 유엔군 후퇴 후 불타는 흥남항



▲ 1950. 12. 26. 전차도 후퇴대열에. 흥남항에서 출발해 부산항에 도착하고 있다



▲ 1950. 12. 27. 인천항에서 출발해 부산항에 도착한 피난민들



▲ 1950. 1. 3. 1·4 후퇴를 앞두고 불타고 있는 서울 시가지


6.25 관련 사진 더 보시려면 www.chosun.com/special/gallery


    비목(碑木)



    초연이 쓸고간 깊은계곡

    깊은계곡 양지녁에

    비바람 긴세월로 이름모를
    이름모를 비목이여

    먼고향 초동친구 두고온 하늘가

    그리워 마디마디 이끼되어 맺쳤네


    궁노루 산울림 달빛타고

    달빛타고 흐르는 밤

    홀로선 적막감에 울어지친

    울어지친 비목이여

    그옛날 천진스런 추억은 애달파

    서러움 알알이 돌이되어 쌓였네




    
    


    가곡'비목(碑木)'에 관하여

      
    
    1964년, 강원도 화천군 백암산 계곡, 
    
    비무장지대(평화의댐 북방 14km 휴전선 부근)를 순찰하던  
    
    한 청년 장교(한명희,당시 25세. 소위, 전 서울시립대 교수)가 
    
    잡초가 우거진 곳에서 이끼 낀 무명 용사의 돌무덤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비목'의 작사자 한명희 교수
    6.25때 숨진 어느 무명 용사의 무덤인 듯
    옆에는 녹슨 철모가 딩굴고 있었고,
    무덤 머리의 십자가 비목(碑木) 은 썩어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보였습니다.
     
     
    
    비목
    녹슨 철모, 이끼 덮인 돌무덤,
    그 옆을 지키고 있는 새 하얀 산목련,
    화약 냄새가 쓸고 간 깊은 계곡을 붉게 물들이는 석양.
    그는 돌무덤의 주인이 자신과 같은  
    
    젊은이였을 거라는 깊은애상에 잠깁니다.  
    
    4년 뒤 당시 동양방송(TBC) 에서 일하던 한명희 PD에게  
    
    평소 알고 지내던 장일남 작곡가는  
    
    (한양대 음대 명예교수, 2006년9월 별세) 가곡에 쓸  
    
    가사 하나를 지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비목'의 작곡자 장일남 교수


    돌무덤과 비목의 잔상이 가슴 속에 맺혀 있던 한명희 PD는
    즉시 펜을 들고 가사를 써 내려갔습니다.

    조국을 위해 산화한 젊은 넋을 기리는 "비목"의 가사는
    이렇게 탄생되었답니다.
    장일남의 빈소를 찾은 한명희

    이 노래는 70년대 중반부터
    "가고파", "그리운 금강산"과 더불어 한국인의 3대 애창곡으로
    널리 불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초연(硝煙)이 쓸고 간 깊은 계곡 양지녘에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비목이여---."

    가곡 "비목" 의 고향인 강원도 화천군에는
    전쟁과 분단의 흔적들이 아직도 이곳저곳에 서려 있습니다.


    6.25 당시 화천댐을 놓고 벌인 치열한 공방전으로
    붉게 물들었던 파로호는 지금 신록 속에 푸르기 그지 없고,

    군사 정권 시절 댐 건설의 필요성을 놓고 논란이 일었던
    평화의 댐은 민통선 바로 앞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댐 옆에는 가곡 "비목" 의 탄생을 기념하는 '비목공원'이 들어섰습니다.



    평화의 댐

     파로호는 호수 모양이 전설의 새 대붕(大鵬) 을 닮았다고 해서  
    
    원 이름은 대붕호(大鵬湖)였답니다. 
    
    그러던 것이 1951년 화천댐 공방전에서  
    
    국군이 중국군 3개사단을 물리치고  
    
    대승을 거두자훗날 이곳을 방문했던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적을 격파하고 포로를 많이 잡았다" 는 뜻으로 
    
    "파로호(破虜湖)" 라는 새 이름을 지었다고 합니다. 
    
    파로호는 1944년, 화천댐 건설로 생긴 인공호수로  
    
    산 속의 바다라고도 불립니다.  
    
    호수에는 
    載「, 잉어 등 70여종의 민물고기가 서식하고 있습니다.  
    


    파로호

     파로호 경치가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대는  
    
    화천읍에서 평화의 댐으로 가는 460번 지방도 오른쪽에 있습니다.  
    
    파로호 휴게소에 차를 대고 5분 정도 걸어올라가야 합니다. 
    
    비목공원은 1998년, 가곡 '비목' 을 기념해서 만들었습니다.  
    
    산비탈에 돌로 한! 
    訃 모양의 단을 쌓았고  
    
    곳곳에 돌무덤과 비목을 세웠습니다. 
    

    비목공원


    주차장 입구에 "비목" 노래비가 서 있어 방문자들은 누구나 한번씩
    그 앞에 서서 가사를 되새겨 본다고 합니다.

    현재 비목공원에는 기념탑 외에 철조망을 두른 언덕 안에
    녹슨 철모를 얹은 나무 십자가들 이 십여 개 서 있어 한국전쟁이라는
    민족 비극의 아픔을 되새기게 해줍니다.


    비목 시비

     화천군에서는 매년 6월 3일부터 6일까지  
    
    이곳 비목공원과 화천읍내 강변에 들어서있는 붕어섬 등에서  
    
    "비목 문화제"를 개최합니다.  
    
    진중가요, 시낭송 등으로 짜여진 추모제,  
    
    비목깎기 대회, 주먹밥 먹기대회, 병영체험,  
    
    군악퍼레이드 등이 나흘간 펼쳐진다고 합니다.  
    
    거기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산자락이 마치 톱니바퀴처럼 맞물렸고  
    
    그 사이로 북한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근래 호랑이 발자국이 발견됐다고 해서 주목을 끌었습니다. 
    
    조국을 위해 희생한 비목의 주인공과 많은 선열들의 숭고한 넋을 생각하며  
    
    "비목"의 가사를 다시 되새겨 봅니다. 
    
     
    
    가곡 '비목'은 적막에의 두려움과 전쟁의 ! 
    疇徨, 그리고 
    
    그 때문에 더욱 간절한 향수 등이 서정적으로  
    
    잘 표현되어 있는 노래입니다 
    






 

 

 <출처;tong.nate.com/hnj0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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