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심사/시

[스크랩] 포스터 속의 비둘기 - 신동집

감효전(甘曉典) 2012. 4. 11. 11:07

 포스터 속의 비둘기

 

포스터 속에 들어 앉아

비둘기는 자꾸만 곁눈질을 하고 있다.

포스터 속에 오래 들어 앉아 있으면

비둘기의 습성(習性)도 웬만치는 변한다.

비둘기가 노닐던 한때의 지붕마루를

나는 알고 있는데

정말이지 알고 있는데

지금은 비어버린 집통만

비바람에 털럭이며 삭고 있을 뿐이다.

포스터 속에는

비둘기가 날아 볼 하늘이 없다.

마셔 볼 공기(空氣)가 없다.

답답하면 주리도 틀어보지만

그저 열없는 일

그의 몸을 짓구겨

누가 찢어 보아도

피 한 방울 나지 않는다.

불 속에 던져 살라 보아도

잿가루 하나 남지 않는다.

그는 찍어 낸 포스터

수많은 복사(複寫) 속에

다친 데 하나 없이 들어앉아 있으니

차라리 죽지 못해 탈이다.

 

[내 마음으로 읽기]

‘서정의 유형’, ‘송신’이란 시집에다, ‘빈 콜라병’, ‘오렌지’의 시인, 신동집 선생. 대구에서 오래 활동했지요. 시를 읽을 때 때론 제목이 암시하는 바가 크지요. 이 작품이 바로 그런 작품입니다. 이상의 ‘날개’에 보면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오.’란 인상적인 구절이 있습니다. 여기 ‘포스터 속의 비둘기’도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생명이 박탈된 존재, 포스터 속의 비둘기는 자신이 본래 지닌 존재의 의미나 가치가 사라진 박제된 존재입니다. 평화니 순수니 자유니 비상하는 생명이니 하는 관념들도 의미가 없는 것이지요. 아무리 천재일지라도 그 생명력이 사라졌다면 하나의 무의미한 돌멩이나 다를 바 없는 것처럼 포스터 속의 비둘기는 무력할 뿐이지요. 포스터는 목적성이 있는 그림이지요. 포스터 속의 비둘기도 목적에 의해 희생된, 복제된 무생명의 존재일 뿐입니다.

그럼 비둘기는 그저 그렇게 복제할 수 있고 복제된 존재로 그치는 것일까요? 여기서 문제가 시작됩니다.

2행에서 비둘기는곁눈질’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곁눈질하는 공간으로 갈 수 없는 포스터 속의 존재이지요. 곁눈질하는 공간에 도달할 수 없는 안타까움이 마지막 행 ‘차라리 죽지 못해 탈이다’라고 합니다. 본연의 생명 상실이 가져온 절망, 그러나 죽을 수도 없는 숙명적 존재. 그러니 보는 이에게 안타까움을 줍니다.

포스터 속의 비둘기가 곁눈질(선망하고 바라는 눈길)로 바라보는 세상은 ‘한때의 지붕마루’이며 ‘집통’이며 ‘하늘’입니다. 그러니까 원초적 생명의 공간이며, 자유로운 공간이지요. 포스터 안의 세계는 ‘하늘도 공기도 없고’, ‘수많은 복사 속에 다칠 일 없는’ 세계입니다. 그러나 그 공간은 복제된 공간이고 무생명의 공간이며, ‘주리를 틀어보아도 그저 열없는 일’로 그치는 공간입니다.

정리를 해봅시다. 포스터 속의 비둘기는 자신이 처한 현실을 알지만 극복할 대응할 어떤 방법도 갖지 못한 존재이면서 동시에 무한 복제 가능한 존재, 결국 감정을 잃어버린 채 유사한 삶의 공간 속에 일상을 반복적으로 살아가는 무개성의 인간 존재 그 자신이 아닐까요. 화자는 포스터 속의 비둘기에서 자신과 또다른 사람들을 발견하고 안타까움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개성 없는, 관습적으로 굳어진 무력한 일상을 살아가되 즐거움이나 슬픔, 아픔의 감정 표현이 서툴러지고, 사라진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 한다. 박남수의 ‘새’라든가, 김광섭의 ‘성북동 비둘기’라든가, 정한모의 ‘나비의 여행’ 등도 현대 문명이나 산업화로 인해 복제된 문화, 아우라를 상실한 삶들, 그 삶의 무의미함에 대해 비판함으로써 진정한 삶, 생명 회복의 가치를 지향한 시를 보여줍니다. 모더니즘적 시들이 지향한 세계도 궁극으로 인간성 상실의 사회에 대한 비판이라 볼 수 있습니다.

 

출처 : 언어-그 안개바다 속으로
글쓴이 : 안개바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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