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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국전쟁은 한반도의 `좌우 민족주의 세력에 의한 무력통일전쟁`이라고 그

감효전(甘曉典) 2012. 3. 23. 13:37
한국전쟁은 한반도의 '좌우 민족주의 세력에 의한 무력통일전쟁'이라고 그 성격을 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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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shopping | 2008/03/06 (목)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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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의 진실과 수수께끼 - (..
A.V. 토르쿠노프, 구종서에디터2003.06.20
 
한국 전쟁, 어떻게 볼 것인가
 
                                                                                구 종 서
 
                                                                             (정치학박사/한국문명사연구소장)
 
1.여는 말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반 세기가 넘었고 그동안 한국전쟁의 기원을 둘러싸고 많은 논란이
있어 왔지만, 논쟁은 아직 끝나지 않은 채 계속되어 왔다.
 
한국전쟁에 대한 논의는 세 가지 논점을 둘러싸고 전개되었다.
 
즉 전쟁을 일으킨 자는 누구인가,
 
전쟁의 원인은 무엇인가,
 
전쟁의 성격은 어떤 것인가의
 
세가지였다.
 
 
이 논점들은 서로 확연히 구별되는 것이지만, 서로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그 때문에 논자들은 그 세가지 포인트를 한데 묶어서 설명하여 왔기 때문에 논쟁은
더욱 복잡한 난전의 인상을 주어왔다.
 
한국전쟁 논쟁은 대체로 다음 세 갈래로 전개되어 왔다.
 
첫째는 정통주의(正統主義)의 남침설(南侵說)이다.
 
이것은 2차 세계대전 후, 소련이 자국의 팽창주의 정책 목적에 따라 북한을  사주하여
조선 인민군으로 하여금 남한을 침공케 했다는 주장이다.
 
남침설은 한국과 미국 정부의 공식견해를 수용하고 지지하는 견해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인정되어온 정설이었다.
 
둘째는 정통주의에 반대하고 나선 비정통주의(非正統主義)의 북침설(北侵說)이다.
 
이것은 한구과 미국 정부가 공모해서 북한을 먼저 침공했다는 주장이다.
비정통주의는 북한 당국의 주장을 그대로 수용하고 지지하는 학설이다.
그러나 북침설은 북한 이외의 공산권 안에서도 불합리하고 근거없는 것으로 배척되어
왔다.
 
 세째는 북한의 북침설을 옹호하는 수정주의(修正主義)의 남침 유도설이다.
 
수정주의는 한국과 미국이 북한에 대해 남침을 유도해서 북한이 남한을 침공케
했다는 견해다.
 
 
 
2. 누가 전쟁을 일으켰는가
 
 
역사상의 특정 전쟁을 연구하거나 분석할 때, 제일 먼저 거론 되고 가장 중요시되는 것은
전쟁을 일으킨 주체가 누구냐 하는 것이다.
 
따라서 전쟁 행위를 최초로 행한 자, 곧 전쟁 발발자의 규명은 전쟁연구에서 가장 핵심적인
사항이다. 전쟁 발발자만 구명하면, 전쟁의 원인이나 성격은 쉽게 해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을 처음으로 도발한 자가 누구인가에 대해서 각 이론들 사이에 처음부터
견해차가 선명하게 나타났다.
 
가)정통주의 이론: 스탈린과 모택동
 
남침설을 신봉하는 전통주의 이론에서는 소련과 중국이 북한을 사주해서 남침전쟁을 벌였다고
주장한다. 즉 세계패권을 노리는 소련과 아시아 패권을 노리는 중국이 팽창주의 정책을
썼서 동아시아 지역에 대해 팽창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정통주의 안에도 몇 가지 서로 다른 주장들이 있다.
 
첫째, 소련의 북한사주설이다.
이것은 제2차 대전에서 자본주의와 동맹하여 우익전체주의, 곧 국제 파시즘 체제를 타도한
소련은 동구를 공산화하고 다시 중국 대륙이 공산화되자, 남한에 들어와 있는 미국의
영향력을 일소하기 위해 남한과 대립관계에 있는 김일성을 시켜 남한을 침공케
했다는 주장이다.
 
이것은 스탈린이 단독으로 남침 방침을 정해놓고 북한을 동원했다는 설명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스탈린을 한국전쟁의 발발자로 보고 있다.
 
둘째, 중 . 소 공모론이다.
 
이것은 스탈린이 새로 중국 대륙을 평정한 모택동과 합의하여 동아시아 대륙부를 완전히
공산화하기 위해 북한으로 하여금 남침하도록 도왔다는 주장이다. 이것은 소련이 단독으로
남침을 결정하지 않고 중국과 함께 결정했다는 설명이다.
 
 
실제로 스탈린은 김일성의 요청에 따라 남한에 대한 북한의
 
선제공격을 승인하면서 최종적으로는 모택동과 합의하여
 
남침여부를 결정하고 중국의 지원을 받아 개전하도록
 
지시했다.
 
 
6.25 직전에는 스탈린이 모택동을 모스크바로 불러 밀회한 기록이 있고,
 
개전 후에는 모택동에게 직접 전쟁 지원과 휴전회담을 지휘하도록 일임한
 
흔적도 있다.
 
 
 
셋째, 모택동 주도설이다.
 
스탈린의 의도나 지원과는 관계없이, 아시아의 공산혁명과 그 패권을 노리던 모택동이
중국 대륙의 공산화에 이어 아시아 공산화 전략의 연장으로서, 남한 적화를 노리는
김일성을 부추겨서 한국전쟁을 도발했다는 주장이다.
 
이것은 모택동이 단독으로 한국전쟁을 결정했다는 견해이나, 신빙성은 없다.
 
정통주의 이론에서는 전쟁발발의 주체를 스탈린과 모택동으로 한정하여 보기 때문에,
김일성은 괴뢰로 취급되고 있다.
 
그것은 주로 한국전쟁의 기원을 국내적 요인에서 보지 않고,
냉전체제라는 국제 환경적 요인에서 보려는 외인론적(外因論的) 시각의 산물이다.
 
 
나)비정통이론:이승만
 
북침론을 주장하는 비정통주의 이론은 바로 북한 정부와 일부 추종자의 주장이다.
 
개전 당일부터 북한측에 의해 주장되어온 이 이론에서는 이승만을 전쟁의 주동자로
보고 있다.
 
김일성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3시 조선 노동당 정치위원회와 내각합동 비상회의를
소집한 자리에서 "동지들! 매국역적 리승만 도당의 괴뢰군들이 오늘 새벽 38선
전역에 걸쳐 공화국 북반부를 반대하는 불의의 무력침공을 개시하였습니다"라고
서두를 꺼낸 뒤, "적들은 이미 38선 이북지역으로 1~2킬로미터 침공하였으며,
모험적인 전격전으로 공화국 북반부를 단숨에 삼키려고 시도하고 있습니다"라고
연설한 것으로 발표했다(김일성 저작집 제6권).
 
그 후 이런 논조는 보도문으로 작성되어 북한의 신문, 라디오에서 반복되어 왔다.
 
비정통주의 이론의 대표적인학자는 인도 캘커타대학교 교수인 굽타(Karunaker
Gupta)였다. 굽타는 그의 논문 '한국전쟁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How did the Korean
War begin?'에서 북한 정부 발표를 액면 그대로 인용하면서, 한국군이 해주를 선제공격
함으로써 전쟁의 직접적인 도발유인이 되었다고 주장하여, 도발 책임은 한국에
있다고 단정했다.
 
굽타는 자기 논문에서 황해도 해주를 '한국의 옛 수도'라고 하거나, 전쟁 직전에
'한국군이 38선 이북의 북한 전략도시 해주를 점령했다'는 등 검증되지 않은 사실을
전제로 논리를 펴는 오류를 범하고 있어, 그의 저서가 전반적으로 신빙성을 잃고 있다.
 
 
 한국군이 북한에 대한 경고용으로 해주를 점령하겠다고 자주 말한 적이 있으나, 이 한국군의
해주점령설은 이미 사실이 아님이 판명된 지 오래다. 실제로 한국군이 해주를 점령한 것은
1950년 10월, 한국군이 38선 이북으로 진주하여 북한을 점령했던 3개월이 처음이고
마지막이었다. 따라서 한국군의 해주 점령은 전쟁발발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
 
북한이나 굽타의 주장은 믿을 만한 근거를 제시한 바 없고, 북한군이 3일 만에 서울을
함락하고 3주일 만에 낙동강까지 진출하여 남한의 90퍼센트를 점령한 개전 직후의 상황으로
보아서도 한국이 북침했다고는 인정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이 비정통주의 이론은 북한을 옹호하려는 비학문적 이데올로기적 차원에서만 일부
수용되어 왔다. 그런 이유들 때문에 이 이론은 그 임무를 수정주의에 넘기고, 지금은
토론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다) 수정주의이론:이승만, 김일성
 
수정주의는 한국전쟁의 기원에 대해서 정통주의에 반발하고 나와 비정통주의를 수정 보완하면서
기본적으로 북한을 옹호하는 입장에 서서 한국전쟁을 재해석하는 경향의 이론이다.
 
수정주의의 원조는 스톤(I. F. Stone)이었다. 스톤은 그의 저서 '한국전쟁 비사(The Hidden
History of the Korean War, 1952)'에서 이승만 정권이 지지를 잃고 위기에 처하자,
이를 구원하기 위해 이승만과 미국 정부가 공모하여 북한을 침공했다고 주장한다.
 
그 후로 커밍스(Bruce Cumings) 등의 몇몇 학자가 나와 수정주의를 발전시켰고,
80년대 들어 한국에서도 커밍스류의 수정주의를 지지 추종하는 일군의 이론가들이
등장하여 여러 가지 주장을 내놓았다. 수정주의자들의 경향은 대체로 마르크스적
경향을 띤 북한 옹호에 흐르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커밍스를 포함한 수정주의자들은 북한의 남침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 대신 미국과 한국이 공모하여 남침을 유도했다고 설명함으로써 전쟁 발발의 책임을
한미측에 전가하고 있다. 심지어 그들은 한국전쟁은 1945년의 한국해방이 불완전했기
때문에 해방완수를 위해 꾸준히 계속된 해방전쟁의 연속이었다고 말하면서,
누가 전쟁을 도발했는지는 중요치 않다고 주장한다.
 
수정주의의 해방미완론자들은 한국전쟁이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라는
엄연한 기한을 무시하고, 해방으로부터 한국전쟁을 기산하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6월 25일 북한의 정규군인 인민군이 남북의 경계선이었던
38선의 전역에 걸쳐 동시에 남으로 진격해서 서울을 점령하고, 한국 정부를 말소하기
위해 계속 남진한 것이 바로 한국전쟁이다
 
일상의 국경 충톨처럼 인민군이 38선을 쳤다가 되돌아갔다면 한국전쟁이라고 할 수는 없다.
 
 
따라서 한국전쟁을 8.15로부터 기산하고 전쟁 발발자를 따질 필요가 없다는 수정주의자들의
태도는 한국전쟁에 대한 학문적 연구를 포기하겠다는 것과 같다.
 
정치적 목적과 이데올로기적 편향에 젖어있는 수정주의의 그런 견해와 태도는 '침략자로
지탄받고 있는 북한의 전쟁책임을 벗겨주려는 의도로 밖에 이해되지 않는다'는
정통주의로부터의 공격을 받고 있다.
 
 
1977년부터 미국무성이 한국전쟁 관계 비밀 문건들을 공개하면서 남침 사실이 더욱
명백해졌으나, 수정주의자들은 미국 문서를 믿을 수 없다면서 자기네 기존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들은 흐루시초프의 이름으로 발표된 저서 '흐루시초프 회고록'에서
흐루시초프가 한국전쟁을 일으킨 것은 김일성이라고 분명히 밝혔음에도 이를
믿지 않았다.
 
흐루시초프는 자기 회고록에서 김일성이 남한에 대해 일격을 가하면 남한에서 내란이
촉발하여 남한 정권은 붕괴된다고 주장하면서, 스탈린에게 자기의 남침을 승인해달라고
요구하면서 원조를 청했고, 스탈린은 김일성을 말리지 않고 북한에 대해 군사원조를
제공했다고 밝혔다. 수정주의자들은 흐루시초프의 회고록이 미국 CIA에서
조작해낸 출판물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90년대 초에 걸쳐 소비에트연방이 해체되면서 소련 기밀문서들이 공개되자,
비정통주의의 북침설이나 수정주의자의 남침유도설은 설자리를 잃고 말았다.
 
 
공개된 소련의 한국전쟁 관계 문서들에 의하면 한국전쟁은 처음에 남침을 반대한
스탈린이 김일성의 계속된 요구에 따라 마침내 승인란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스탈린은 김일성의 남침계획을 승인하면서 모택동과 의논해서 최종결정을 내리고,
중국의 지원을 받아서 공격하라고 말했다. 김일성은 중국으로 모택동을 방문하고
스탈린의 뜻을 전하면서 남침지원을 요청했다.
 
모택동은 소련의 전쟁 물자 및 장비의 지원과 미국이 중국을 침공할 때 소련이 중국을
구원한다는 스탈린의 보장을 약속 받고 김일성의 남침에 동의했다.
 
결국 한국전쟁 발발의 일차적인 책임은 외세의 승인과 지원하에 남한에 대해 선제공격을
가한 김일성이 져야 한다는 것이 공산권의 비밀문건들에 의해 명백해졌다.
 
결국 한국전쟁은 발의 한 것은 김일성이고, 승인하고 군사원조를 제공한 것은 스탈린이며,
이 계획에 동참해서 이를 측면에서 조종하고 지원한 것은 모택동이다.
 
 
 
3.전쟁의 원인: 김일성의 대남적화 통일전략
 
 
한국전쟁의 원인을 구명할 때, 남북한 곧 한반도 안에서 원인을 찾는 내인론(內因論)과
한반도를 벗어나 국제관계 속에서 찾는 외인론(外因論)의 두 가지 접근법이 있어왔다.
초기 연구에서는 외인론이 우세했으나, 후기에 와서는 내인론의 비중이 커졌다.
한국전쟁 전쟁 발발자에대한 견해가 서로 달랐던 만큼, 당연히 전쟁의 원인
규명에도 이론이 많다.
 
가)정통주의
정통주의 이론에서는 소련의 팽창중의적 침략 정책이 세계냉전을 가져왔고, 그 팽창주의
정책이 아시아에서 한국전쟁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주장하여, 전쟁 원인을 소련의
팽창주의로 돌렸다.그들은 소련이 동구를 점령하고, 다시 서방권인 그리스와
터키로 팽창을 시도했던 사실을 그 근거로 제시했다.
 
그러나 정통주의 논자들이 주장하는 전쟁의 원인도 다양하다.
 
 
첫째, 압력분산설이다.
 
 
이것은 미국이 마셜플랜으로 서구를 전쟁의 파괴로부터 재건하고, 군사동맹체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결성하여 무력을 서구에 집중하자, 이에 위협을 느낀
스탈린이 미국의 힘과 위협을 동북아쪽으로 분산시키기 위해 한반도에서
전쟁을 일으켰다는 주장이다.
 
 
둘째는 미. 중 소모전론이다.
 
이것은 자본주의 중심국가인 미국과 새로 공산대국으로 등장 한 중국을 소련에 대항할 수 있는
잠재적인적 적대세력으로 보고, 미 .중이 서로 싸우게 해서 국력을 소모케 하기 위해,
스탈린이 한국전쟁을 일으켰다는 주장이다.
 
전쟁 말기에 스탈린이 휴전교섭을 회피 지연시키면서,
북한과 중국에 대해 적극적인 공격과 확전을 계속 독촉하여 정전을
지연시키려 한 사실이 미중 소모론의 논거로 제시됐다.
 
소련의 세계패권 전략에 초점을 두고 있는 이 견해는 '함정설'이라고도 불려왔다.
 
셋째, 스탈린의 허점공격설이다.
 
이것은 스탈린이 세력권을 확대하기 위해 적절한 곳을 탐색하다가 한반도를 택했다는
주장이다. 1949년에 남한주둔 미군이 고문단 200명만 남기고 철수했고, 미국 군부에서
한반도의 전략적가치를 부정하는 보고서를 잇따라 제출하는 한편, 애치슨 미국무장관이
한반도를 세력팽창의 출구로 선택했다는 것이다.
 
넷째, 소련의 반응실험설이다.
 
이 설은 스탈린은 대외팽창정책의 확대에 앞서 미국이나 서방의 태세를 떠보기
위해 한반도에서 실험적으로 무력시위를 벌인 것이 한국전쟁이라는 주장이다.
 
나)수정주의
 
수정주의쪽에서는 대외 팽창정책을 쓴 것은 소련이 아니라 미국이라고 주장하여,
전쟁 발발 원인을 미국의 제국주의적 대외정책에 찾고 있다.
 
수정주의 안에서도 한국전쟁 원인에 대해 상이한 견해들이 많이 나와 있다.
 
첫째, 한국과 미국의 대북 남침유도설이다.
 
이것은 수정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가장 일반적인 논거의 하나다.
 
그들은 미국이 제국주의 정책을 감추고 한반도에서 미군을 철수한 다음 잇따라 불개입정책을
표명하면서, 1950년에 들어와서는 애치슨라인을 선포하여 한국, 대만 등을 미국의
방위권 안에서 제외함으로써 북한의 남침을 유도했고 김일성이 그 유도에 말려들었다고
해석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이 신속히 개입한 것은 미국이 자기네
제국주의 정책을 숨긴 사실을 폭로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둘째, 한 .미 공모설이다.
 
스톤이 주장한 이 견해는 미국과 한국이 국내 불안과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전쟁을 유발했다는
주장이다. 스톤은 미국은 남한에 대한 군사공약을 강화하여 남북한 사이에 군비경쟁을 촉발시키고,
이승만은 북벌론과 무력통일론을 주장하여 북한을 자극해서 남북한 사이에 조성된 긴장이
결국 한국전쟁으로 발전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한국전쟁의 원인은 남한과 북한의 통일방략의 상충에서 찾아야 한다.
 
당시 북한의 김일성은 남한을 적화통일한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는 1949년도 신년사인 '국토의 완정과 조국의 통일을 위하여 궐기하자'라는 제목의
연설문에서 국토완정론(國土完整論)을 제시했다. 국토완정론이란 남한을 북한 체제 하에
통일하는 것을 의미한다.
 
김일성은 그때 국토완정을 위해 북한은 남한의 민주화를 선도하고 지원하는 튼튼한 기지가
되어야 한다고 선포하고(북한기지론), 남한의 좌익 공산세력과 연대한다는 전략을 마련하여
(통일전선전략), 이승만 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남로당 중심의 대남 게릴라전(빨치산 투쟁)을
전개했다.
 
그 결과 남한 도처에서 시위와 총파업 무장반란 등의 소요사태가 잇따라 일어났다.
1946년 10월의 대구폭동과 1948년 10월의 여수-순천 반란 사건 등이 그 두드러진 예다.
 
한편 남한의 이승만은 북벌정책을 써서라도 북한을 해방하여 자유주의 정치체제와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토대로 하고 있는 남한체제를 북한에까지 확산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일성의 대남 게릴라전이 극성하여 남한 사회가 혼란에 빠지자, 이승만 정부는
'지지하자 대한정부, 박멸하자 공산당'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군경을 동원하여
남로당원 소탕에 나서는 한편, 38선 지역에서 대북 무력시위를 잇따라 벌였다.
 
북한의 '대남 게릴라전술'에 대해, 남한은 '국경도발 전술'로 대응한 것이다.
 
이처럼 해방 직후의 혁명전략에서 북한은 남한내에서의 게릴라(빨치산) 전략에,
남한은 38선에서의 국경교란 전략에 중점을 두었었다.
 
 남한에서 남로당이 크게 소탕되고 게릴라전이 실패하자, 남한에 있던 공산주의 지도자들은
지하로 들어가거나 북한으로 넘어갔다. 김일성은 게릴라전술로는 그의 대남 적화통일
목표가 달성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와 때를 같이 해서 이승만은 후방의 게릴라 소탕전에 투입됐던 군대를 38선에
투입했다.
 
이에 불안을 느낀 북한 김일성이 드디어 대남 전쟁을 도발한 것이다.
 
따라서 한국전쟁의 간접적인 원인은 남북한 민족주의세력의 통일정책에 있고,
직접적인 원인은 북한 김일성의 대남 적화통일 정책에 있다.
 
 
4 . 전쟁의 성격; 무력통일전쟁
 
전쟁의 성격 규정은 주관적 인식이 크게 작용하기 때문에 다양한 견해가 나와 있다.
 
첫째, 침략전쟁론이다.
 
한국전쟁의 원인을 스탈린의 음모론에서 찾고 있는 정통주의쪽에서는 한국전쟁을
소련의 팽창주의정책에 의한 국제공산주의 침략전쟁으로 규정해왔다.
 
한국전쟁은 이미 미 . 소간에 전후체제의 일환으로 38선이 경계선으로 정해졌고,
그 양쪽에 수립된 남북한의 국경선으로 확정되어 있음에도, 북한이 정규군을 동원하여
이 경계선을 전면적으로 침공했다는 점에서 침략전쟁이라는 것이다.
 
둘째, 민족해방전쟁론이다.
 
수정주의쪽에서는 한국전쟁의 성격을 민족해방전쟁으로 보고 있다.
 
 민족해방전쟁이란 제2차 대전 이후 식민지 반식민지 지역에서 공산혁명이 일어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전쟁을 말한다.
그 가까운 예가 중국의 내전과 베트남전쟁이다. 이것들은 성공한 민족해방전쟁의 예다.
 
민족해방전쟁은 공산주의 세력이 토착 민족주의에 외래 마르크스-레닌주의의
폭력혁명이론을 결합시켜 일으키는전쟁이다.
 
 
따라서 민족해방전쟁의 본질적인 성격은 공산화를 위한 혁명 전쟁이다.
 
수정주의자들이 한국전쟁을 민족해방전쟁이라고 규정한다면, 그것은 북한에 의한 남침과
대남 공산화혁명을 위한 전쟁임을 시인하는 것이 된다.
그런점 에서 보면 민족해방전쟁이라고 해서 김일성의 전쟁도발 책임이 면제되거나 대남
선제공격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그 대문에 수정주의는 북한옹호라는 그들 본래의 의도와는
반대되는 자가당착(自家撞着)의 모순에 빠져 있다.
 
 그밖에도 한국전쟁의 성격을 규정하는 견해 가운데 노동자-농민과 자본가-지주 사이의
계급전쟁론, 한민족간의 민족내전론, 동서진영간에 벌어진 국제전쟁론,
미 .소를 대신하여 벌인 대리전쟁론,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사이의 이데올로기 전쟁론,
한반도에 국한된 국지전론 등이 나와 있다.
 
모두 한국전쟁의 성격을 반영한 견해들이지만, 그리 중요하지 않은 설명들이다.
 
엄밀히 볼 때, 해방 후 북한에서 대남 적화통일 정책이 추진된 반면 남한에서는
대북 민주화 통일 정책이 거론되고 있었다. 북한에서 소비에트형 공산화혁명이 일어나고
있을 때, 남한에서는 서구형 민주화혁명이 일어나고 있었다.
 
 
따라서 한국전쟁의 초기, 즉 북한의 선제공격으로 이뤄진 남침전쟁은 김일성에 의한
'무력 적화통일 전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군이 북한 인민군을 반격하여 38선을 넘어 북진한 것은 이승만에 의한
'무력 반공통일 전쟁'의 성격을 띤다.
 
따라서
한국전쟁은 한반도의 '좌우 민족주의 세력에 의한 무력통일전쟁'
이라고
그 성격을 규정할 수 있다.
 
 
5.맺는 말
 
소련 비밀문서의 공개로 그동안 베일에 싸여 있던 한국전쟁의 진실이 대부분 밝혀졌고,
그 결과 한국전쟁에 관한 논쟁도 많은 변화를 겪게 됐다. 우선 전쟁 발발자가 밝혀짐으로써
남한에 의한 북침론은 자취를 감추고, 한국전쟁에 관한 가장 큰 논점으로 되어 있던
'누가 전쟁을 일으켰는가'에 대한 논쟁은 끝났다.
 
그 후 한국전쟁에 관한 논쟁의 초점은 전쟁의 원인과 성격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전쟁 발발자가
분명해지고 수정주의가 주장한 남한의 북침설이나 한미의 대북 전쟁유도설이 힘을
잃게 됨으로써, 비록 논쟁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지만 논쟁의 의미 자체는 퇴색됐다.
 
 한국전쟁에 대해 세계에서 가장 깊이 있게 연구한 학자로 알려져 있는
박명림(朴明林)교수는
 
"지금까지 우리는 남침이냐 북침이냐 하는 ,
 
이론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별로 중요하지 않은
 
문제에 대한 논란을 수십 년간 거듭해왔다"고 말하고,
 
 "한국전쟁은 분명히 통일을 위한 세계 공산주의 지도자들의지지와 원조을
 받은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선택의 결과"라고 말하여 남침설을 확인했다.
 
그는
"한국전쟁 발발의 진실을 둘러싼 그동안의 오랜 논쟁은
 
 객관적 사실에의 탐구가 이념적 편향과 정치적 목적을 위해
 
왜곡될 때,
 
그 왜곡이 얼마나 오래동안 지속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실례"라고 개탄했다.
출처 : 한 울
글쓴이 : hahnwool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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