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는 지난 2005년 1월 27일 제주국제자유도시 특별법 제12조 근거해 ‘평화의 섬’으로 지정됐다. 그러나 진정한 평화의 섬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단순히 정부의 지정과 선언만으로 될 수 없다.
4.3항쟁뿐 아니라 과거 탐라 시기부터 부침과 영욕의 역사에 거친 파도와 싸우면서 척박한 돌무지 땅을 일구고 거센 바람에 맞서 싸운 제주 사람들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앞으로도 평화의 땅으로 지키기 위한 공동의 노력을 할 때만이 평화의 섬으로 거듭날 것이다.
올해 4.3항쟁 63주년을 맞아 <통일뉴스> 기자는 취재를 위해 제주를 잘 아는 한 지인(知人)과 함께 곳곳을 탐방했다. 헌신적으로 제주를 알려준 그 지인은 자신의 이름이 공개되는 것을 꺼려했다. 제주의 아픈 역사는 아직도 일상 곳곳에 뿌리 깊이 남아있다. / 편집자 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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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선동 4.3성. 성안에는 모서리마다 보초막을 지어 남녀노소 구분 없이 보초를 섰다.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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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사건이 한창이던 1948년 11월부터 중산간 마을들이 토벌군에 의해 초토화되었다. 특히 선흘리 낙선동의 4.3은 지금도 그 때 그 자리에 석성으로 남아 있다. 낙선동 성터는 주민들에 대한 무장대의 연계를 차단하고 효율적으로 감시 통제하기 위해 만들었던 전략촌이었다.
이러한 돌성은 당시 소개(疏開)된 후 재건하는 산간마을은 물론 그 이전에 해안마을까지 무장대의 습격을 방비한다는 명분으로 제주도 대부분 마을에 축성됐다. 그러나 당시 제주도 전역에 쌓았던 성은 무장대습격 차단이라는 명분과 함께 주민들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수단이 되었다. 낙선동 4.3성은 4.3당시 축조된 선 가운데 원형이 가장 잘 보존돼 있는 유적가운데 하나이다.
줄 이은 주민의 희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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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선성 내부. 낙선동 성터는 주민들에 대한 무장대의 연계를 차단하고 효율적으로 감시 통제하기 위해 만들었던 전략촌이었다. 사진 가운데 보이는 것은 통시(화장실)이고 그 뒤로 보이는 둥근 초가지붕 건물은 각 초소마다 배치된 5명 중 1명이 2층 망루에 올라 밖을 감시하는 동안 나머지 4명이 교대를 위해 대기하던 '보초대기소'이다. 오른쪽 건물은 경찰지서로 성 안에는 사람들을 통제하고 경비순찰을 담당할 함덕지서 파견출장소이다.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기자] |
당시 조천면 선흘리는 1948년 11월 21일 선흘초등학교에 주둔해 있던 군인들에 의해 온 마을이 불타며 소개되었다. 집들이 소각되자 주민들은 인근 선흘곶의 밀림 속으로 피난해 생활하게 된다. 주민들은 비상식량을 짊어지고 선흘곶의 목시물굴과 대섭이굴, 도틀굴, 벤뱅듸굴 등지를 피신처로 삼아 숨어들었다.
선흘리 주민들에 대한 대량 학살은 소개령을 내린 지 나흘째 되는 1948년 11월 25일부터 시작된 것으로 은신했던 굴들이 잇따라 발각되면서 많은 주민들이 현장에서 총살당했다. 또 일부는 함덕 대대본부로 끌려가 무자비한 고초를 당한 후 엉물과 서우봉에서 희생을 당했다. 또한 미리 해변마을로 소개 내려간 주민이나 나중에 야산에 은신했다가 붙잡혀 온 주민들 중에서도 도피자가족 등의 이유로 희생을 당했다고 한다.
성을 쌓아 함바집에서 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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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선동 4.3성 내부. 성 안에는 주민들이 겨우 들어가 잠만 잘 수 있는 함바집을 짓고 집단적으로 생활했다. 함바집은 방, 마루, 부엌 구분이 없었고 몸을 굽혀 출입을 해야할 정도였다.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기자] |
1949년 봄으로 접어들면서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가 설치됐고 사령부는 무장대와 주민을 분리시킨 후 토벌한다는 작전에 따라서 모든 마을에 축성을 강화하고 전략촌을 구상하게 된다. 들판의 모든 먹을 것과 가옥을 철거해 적에게 양식과 거처의 편의를 주지 않으면서 성벽을 지켜내는 토벌작전이었던 것이다.
대표적인 전략촌인 낙선동의 축성작업은 선흘 주민들만이 아니라 조천면 관내의 다른 지역 주민들과 부녀자는 물론 초등학생들도 동원돼 1949년 봄 한 달 동 안 계속됐다. 당시 성을 쌓았던 주민들은 하나같이 등짐을 져서 돌을 날랐기 때문에 어깨나 등이 다 벗겨질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성을 쌓는 것뿐만이 아니라 성의 외곽에 너비 2m, 깊이 2m 정도의 도랑을 파서 가시덤불을 놓아 무장대가 성에 쉽게 기어오를 수 없도록 만든 해자도 주민들의 일이었다.
구덩이를 파는 일은 하루 한 끼 먹기도 힘들었던 당시 축성작업에 버금가는 고통이었다. 1949년 4월 가로 150m, 세로 100m, 높이 3m, 폭 1m 정도의 직사각형 모양 총 500여m에 달하는 성이 완공됐고 그 안에 선흘리 주민들은 겨우 들어가 잠만 잘 수 있는 함바집을 짓고 집단적으로 살았다. 일종의 수용소와 마찬가지로 성 밖 출입도 통행증을 받아야 가능했고 밤에는 통행을 금지했다고 한다.
이 당시 마을주민 중 젊은 남자들은 무장대 동조세력이나 도피자 가족으로 몰려 이미 많은 희생을 치른 상태였다. 그나마 살아남은 청년들은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 때 대부분 자원입대했기 때문에 성을 지키는 보초는 16살 이상의 여성과 노약자들의 몫이었다. 그들은 낮엔 밭에서 일하고 밤엔 성을 지키는 고단한 생활을 이어갔다. 뿐만 아니라 경찰파견소 주둔 경찰에게 폭행당하는 일이 빈번했다고 한다.
현재 4.3성이 있는 낙선동 인근에는 안선흘로 불리는 봉냉이동산, 돗바령 등의 작은 마을이 있었다. 축성을 한 이곳에는 ‘뱅듸왓’이라는 농토였으나 지형이 높아 무장대의 근거지였던 선흘곶 등 사방을 관찰할 수 있었기 때문에 성이 들어섰던 것이다.
선흘리 주민들은 1954년 통행제한이 풀리면서 비로소 고향마을로 돌아가 집을 지어 살았고 일부는 그냥 성안에 정착해 오늘날의 낙선동을 이루고 있다.
당시 쌓은 4.3 석성은 대부분 밭담이나 산담을 이용했기 때문에 통행제한이 풀린 1954년을 기점으로 대부분 돌들이 원위치 돼 사라져 버렸으나 낙선동 성담은 마을을 지켜주는 방풍역할의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에 가장 원형이 잘 남아 있다. 성벽의 총안(담에 만들어진 작은 구멍으로 이 구멍을 통해 무기를 겨누거나 바깥을 내다볼 수 있도록 한 것. 성벽의 2m 높이에 만들어졌다)도 여러 군데서 볼 수 있다.
불칸낭과 반못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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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칸낭 전체. 불칸낭은 토벌대들이 마을을 없애려고 불을 질렀으나 온몸이 불에 타고도 살아남아 60년 넘게 버틴 나무로 수령이 족히 500년은 됐다.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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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까이서 본 불칸낭.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기자] |
낙선동 4.3성 주변에는 불칸낭(불에 탄 나무)이 있다. 수명이 족히 500년은 됐을 법한 후박나무를 자세히 보면 기둥 아래쪽을 보면 절반 이상 불에 타 말라 있다. 토벌대들이 마을을 없애려고 불을 질렀으나 온몸이 불에 타고도 살아남아 60년 넘게 버틴 나무다. 아픈 상처를 안고 끈질기게 살아남는 모습이 꼭 제주도민들을 상징하는 듯하다.
1948년 11월 21일 선흘리가 토벌대에 의해 초토화된 후 주민들이 ‘도틀굴’이라고 불리는 ‘반못굴’에 숨어들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반못굴의 당시 흔적을 찾아볼 수 없으며 동굴보호차원에서 입구가 막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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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못굴 입구. 선흘리가 토벌대에 의해 초토화된 후 주민들은 ‘반못굴’에 숨어들었다. 그러나 지금은 반못굴의 당시 흔적을 찾아볼 수 없으며 동굴 보호차원에서 입구가 막혀 있다.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기자] |
마을이 초토화되자 일부 주민들은 국방경비대 제 9연대의 명령에 따라 해안마을로 피난했지만 기르던 가축과 가을걷이한 곡식을 두고 갈 수 없었던 많은 주민들은 임시 피난처를 찾았다. ‘며칠만 숨어 있으면 사태가 끝나겠지’하는 생각으로 찾아든 곳이 숲이 우거지고 천연동굴이 산재한 이 일대 ‘선흘곶’이었다.
그러나 1948년 11월 25일 굴이 토벌대에 의해 발각되면서 은신했던 주민 18명이 희생된다. 그날 선흘곶 주위를 포위해 사방을 감시하던 군인들은 굴을 나와 있던 주민 1명을 붙잡아 마을사람들이 숨어있는 곳을 대라고 윽박질렀다. 죽이겠다는 협박 앞에 굴의 위치가 알려졌으며 학살 후 살아남은 4명이 시신을 가지런히 |